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가지를 명심하거래이”

〈삽화=필몽〉
〈삽화=필몽〉

“세 가지를 명심하거래이. 첫 번째는 공부 열심히 하는기다. 공부 많이 한 너거 숙모 봐라. 공부 많이 항께 아들도 많이 낳지 않냐? 그래야 사람들이 떠받드는 기라. 무시 받는 기 젤 나쁜 기다. 두 번째는 돈을 많이 벌어라. 살아봉께 여자도 돈이 필요하더라. 남자 돈 받는 거 그거 마음 상할 때 많다.” 그리고 어머니는 한참 뜸을 들이더니 세 번째를 말씀하셨다. “여자로서도 행복해라.”

서울 가는 딸

어머니는 서울로 가는 딸에게 재차 이 세 가지를 확인시켰다. 그것도 전화로 말이다. 이 당부는 처음 한 말이 아니다. 아마도, 아니 적어도 스무 번은 했을 것이다. 1959년 부산으로 전학을 가던 그때도 봄 아지랑이가 하늘을 떠돌던 새벽 첫 버스를 바로 옆에 두고 어머니는 이 세 가지를 언급했었다. 첫째, 공부 많이 해라. 둘째, 돈 많이 벌어라. 셋째, 여자로서 행복해라.

그래, 어쩌면 이것이 여자 인생의 핵심인지도 모른다. 나 역시 내 딸에게 인생교훈을 말한다면 이 세 가지를 빼놓을 수는 없을 것 같다. 다시 말하지만 ‘공부’는 어머니가 애절하게 품고 싶었던 소망·꿈·희망이었다. 그 공부를 통해 딸만이라도 사회에서 인정받는, 사회적 지식인이 되길 바랐던 것이다. 학력 간판은 내 어머니는 가지지 못한, 그래서 부러워했던 티켓이었다. 벌써 60년이 지난 이야기다.

그 후 여성교육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변화가 일어났다. 여성의 인생 목표나 내용도 이루 말할 수 없는 변화를 겪었다. 하지만 1959년 거창 차부, 새벽 첫 버스 앞에서 어머니가 말한 이 세 가지는 로봇이 음식을 배달하고, 로봇이 집안에서 노인의 외로움을 달래주는 첨단 과학시대에 살고 있는 내가 나의 딸에게 행복의 조건으로 말할 수 있는 변치 않은 지침이다.

내 어머니는 무식했고, 무식 그 자체가 힘이었던 여자였다. 어머니가 살던 시절, 딸을 낳으면 여자의 책임이었던 그런 시절, 홀로 모든 인생을 혼자 걸머지고 살아야겠다는 어머니의 그 무식한 의지 속에는 ‘나는 틀렸어. 대신 내 딸 누군가가 내 꿈을 이루어 주었으면 해.’라는 하나의 목표가 어머니의 온몸과 마음을 달궜을 것이다.

남편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식 일곱을 키웠지만 자랑거리가 없었던 어머니의 집착과 희망, 1961년 2월 나는 서울로 가는 기차에 그 아득한 희망을 실었다. 혼자였지만 열 개의 내 몸보다 더 큰 희망을 싣고 생각만 해도 뜨겁던 그 서울을 향해 가고 있었다. 그 희망은 90%가 어머니의 것이고, 10% 정도가 나의 목표였다고 생각한다. 사실 서울은 나도 가고 싶은 곳이지만 어머니께 떠밀려갔다고 해도 틀리지 않다. 어머니의 ‘90’을 내 희망으로 수용해 나의 것으로 만들어 ‘100’을 완성하는 일, 그것은 어머니의 꿈이고 나의 희망이기도 했다.

서울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떠올린 것도 이 생각이었다. 서울역에서 가방을 밀며 밖으로 나온 후 먼저 하늘을 바라보았다. 부산 바람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사람 사는 일도 저 하늘과 같을지 모른다. 겁먹지 말자. 겁먹지 말자.’고 되뇌었다. 바람이 불었다. 초봄의 바람은 싸늘했지만 나는 뜨거웠다. 그 뜨거움으로 그렇게 꿈꾸던 서울을 살겠노라 다짐했다.

김남조 선생님

나는 택시를 타고 청파동 하숙집으로 갔다. 그리고 주인집 전화로 어머니에게 연락했다.

“서울 갔나?”

“응”

“하숙집은 찾았나?”

