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놀이 대모
“천진불’ 포교 위한
‘佛劇’ 만들고파”

연극인 집안에서 태어난 아이는 무대를 놀이터로, 의상바구니를 요람 삼아 자랐다. 아이는 국극 배우인 어머니의 아역으로 처음 무대에 올랐다. 무대의 매캐한 먼지 냄새와 배우들의 화려한 의상, 다채로운 연기, 관객의 박수갈채를 마음의 안식처로 여기던 아이는 그렇게 연극인이 됐다. 배우 김성녀(73)의 이야기다.

마당놀이의 대모인 김성녀는 가수, 가야금병창, 연극·뮤지컬·드라마 배우, 교수, 국립창극단 예술감독 등 다채로운 경력을 자랑하는 팔방미인이다. 최근 모노드라마뮤지컬 ‘벽속의 요정’에서 1인 32역의 연기를 펼치고 있다. 그녀는 불자로서 찬불가를 통한 음성포교에도 앞장서고 있다. “남들보다 조금 늦은 ‘늦깎이’라, 하루가 25시간인 것처럼 보냈다.”고 말하는 그녀의 인생 이야기를 들어봤다.

5살에 국극단 무대 올라

김성녀는 ‘삼성국극단’을 운영하던 연극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당대 인기 여성 국극배우 박옥진(1935~2004), 아버지는 극본가이자 연출가인 김향(1921~1999)이다. 이모(박보아)와 외숙모(조양금)도 국극배우였다.

김성녀는 1남 5녀 중 장녀다. 가족이 운영하던 삼성국극단은 전국을 순회하며 공연을 펼쳤다. 당시 여성 국극이 한창 성행하던 때라, 유복한 환경에서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공연장을 따라다니던 김성녀는 5살에 어머니의 아역으로 무대에 올랐다. 국극단이 놀이터였기에 소꿉놀이보다 무대 위에서 연기와 노래를 하는 게 더 친숙했다. 이 시절의 기억때문인지, 그녀에게 무대는 마음의 고향이었다. 김성녀의 아역 무대는 국민학교에 입학하면서 짧게 막을 내렸다.

이 무렵 아버지는 여성 국극의 인기에 기대어 영화 사업에 뛰어들었다. 운영하던 국극단을 정리하고 ‘삼성영화사’를 설립한 뒤, 전 재산을 투자해 여성 국극 영화 ‘대춘향전(1957)’을 제작했다. 하지만 영화는 흥행에 참패했다. 집안의 가세가 기울고 빚이 생겼다. 아버지는 그 충격으로 은둔생활을 자처했고, 어머니가 가족의 생계를 도맡아야 했다.

어머니는 임춘앵국극단 등 다른 단체에서 배우로 활동하며 출연료를 받아 빚을 갚고 생계를 꾸려나갔다. 집안 살림과 어린 동생들을 챙기는 일은 오롯이 김성녀의 몫이었다. 1967년, 어머니마저 늑막염과 폐렴으로 쓰러지면서 배우생활을 은퇴했다. 어머니 대신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했기에, 결국 대학진학을 포기했다.

이 무렵 동생 김성애가 가수의 꿈을 안고 오아시스 레코드사를 찾아갔다. 펄시스터즈·바니걸스 등 자매가수 그룹이 인기를 끌던 때여서 김성애의 노래를 들은 레코드사 사장은 “언니나 동생이 있으면 같이 데뷔를 하는 게 좋겠다.”고 권유했고, 동생은 언니 김성녀를 데려갔다. 그렇게 자매가 의기투합해 ‘비둘기자매’를 결성, 1972년에는 히트곡 ‘까투리 사냥’을 발매했다.

“비둘기 자매로 대중의 사랑을 얻었지만 마음속으로는 ‘이 길이 내가 가야할 길인가’라는 의문이 들었어요. 당시 가수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부족했던 가요계 환경도 한몫했죠. 결국 가수활동을 그만 뒀고, 동생만 솔로가수로 남았어요. 저는 한동안 집에서 진로를 고민하다 문득 ‘가야금 병창’을 하고 싶더군요. 그래서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와 친하고 교류가 잦았던 박귀희(가야금병창 인간문화재) 선생님을 찾아갔어요.”

박귀희 명창은 그녀에게 “박옥진 딸이면 볼 것도 없다. 다른 사람은 10년이 걸릴 것 너는 3년이면 된다.”며 흔쾌히 2호 전수자로 받아주었다. 가야금 병창을 배우는 동안에도 김성녀는 계속해서 자신의 길에 대해 의심하고 고민했다.

