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수행과 심리학의
조화 위해 평생 바친
자아초월심리학 개척자

존 웰우드는 심리치료의 중요한 접근법인 경험적 심리치료를 동양의 영적 전통과 통합해 인간의 실존적인 문제를 포괄적으로 다룰 수 있는 심리치료 로 발전시켰다.
존 웰우드는 심리치료의 중요한 접근법인 경험적 심리치료를 동양의 영적 전통과 통합해 인간의 실존적인 문제를 포괄적으로 다룰 수 있는 심리치료 로 발전시켰다.

 

한 청년의 명상 수행

불교 명상에 심취한 한 청년이 유명한 명상 지도자를 찾아가 그의 수행처에서 머물면서 지도받기를 청했다. 지도자는 청년의 진지한 마음을 알아보고 자신의 제자들과 함께 수행하도록 허락했다. 청년은 그를 영적 스승으로 모시는 수행자들과 함께 생활하며 정진하는 마음을 흩트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청년은 의구심이 들었다. 그가 존경하는 지도자가 보여주는 파괴적인 행동 때문이었다. 무엇인가가 지도자의 온전함을 방해하고 있는 듯했다. 그는 평소에 한없이 자비로웠지만 때때로 불편한 감정을 괴팍하게 드러내기도 하고, 그에게 충실하지 못한 수행자들을 공공연하게 모욕했다. 지도자의 날카로운 말은 듣는 이의 마음을 다치게 했다. 언뜻 보면 낡은 습관을 무너뜨리고 깨우침을 얻도록 하기 위한 자극으로 여겨질 수도 있었지만, 지도자의 언행은 결과적으로 수행처 사람들의 자존감을 떨어트렸고, 집단의 편 가르기를 부추겼다.

지도자가 깨달음을 추구하면서 높은 의식 수준에 이르렀고, 깊은 영적 통찰을 얻었다는 것에는 의심할 나위가 없었다. 그러나 심리치료사인 청년의 눈에는 지도자가 정작 인격 속의 개인적인 문제, 즉 자기혐오와 자기애적 이기주의에 직면했음에도 해결하려고 노력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자신의 심리적 상처를 돌보지 않아서 그 상처로부터 오는 아픔이 무의식적으로 공격적인 행동으로 표출된 것이다. 결국 그 수행단체는 지도자 때문에 분열되었고, 모두 흩어졌다.

수행처를 떠나면서 청년은 책에서 읽은 선사의 이야기처럼 깨달음에 대한 낭만적인 일이 현실에도 일어나기를 바라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선 수행을 통해 한순간에 자신의 낡은 자아가 무너지고 새로운 영적 존재가 나타나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명상은 분명히 수행자를 특별한 정신적 영역으로 이끌어주지만, 그것이 낡은 자아를 단박에 무너뜨릴 수는 없었다. 명상 수행에서 얻는 새로 태어난 느낌 같은 해방감과 새로운 가치의 체험이 마음속 깊숙이 박혀있는 정서적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누구나 마음속에 감정적 응어리가 있는데 어린 시절에는 미처 해결하지 못했던 문제들을 직면해야 하는 용기를 가지고, 그것과 씨름해야 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러나 청년은 그러한 과정 없이 명상이라는 고차원적인 방식으로 자유와 해방을 얻으려고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도 그 지도자와 다를 바 없이 명상으로 마음의 문제를 회피하고 있었던 것이다.

청년은 이제 깨달음을 추구하는 영적 수행뿐만 아니라 인격도야를 함께 할 때 비로소 참다운 영적 발달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내면에서 해결되지 않은 감정적인 문제와 심리적 상처를 다루는 작업을 위해 심리학의 공부가 필요하다고 확신했다. 그는 한때 싫증을 느껴 떠났던 심리학 공부를 다시 시작하기로 마음먹고 시카고대학교로 돌아갔다.

청년의 이름은 존 웰우드(John Welwood, 1943~2019)이다. 그는 미국의 심리치료사이자 자아초월심리학의 개척자로서 동양의 지혜와 서양 심리학의 통합을 위해 평생을 바친 저명한 심리학자이다. 웰우드는 심리치료의 중요한 접근법인 경험적 심리치료(대화로만 상담하는 게 아니라 다양한 활동의 체험을 통해 삶에 변화를 주는 심리치료)를 동양의 영적 전통과 통합해 인간의 실존적인 문제를 포괄적으로 다룰 수 있는 심리치료로 발전시켰다.

