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희도 선생 세속 떠나 머문 곳
​​​​​​​후손들 배롱나무·홍송 심어 가꿔

담양 명옥헌원림은 오희도 선생이 터를 잡았고, 넷째 아들 오이정이 정자를 지은 후 대대손손 배롱나무와 홍송 등을 심어 가꾼 별서정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어느 지역에서든 특산물·특산품·관광명소·축제 등을 소개하는 조형물이나 현수막 등 홍보물을 쉽게 볼 수 있다. 학창시절 ‘강화 화문석’·‘통영 나전칠기’ 등 지역의 특산품을 줄줄 외운 기억이 있다. 그렇게 외운 기억은 지금도 가끔 도움이 된다. 이번 호에 소개할 별서정원 명옥헌원림(鳴玉軒園林)이 위치한 전남 담양은 죽세공품이 특산품이다. 대나무를 활용한 특산품인 만큼 타 지역에 비해 대나무가 많이 식재돼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죽세공품’ 유명한 대나무 고을

호남고속도로 창평톨게이트를 빠져나가면 도로 곳곳에 가로수 대나무가 위풍당당하게 서 있다. 바람 방향에 따라 댓잎이 이리저리 부딪혀 ‘스윽~ 스윽~’ 소리를 내는데, 마치 ‘당신이 지나는 이곳은 담양이오.’라며 친절하게 알려주는 듯하다. 도로 가운데 중앙선 역할을 하는 대나무는 대체로 키가 작고, 길 가장자리 대나무는 키가 크다. 대나무와 함께 메타세쿼이아와 배롱나무(목백일홍)도 눈에 띈다. 모두 날씨가 온화한 지역에서 잘 자라는 수종이다. 그러다 보니 요즘 담양의 가로수는 대나무와 메타세쿼이아, 메타세쿼이아와 비슷한 낙우송, 배롱나무가 주를 이루고 있다.

담양 거리에서 심심찮게 만날 수 있는 배롱나무는 아마도 국가 명승으로 지정돼 있는 명옥헌원림(鳴玉軒園林)의 영향이 아닐까 싶다. 명옥헌원림에서 주를 이루는 나무가 여름 약 100일 동안 꽃이 피고 지기를 반복하는 배롱나무이다. 그 화려한 아름다움을 여러 곳에서 감상할 수 있게 가로수로 심어 놓은 것 같다.

國師 지낸 천태종 조구 스님 고향

담양은 불교와 인연 깊은 고을이다. 통일신라시대에 경문왕이 재위 8년(868) 때 발원해 건립한 개선사(開仙寺)의 석등이 남아 있고, 담양 용흥사 동종·불조역대통재·담양 남산리 오층석탑·담양 객사리 석당간 등의 불교 유물도 다수 남아 있다.

특히 담양은 조선 태조 이성계가 국사로 모신 천태종의 고승 조구(祖丘, ?~1395) 스님의 고향이기도 하다. 조구 스님은 조선 전기에 활동한 천태종 스님으로, 조선의 처음이자 마지막 국사다. 1394년 9월 8일 국사의 자리에 올랐지만, 이듬해 11월 14일 입적했다. 당시 태조 이성계의 왕사는 무학대사였다. 조구 스님이 국사의 자리에 오른 한 달 뒤인 10월 21일 태조는 내전에서 108명의 스님에게 음식을 공양하는 반승의식(飯僧儀式)을 하고, 봉숭례(封崇禮)를 올렸다.

〈태조실록〉에는 조구 스님과 관련해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돼 있다.

태조 3년(1394) 9월 8일 /
천태종(天台宗)의 스님 조구(祖丘)로 국사(國師)를 삼았다.
태조 3년(1394) 10월 21일 /
내전에서 스님 108명에게 반승(飯僧) 의식을 하고, 국사의 봉숭례(封崇禮)를 행하여, 안장 갖춘 말을 하사했다.
태조 4년(1395) 11월 4일 /
국사 조구가 병사(病死)해 조회를 정지하게 하였다.

