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라 때 불심이 깊고 학식이 뛰어났던 배휴(裵休, 797~870)가 당대의 선승이었던 황벽선사에게 물었습니다.

산중(山中)의 사오백 명 대중 가운데서 몇 명이나 스님의 법을 얻었습니까?”

법을 얻은 사람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 도는 마음을 깨치는 데 있는 것이지 어찌 언설에 있겠느냐? 언설(言設)이란 다만 어린아이를 교화할 뿐이니라.”

<완릉록(宛陵錄)>에 나오는 대화입니다.

언설은 소통의 중요한 수단입니다. 하지만 사람을 지나치게 믿게 되면 그 사람의 언설에 넘어가고, 그 사람의 언설에 넘어가면 정작 중요한 것을 잃게 되는 일이 비일비재한 게 세상의 일입니다. 부처님은 그래서 진리에 의지해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아함경>에 진리를 믿지 않고 사람을 믿으면 다섯 가지 허물이 생긴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만약 자기가 믿는 사람이 대중으로부터 비난받거나 버림을 받으면 그는 실망해서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그를 존중하고 공경하였는데 대중은 그를 비난한다. 이제 나는 누구를 믿고 절에 갈 것인가.’ 이것이 첫 번째 허물이다. 만약 자기가 믿는 사람이 계율을 범하거나 어기면 그는 실망해서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그를 존중하고 공경하였는데 그는 계율을 범하였다. 이제 나는 누구를 믿고 절에 갈 것인가.’ 이것이 두 번째 허물이다. 만약 자기가 믿는 사람이 그 절에 있지 않고 다른 곳으로 떠나면 그는 실망해서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그를 존중하고 공경하였는데 그는 다른 곳으로 떠났다. 이제 나는 누구를 믿고 절에 갈 것인가.’ 이것이 세 번째 허물이다. 만약 자기가 믿는 사람이 도를 닦지 않고 속세로 돌아가면 그는 실망해서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그를 존중하고 공경하였는데 그는 세속으로 돌아갔다. 이제 나는 누구를 믿고 절에 갈 것인가.’ 이것이 네 번째 허물이다. 만약 자기가 믿는 사람이 목숨이 다해 죽게 되면 그는 실망해서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그를 존중하고 공경하였는데 그는 죽었다. 이제 나는 누구를 믿고 절에 갈 것인가.’ 이것이 다섯 번째 허물이다.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마땅히 부처님과 교법과 승단과 계율에 관한 무너지지 않는 깨끗한 믿음을 갖고 지나치게 사람을 의지하거나 믿지 말라.”

사람을 지나치게 의지하게 되면 그의 말로 상처를 입는 경우도 생깁니다. 사람을 믿거나 의지하지 말라는 부처님의 말씀은 이를 경계하고자 하는데 있습니다.

선어록에 이르길 일체 언설은 상을 여의지 못한 것이요, 지혜 있는 자는 문자에 집착하지 않으므로 두려움이 없으니, 문자의 상을 여의어 문자 없는 그것이 곧 해탈상이요, 해탈상이 곧 법이다.”고 했습니다.

이는 언설이란 진리를 표현하는 수단일 뿐, 말이 진리 그 자체가 아님을 설파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언설은 그저 방편이며 대기설법(對機說法)의 유용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전심법요>에 등장하는 황벽선사와 배휴와의 대담 또한 언설에 대한 진리관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배휴가 물었습니다.

스님께서는 제가 한 말씀이라도 드리기만 하면 어째서 바로 말에 떨어진다 하십니까?”

그대 스스로 말을 알아듣지 못한 사람이거늘 무슨 잘못에 떨어짐이 있겠느냐?”

이렇듯 말에 떨어진다[話墮]’는 용어가 선어록에 자주 등장하는데, 이는 제불조사가 말씀하는 그 뜻을 간파하지 못하고 말 그 자체에 끌려 다니는 수행자들을 경책하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황벽선사는 저 개와도 같아서 움직이는 물건을 보기만 하면 문득 짖어대니 바람에 흔들리는 초목과 뭐 별다를 게 있겠느냐?”고 힐책합니다. 한 밤중에 한 마리 개가 달빛 그림자를 보고 짖으면 옆집의 다른 개들도 덩달아 짖어대는 것처럼 선지식의 말씀에 집착해 알음알이에 매달리면 결국 그 말에 속아 진리와는 동떨어지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언설이란 어린아이를 교화할 뿐이다.”라는 말은 이 같은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마치 달을 가리키면 달을 봐야 하는데,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언설이 방편이라면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도 방편입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은 그 방편에 집착해 정작 봐야 할 달, 즉 진리를 보지 못합니다.

언설을 방편으로 이용하되 그 말에 갇히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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