“응”

“애미가 말한 그 세 가지 잊지 말거래이.”

어머니는 전화를 끊었다. 너무너무 낯설고, 불안은 다가오는데 어머니 전화는 더 이상 짧을 수 없을 정도로 짧았다. 한마디의 위로도 없는 그 서늘함 속에 내 몸속에 번진 것은 오직 어머니의 투박한 의지, 그 무섭고 끔찍하게 느껴지는 어머니의 그 집착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다행히 말을 걸어오는 사람 한 명이 나의 불안을 녹여주었다. 같은 방을 사용하는 친구였다. 나는 어머니보다 그 친구가 더 좋았다. 목포에서 온 친구는 나와 닮은 점이 많았다. 두려움, 외로움, 불안, 아득한 그리움이 비슷했다. 우린 곧 친해졌다. 국문과는 아니었지만 서로 통하는 것이 있었고, 방 청소도 잘하는 것 같았다. 가족 아닌 사람과 같은 방을 사용하는 일은 처음이었지만 즐거움도 있었다.

다음날 처음 가보는 대학교, 숙명여대로 향했다. 대단하다는 느낌은 없었다. 여자대학답게 소박하게 느껴졌다. 교정에 첫발을 내디디며 나는 내게 말했다. “그래 여기서 나의 꿈을 이루자.”

이곳은 나에게 꿈을 가르쳤던 장봉애 선생님이 다니던 곳이다. 국문과에는 훌륭한 선배들이 많다고 들었다. 그리고 나는 갑자기 우리에게 시를 가르치는 선생님이 누구인지 궁금했다. 물어물어 교무과를 찾아갔다. 무턱대고 국문과에서 시를 가르치는 분이 누구냐고 물었다.

“저기로…”

그곳으로 가서 다시 물었다. 남자분이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이분이야.”

한문으로 된 이름을 가리키는데 세 번째 한자를 도저히 읽을 수가 없었다. ‘金南祚’, ‘김…남…’까지는 읽을 수 있었는데, 마지막 한자는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종이를 들고 정문 앞 서점으로 갔다. 서점 주인에게 종이를 보이면서 이분 책이 있느냐고 물었다. 서점 주인은 바로 “아, 김남조 선생님”하시며 시집 한 권을 꺼내 내밀었다. “아 그것이 ‘조’자였구나.” 나는 안도했다.

값을 치르고 나와서 학교 운동장에 선 채 시집을 읽기 시작했다. 그 이름은 분명히 남자일 것이다. 그런데 시가 다분히 여자의 감성을 닮았다. ‘아, 상당히 여성적인 남자구나.’하고 생각했다. 시집의 제목은 〈나무와 바람〉이었다. 그 안에는 ‘아가에게’라는 시가 있었다.

아가의 머리맡에 햇빛이 앉아 놉니다
햇빛은 아가의 손님입니다
(중략)
아가는 엄마의 등불입니다
아가 함께 있으면
훤히 밝아 오는 마음이 있습니다

이렇게 끝나는 시를 읽고 나는 놀랐다. ‘김남조가 그렇다면 여자인가? 엄마라고 하지 않는가? 아니 인쇄가 잘못됐을 수도 있을 거야.’ 홀로 복잡한 생각을 하며 첫 수업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난 그분의 수업시간을 애타게 기다렸다.

하숙집으로 돌아가 방 친구 박춘자에게 물었다.

“김남조가 여자 같아? 남자 같아?”

“물론 남자이름이지.”

그래 남자일 거야. 나는 다만 그분을 만날 수 있는 강의시간을 조바심내며 기다렸다.

〈삽화=필몽〉

첫 강의 첫 만남

그분의 첫 강의를 앞두고 다른 친구들도 모두 긴장하고 있었다. 나는 마치 애인을 기다리는 여자처럼 온몸이 상기된 채 문 쪽으로 시선을 주고 있었다. 4년 동안 우리에게 시를 가르칠 분이 아닌가. 그가 여자이건 남자이건 무슨 문제겠는가.

바로 그때 문으로 누군가 들어왔다. 한복을 입고 고개를 숙이고 보폭은 넓었지만 안정감 있는 걸음으로 교단에 올라 내 앞에 탁 서는 것이었다. 여자였다.