조구 스님의 행적에 관해선 〈자비도량참법〉의 유일한 주석서인 〈자비도량참법집해(慈悲道場懺法集解)〉를 편찬했다는 내용과 위에서 언급한 〈조선왕조실록〉의 내용을 제외하면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스님은 〈자비도량참법집해〉를 편찬하게 된 이유에 대해 서문에서 “내용과 문자가 읽고 해석하기 어려워 여러 학자들의 풀이를 취사선택해 편찬했다.”고 밝히고 있다.

조구 스님은 명옥헌원림과는 얽힌 이야기가 없지만, 담양과는 인연이 있다. 스님이 국사가 된 후 담양은 고을의 격이 높아졌다. 〈조선왕조실록〉 태조 4년(1395) 1월 27일 조에 ‘담양현(潭陽縣)을 군(郡)으로 승격했다. 국사 조구의 고향인 까닭이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국사의 고향이라는 이유만으로 고을이 승격됐으니 담양 사람들의 자부심이 상당히 높아지지 않았을까 짐작해본다.

수백 년 배롱나무 아름다운 정원

담양에서 가장 유명한 별서정원은 소쇄원(瀟灑園)이지만, 여름에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명옥헌원림도 그에 못지않게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 드라마 ‘사임당’을 비롯해 수년 전부터 드라마와 영화 촬영장소로 알려진 게 계기가 됐다.

명옥헌원림은 조선 중기 예문관 관원을 지낸 오희도(吳希道, 1583~1623) 선생이 터를 잡은 이후 대를 이어 연못을 파고 배롱나무와 홍송 등 각종 나무를 심어 정성스레 가꿔 온 별서정원이다. 총면적은 1만 3,484㎡(4,086평)에 달하며, 배롱나무·홍송·오동나무·느티나무·꽝꽝나무 등 다양한 수목이 심겨 있다.

선생의 호는 득원(得原)·명곡(明谷)이다. 선조 35년(1602)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한 뒤 인조 1년(1623)에는 알성문과(謁聖文科)에 병과로 급제했다. 이후 예문관 관원으로 천거됐고, 기주관(記注官, 역사 기록·편찬 담당)을 대신해 어전(御殿)에서 기록을 할 때 여러 대신들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그 후 예문관과 춘추관에 소속된 검열(檢閱)에 제수됐다.

선생은 남달리 효성이 지극했다. 어머니를 모시고 형제들과 함께 살면서 책을 읽고, 서로 권면(勸勉)할 정도로 형제애도 두터웠다고 한다. 고향 대명곡(大明谷)에 머물며 스스로 호를 ‘명곡(明谷)’이라 지어 불렀고, 뒷산 기슭에 집을 짓고 ‘망재(忘齋)’라 했다. ‘망재’에는 ‘세속적인 모든 것을 버리겠다.’는 뜻이 담겨 있다. 오희도 선생은 어머니 사후에 망재를 별서로 사용했다. 자연을 벗 삼아 살던 선생은 1623년 11월 4일 천연두에 걸려 생을 마쳤다.

〈인조실록〉 3권, 인조 1년 11월 4일에는 “1623년 명 천계(天啓) 3년 검열 오희도가 천연두를 앓다가 경저(京邸)에서 객사했다. 상이 듣고 관판(棺板)을 지급토록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앞서 인조가 등극하기 전, 창평에 들러 오희도 선생에게 정사를 함께 논의하자고 했으나 노모 때문에 떠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거절하고 후진 양성에 힘썼다고 한다.

조선시대 사대부 중에서 스스로 불교이라고 내세운 이는 드물다. 하지만 그들의 문집 등을 보면 사찰에서 유숙하거나 머물며 강학을 하고, 심신의 피로를 씻어낸 것을 알 수 있다. 요즘에 빗대면 ‘템플스테이(Templestay)’를 한 셈이다. 세종대왕기념사업회가 2003년에 펴낸 국역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14 ‘양대박~오희도’에 ‘사미인곡’·‘관동별곡’ 등을 지은 가사 문학의 대가인 송강 정철(松江 鄭澈, 1536~1593)의 넷째 아들 정홍명(鄭弘溟, 1582~1650)이 쓴 글이 있다.

