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상과 노스님의 방

〈삽화=이지미〉

평상에 대하여

여름에는 평상만 한 것이 없다. 내가 좋아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이 평상이다. 대개는 밖에다 내어놓아 그 위에 앉거나 드러누워 쉴 수 있다. 낮에는 뒷마당이나 감나무 아래에 놓으면 그늘이 있고 바람이 흘러서 좋고, 밤에는 넓은 밤하늘을 올려볼 수 있는 곳이면 어디에 둬도 좋다. 그늘이 진 곳에 놓아두면 낮잠을 잠깐씩 즐기기에 안성맞춤이고, 밤에 마당에 놓아두면 별이나 달을 우러러 한가한 마음을 얻기에 적당하다. 그리고 가끔은 이 평상에서 저녁밥을 먹는 때 행복했다. 모깃불을 피워놓고 국수를 먹을 때는 그 저녁 끼니가 지금껏 오래 기억에 남아있을 정도로 일미였다.

지금 살림에는 평상을 놓아두고 있지는 못하지만 요즘 나는 툇마루에 앉아 자주 저녁밥을 먹곤 한다. 툇마루를 마련한 것은 예전의 그 평상이 주던 편안함 때문이었다. 평상이든 툇마루든 벽이 없고 바라보는 방향이 뚫려 있으니 일단 눈이 시원하다. 요즘은 툇마루에 앉아 텃밭에서 내 손으로 기르는 상추와 곰취, 방풍나물과 오이 등을 따와서 물에 씻고 헹궈 된장과 함께 먹는다. 아주 간단한 공양이지만 뒷맛이 깔끔하다. 땅에서 갓 얻어온 것이니 그만큼 신선하고, 반찬의 수를 줄여 적게 먹으니 몸에 이롭다.

그리고 밤이 되면 툇마루에 앉아 밤하늘을 본다. 밤하늘은 크고 둥글고 아득하다. 밤하늘은 지금 내가 사는 곳이 어느 골짜기인가를 스스로 묻게 한다. 아득한 바다와 먼 수평선을 볼 때와 마찬가지로 밤하늘을 볼 때는 내가 얼마나 작고 작은가를 되묻게 되고, 아상(我相)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평상과 툇마루는 집 한쪽에 자리하지만 동산이나 언덕처럼 조금은 멀리 보게 한다. 번거롭게 뒤섞여 어수선한 상태를 조금은 가라앉힌다. 올해 여름에는 작은 평상을 하나 직접 만들어 나무 아래 놓아둘 생각이다.

잠재우는 단계와 소멸하는 단계

불교에서는 탐욕과 진에(瞋恚)와 우치(愚癡)를 세 가지의 독(毒)이라고 한다. 욕심과 노여움과 어리석음은 장애가 되는 세 가지 해악이라는 뜻이다. 〈법구경〉에는 이런 말씀이 있다. “욕망의 꽃을 따 모으느라 제정신이 없는 사람을 죽음은 먼저 끌고 가리라. 욕망을 미처 채우기도 전에.” 욕망의 독을 경계하여 이르신 것일 테다. 마찬가지로 노여움과 어리석음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대개는 잘 알고 있는데, 이 세 가지가 실제로는 잘 다스려지지 않는다.

어느 날 한 스님께서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낮은 단계는 탐진치를 잠재우는 것이고, 높은 단계는 탐진치를 소멸하는 것입니다.” 다른 스님은 또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하지 않으려고 한 행동을 할 때는 ‘내가 이것을 또 하는구나.’ 이렇게 생각을 해야 합니다. 이렇게 생각을 하면서 그 행동을 하다 보면 빈도가 줄어들게 됩니다. 그러나 내가 ‘이것을 또 하는구나.’ 이렇게 생각하면서 그것을 당장에 그만하려고 하면 되지가 않습니다. 하려다 꾹 참으면, 뚝 그치면 불만이 더 크게 자랍니다. ‘또 하려고 하고 있구나.’ 이렇게만 자꾸 보다 보면 행동의 의지가 수그러들게 됩니다. 가라앉게 됩니다. 잠들게 됩니다.”

