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둔하고 어리석지만
모두가 작은 허물마저
부끄럽게 여기길서원

큰 귀에 인상적인 눈, 전체적인 모습은 말을 빼닮은 듯 하지만 몸매는 말처럼 미끈하게 균형 잡히지 못했고, 권력자의 준마보다는 가난한 민중의 짐꾼 노릇에 더 어울리는 나는 나귀입니다. 지금도 모로코나 중국 운남 근처를 가면 여전히 무거운 짐을 양쪽으로 나눠 싣고 힘겹게 가고 있는 나를 만날 수 있습니다. 자동차가 다니지 못하는 길에 더 큰 동물을 부릴 능력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 기꺼이 평생 짐을 짊어지고 다니는 나를 사람들은 아주 친근하게 여기고 있지요.

그런데 그토록 친근한 가축인 나를 그리 듣기 좋게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 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 어떤 문화권이건, 어떤 종교이건 나귀를 평가절하하고 있는데 도대체 전혀 반박할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나귀들에게 덧입혀진 불명예가 어떤 것인지 하나하나 살펴볼까요?

무엇보다 첫째, 경전을 비방한 자가 받게 되는 과보를 우리 나귀의 노역에 빗대고 있지요.

경전에서는 부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나 멸도하신 후에 이 경을 비방하고, 이 경을 독송하고 써서 지니는 사람을 보고 가벼이 여기고 천대하며 미워하고 질투하거나 원한을 품는다면 아비지옥에 떨어져서 일 겁 동안 그 과보를 받다가 지옥에서 나오면 낙타나 나귀로 태어나 항상 무거운 짐을 지고 채찍에 맞으며 오직 물과 풀만 바랄 뿐 다른 것은 알지 못한 채 살아간다.”(묘법연화경비유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허허, 이것 참. 내가 한평생 그 무거운 짐을 지고 가파른 언덕길이나 비좁은 골목길을 오르내린 것이 법화경을 믿는 자들을 비방하고 질투한 과보라고 합니다.

법화경, 정식 이름은 묘법연화경이라고 하지요. 도대체 이 경전 속에 어떤 내용이 담겨 있기에 그리 귀하게 여기며 열심히 사경을 하는지 처음에는 잘 몰랐습니다.

하지만 옛 스님들이 내 등에 경전을 짐 지우고 다니면서 중얼중얼 읊으신 내용을 떠올려보면 법화경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이 세상에 출현하신 단 한 가지 이유를 밝힌 경전이라고 하더군요. 그 한 가지 이유란, 어떤 중생이라도 부처님 같은 지혜를 품고 있는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라는 거지요.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듣고도 수긍하기보다는 ,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난 그냥 중생으로 사는 게 좋아. 열심히 마음공부해서 내 번뇌 하나 없애면 그걸로 된 거야.”라고 귀를 닫아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이들을 끝끝내 설득해서 부처님 되려고 마음을 내도록 인도하는 경전이 바로 법화경이라는 사실. ! 이런 사실을 진즉에 제대로 알았더라면 내가 그 경전을 비방했겠습니까? 그 경전을 외고 필사하고 다른 이들에게 들려주는 이를 함부로 대했겠습니까?

네팔 북부에서 짐을 실은 당나귀들이 다리를 건너고 있다.  ⓒGettyimagesBank
네팔 북부에서 짐을 실은 당나귀들이 다리를 건너고 있다. ⓒGettyimagesBank

 

두 번째 : 옹기장이가 운 이유

그리고 둘째, 우리 나귀는 경거망동해서 귀한 것을 부수는 존재라는 불명예스런 풍문도 있습니다.

어떤 부자가 큰 잔치를 열려고 하인을 불러 말했습니다.

질그릇이 아주 많이 필요하다. 너는 수소문해서 솜씨 좋은 옹기장이 한 사람을 데리고 오너라.”

하인이 서둘러 옹기장이 한 사람 집을 알아내 그곳으로 달려갔는데 하필 그 옹기장이가 대성통곡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인이 그를 달래며 이유를 묻자 옹기장이가 눈물과 한숨을 섞어서 풀어놓은 이야기는 이러했습니다.