“나는 공[오희도]과 나이가 비슷하고 동향에 살았다. 한가한 날이면 글과 술로 모였고, 책을 지니고 말을 타고 와 산사(山寺)에 오래 머물기도 했는데, 토론하고 강마(講磨)하면서 즐거움으로써 고단함을 잊었다.”

이로 보아 오희도 선생도 사찰에 머물며 심신의 안정을 찾은 것으로 보인다. 대부분의 산사가 자연 속에 있기에 망재에서의 생활환경과 비슷해서 오랫동안 머물렀을 것으로 짐작한다. 선생의 문집으로는 〈명곡유고(明谷遺稿)〉가 있는데, 1902년 후손 오준선이 집안에 내려오던 문헌을 정리해 간행한 책이다.

역대 주인의 ‘소욕지족’한 삶

오희도 선생 사후 넷째 아들 오이정(吳以井, 1619~1655)은 효종 1년(1650) 태학(太學)에 들어가 1651년 정시(庭試)에 응했으나 낙방했다. 그는 곧장 고향으로 내려와 아버지가 머물던 곳에 정자를 짓고 학문에 매진했다. 오이정의 호는 장계(藏溪)이며, 정홍명의 문인이었다. 그는 인조 17년(1639) 사마양과(司馬兩科)에 합격했다. 1640년 고두강(高斗綱)·정한(鄭漢)이 머물던 산사로 찾아가서 함께 〈주역〉을 강론했다고 전한다. 오이정은 학문에 조예가 깊었고, 기예(技藝)에도 능했다. 그러나 37세 때인 1655년 병으로 요절했다. 저서로 〈장계유고(藏溪遺稿)〉가 있다.

‘흐르는 물소리가 옥이 부딪히는 소리와 비슷하다.’는 뜻의 ‘명옥헌’이라는 이름은 우암 송시열 선생이 지어주었다고 전한다. 우암 선생은 오이정의 셋째 아들 오기석(吳祺錫, 1651~1702)의 스승이다. 자신이 아끼던 제자가 머무는 정자의 이름을 ‘명옥헌’으로 지어주고, 연못 옆 바위에 글씨를 새겼다고 한다. 오기석의 아들 오대경(吳大經, 1689~1761)은 명옥헌 연못을 중수하는 등 대를 이어 명옥헌과 주변 원림을 정성스레 가꿨다.

이렇게 명맥을 이어져 온 명옥헌은 오늘날에 이르러선 관광객이 즐겨 찾는 명소가 됐다. 장평톨게이트에서 약 5분 거리에 명옥헌원림 주차장이 있다. 이곳에 주차하고 걸어서 수백 년 된 버드나무 몇 그루가 우뚝 서 있는 후산 저수지를 지나 마을길을 따라 10분 가량 걸으면 연못과 빽빽한 나무, 그리고 무성한 나뭇잎 사이로 기와지붕이 시야에 들어온다.

배롱나무꽃은 빠르게는 7월부터 피기 시작하는데, 그보다 이른 5월 말 명옥헌원림을 찾았으니 배롱나무꽃을 볼 수는 없었다. 그래도 용이 몸을 비틀며 승천하는 모습을 닮은 수백 년 배롱나무 고목이 위안을 주었다. 여기도 배롱나무, 저기도 배롱나무, 그야말로 배롱나무 천지다. 연못 양쪽으로 길이 나 있는데, 오른쪽 길이 정문으로 통하는 길이다. 사방으로 뻗어 있는 배롱나무 가지를 피해 걸으면 좁은 흙길 끝에서 단아한 자태의 정자 명옥헌이 늠름하게 서 있다. 명옥헌은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의 건물이다. 방은 한 칸이며, 방을 중심으로 사방에 마루가 있다. 정면에는 ‘명옥헌’ 현판이 있고, 마루에는 ‘삼고(三顧)’ 현판과 정홍명이 쓴 ‘명옥헌기(鳴玉軒記)’가 걸려 있다.

