사회 어려움 극복 위해
지계와 선정력으로
통찰의 지혜 갖추자

<조선왕조실록> ‘성종실록’에 따르면 1476년 10월 29일 “청주의 중 명천(明天)이 어느 날 섶을 쌓아 놓고 스스로 불타서 죽으니, 이웃 고을 사람이 모두 보고서 부처라 하며 혹은 옷을 벗고 혹은 쌀을 져다주어, 하루아침에 재물이 산처럼 쌓였다. 수령들도 그 말을 듣고 가서 절을 하고 호사자들은 그를 위해 암자를 짓고 화상을 그려 받드니 무지한 백성들은 그를 본받아 더욱 정성스럽게 받들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을 분석해 보면 청주에서 명천 스님이 ‘소신공양’을 올렸고 이에 대해 관원과 백성이 암자를 짓고 공양을 올렸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이 시기에 스님이 왜 소신공양을 올리게 되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의 제9대왕 성종(재위 1469~1494)은 즉위하면서부터 도성안의 염불소와 간경도감을 폐지하고, 사대부 부녀자의 출가를 금지시키는 것은 물론, 도성 내외의 비구니 사찰을 모두 폐사시켰다. 심지어 국왕의 생일 때 사찰에서 봉행했던 ‘축수재’를 폐지했으며, 도첩이 없는 스님들은 잡아들여 정역과 군정으로 충당케 했다.

인수대비가 불상을 조성하여 정업원으로 보냈을 때 유생들이 이를 탈취하여 불태웠고, 사찰의 창건과 출가를 엄하게 규제함으로써 승려의 수가 감소해 잘 운영되던 사찰마저 폐사되는 법난에 직면했다. 이러한 시기에 호불호법(護佛護法)을 위해 위법망구의 자세로 소신공양으로 대항했던 스님이 있었다는 사실에 저절로 머리가 숙여진다.

불교에서 소신공양의 기원은 〈법화경〉 ‘약왕보살본사품’에서 찾아볼 수 있다. 경전에서는 일월정명덕불께서 중생을 제도하실 때, 일체중생희견보살이 “첨복 등의 꽃 향유를 마시며 몸에 바르고 하늘 보배 옷으로 스스로 몸을 감고 거기에 향유를 부어 적신 뒤 신통력의 발원으로써 몸을 태우니, 그 광명이 80억 항하의 모래 같은 세계를 두루 비추었다.”고 전한다. ‘약왕보살본사품’의 가르침에 따라 “손가락이나 발가락 하나를 태워서 공양”하는 수행문화가 형성되었고, 오계 수지시에 연비의식을 하는 사상적 토대가 되었다.

베트남에서는 1963년 6월 11일 틱광득 스님이 베트남 정부의 불교탄압에 대응해 소신공양을 올렸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 인해 베트남의 불자와 국민이 단합하여 정부를 전복시켰다. 최근 티베트에서도 중국의 강압적 통치에 맞서 소신공양을 올리는 사례가 종종 나타나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1998년 충담 스님, 2010년 문수 스님, 2017년 정원 스님 등의 소신공양 사례가 있다.

조선왕조 성종 때의 명천 스님이나 베트남과 티베트 등의 소신공양 사례의 공통점은 외부에서 불교를 공격하고 탄압할 때 나타난다는 것이다. 소신공양으로 탄압받는 불교의 현실을 하루아침에 바꿀 수는 없었으나 불교계는 스스로 자성하게 되었고, 국민들을 통합시킬 수 있는 강력한 메시지를 제공해 주었음은 분명하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각종 변종을 만들어냄으로써 팬데믹 현상이 몇 년간 지속되고 있다. 이로 인해 불교계는 물론이고 사회 전반에 큰 타격을 주고 있다.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종단에 관계없이 사부대중 모두가 사심을 버리고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불자들은 소신공양은 아닐지라도 연비의식에 동참하여 계를 수지하고, 흔들림 없는 선정력과 세상을 꿰뚫어 보는 지혜를 갖추기 위한 정진에 나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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