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당 가리지 않게 아담
한여름 100일간 꽃피워
안거 지친 수행자에 귀감
백일홍(百日紅), 우리에게는 친근한 이름이다. 그런데 ‘백일홍’이라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꽃 백일홍’을 떠올린다. ‘나무 백일홍’을 떠올리는 이는 드물다. 한여름 강렬한 태양 아래 100일 동안 피어있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꽃 백일홍이 멕시코가 원산지라면, 나무 백일홍은 중국이 원산지다.
백일홍은 이름으로 볼 때 한 송이가 여름 내내 피어있을 것 같지만, 사실 한 번 핀 꽃이 백일동안 피어있는 것은 아니다. 꽃 백일홍은 개화기가 길어 여러 꽃이 순차적으로 피고, 나무 백일홍은 가지 끝 뭉치꽃이 아래부터 순차적으로 피다 보니 백일동안 계속 피어있는 듯 보일 뿐이다.
나무 백일홍은 ‘배롱나무’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연분홍 꽃이 나무 전체를 붉게 물들일 정도로 무더기로 피어 한여름에 강렬한 인상을 풍긴다. 그렇다고 배롱나무꽃이 붉기만 한 건 아니다. 흰색도 있고, 보라색도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붉은 꽃 배롱나무를 선호하지만 중국에서는 보라 꽃 배롱나무를 더 선호한다. 이는 천자사상(天子思想)에 기인하는데 자미원(紫微苑)에 피는 꽃이란 뜻의 ‘자미화(紫薇花)’가 보라색이기 때문이다.
배롱나무는 나무껍질이 매우 얇고 잘 떨어지는 성질이 있어서 추위에 약하다. 그래서 충청 이남에서 잘 자라 남도의 여름나무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한반도에는 자생지가 없다. 현전(現傳)하는 모든 배롱나무는 언젠가 누군가에 의해 심어진 것이다.
배롱나무는 크게 자라지 않는다. 어느 정도 자라면 우산 살대처럼 많은 가지가 사방으로 동그랗게 뻗는다. 햇빛을 좋아하는 특성이 만들어낸 수형이다. 중국에서는 이 모습을 좋아해 예전부터 사원이나 관청, 공원에 조경수로 많이 심었다.
옛 선비들도 좋아해서 별서(別墅)나 정자·연못이 있는 곳이면 으레 한두 그루쯤 심어 꽃을 즐겼다. 이렇게 선비들이 배롱나무를 좋아한 이유는 그들이 지은 시 구절에 잘 나타나는데, 꽃이 오래가듯 왕이나 부모의 장수를 염원하고, 지금의 태평성대가 오랜 기간 지속하기를 바라는 의미가 깃들어 있다.
언제부터 사찰에 심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남도의 큰 사찰에 가면 배롱나무 고목을 쉽게 찾아볼 수 있어 오래전부터 사랑받아 왔음을 알 수 있다. 주로 법당 앞 중정에 많이 심었는데 꽃이 만개했을 때 소복한 꽃잎이 부처님 머리카락 나발을 닮았고, 전체적인 수형이 불두(佛頭)를 닮았기 때문이다. 또 꽃이 만개하기 시작하면 뭉치꽃의 모양이 화염문양(火焰文樣)을 이루는데 색깔마저도 연분홍으로 완전한 화염형상을 완성한다. 게다가 주변의 진한 녹음은 화염문양을 더욱 선명하게 만들어 악귀를 물리치고 세상을 밝히는 상징이 되었다.
이밖에도 배롱나무꽃이 필 무렵은 하안거에 든 수행자들이 더위에 지칠 즈음이어서 배롱나무꽃의 긴 개화는 수행자들이 마음을 다잡는 본보기가 되기도 했다. 이런 이유 외에도 배롱나무가 법당 앞에 오래 자리할 수 있었던 것은 크게 자라지 않아 법당을 가리지 않고, 꽃이 지고 잎이 떨어진 후의 하얀 나목(裸木)마저도 아름답기 때문이다. 거대하게 자랐다면 법당 앞이 아니라 사원의 외곽으로 밀려나고 말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