그러던 중 극단 민예에서 연극 ‘한네의 승천’ 주인공인 ‘한네’ 역을 맡을 배우를 찾는다는 소식을 듣고 오디션을 보러갔다. 간단히 자신을 소개하며 가야금병창을 배운다고 말했는데, 곧장 주인공으로 발탁됐다. 순간적으로 ‘여기 사이비 극단인가?’ 생각이 들 정도의 파격적인 캐스팅이었다.

나중에 이유를 물으니 연극 ‘한네의 승천’의 특징 때문이라는 설명을 들었다. ‘한네의 승천’은 우리나라 전통연희 양식이 가미된 음악극으로, 국악에 대한 높은 이해도를 가진 사람이 필요했다. 또 가창력과 연기력이 동시에 요구되다 보니 심사위원들은 가야금 병창을 배우고, 아역배우로서의 경력도 있는 그녀가 제격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약 2개월간의 준비를 마친 뒤 막을 올린 연극 ‘한네의 승천(1976)’은 큰 인기를 끌었다. 김성녀도 연극계의 신예로 극찬을 받았다. 그녀는 새로운 도전과 변신이 이어지는 연극이야말로 자신이 가야할 길이라고 느꼈다.

이 무렵 그녀는 극의 연출을 맡은 손진책 씨와 좋은 만남을 이어가고 있었다. 두 사람 다 독신주의자로 가치관이 맞았고, 서로의 세계관을 넓히며 술잔을 기울이는 친구이자 동지로 지냈다. 점차 관계가 깊어진 두 사람은 넘지 말아야할 선을 넘었고, 사랑의 결실이 찾아와 결혼하게 됐다.

2010년 마당놀이 ‘이춘풍전’ 공연을 마치고 ‘마당놀이 트리오’ 김종엽·김성녀·윤문식이 함께 사진을 찍었다. 
2010년 마당놀이 ‘이춘풍전’ 공연을 마치고 ‘마당놀이 트리오’ 김종엽·김성녀·윤문식이 함께 사진을 찍었다. 

마당놀이 통해 ‘찬불가’ 만나

“결혼하고 시집에서 짠맛·신맛·매운맛을 다 봤어요. 넉넉지 못한 형편의 8남매 맏며느리 자리는 많이 힘들었어요. 그 시기를 견디면서 좀 더 단단해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사실 이때 불교를 처음 접했어요. 시어머니는 독실한 불자셨어요. 제게 ‘우리 집안은 내가 불공을 많이 들인 집안이다. 앞으로는 네가 대를 이어서 불공을 많이 드리고 기도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죠. 하지만 그때는 그 말이 마음에 와 닿지 않았어요. 연극으로 생계를 유지한다는 게 만만치 않았거든요.”

결혼 후에도 연극배우로 활동하며, 드라마에도 틈틈이 출연했다. 1978년에는 국립창극단으로 이적해 약 3년간 ‘춘향전’·‘광대가’·‘강릉매화전’ 등 다양한 작품에 출연했다. 1981년에는 국립극단으로 다시 옮겼다.

이때 인생의 전환점이 찾아왔다. 바로 ‘마당놀이’다. 1981년, 정부에서 민족문화 계승과 국학(國學)에 대한 관심을 고취시키고자 ‘국풍81’이라는 문화축제를 개최했다. 이를 기점으로 MBC에서도 창사 20주년을 맞아 전통극 공모를 진행했다.

극단 민예의 멤버 이영운 씨와 남편인 손진책 연출자는 ‘가장 한국적인 연극을 만들어보자.’고 의기투합했다. 우리나라 전통연희·탈춤 등의 요소와 현실풍자를 곁들인 연극 제안서를 공모전에 제출했는데, 곧장 채택되면서 마당놀이 ‘허생전’이 탄생했다. 이 마당놀이 ‘마당에서 행하는 민속놀이’란 사전적 의미와는 달리 우리나라 전통연희의 무대인 ‘마당’과 연극을 뜻하는 단어 ‘play’를 합성한 의미를 지닌, 처음 선보이는 장르의 연극이었다. 김성녀도 극단 민예에서 함께 활동했던 단원들과 허생전을 연습했는데, 뮤지컬 에비타의 주인공 ‘에비타’ 역을 맡으면서 첫 번째 마당놀이에서는 빠지게 됐다.