‘삼고’는 인조가 능양군 시절, 담양 지역을 유람하다가 오희도 선생을 찾았다는, 유명한 ‘삼고초려(三顧草廬)’에서 따왔다. 방 안에서 밖을 바라보는 풍경, 마루의 각 방향에서 보이는 풍경은 제각각 다른 모습을 연출한다. 그래도 가장 멋진 풍경은 입구 쪽 연못과 배롱나무, 먼 산, 푸른 하늘이 보이는 중앙 마루다. 벽에 기대어 숨을 돌리고 있으려니 온갖 새들이 배롱나무 위에 앉아 지저귀다가 떠나가고, 다음 새가 와서 놀다가 떠나기를 반복한다. 눈을 감고 배롱나무꽃 흐드러진 이곳의 풍경을 상상한다. 명옥헌 마루를 오가는 맑고 푸른 빛깔의 바람도 피부를 스쳐 지난다. 마음은 한없이 편안하고 여유로워지고, 무거웠던 몸도 한결 가벼워짐을 느낀다. 역대 명옥헌의 주인들도 이 풍경에 흠뻑 빠져 살았으리라.

명옥헌 뒤편 왼쪽에는 정방형의 연못이 있고, 그 옆 바위에는 송시열 선생이 썼다고 전하는 ‘명옥헌계축(鳴玉軒癸丑)’ 글씨가 새겨져 있다. 오른쪽에는 홍송이 줄지어 늘어서 있고, 담양 지방의 이름난 선비들을 제사 지내던 도장사(道藏祠) 터가 남아 있다. 홍송 사이로 난 오솔길을 오르면 상쾌한 솔향이 머리를 맑게 만든다.

다시 명옥헌으로 왔을 때, 대학생으로 보이는 두 딸과 엄마, 세 모녀가 마루에 앉아 즐겁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밝은 에너지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사진 부탁을 받고 몇 장 찍어주었다. 사진을 보고 행복해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명옥헌의 진가를 엿보았다. 그것은 다름 아닌 작은 것에 만족할 줄 아는 ‘소욕지족(少欲知足)’의 삶, 그것이 곧 명옥헌 역대 주인들이 꿈꾼 삶이 아니었을까.

명옥헌원림은 배롱나무의 붉은 꽃이 만발한 때가 가장 아름답기로 이름나 있다. 배롱나무꽃 사이로 보이는 명옥헌. 〈사진=김성철〉
명옥헌원림은 배롱나무의 붉은 꽃이 만발한 때가 가장 아름답기로 이름나 있다. 배롱나무꽃 사이로 보이는 명옥헌. 〈사진=김성철〉
명옥헌원림 초입. 소나무와 배롱나무가 우거진 숲길을 따라 가면 명옥헌이 자태를 드러낸다.
명옥헌원림 초입. 소나무와 배롱나무가 우거진 숲길을 따라 가면 명옥헌이 자태를 드러낸다.
명옥헌에는 방이 한 칸 있으며, 사방이 마루다.
명옥헌에는 방이 한 칸 있으며, 사방이 마루다.
선비의 소박한 방안에서 내다보이는 전망은 가히 일품이다.
선비의 소박한 방안에서 내다보이는 전망은 가히 일품이다.
명옥헌원림에는 두 개의 연못이 있다. 입구의 큰 연못 주위를 환하게 밝히는 꽃이 핀 배롱나무 아래에 있으면,걸림없이 오가는 선선한 바람과 새들의 지저귐으로 세속의 일을 절로 잊는다. 〈사진=김성철〉
명옥헌원림에는 두 개의 연못이 있다. 입구의 큰 연못 주위를 환하게 밝히는 꽃이 핀 배롱나무 아래에 있으면,걸림없이 오가는 선선한 바람과 새들의 지저귐으로 세속의 일을 절로 잊는다. 〈사진=김성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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