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장르 벽 허물고
삶의 궤적 담은 작품엔
​​​​​​​부처님 향기 ‘솔솔’

어린 시절, 밤하늘 가득 수놓인 별을 바라보며 ‘시에 목숨을 걸겠다.’고 다짐했던 소년은 어느새 희수(喜壽)의 노인이 됐다. 소설가이자 시인인 윤후명(77세, 본명 윤상규). 그는 21세 때 쓴 시 ‘빙하의 새’가 신춘문예에 당선돼 시인으로 등단했다. 첫 시집 〈명궁(名弓)〉을 출간한 뒤, 자신의 삶을 더 자세히 전하고자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빈 원고지를 연필로 가득 채우던 청년의 머리 위에는 어느덧 새하얀 서리가 내렸다.

올해로 등단 55주년을 맞은 그는 어린 날의 다짐을 지키고자, 희수의 나이에 시를 쓰기 위해 다시 펜을 들었다. 새로운 시집 출간을 앞둔 그는 “소설도, 시도 그저 원고지 위에 있을 뿐”이라는 말로 시인으로 등단했다가 소설가로 정점을 찍은 후 다시 시를 쓰는 이유를 설명했다. 서울 경복궁 인근 작업실 ‘문학비단길’에서 만난 그는 문학이란 큰 틀 속에서 작업할 뿐 시와 소설의 벽은 허문지 오래인 듯했다.

시인 등단과 함께 새아버지 타계

윤후명은 1946년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그에게 ‘상규(尙奎)’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경찰관이었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없다. 38선을 경계로 남북이 대치하던 정치적 상황 아래 벌어진 국지전에서 전사했기 때문이다. 열아홉에 미망인이 된 어머니가 홀로 그를 돌볼 때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피난을 떠나야 했지만, 아들이 홍역을 앓자 어머니는 피난을 포기했다. 어머니는 강릉 임당동에서 담배장사를 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밤에는 총성이 울렸고, 낮에는 시가전이 벌어졌다. 생사를 넘나드는 아찔한 순간의 연속이었다. 이 무렵 어머니는 마을 인근 군부대에서 군 법무관으로 복무하던 한 남자와 결혼했다. 그가 윤상규의 새아버지다.

1953년 7월, 남북이 정전협정을 맺으면서 길고 긴 전쟁이 사실상 종지부를 찍었다. 학교에 입학할 나이였지만, 사회기반시설이 모두 무너져 다닐 수 있는 곳이 없었다. 이 무렵 아버지가 복무지를 대전으로 발령받으면서 온 가족이 이사했고, 그는 아홉 살이 되던 해 국민학교(현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이후 아버지의 발령지를 따라 전국으로 이사를 다녀야 했다.

잦은 이사로 마음 둘 곳이 없었기 때문일까? 윤후명에게 고향 ‘강릉’은 인생의 출발점이자 마음속 깊은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고장으로 남았다. 소설 〈강릉〉에는 그가 어린 시절 겪은 이야기부터 성인이 되어 찾아간 동네에서 옛 추억을 되새기는 모습 등이 담겨 있다. 그는 “강릉은 내 모든 글의 배경이자 원천”이라고 말했다.

윤상규의 가족은 5·16군사정변이 일어난 1961년 서울에 정착했다. 중학교 3학년 때다. 이 무렵 아버지가 군에서 ‘반혁명세력’으로 분류되면서 힘든 시기가 찾아왔다. 과거 박정희 전 대통령이 군사정변을 준비하면서 아버지에게 동참을 제안했는데 거절하자, 그 보복으로 숙청한 것이다. 이후 그의 삶은 지독한 가난과 함께했다.

“용산고등학교에 입학했는데, 연필 한 자루를 살 돈조차 없어서 필기를 못했어요. 그저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하루하루를 보냈죠. 어느 날, 친구가 읽던 잡지에 실린 시를 한 편 읽게 됐는데, 그때부터 시에 관심을 가지게 됐어요. 빈 노트 위에 나름대로 ‘시’라는 걸 끄적거렸고, 종합잡지 〈학원〉에 투고하곤 했어요. 그게 제 문학 인생의 시작이에요.”