나는 강의실 맨 앞줄에 앉아 있었으므로 그분을 무척 가깝게 볼 수 있었다. 첫인상은 신비로웠다. 목소리도 아름다웠다. 미인이기도 했다. 소매 끝을 한 번 걷어 올린 모습은 소박했지만, 창 너머로 시선을 자주 주면서 학생들 쪽으로는 가끔 얼굴을 돌렸다. ‘아, 여자였구나. 이름은 완전 남자였는데, 아름다운 여자였구나.’ 그리고 또 생각했다. ‘저분이 시인이구나. 시인은 저렇게 아름다워야 하는구나.’

강의내용은 만해 한용운의 시 ‘님의 침묵’과 ‘예술가’를 주제로 ‘시의 길’, ‘시의 힘’에 대해 말씀하신 것 같다. 고요한 음성에 파르르 떨리는 시의 힘이 실려 있었고, 압도적 매혹이 흐르고 있었다. 기억하건대 강의 막바지에 학생들을 향해 질문하나를 던지셨다.

나는 번쩍 손을 들었다. 선생님은 나를 지명했고, 기억이 잘 나진 않지만 두 손을 꼭 쥐고 질문에 대답했던 것 같다. 말소리는 분명 떨렸을 것이다. 그런데 선생님은 상상력이 있는 대답이라고 칭찬하셨다. 수업이 끝난 후 선생님의 방으로 오라고도 하셨다. 친구들이 와와~ 웅성거렸고, 나는 어리둥절했다.

마음에 평정을 찾기가 어려웠다. 나는 선생님 방으로 갔다. 옷걸이와 책장과 책상과 몇 권의 책이 책상에 놓여 있는 평범한 방이었다. 선생님은 그날 나를 선생님 댁으로 데리고 가셨다. 학교에서 멀지 않은 효창동이었는데 소박한 집이었다. 뜰에 큰나무가 있었던 게 기억난다. 나의 마음은 계속 파도처럼 일렁였고, 몸은 떨렸다. 나는 상상할 수 없는 높은 경지에 닿아있는 듯 흥분 속에 있었다.

더욱 정신을 차릴 수 없었던 것은 그 큰나무 밑에서 선생님이 첫사랑을 이야기하는 대목이었다. 나는 스스로를 주체하기 어려웠다. 그 어떤 말도 대답도 도무지 입을 뗄 수 없었다. 사실 대답은 필요 없었다. 선생님은 누군가에게 첫사랑 이야기를 꼭 그때 그날 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나는 목숨처럼 사랑하는 남자와 연애라도 하듯 그분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자주 하늘을 바라보며 일찍 나온 별을 바라보며 기억의 꽃밭에 추억의 산장을 거니는 표정을 지으면서 가끔은 웃고 가끔은 침울해하셨다. 그 모든 표정과 움직임은 사람의 모습이 아니었다. 나에겐 신비였고, 그래서 선생님은 신(神)이었다. 그녀는 살짝 나에게 사람으로 왔지만, 신비로운 그 어떤 물체였는지 모른다.

신비로운 만큼 화장실도 가지 않고, 먹지도 않을 것이고, 누구와 싸우지도 않을 것 같았다. 도무지 이런 순간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이 순간을 확장해 나갈 것인지 머리가 부어오르는 것 같았다. 그것은 기쁨이었고 행운이었고, 다시 기쁨이었고 행운이었다.

그 집을 나와서도 나는 한참 그 집을 바라보았다. 그 집에서 학교까지의 거리, 학교에서 내 하숙집까지의 거리가 모두 신비롭게 다가왔고 가슴을 부풀게 했다. 하숙집에 도착해서 주인아주머니에게 부탁해 어머니께 전화를 했다.

유명하고 위대한 선생님이 나의 스승이 되었다고. 내가 그 집까지 가서 그분의 첫사랑이야기도 들었다고. 그리고 나에게 앞으로 시를 잘 쓰겠다는 칭찬을 했다는 이야기까지. 나는 어머니께 그렇게 흥분해서 말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언제나 퉁퉁거렸고 빗나가고 말의 중간을 자르고 전화를 끊었었다. 그러니 어머니가 왜 눈치를 못챘겠는가? 정말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났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흥분이 계기가 되어 내가 뭐든 열심히 하게 되리라는 것을 어머니는 알았고, 무릎을 탁 쳤을 것이다.

“그렇게 마음에 들어?”

“사람이 아니야. 우리 같은 사람이 아닌 것 같아.”

