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많이 묵어라.
​​​​​​​니만 잘 있으면 됐다.”

〈삽화=필몽〉
〈삽화=필몽〉

나의 대학생활이 나름 재미와 의미를 누리며 살아가는 듯 보였을까? 어머니는 자주 전화를 하셨다.

“메뚜기는 잘 먹었다 카드나?”
“또 뭘 좋아한다 카드나?”
“그 선생님 따라서 머시든 열심히 따라 하거래이.”

주로 이런 내용이었다. 어머니의 상상력은 다분히 화려한 꽃이 피어나는 무대였을 것이다. 딸의 머리 위에 왕관이라도 올려놓고 싶은 심정이었을까? 아니면 은관이라도? 어머니는 단 한 번도 딸이 빗나가게 될 것이란 상상을 해본 적이 없을 것이다. 그것은 상상만으로도 어머니의 수치요, 절망이기 때문일 것이다.

여류작가들의 수다

나는 어머니의 상상력과 무관하게 대학생활을 즐기고 시에 빠져있었다. 숙명여대 대학신문에 내 이름이 나는 것은 흔한 일이 되었고, 여기저기서 칭찬을 들었다. 그러므로 나는 더 나아갔다. 밤새 커피를 줄줄 마시며 시인은, 문학가는 이래야 한다고 자처하며 잠을 안 자고 버티며 원고지에 무엇인가를 써나갔다. 쓸 만한 것과 말도 안 되는 것이 뒤섞여 수북했다. 자만과 도취와 우월감이 파지(破紙)로 방안을 가득 메웠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안될 것이 없었다. 쓰고 읽고, 쓰고 읽었다.

릴케의 시집을,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를,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을, 입센의 〈인형의 집〉을,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너새니얼 호손의 〈주홍글씨〉를 읽었다. 하지만 사실 무슨 소리인지도 모르고 건방만 저 하늘 꼭대기로 오르고 있었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조금씩 미쳐가고 있었다고나 할까?

그리고 플라톤의 〈잔치〉를 외출할 때마다 들고 다녔다. 내게 〈잔치〉는 브로치나 머플러 같은 것이었다. 플라톤이 누구인지, 〈잔치〉가 무슨 내용인지조차 모르면서 근사하게 보인다는 이유로 열심히 들고 다녔다. 더러는 〈잔치〉를 집에 두고 〈현대문학〉을 끼고 다녔다. 단지 멋있어 보이니까. 나는 시인이 될 것이고, 철학을 아는 사람이라고 헛광고를 온몸으로 펄럭이면서.

잠을 안 자는 것이 문학인의 도리라고 생각했던 나는 사실 단 한 번도 공부를 하느라 잠을 미루어 본 적이 없다. 하지만 그것이 시라면 기꺼이 밤을 꼴딱 새울 수도 있었다. 당연히 수업시간엔 졸음이 밀려왔다. 그래도 김남조 선생님 수업시간만큼은 절대 조는 일이 없었다.

내게 신비의 여신인 그분은 가끔 나를 여류시인 모임에 데리고 가셨다. 시종쯤으로 데리고 가셨는지는 몰라도 나는 흥분 그 자체였다. 선생님은 그 어느 곳도 혼자 가는 걸 싫어하셨다. 친구모임, 작가모임, 심지어 영화관에나 시장에도 날 데리고 가셨다.

어느 날은 박화성·모윤숙·한무숙·손소희·전숙희·강신재 등 이름만 들었던 여류작가들이 앉은 밥상에 선생님의 그림자처럼 허리를 굽히고 앉아 있었다. 나는 긴장으로 온몸이 떨렸다. 사실 그런 곳에 어린 제자를 데리고 가는 건 잘못된 행동이었다. 다른 분들도 싫었을 것이다. 그러나 선생님의 습관 같은 것으로 봐 주는 것 같았다. 나는 흥분했다. ‘세상에 이런 분들의 얼굴을 보게 되다니.’ 특히 ‘젊은 느티나무’를 쓰신 강신재 선생님은 바로 바라보지도 못할 정도였다. 나는 어머니의 말처럼 성공했다. 저런 분들과 마주 앉아 있을 수 있다니, 아니 마주하는 것이 아니라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내가 궁금했던 것은 ‘그들은 과연 어떤 대화를 나눌까?’하는 궁금함이었다. 그러나 내가 하늘처럼 바라보던 그 여성들이 나눈 대화는 몸이 아픈 이야기, 자녀이야기, 혹은 신문기사 따위였다.