윤상규는 시를 쓸수록 그 매력에 더욱 빠져들었다. 특히 고등학교 2학년 때 성균관대학교가 주최한 백일장에서 장원을 차지하면서 ‘시에 목숨을 바치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극심하게 반대했다. 군 법무관으로 근무했던 아버지는 그가 법학을 공부하기를 원했다. 아버지는 “문학은 패배자의 것이고, 법은 승리하는 사람의 것”이라며 시인이 되고자 하는 꿈을 꺾으려 했다. 하지만 그는 “법은 인간을 구속하지만, 문학은 인간을 자유롭게 한다.”며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매서운 회초리와 달콤한 회유에도 그의 결심은 굳건했고, 아버지와의 대립은 계속됐다.

연세대 철학과에 진학하게 된 이유도 그가 훗날 마음을 바꿔 법학을 공부하길 바라는 아버지의 선택이었다. 하지만 윤상규는 입학 면접시험에서 “시를 쓰기 위해 이 학과를 선택했다.”고 말하며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대학 입학 후에도 궁핍한 생활은 이어졌다. 하지만 시에 대한 그의 사랑은 계속됐다. 빈 공책, 빈 원고지 위에 연필을 꾹꾹 눌러 시를 쓰던 그는 196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빙하의 새’가 당선되면서 등단했다. 시인의 꿈을 반대했던 아버지는 그가 등단한 직후 58세의 나이에 유명을 달리했다. 그는 신춘문예 당선 상금으로 시인이 아닌 법학도가 되길 바라던 아버지의 묏자리를 마련했다.

윤후명은 이 시절의 이야기를 소설 〈모든 별들은 음악소리를 낸다〉에 담았다. 이 작품은 아버지의 삼우제(三虞祭)를 지내러 가는 길에 화자가 아버지와의 기억을 회상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그는 이 작품을 집필하는 동안 아버지와의 기억을 토대로 ‘문학의 길을 걷겠다.’고 결심했던 어린 시절 자신의 마음을 반추(反芻)했다. 자신이 시인의 길을 고집했듯, 아버지도 스스로 옳다고 생각한 길을 아들에게 제시했다는 걸 그는 뒤늦게 깨달았던 것이다. 소설은 어쩌면 아버지에게 바치는 참회록이었는지 모른다.

소설가로 살고 싶어 개명

윤상규는 대학 졸업 후 삼중당·샘터·삼성출판사·독서신문사·현암사 등 출판사에 근무하며 꾸준히 시를 썼다. 등단 10년만인 1977년에 시집 〈명궁〉(문학과지성사)을 출간했다. 시집 출간은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문학적 갈증을 유발했다. 그는 작품 안에 자신의 이야기를 담고자 했지만, 함축과 은유로 이뤄진 시의 언어로는 한계가 있었다. 이러한 고민은 그를 소설의 세계로 이끌었고, 197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소설부문에서 단편소설 〈산역〉으로 등단했다. 첫 시집을 내고 2년 만의 일이다.

윤상규가 소설로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하자 주변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혹자는 그에게 “당신은 새요, 박쥐요?”하고 물었다. 당시 그의 작품을 심사한 이어령(1934~2022) 문학평론가도 “시를 쓸지 소설을 쓸지 딱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 나는 시도 소설도 수필도 썼는데, 오히려 그래서 다 잘 안됐다.”고 조언했다.

“외국에는 릴케(Rainer Maria Rilke, 1875~ 1926)처럼 시와 소설을 모두 쓰는 작가들이 있어요.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한 우물을 파야 한다.’고 입을 모아 말하죠. 문학이라는 장르를 서양에서 들여올 때, 그들의 풍토까지 가지고 오지 못해서 생긴 현상이 아닐까 싶어요. 하지만 저는 장르의 구분을 떠나 그저 ‘문학’안에서 다양한 작품활동을 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돼야 한다고 봐요. 다행스럽게도 최근 들어서 그게 조금씩 가능해져 가는 듯해 앞으로가 기대됩니다. 제가 그 초석이 되어도 좋고요.”