내가 흥분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린 어머니는 기대도 되고 걱정도 되는 것 같았다

“그 선생님이 가르치는 것을 더 많이 공부하거래이.”

볶은 메뚜기

그렇게 봄이 가고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다. 내 대학생활은 순조로웠다. 용돈도 넉넉했고 공부도 재미있고 무엇보다 문학에 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과 함께 한다는 것만으로도 충만과 만족이 너울너울 넘실거렸다.

국문과 조교로 계시는 허영자 시인과도 가까워졌다. 김남조 선생님이 사랑하는 제자였고, 가끔은 셋이서 밥을 먹는 경우도 있었다. 허영자 시인을 언니로 부르기 시작했다. 내게는 언니가 넷이나 있었지만 허영자 시인을 ‘언니’라고 부르는 것은 감정이 달랐다.

가을로 접어들어 ‘문학의 밤’에 참가하면서 나는 인생 최대의 목표를 향해 가고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 이름만 듣던 박목월·서정주·곽종원·안수길 선생님을 뵙게 되고, 그분들의 시낭송을 들으면서 나는 한 열흘 굶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냥 그분들을 보았을 뿐인데 나는 내가 문학의 고지에 서 있다는 착각을 하고 있었다. 가시에 찔려도 아프지 않았다. 웃으며 피를 닦았다.

큰 강당에 관객이 꽉 들어찬 무대에서 내가 쓴 시를 낭송할 때는 마치 구름 위에 서 있는 기분이 들었다. 객석에서 들려오는 박수가 며칠 내 귀에서 떠나지 않았다. 시, 시, 시. 시는 내 영원한 동반자가 될 것이다. 내가 가진 생명의 힘을 나는 시에 모두 불태울 것이다. 젊은 열정의 피가 솟아오르는 걸 느꼈다.

나는 어머니께 그런 마음을 그런 현상을 전화로 고백했다.

“그 선생님은 뭘 좋아하나?”

“소문에 폐가 좀 안좋다카데.”

보름쯤 후 하숙집으로 소포가 배달됐다. 전날 어머니는 전화로 소포의 내용물을 자세히 설명하셨다. 우리 정미소와 제재소 일꾼 열 명을 시켜 고향 들판에서 가장 좋은 메뚜기를 잡아오게 했다. 그것을 다듬고 들기름에 볶아 딱 그대로 몇 마리씩 먹으면 되게 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폐에 억수로 좋은 것이다. 일꾼들이 젤 상등품을 가져 왔더라.”

나는 그 소포를 선생님께 가져다드렸다. 꽤 많은 양이었다. 선생님도 메뚜기를 알고 계셨고, 어머니께 고맙다고 잘 전하라고 하셨다. 다행이기는 했다. 나는 그 징그러운 메뚜기를 그렇게 신비하신 분이 드실지 의문이었다. 그 신비한 분 앞에 그것을 펼치는 것조차 손이 떨렸다.

“맛있네.”

하나를 집어 성큼 입안에 넣고 말했다. 나는 온몸이 풀리는 느낌을 받았다. 충격이었다. 아니 너무 자연스럽게 드시는 게 아닌가? 그렇다면 저분도 보통 사람이란 말인가?

그 메뚜기를 다 드셨는지 안 드셨는지는 모른다. 어찌됐든 그 메뚜기는 선생님의 신비를 벗기는 사건이기도 했지만, 어머니가 그 수고와 뜨거운 마음으로 딸의 미래를 또 한 번 지지하는 의지의 표현이었다고 나는 생각했다. 어머니의 딸에 대한 헌신은 다시 말하지만 두려울 정도의 집착이었다. 김남조 선생님이 그 집착의 냄새를 모르고 지나간다면 너무나 큰 다행일 것이다. 눈치채셨더라도 나는 이미 그분에게 내 마음이 모두 가 있었고, 그분이 시인인 이상 나도 그 시를 따라 영원히 갈 것이라는 확신에 차 있었다.

신달자
시인. 한국시인협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다. 첫 시집 〈봉헌문자〉를 비롯해 수필집 〈나이 마흔에 생의 걸음마를 배웠다〉·〈백치애인〉, 소설 〈물 위를 걷는 여자〉 등 수많은 작품을 펴냈다. 만해대상 문예상, 대한민국문학상, 현대불교문학상, 공초 오상순문학상, 대산문학상, 김달진문학상(시부문), 석정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저작권자 © 금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