마음에 탐진치가 쌓인 것이 오래되었으니 하루아침에 없애긴 어려운 일일 테다. 낮은 단계에서부터 조금씩 조금씩 향상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교감

샤를 피에르 보들레르(1821~1867)의 작품 중에 ‘교감’이라는 시가 있다. 시의 일부는 이러하다. “밤처럼 그리고 빛처럼 끝없이 넓고/ 어둡고 깊은 통합 속에/ 긴 메아리 멀리서 어우러지듯/ 향기와 색채와 소리 서로 화답한다// 어린애 살결처럼 싱싱하고/ 오보에처럼 부드럽고, 초원처럼 푸른 향기들이 있고” 이 시를 읽으면 여름의 숲에 들어와 있는 것만 같다. 꽃들과 잎사귀들이 보여주는 향기와 색채가 흐릿하고 또렷하게, 그리고 숲에서 다채로운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숲이 품은 이 향기와 색채와 소리의 어우러짐을 시인은 ‘화답’과 ‘통합’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들의 섞임을 “긴 메아리 멀리서 어우러지듯”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경계가 없다는 뜻일 테다.

특히 시인은 숲에서의, 자연에서의 향기를 각별하게 주목하는데 그 향기의 속성을 “어린애 살결처럼 싱싱하고/ 오보에처럼 부드럽고, 초원처럼 푸른 향기”라고 적었다. 아주 근사한 시구가 아닐 수 없다. 아무튼 시에서 노래하고 있는 것처럼 자연의 이 화답과 통합의 성질 때문에 우리는 숲에 들면 언제라도 편안하고 안정되고 상쾌한 기운을 느끼게 될 터이다.

〈삽화=이지미〉
〈삽화=이지미〉

여름 소낙비

비가 내리지 않고 메마른 날씨가 이어지더니 잠깐 소낙비가 다녀갔다. 먼지가 가라앉듯이 땅의 거죽이 혹은 땅의 바닥이 내려앉아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빗방울은 토마토와 상추, 가지와 부추 위에 내렸다. 소나기는 귤밭에 달맞이꽃 위에 풀잎에 마당에 지붕에 장화와 비옷 위에 쌓인 돌담 위에 내렸다.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세계가 차가운 물을 한 동이 받아 세수를 한 기분이었다.

“캄캄한 돌 속에서 푸른 이끼 돋아나시네/ 환해진 하늘 쪽에서 흰나비 날아오시네// 앞집 할머니는 무화과나무 아래 쪼그려 풀을 뽑으시고/ 젖은 풀들 속에서 풀벌레 우는 소리 젖지 않은 채 떨리며 나오시네” 이 시는 나의 졸시 ‘여름 소낙비 그치시고’의 전문이다. 이 시를 작년 여름에 지었으니 곧 올 여름에도 이 풍경을 자주 보게 될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벌써 앞집 할머니는 무화과나무 아래 풀을 뽑다 집으로 들어가셨다. 밭에는 대파 같은 것이 심겨 있는데, 가만히 보니 할머니는 비가 오는 날에 모종을 하고, 비가 그친 직후에 풀을 뽑으셨다. 비가 오는 날에 모종을 하는 것은 땅이 젖어 그 작물이 뿌리를 내리기 쉽게 돕는 까닭이요, 비가 그친 직후에 풀을 뽑는 것은 땅이 젖어 그만큼 풀의 뿌리가 쉽게 뽑히는 까닭일 것이다. 해서 나도 오늘은 소낙비가 그친 직후에 텃밭에 나가 풀을 뽑고 호미질을 하고 북을 돋우었다.

농사를 오래 지은 어른들이 하는 일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고 또 지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니, 나는 다른 분들이 농사를 짓는 밭을 지나가며 무엇을 새로이 씨 뿌리고 옮겨 심었는지를 유심히 본다. 또 그대로 따라서 하고, 그 한 일을 농사일지처럼 기록해 둔다. 그러면 먼 후일에는 나도 하루의 날씨와 한 달의 일을 미리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낮의 시간 동안 볕은 더욱 뜨거워질 테니 이제 일을 하기에 좋은 시간은 아침 식사를 하기 전이나 해가 떨어질 때가 될 것이다. 그만큼 땅에 기대어 하는 일도 일찍 시작할 수밖에 없으니 아침과 해질녘에 부지런히 손과 발을 움직여야 할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내 어릴 적 아침밥을 먹기 전에 벌써 풀짐을 한 지게 가득 지고 집으로 들어오시던 여름날의 아버지가 문득 생각났다. 농사꾼 아버지의 하루는 여름날에 가장 일찍 시작되었던 것이다. 여름의 낮시간은 꽤 길지만 일하기에 좋은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노스님의 방