오랜 고민 끝에 ‘오롯이 소설가로 서겠다.’고 다짐하고, 출판사를 그만둔 뒤 전업 작가로 나섰다. 또 스스로의 의지를 굳건히 하고자 ‘후명(厚明)’이라는 이름을 직접 지어 개명했다. 이후 〈둔황의 사랑〉(1982)으로 제3회 녹원문학상(1983)을, 〈누란〉으로 제3회 소설문학작품상(1984)과 제18회 한국창작문학상(1986)을, 〈별을 사랑하는 마음으로〉로 제39회 현대문학상(1994)을, 〈하얀 배〉로 제19회 이상문학상(1995)을 수상했다. 그의 소설 〈둔황의 사랑〉은 1993년 프랑스의 악트 쉬드(Actes Sud) 출판사에서 프랑스어로 번역·출간했으며, 소설 〈하얀 배〉는 최근 일본에서 출판되었다.

젊은 시절 윤후명은 늘 술과 함께했다. 술을 마시게 된 계기를 정확히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살길이 막막해 괴롭고 힘든 시기를 견뎌내기 위해 술에 의지했던 건 아니었을까 추측했다. 그 결과는 ‘알코올 중독’이었다.

46세가 된 1991년, 윤후명은 민족문화작가회의가 주최하는 열린 문학모임에 참가했다. 유수의 작가와 작품을 좋아하는 독자가 함께 참여하는 행사였다. 행사 첫날 저녁, 이문열 작가와 바둑을 두며 술을 마셨다. 그가 “여기 자네와 결혼하고 싶다며 찾아온 여성이 있다. 살고 싶다면 그 사람을 꼭 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술김에 길게 고민하지도 않고 대답했다.

“그렇게 하겠다.”

다음날 아침, 주최 측에서 숙취에 정신을 못차리고 있던 윤후명을 ‘결혼식을 하러가야 한다.’며 깨웠다. 비몽사몽 간에 사람들 손길에 끌려가니, 정말 결혼식이 준비돼 있었다. 전날 이문열 작가가 주도해서 이뤄진 일인데, 정작 이 작가는 구석에서 이불을 둘둘 말고 잠을 자고 있었다.

윤후명의 결혼식 참석자 중 가장 연장자인 이호철(1932~2016) 작가가 주례를 맡았다. 이근배 시인이 사회를 보고, 송영(1940~2016) 작가가 축가를 불렀다. 이들의 결혼식은 KBS지국에서 취재해 ‘전국은 지금’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생중계되기도 했다.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진행된 결혼이었지만, 윤후명 작가는 ‘이렇게 된 이상 잘 살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이후에도 술을 끊지 못했다. 보다 못한 부인이 그를 서울대학교 알코올중독치료 폐쇄병동에 입원시켰다. 갑자기 병원에 갇히게 된 그는 초기에는 크게 화가 나 ‘나가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생각했지만, 이내 ‘잘 이겨내서 치료를 받아보자.’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덕분일까? 몇 개월의 치료 끝에 퇴원을 할 수 있었다. 그는 이 시기를 소설 〈별까지 우리가〉에 녹여냈다. 자신이 ‘삶을 다시 시작했다.’는 의미를 담은 회고록이다. 그는 이 작품으로 현대문학상을 수상했다.

불교, 민족 잠재의식에 깃든 정서

윤후명 작가는 퇴원 후 〈협궤열차〉(1992)·〈오늘은 내일의 젊은 날〉(1996)·〈삼국유사 읽는 호텔〉(2005)·〈촛불랩소디〉(2007) 등 꾸준히 소설을 집필했다. 그의 소설에는 불교적 요소가 여러 군데에서 발견된다. 언제부터 소설에 불교적 요소를 반영했느냐는 질문에 그는 “잘 모르겠다. 그저 어느 순간부터 스며들어 있었다.”고 대답했다.

그는 불교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명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소설 〈둔황의 사랑〉의 배경이 된 중국 돈황(敦煌)에 직접 방문한 걸 계기로 불교를 명확하게 알고 싶은 호기심이 생겼다고 털어놨다.

“소설 〈둔황의 사랑〉을 쓴지 10년쯤 지난 뒤에 돈황 지역을 여행할 기회가 생겼어요. 이곳저곳을 둘러보던 차에 석굴사원에 방문했는데 수행승들이 앉아 고요하게 참선을 하는 모습을 보게 됐죠.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마음속에 어떤 울림이 퍼져나갔어요. ‘아, 나도 저렇게 살다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거기에 어떤 현묘(玄妙)한 세계가 있지 않을까 기대한 거죠. 그 기억을 계기로 불교를 공부하게 됐어요.”