영적 우회이론의 정립

1950년대에 이르러 미국 사회는 불교 서적의 보급이 크게 늘고 이와 함께 체험을 통해 불교를 알고자 하는 대중적 열의가 상당히 높아졌다. 웰우드도 스즈키 다이세쓰(1870~1966)와 앨런 왓츠(1915~1973) 같은 불교 작가들의 책을 통해 10대 시절부터 불교를 접할 수 있었다. 불교에 대한 지적 호기심으로 심리학과의 유사성을 학술적으로 탐색했던 이전 세대의 심리학자들과 달리, 웰우드 세대의 심리학자들은 어릴 때부터 직접 불교 수행을 꾸준히 해오면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불교와 심리치료의 통합을 모색하였다. 이처럼 명상 수행과 심리학적 연구를 통합하는 대표적인 학자가 존 웰우드와 존 카밧진(1944~)이다. 이들은 자신의 불교 수행을 토대로 불교 수행법을 심리치료에 적용해 상담심리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1943년에 태어난 존 웰우드는 17세에 스즈키의 선불교에 관한 글을 읽고, 선 수행을 통해 자신의 본성을 경험적으로 깨달을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과 환희심을 느꼈다. 웰우드는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기독교와 함께 자랐고, 교회의 종교의식과 교회 음악을 좋아했다. 하지만 채울 수 없는 정신적인 갈증을 느꼈다. 그러던 차에 선불교를 만나게 되었고, ‘깨달음이 인간의 진정한 목표라고 믿고 삶의 방향을 정했다. 또한 앨런 왓츠의 책 동양과 서양의 심리치료를 읽고, 서양의 심리치료도 깨달음을 위한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특히 심리치료가 서양인에게 적합한 방법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깨달음을 위한 서양의 방식을 찾으리라 결심했다. 그는 시카고대학에서 임상심리학을 공부했다.

티베트불교의 지도자인 쵸감 트룽파(1939~1987)를 만난 웰우드는 그의 명석함에 매료돼 명상 수행을 강조하는 그의 안내에 따라 명상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웰우드는 명상을 통해 마음의 활동을 면밀하게 살펴볼 수 있었고, 이를 통해 마음의 본성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웰우드는 생각이 멈춘 마음을 직접 체험함으로써 실존의 문제를 다룰 수 있었다. 이후 수년간의 명상 수행을 통해 영적 체험을 함으로써 명상을 더욱 중요하게 여기게 되었다. 명상은 해방을 성취하게 하는 가장 고차원적인 길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그러나 명상에 심취하면 할수록 그는 자신의 대인 관계가 점차 흐트러지고 소홀해지고 있음을 느꼈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꼈을 때, 문득 과거에 자신의 영적 지도자가 생각났다. 자신의 내면에 잠재된 여러 가지 심리적 불만과 불안을 다루지 않고, 인간 세상의 이해관계나 경쟁 구도가 하찮게 여겨지는 마음 상태는 분명히 명상을 통해 자유를 갈구하면서 더 높이 올라가려는 욕구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것이 붓다가 의미하는 깨달음의 길이 아니라는 것도 자각했다.

어떻게 하면 명상 수행에서 얻는 놀라운 경험을 일상의 삶과 연결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영적인 삶과 세속적인 삶은 조화롭게 어울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동양의 종교와 서양의 과학이 통합될 수 있을까?

웰우드는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명상 수행자가 쉽게 빠질 수 있는 현실 회피적 경향에 대한 이론을 세웠다. 그리고 영적 우회’(직면하지 않고 돌아간다는 뜻에서 우회라고 표현)라고 이름 붙였다. 이 영적 우회는 자아초월심리학의 중요한 개념이 되었다.

존 웰우드의 대표 저서들.
존 웰우드의 대표 저서들.

 