이산하 시인이 쓴 작품 가운데 ‘인생목록’이라는 시가 있다. 시인은 아마도 어느 노스님의 방에 들어가 본 적이 있었던 모양이다. 시인은 이렇게 썼다. “구름 같은 이불/ 빗방울 같은 베개/ 바람 같은 승복/ 눈물 같은 숟가락/ 바다 같은 찻잔/ 낙엽 같은 경전” 이 시구들의 의미가 무엇일까를 여러 날 고민해보았다. ‘이불을 구름처럼 덮는다.’는 뜻은 무엇일까. 아마도 이불은 몸과 잠과 꿈을 덮는 것이니 그것 또한 모이고 흩어진다는 것을 알라는 뜻이 아닐까. ‘빗방울 같은 베개’는 무슨 뜻일까. 몸과 잠과 꿈을 누일 때 그 일을 중하게 받아들이지 말고 소소한 것으로 여기되 빗방울처럼 곧 말라 사라질 것을 기억하라는 뜻이 아닐까. ‘바람 같은 승복’이란 무슨 뜻일까. 바랑 하나를 등에 지고 떠나는 만행(萬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눈물 같은 숟가락’은 무슨 뜻일까. 절에서 스님들과 재가 불자들이 공양을 할 때 읊는 공양게가 있다.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고. 내 덕행으로 받기가 부끄럽네. 마음의 온갖 욕심 버리고 몸을 지탱하는 약으로 알아 도업을 이루고자 이 공양을 받습니다.” 이 공양게를 읊으며 음식을 받을 적엔 한 끼의 식사가 거룩한 공양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니 눈물 같은 숟가락이라고 쓴 것이 아닐까. ‘바다 같은 찻잔’은 무슨 뜻일까. 잠잠한 찻잔에 바다의 해풍과 파도와 그 큰 넓이와 깊이를 담는다는 것이니 격함을 가라앉히되 그 안목은 대양처럼 하라는 뜻이 아닐까. ‘낙엽 같은 경전’은 무슨 뜻일까. 수행을 하되 언어에 얽매이지 말라는 뜻이 아닐까. 이렇게 어림짐작을 해보니 나도 그 노스님을 뵙고 싶어졌고, 노스님의 방을 보고 싶어졌다.

첫머리와 끝머리

어떤 일이라든지 어떤 사물의 시작되는 부분을 ‘첫머리’라고 한다. 반면에 일이나 사물의 끝이 되는 부분을 ‘끝머리’라고 한다. 일로 보자면, 어떤 일이든 첫머리는 누구든 잘 가꾼다. 새로운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기대도 한다. 그러나 어떤 일의 끝머리는 흐지부지되는 경우가 많다. 성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할 경우 더더욱 그러하다. 이러한 것을 잘 아셨기 때문이었을까.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늘 내게 가르치려 하신 것은 일의 끝머리에 가져야 할 마음가짐 같은 것이었다. 일례로 아버지와 어머니께서는 집으로 들어올 때 현관문 앞에 벗어둔 신발들을 가지런하게 해야할 뿐만 아니라 집을 나설 때도 놓인 신발들을 가지런하게 바로잡아 놓으라고 당부하셨다.

또 밥을 먹을 때도 늘 밥그릇 둘레 쪽에 숟가락을 넣어 밥그릇 안쪽을 향해 밥을 뜨라고 주문하셨고, 밥그릇을 비울 때는 밥알 하나하나도 남기지 않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군불을 때거나 쇠죽을 끊이기 위해 아궁이에 불을 넣을 때는 아궁이 앞을 깨끗하게 하는 법을 내 앞에서 손수 보여주기도 하셨다. 묶거나 매듭을 짓는 법, 보자기 등으로 물건을 싸는 법과 같은 일도 어릴 때 부모님으로부터 배워 손으로 익힌 것이었으니 첫머리보다는 끝머리를 더 잘 챙겨야 함을 내게 알려주고 싶으셨던 게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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