“나는 발바닥까지 아파.”

한무숙 선생님의 말에 모두가 웃었다. 나는 무지막지하게 실망도 하고, ‘저들도 사람이니 사람의 근본이야기를 하는 것이겠지.’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뭔가 아쉬웠다. ‘이렇게 우정을 나누는 자리에 문학이야기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교과서에 이름이 오르는 여자들이 앉아서 나누는 대화가 고작?’하고 생각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들을 만난 것만으로도 마치 노벨상을 탄 듯 뿌듯했고 행복했다.

선생님의 임신

1962년은 화폐개혁이 있는 해이다. ‘환(圜)’이 ‘원’되는 해였다. 여러 말이 이리저리 나돌았다. ‘1원이면 쌀 한 가마니를 산다.’, ‘천원이면 집을 산다.’는 말이 떠돌았지만 다 거짓말이었다. 화폐의 가치에 변화가 있었기에 용돈도 처음엔 번거롭고 김밥값을 계산할 때도 한참이나 생각해야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안정을 찾았다.

그러다 미국 대통령이 시해당하는 사건이 생겼다. 케네디 대통령은 한국에서 인기가 많았는데, 그의 아내 재클린도 인기가 있었다. 세계적인 뉴스였다. 어린 두 남매의 사진을 보면서 우는 사람도 있을 정도였다. 남편 사후에도 재클린은 인기가 식을 줄 몰랐다. 우리나라 미장원에는 ‘재클린 머리’라는 헤어스타일이 유행했고, 나도 그 머리를 자주 하곤 했다.

“재클린 머리로 해주세요.”

머리 손질이 끝나면 재클린이 된 것 마냥, 대통령의 여자가 된 기분으로 거리를 활보하곤 했다. 1962년은 세계적으로 중요한 사건이 많이 발생했던 해다. 그러나 나는 문인 여성들을 만난 흥분에 빠져있었다. 나의 건방진 태도는 날로 더해졌다. ‘언젠가 너희들을 넘어서리라.’하고 커피를 마셔대며 밤을 새웠다. 스무 살, 어쩌면 누가 봐도 어여쁘기만 한 젊음의 늪을 거치고 넘어서는 과정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선생님은 어느 날 미도파백화점에 살 것이 있다고 날 데리고 가셨다. 전등을 구경했고 사지는 않았다. 아마도 책상을 밝히는 전등을 사려고 했는데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 같았다. 그리고 미도파백화점 앞에 이름있는 중국집으로 날 데리고 가셨다. 어머나 이런 신비한 분이 중국음식을 먹나? 나는 당혹스럽게 의자에 앉았다.

“넌 뭐 먹을래?”
“짜장면…….”
“난 짬뽕.”

내 속에 다시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 이런 신비한 분이 짬뽕을 먹다니. 나는 기절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더 기절할 것 같은 대목은 짬뽕 국물을 후루룩 마시는 장면이었다. 그 모습을 본 나는 더 이상 짜장면을 먹을 수 없었다. 내 나이 스무살 때의 일이다.

‘그분도 인간이다.’, ‘사람이다.’, ‘여자이다.’ 나는 그분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려고 자신에게 계속 주입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꾸 짬뽕 국물을 마시던 모습이 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갈 때는 다시 신비한 모습의 선생님으로 보였다.

그것뿐이겠는가? 기막힌 일은 계속되었다. 나는 3학년이 되었고, 국문과 예비시인으로 급부상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선생님의 배가 불러오기 시작했다. 아니 이럴 수가. 이런 신비한 분도 임신을 하고, 아기를 낳는단 말인가. 그럼, 우리 어머니와 같은 여자란 말인가. 당시 나는 믿기지 않겠지만 임신이 여자와 남자가 더불어 이뤄내는 결과란 것을 알지 못했다. 뭐랄까? ‘둘이 손을 잡았나?’하는 정도로 성 지식이 무지몽매했다.

어느 날 선생님 댁에 갔을 때 선생님은 만삭이 된 몸으로 뜰 의자에 앉아 계셨다. 멀리 하늘을 보거나 눈을 감고 있었다. 그 모습 또한 신비로웠다. 하늘을 보거나 눈을 감고 있고 명상을 하는 모습으로 비추어졌다. ‘저런 분은 저 순간에도 시를 생각하고 있나?’, ‘아니면 뱃속 아기를 생각하고 있나?’ 내게는 그분을 바라보는 것 자체가 시 공부였다.