난 쫄딱 망했소. 오늘 시장에 내다 팔려고 내가 얼마나 열심히 그릇을 빚었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오. 오늘 아침 그 많은 질그릇들을 차곡차곡 저 나귀 등에 실었는데, , 그만 저 나귀 녀석이 무슨 심술이 났는지 몸부림을 치고 이리저리 내달리는 바람에 모조리 깨지고 말았어요. 내 몇 년의 수고와 땀이 이렇게 허망하게 사라지고 말았으니 내 어찌 통곡하지 않을 수 있겠소.”

그런데 옹기장이의 넋두리를 듣고 있던 하인이 갑자기 박수를 치며 제안했습니다.

듣다 보니 저 나귀야말로 정말 대단한 녀석이오. 어떻게 몇 년에 걸쳐 이룬 것을 한순간에 다 부술 수가 있단 말이오? 그야말로 능력자 아니겠소? 이보시오. 울지 마시오. 저 나귀를 내게 파시오.”

원수 같던 나귀를 거금을 주고 사가겠다는 하인의 말에 옹기장이는 두 번 생각하지 않고 기꺼이 팔아버렸습니다. 나귀 등에 올라타고 부자의 집으로 돌아온 하인에게 주인이 물었습니다.

웬 나귀를 타고 왔어? 옹기장이는 언제 오느냐?”

몇 년을 꿈지럭거려서 이룬 것을 한순간에 부숴버리는 대단한 나귀입니다. 그래서 제가 옹기장이 대신 이 나귀를 사왔습니다.”

주인이 하인의 어리석음을 크게 꾸짖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백유경)

여기 등장하는 나귀에게는 두 가지 커다란 단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백 년을 기다려도 그릇 하나 만들지 못하는 무능한 존재를 상징합니다. 인생을 산다는 것은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노력으로 자신의 뜻을 펼치며 무엇인가를 이루어야 합니다. 이뤄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세속을 살아가는 우리는 재산을 모으고 명예를 거머쥐고 권력의 자리에도 올라야 합니다. 세상에서 떵떵거리며 살지는 않는다고 해도 최소한 남에게 기대지 않고 굴욕당하지 않을 정도의 것들을 이뤄야 합니다. 그리고 부지런히 선업을 지어 즐거운 과보도 불러 모아야 하고, 육바라밀을 실천해 공덕을 쌓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즐거운 과보와 공덕은 모두 부처님 지혜를 얻는 것으로 귀일케 해야겠지요.

그런데 나귀는 단 하나도 이루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자신의 것을 이루지 못하기만 한다면 그나마 다행입니다. 다른 이가 공들여 쌓아놓은 탑을 한순간에 부숴버리는 파괴적인 행동도 서슴지 않습니다. 자신의 선업과 공덕 짓기는 고사하고 다른 이에게 해를 끼쳐 결국 자신에게도 피해를 입히는 어리석은 존재가 꼭 옹기장이의 나귀와 같다는 것이지요.

뿐만 아닙니다. 두 번째 단점은, 우리 나귀는 1100년 남의 공양을 받고도 그 큰 은혜를 몰라서 갚기는커녕 오히려 손해만 끼치는 해로운 존재라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보기 어려운 일이 두 가지가 있다고 하지요. 첫째는 은혜를 갚을 줄 아는 것이요, 둘째는 큰 은혜는 물론이거니와 조그마한 은혜라도 잊지 않는 것입니다. 은혜를 알고 보답할 줄 아는 사람은 세상의 존경을 받을 만하다고 부처님은 말씀하십니다.(증일아함경) 심지어 은혜를 아는 것이 대자대비의 근본이며, 선업의 첫 문을 열어 사람들의 사랑과 공경을 받고 명예가 멀리까지 들리며 다음 생에도 안락하고 마침내는 불도를 이룰 것이라고 말합니다.(제경요집)

