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양 낭비 없도록
외출·끼니 거를 때
자신의 명패 뒤집어

사찰의 식량 관리는 철저하기로 이름 높다. 옛 스님들은 시주물의 의미가 얼마나 소중하고 무거운지 매 순간 새겼다. 행자시절부터 시은(施恩)이 일미칠근(一米七斤)’이라는 은사의 말씀과 함께 수행자의 삶을 살아왔다. 시주의 은혜는 쌀 한 톨이 일곱 근과 맞먹는 무게를 지녔다는 가르침이다.

특히 20세기 중후반까지는 궁핍하여 대중에게 의식(衣食)을 제공하지 못하는 사찰이 많았다. 이에 선방이나 강원에 방부(房付)를 들이려면 각자 자신이 공양할 쌀을 내었는데, 이를 자비량(自費糧)이라 불렀다. 주지를 비롯해 삼직 소임의 스님들에게만 봉급에 해당하는 쌀이 서 말 정도 지급되었다.

아울러 대방이나 공양간 근처에는 작은 나무 팻말에 각각의 대중 법명을 적어 죽 걸어두는 사찰이 많았다. 이 명패는 공양과 관련된 것이기에 공양좌목(供養座目)’이라고도 불렀다. 외출하거나 끼니를 먹지 않을 때는 자신의 명패를 뒤집어놓아, 쌀을 내주는 미감(米監)이 그걸 보고 서홉으로 쌀을 내어 공양주에게 주었다. 실제 공양할 인원만큼만 밥을 하여 한 치도 낭비가 없도록 하기 위함이다.

서홉은 당시 사찰에서 한 끼 분량을 일컫는 말이다. 손잡이가 달린 작고 네모난 목기에 쌀을 깎아 담으면 1인분에 해당하여, 그 용구를 서홉’, 그렇게 먹는 밥을 서홉밥이라 불렀다. 실제 세 홉의 계량 단위가 아니라 관용적인 명칭이라 하겠다. 이에 석 달 치 양식을 한 번에 내지 않고, 공양주가 서홉을 들고 다니며 쌀을 거두러 다니는 곳도 있었다. 그러면 다음 끼니에 공양할 승려들만 쌀을 내주고, 단식할 승려들은 내지 않았다.

1960년대 초 홍제동 백련사에서도 자비량을 내었는데, 명패를 뒤집는 스님 중에는 자신이 낼 쌀이 모자라 끼니를 굶기 위한 경우가 많았다. 이들은 공양 때면 산에 올라가서 물을 먹으며 시간을 보내다 내려왔다. 미감은 각 개인이 낸 쌀과 공양한 날짜 수를 계산하는 소임에 철저해야 했고, 낸 쌀이 부족한 스님은 하루 한두 끼로 조정하며 명패를 뒤집을 수밖에 없던 것이다. ‘한 달에 한 말등으로 자비량이 정해져 있어도 거르는 끼니가 있으면 계산하여 남는 쌀을 누적시켜주었으니, 한 끼의 소홀함도 없이 철저한 시절이었다.

이러한 실정이다 보니 갑자기 객승(客僧)이 와서 인원이 늘어날 때가 문제였다. 그때는 십시일반 한 술씩 밥을 덜었고, 죽을 끓일 때는 물을 늘이거나 퍼지게 두어 양이 많아지도록 만들었다. “다리 저 너머에서 객승이 걸어오는 걸 보면, 공양주는 죽에다 물을 한 바가지 더 부었다.”는 것이다. 밥을 남게 하지 않는 원칙을 우선으로 지키고, 그 속에서 발휘한 융통성이다.

노스님들은 먹고 살기에 너무 힘들었지만, 어느 때보다 구도의 열기가 뜨겁던 시절로 당시를 회상하였다. 자급자족하는 노동과 출가자의 본분인 수행을 병행하면서 중생을 이끌었으니, 지극한 원력이 아니고서는 감당하기 힘든 삶이었을 터이다. 고행을 자초할 필요는 없지만, 물질이 풍요해지면서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에 소홀한 우리 모두에게 들려주는 경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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