선생님은 내가 3학년 가을이 됐을 무렵, 넷째 아이를 낳았다. 그해 가을 문학의 밤에는 선생님 대신 박목월 선생님이 오셨다. 그 시절 ‘숙명여대 문학의 밤’은 장안의 화제였다. 강당이 꽉 차고 운동장도 발 디딜 자리가 없을 정도였다. 몇몇 학생들이 자작시와 수필을 읽었고, 마지막으로 박목월 선생님이 작품해설과 문학의 의미를 말하는 순서로 끝이 났다.

그 무대에서 기억에 남는 낭송은 허영자 시인과 수필을 낭송한 전원주(지금의 탤런트) 씨의 낭송이 돋보였다는 기억이 있다. 무대에서 내 자작시를 낭송하고 박수를 받은 일도 심장이 뛰는 일인데, 박목월 선생님께서 “신달자의 시는 이런 면이…….”하는 순간에는 팔만 들면 날아 갈 것 같은 기분이었다.

〈삽화=필몽〉
〈삽화=필몽〉

희생과 결핍

날아갈 듯한 순간이 이어지고 있던 어느 날 밤, 하숙집으로 엄마가 전화를 했다.

“와~ 무슨일 있나?”
“무슨 일은. 없다.”
“그런데 목소리가 왜 이렇노?”

어머니의 목소리는 쩍쩍 갈라져 있었다. 크게 운 다음의 목소리 같았고, 기력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목소리였다. ‘아버지와 싸웠나?’, ‘아버지가 또 여자를 얻었나?’ 여러 가지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분명 무슨 일이 있었던 게 틀림없다. 다른 때와 달리 겁이 났다. ‘엄마가 또 이상한 짓을 하진 않겠지?’

“밥 많이 묵어라. 니만 잘 있으면 됐다.”

그 말과 함께 전화를 끊었다. 내가 다시 전화를 걸어 물었지만 “아무 일도 없다.”면서 다시 전화를 끊었다. 곧 방학이 올 것이다. 그때 가서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늘 그랬다. 꼬이고 다시 꼬이고. ‘이제 풀리나?’하고 바라보면 더 엉켜있는 게 우리 집안의 현실이었다. 사소한 개인감정을 묻어놓고, 오직 자녀를 위해 집안을 위해 꿋꿋하게 나아간 것은 늘 엄마였다. 어릴 때 집안이 무엇인가 어지럽게 돌아갈 때, 도무지 실마리가 잡히지 않을 때도 어머니가 작심을 하면 풀리곤 했다. 이상하게도 “알았다.”하시며 어머니가 움직이면 마술처럼 모든 게 제 자리를 찾게 되는 경험을 참 많이 했다. 또 무슨 일이 있는 것일까?

내가 늘 퉁퉁거리고,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고도 요리조리 빠져나가도 어머니는 내게 무작정 힘을 실어 주는 사람이었다. 못생겨도 예쁘다고 해 주고, 실수해도 괜찮다고 “그래, 다시 잘하면 된다.”고 해 주던 사람이었다. 조금 시원치 않게 부엌일을 해도 “그만하면 됐다.”고 치켜세워준 후 그 나머지 설거지를 어머니의 손으로 마치고 마지막 먼지까지 닦고 다시 정돈하는, 그런 사람이 어머니다. ‘어머니’는 ‘희생’이란 말의 동의어가 아닌가.

그 희생은 단순하거나 몇 사람을 위한 희생이 아니다. 어머니의 희생은 집안 모든 사람을 편하게 하려는 희생이었다. 정작 어머니야말로 가장 위로받아야 할 사람이었지만, 자신은 저 아래 파묻어 놓고 그저 가족의 평안을 이끌어 가려고 자신을 희생했다. 누구도 그 고통을 몰랐다. 습관처럼 어머니는 원래 그런 존재라고 여기며 스쳐 지나간 것이다.

그런데 어머니는 아버지에게만은 달랐다. 아마도 정인이었기 때문은 아닐까? 바라는 것이 많고 요구도 많았지만 단 한 가지도 이루어지지 않은 아버지와의 관계가 문제였다. 하고 싶은 말을 날마다 꿀꺽 삼키다가 누적된 감정이 한꺼번에 폭발하면 어머니는 거의 실신상태까지 갔다. 나는 지금도 어머니의 그 핏발선 함성을 잊지 못한다.