윤후명은 귀국 후 불교공부를 체계적으로 할 수 있는 방향을 모색했다. 1992년 조계사불교대학에 입학했고, 1994년에는 포교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그는 불교를 신앙의 의미보다 우리 민족의 잠재의식에 깃든 정서라고 여기고 있다. 불교는 인도와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와 역사와 문화 전반에 영향을 미쳤고, 오늘날까지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불교가 민중의 삶과 정신의 맨 밑바닥에 스며들어 있다고 주장했다.

윤후명은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소설에 불교적 요소를 녹여냈다. 부처님의 생애나 고승의 이야기, 교리와 같은 종교로서의 불교를 말하기보다 작품 안에 은은한 불향(佛香)이 풍기게 하고자 노력했다.

윤후명은 시인과 소설가뿐만 아니라 ‘화가’라는 직업도 가지고 있다. 벌써 세 차례 개인전을 치러냈다. 우연한 기회에 붓을 잡았는데, 문학으로 표현할 수 없는 또 다른 영역을 화폭에 자유롭게 담아낼 수 있다는 점에 매력을 느꼈다. 최근에는 직접 그린 그림에 시와 짤막한 글을 붙여 화서첩 〈윤후명 그리고 쓰다〉(2022)를 출간했다.

요즘 윤후명은 다시 시를 쓰기 시작했다. 2017년 작가 데뷔 50주년을 맞아 전집을 내는 과정에서 시의 부족함을 느낀 탓이다. 새 시집 출간을 앞둔 그는 “그동안 시 한테 참 미안했다. 이제 ‘시에 목숨을 바치겠다.’고 맹세한 어린 날의 다짐을 지켜야 할 때”라고 말하며 빙그레 웃어 보였다.

“저의 모든 작품은 결국 하나의 작품입니다. 제가 직접 겪은 일, 지켜본 일을 다르게 해석하거나 소설적 장치를 통해 이야기로 풀어냈기 때문이죠. 그러다 보니 1인칭 시점을 사용하게 됐어요. 시도 마찬가지입니다. 독자들이 제 작품을 읽을 때 특별히 정해진 의미를 찾는 게 아니라, 스스로 오롯이 느낀 감성을 토대로 한 사람의 인생을 바라봐주길 바랍니다.”

윤후명의 작품에 담긴 그의 인생 조각들을 천천히 바라보노라면 알쏭달쏭하면서도 따뜻한 감동이 밀려온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글을 쓰고 싶다.’는 그의 소망에 ‘어쩌면 그의 삶의 궤적을 더 엿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묘한 기대감이 샘솟았다. 한 사람의 삶이 녹아든 그의 작품 속 메시지가 우리의 마음에 별이 되고, 아름다운 음악이 되어 지친 마음에 위안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윤후명의 어린 시절. 어머니 아버지와 석굴암 앞에 서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시에 목숨을 걸겠다.’ 다짐했던 윤후명은 최근 다시 시를 쓰기 위해 펜을 들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시에 목숨을 걸겠다.’ 다짐했던 윤후명은 최근 다시 시를 쓰기 위해 펜을 들었다.
1992년, 부인과 함께 유럽여행을 떠났다. 모스크바 붉은광장.
1992년, 부인과 함께 유럽여행을 떠났다. 모스크바 붉은광장.
파리 몽마르트의 식당.
파리 몽마르트의 식당.
파리 발작상 앞에서.
파리 발작상 앞에서.
1992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작은 숙소에서 글을 쓰고 있다.
1992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작은 숙소에서 글을 쓰고 있다.
1970년대 동인지 〈70년대〉에서 활동한 시인 5명이 공동시집 〈고래〉를 출간했다. 왼쪽 뒤부터 석지현·김형영·강은교·정희성·윤후명 시인.
1970년대 동인지 〈70년대〉에서 활동한 시인 5명이 공동시집 〈고래〉를 출간했다. 왼쪽 뒤부터 석지현·김형영·강은교·정희성·윤후명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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