내면 문제의 회피, 영적 우회

“‘영적 우회는 내가 속한 불교 공동체와 나 자신에게 일어나는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만든 용어입니다. 더 높은 정신적인 차원으로 나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우리(수행자들)는 대부분 자신을 위해 진실한 노력을 기울이지만, 내면에서 해결되지 않은 감정적인 문제와 심리적 상처 그리고 아직 미완성된 채로 남아 있는 미숙한 감정처리 방식 등이 있는데 그것에 다가가기를 꺼립니다. 교묘하게 회피하려고 하죠. 그런데 수행하는 우리는 명상이라는 수행법을 이러한 내면의 문제를 회피하는 데 사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이 영적 우회입니다. 또한 우리는 다양한 인간관계에서 겪는 어려움과 복잡함을 절대적 진리에 기댐으로써 인간관계의 어려움과 복잡함을 깎아내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도 영적 우회의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웰우드에 의하면, 사람의 존재는 개인적 삶과 관계가 주를 이루는 세속적 영역과 개인을 초월하는 초개인적 영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통 심리학은 세속적 영역만을 다루고, 영적 전통은 초개인적 영역에 전념하기를 강조한다. 그러나 심리학과 영적 수행 전통이 서로 다른 목표를 추구하고 인간 본성에 관해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을 보고, 웰우드는 이 두 영역의 조화로운 통합을 위해 평생을 바쳤다. “나는 명상과 영적 수행이 나의 모든 문제에 대해 해답을 줄 수 있기를 간절히 원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했다.” 웰우드는 심리적 치유와 정신적 수행이 모두 필요하며, 둘 중 하나만으로는 인생 전체를 온전히 다루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처음에 웰우드는 서양의 심리치료가 서양인들을 깨달음과 해방으로 안내하는 좋은 길잡이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곧 서양의 심리학은 인간 본성에 대한 좁은 시야를 가지고 있기에 그렇게 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웰우드는 그 대안으로 자신을 더 풍부하고 온전하게 이해하기 위한 길을 찾으며 불교에 심취했다. 그런데 웰우드의 불교 철학에 관한 공부와 끊임없는 명상 수행은 오히려 서양 심리학을 완전하게 이해할 수 있게 해주었다. 불교를 배우고 명상 체험을 통해 여러 가지 통찰을 얻고 나니, 한때 심리학의 한계를 인식했던 웰우드는 다시금 서양 심리학자들이 이룬 엄청난 업적을 인정하고 감사할 수 있었다. 비록 심리학은 인간의 궁극적인 본성을 설명하지 못하지만, 심리학을 연구하고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의 성장에 충분히 도움을 주는 일이다. 특히 심리학은 심리치료 작업이라는 훌륭한 체계를 포함하고 있어서 어린 시절에 부정적으로 조건화된 사람들의 해방에 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심리치료는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도록 가지치기하고 비료를 주는 것과 같다면, 영적 수행은 근본적인 것, 즉 나무의 뿌리를 다루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서 뿌리란 자기에 대한 근원적인 집착심을 말합니다.”

ⓒGettyimagesBank
ⓒGettyimagesBank

 

올바른 영적 수행의 길

웰우드에 의하면, 불교의 수행은 한 개인이 성장 과정에서 받은 충격으로 얻은 상처를 치유한다기보다 개인적인 모든 것을 넘어서는 보편적인 신경증 경향을 다룬다. 그래서 영적 수행의 길에서 개인적인 상처를 돌보는 것을 소홀히 한 채 영적 수행자가 되는 것은, 우리 자신에 대해 나쁘게 생각하거나 기본적으로 부족하다고 느끼는 근본적인 결함을 덮고 대신 방어적이고 보상 추구적인 정체성을 형성할 수 있다. 이러한 동기가 깔려 있으면, 비록 우리가 부지런히 수행할지라도 결과적으로 우리의 정신적 수행은 방어적인 정체성에 봉사하는 꼴이 된다. 이처럼 명상과 수행이 우리의 인간적인 문제를 직면하지 않고 돌아가는 방식(우회)으로 사용될 때, 우리는 전반적인 인격과 통합되지 않은 채 남아 있게 되고 이중적인 삶의 모습을 띠게 된다.

웰우드는 진정한 불교도라면 정신적 차원의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 위해 노력해야 하며, 동시에 세속적인 관심사에서 멀어진 그 마음 상태를 목적지로 여겨서는 안 되며, 하찮게 여겨지는 세속의 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지상에 존재하는 이 세상과 우리 자신을 존중해야 하고, 자신의 몸을 잘 살필 줄 알고, 심리적인 작용을 잘 보고 다루며, 자신과 타인의 관계를 조화롭게 이루어 나가는 것을 실천할 줄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것은 심리치유로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그는 온전한 인격체는 하늘과 땅 그리고 그사이를 잘 연결할 줄 알아서 삶이 든든해진다.”고 말한다.

깨달음에 대해 잊으세요. 당신이 어디에 있든 가만히 앉아 바람에 귀 기울이세요. 사랑과 갈망 그리고 두려움을 느껴보세요. 당신이 되고 싶은 사람이 아니라 지금 당신이 누구인지에 대해 마음을 여세요. 당신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성자가 아닙니다. 바로 여기 당신 앞에, 당신 안에, 당신 주위에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거룩합니다. 당신은 이미 부족함이 없고 이지러지지도 않았으며 두루 갖춘 존재입니다. 숨을 내쉬고 내면을 관찰하고 놓아주세요.”

 

문진건_ 현재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불교문예학과 조교수. 미국 ‘California Institute of Integral Studies(CIIS)’에서 동서양심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CIIS 동서양심리학과 초빙교수(2012~2014), 미국 중독심리전문상담사(CAADAC), 동국대학교 명상심리상담학과 책임교수(2015~2019)를 역임했다.

저작권자 © 금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