어쩌면 깨달음을 이뤄 부처가 된다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수도 있겠습니다. 지금까지 세세생생 목숨을 받고 살아온 것이 누군가의 덕분이라는 점을 잊지 않고 내가 받은 은혜를 다른 누군가에게 나눠주는 일만으로도 우리는 부처님의 사자좌에 한 걸음 성큼 다가서지 않을까요? 배은망덕하고 천둥벌거숭이마냥 이리저리 날뛰며 부수기만 할 줄 아는 나귀의 생각이라고 일소에 붙이지 마시고 한 번 유념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부탄의 한 사원에서 스님이 당나귀에게 축복을 해주고 있다. ⓒGettyimagesBank
부탄의 한 사원에서 스님이 당나귀에게 축복을 해주고 있다. ⓒGettyimagesBank

 

세 번째 : 벌거벗은 여인

나귀로 태어나 평생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다니는 것도 억울하기 짝이 없는데 이런 나에게 더 속상한 것은 외설적인 이야기에 종종 등장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최초의 조상은 북동부 아프리카 사막 지역의 토종동물인 누비아산 야생당나귀입니다. 기원전 4,000년에서 기원전 3,000년 사이에 사육되기 시작했고, 후기 이집트 역사에서 우리 당나귀는 사막과 관련 있는 붉은 신이자 당나귀 머리를 한 것으로 묘사되는 세트(Set)신의 동물로 여겨지고 있으니(리처드 W. 불리엣 사육과 육식에서 인용), 우리가 처음부터 불명예스런 가축으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지는 않았던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긴 귀와 뾰족한 주둥이, 그리고 수직으로 서 있는 꼬리와 과도하게 큰 성기는 사람들의 음흉스러운 상상력을 부채질했고, 그러다 외설스러운 행위를 하는 자에게 나귀와 같은 짓을 한다고 빗대어 비난하게 되었지요.

불교에서 연쇄살인마였다가 성자가 된 앙굴리마라를 잘 알고 계시지요? 그의 전생이야기에도 우리 나귀가 등장합니다. 성욕에 빠진 왕자가 나라의 모든 처녀들이 결혼을 하기에 앞서 반드시 자신과 먼저 동침해야 한다고 선언했습니다. 왕의 엄명까지 내려졌으니 감히 그 부당함을 거론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어느 날 수만(須蠻)이라는 여인이 왕자의 침실로 끌려가게 되자 사람들 앞에서 벌거벗고 맨발로 다니면서 부끄러워하지도 않았지요. 사람들이 수군거렸습니다.

장자의 딸이란 이가 저렇게 벌거벗고서 저 무슨 추태인가! 하는 짓이 꼭 나귀 같군.”

그러자 이 말을 들은 수만 여인이 소리쳤지요.

내가 나귀가 아니라 그대들이 나귀요. 내가 벌거벗고 다닌다고 수군거리는 자 누구요? 여자가 여자 앞에서 벗었는데 창피할 것이 무엇이오. 이 도시에서 남자는 왕자 한 사람뿐이니 나도 그 왕자 앞에 가면 옷을 입을 것이요.”(불설앙굴마라경)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이 왕과 왕자의 불의에 맞서 힘을 뭉쳤고, 왕자를 죽임으로써 마침내 여인들의 시련은 막을 내렸습니다. 우리 나귀가 벌거벗은 채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다니면서도 부끄러운 줄 모르는 존재로 표현된다는 사실이 불쾌하지만 이렇게 해서라도 정의를 외치고 실현하게 되었다면 그나마 위안이 됩니다.

나귀로 살아가는 것이 부끄럽지는 않습니다. 철저히 범부의 속성을 지녔지만 그렇기에 허물을 벗고 환골탈태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나귀는 사람들의 짐을 짊어지고서 비좁고 위태로운 길을 오르내리면서 이제는 이렇게 서원을 세우고 있습니다. “모쪼록 세상 모든 생명체가 진리를 존중하고 땀의 결실을 소중하게 여기며 작은 허물도 부끄럽게 여길 줄 알기를 바랍니다.” 이 서원이 이뤄질 때까지 우리 나귀는 그대들 곁에서 변함없이 땀을 흘리겠습니다.

 

이미령_ 동국대학교에서 불교학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경전번역가이자 불교대학 전임강사·북칼럼니스트이며, 경전이야기꾼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붓다 한 말씀〉·〈고맙습니다 관세음보살〉·〈이미령의 명작산책〉·〈시시한 인생은 없다〉 등이 있다. 또 〈직지〉·〈대당서역기〉 등 다수의 번역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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