금방이라도 살인이 날 것 같은, 무섭고 두려웠던 전쟁을 여러 번 보았다. 어머니가 아버지 옷자락을 부여잡고 늘어지면 아버지는 냉정하고 모멸차게 어머니를 뿌리치고 나갔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독하다.’고 진저리를 치셨다. 원래 그렇다. 사랑받지 못하는 여자는 독하기 마련이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상대도 하지 않겠다는 듯 무표정하고 낮은 말로 몇 마디 던지고 며칠씩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의 감정은 증폭됐고, 어머니의 병은 깊어갔다.

어머니는 이렇게 외쳤다. “저 인간을 살아있게 하는 신은 내가 가만 안 둔다.”고 소리소리 치셨다. 어머니의 그 격렬한 분노와 폭풍 같은 원망과 통곡은 다 사랑의 결핍이었다. 늘 아버지를 기다렸고, 늘 아버지를 위해 밥상을 마련하고, 늘 아버지를 그리워했다. 다른 것은 몰라도 남편의 사랑과 관련해서는 누추하고 굶주린 걸인이었다. 그것을 몰라주는 아버지를 향해 퍼붓는 독설, 그것은 또 다른 언어의 사랑이었을 것이다. 내가 아는 어머니는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자랑하고 싶은 어머니였다. ‘내 자식이 이렇게 잘 되었다.’거나, ‘남편이 이렇게 나를 사랑해 준다.’는 말을 시장에 가서 물건을 살 때도, 목욕탕에 가서도 하고 싶어한 여자였다. 어머니의 비극은 작은 자랑도 할 것이 없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부끄러움뿐이었다. 자랑거리가 도대체 무엇이길래, 하나 받기가 그렇게도 어려웠을까? 소박하고 평범한 여자라면 누구나 갖는 꿈일 뿐인데.

다락방의 장구

중학교 2학년, 나는 두메산골에 위치한 한 중학교의 학생이었다. 그나마 조금 여유 있는 집안의 딸이었고, 어머니가 딸 교육에 대한 욕심이 있었던 터라 고향에서 하나밖에 없는 무용연구소에도 보냈다. 고향 무용연구소는 몇 번 보내다가 마음에 차지 않았는지, 방학이면 나를 대구까지 데리고 가서 무용에 대한 경험을 넓히게 해 주셨다.

어머니는 내가 누구나 알아주는 무용가가 되기를 원하셨던 모양이다. 그러나 나는 어머니가 원하는 무용가는 되지 못했다. 어머니는 나를 부산으로 전학시키고도 한동안 무용을 생각했었다. 어머니와 그 유명한 황무봉 연구소를 찾아간 일도 있었다.

몇 번 찾아가긴 했지만 내가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해 적응을 하지 못했던 것 같다. 나는 장구와 부채를 버리듯 다락방에 숨겨 놓고 꺼내지 않았다. 한국무용과 이별했다는 뜻이었다. 어머니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더 이상 무용을 권하지는 않았다. 다른 목표가 생길 것이라는 걸 어머니는 확신했던 모양이다.

처음에는 어머니가 고향 작은 촌락에서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뿐이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머니가 내게 바랐던 것은 훨씬 더 큰 것이라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어머니의 욕심은 들판에 오뉴월 풀 자라듯 자랐다. 그런데 집엔 도무지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그 옛날 생각이 난다. 딸들 몰래 그 무서운 약을 먹었던 다락방의 이야기. 우리 집에서 그 말은 금기였다. 모두 무서워했다. 어머니에게 무관심한 아버지도 그 이야기는 절대 꺼내지 못하게 했다. 그렇지, 그 생각은 하지 말자.

속옷차림으로 병원을 달려갔던 그 순간을 어찌 내가 잊겠는가? 그리고 오죽 기이한 일이 생겼으면 어머니가 약을 먹었겠는가? 그 두려움, 그 외로움을 아무도 몰라주었으니 그 사건 후의 외로움은 또 얼마나 태산만 했겠는가? 아~ 엄마! 잠속에서도 어머니의 쉰듯한 목소리가 생각나긴 했지만 세수를 하다가도 어머니의 기운 떨어진 목소리를 생각하다가 오래전 일처럼 다시 잊어버리곤 했다. ‘괜찮을 거야, 괜찮을 거야.’ 나는 곧 어머니의 쉰 목소리를 잊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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