마당놀이 허생전은 초연부터 큰 인기를 얻었다. 인기에 힘입어 자연스레 다음 작품을 제작했다. 김성녀는 윤문식·김종엽과 함께 마당놀이의 주축이 되어 심청전·흥보전·별주부전 등 다양한 공연을 이끌었다. 공연의 형태도 길놀이·고사·탈놀이 등이 추가되면서 점차 발전했다.

김성녀는 마당놀이 배우로 활동하며 배움에 대한 갈증이 깊어졌다. 당시 마당놀이는 연극계와 국악계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꿔다놓은 보릿자루 취급을 받았다. 그녀는 마당놀이야 말로 한국적인 뮤지컬이라고 생각했고, 실기자의 입장에서 더 자세히 알아야 한다고 느꼈다. 결국 35살의 나이에 대학입시에 도전했다.

바쁜 일상 속에서도 밤잠을 줄여가며 공부했고, 1985년 단국대학교 국악과에 입학했다. 이후 중앙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해 1995년 음악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김성녀는 학업을 이어가면서도 마당놀이 배우로 활동했다. 그때 마당놀이의 작곡을 맡은 박범훈 현 불교음악원장을 만난다. 당시 박 원장은 불자들이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는 ‘찬불가’를 제작하고자 골몰했다. 그는 국악선율을 바탕으로 찬불가를 만들어 ‘찬불가 부르기 운동’을 펼쳤는데, 김성녀도 여기에 동참하게 됐다. 1997년에는 박 원장이 작곡한 ‘김성녀의 찬불가’ 앨범을 발매하기도 했다.

“사실 제 입으로 불자라고 말하기가 조금 어색했어요. 그런데 박범훈 원장을 만나고, 찬불가를 부르면서 스스로 당당하게 불자라고 말할 수 있게 됐죠. 어느 날은 늑골에 금이 가는 부상을 입은 상태로 ‘교성곡 보현행원송’을 부르게 됐어요. 노래를 들은 광덕 스님(光德, 1927~1999)이 저를 찾아오셨는데, 제가 부상당한 상태에서 찬불가를 불렀다는 사실을 아시고 크게 감동하셨어요. 제게 직접 계(戒)를 내려주시고, ‘혜명(慧明)’이라는 법명도 지어주셨죠. 이후에는 사찰에서 찬불가를 부르고, 불교음악을 통한 포교활동을 하는 스님들을 만나 이야기도 나누며 지내고 있습니다.”

마당놀이·연극·국악 등 장르를 넘나들며 바쁘게 시간을 보내던 김성녀는 2007년, 중앙대학교에서 신설한 국악대학의 교수로 임용된다. 그녀는 직접 학과 커리큘럼을 짰고, 방학에는 학생들과 동고동락하며 연극을 준비해 공연을 올리는 등 다양한 활동을 했다. 이러한 활동 덕분인지 중앙대학교 국악교육대학원장·국악대학장 등을 역임하기도 했다.

김성녀는 교수직을 맡으면서 후학양성과 마당놀이 공연에만 전념했다. 그런데 마당놀이 공연이 30년 가까이 되면서 정체기에 빠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김성녀·윤문식·김종엽 삼인방의 무대를 기대하는 관객이 많았던데 비해 배우 간 세대교체가 이뤄지지 못했고, 배우들도 반복되는 무대에 도전보다는 기존의 형식에 안주하는 ‘매너리즘’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세 배우는 고민 끝에 2010년 ‘마당놀이전’을 고별무대로 마당놀이에서 전격 은퇴를 선언했다. 마당놀이의 발전을 위한 과감한 결정이었다. 김성녀는 은퇴와 함께 전통연극인에게 주는 ‘이해랑연극상’을 수상했다. 그녀는 당시를 “여러 상을 받았지만, 이때만큼은 ‘한국 전통극을 위한 노력이 빛을 볼 수 있었다.’고 느꼈다.”고 회상했다.

좌측부터 시계방향으로 마당놀이 ‘심청전’(1988), 극단 미추의 대표작인 ‘오장군의 발톱’(1988), 마당놀이 ‘심청’(2008), 마당놀이 ‘홍길동 전’(2000), 마당놀이 ‘삼국지’(2004), 마당놀이 ‘이춘풍 난봉기’(2009).
좌측부터 시계방향으로 마당놀이 ‘심청전’(1988), 극단 미추의 대표작인 ‘오장군의 발톱’(1988), 마당놀이 ‘심청’(2008), 마당놀이 ‘홍길동 전’(2000), 마당놀이 ‘삼국지’(2004), 마당놀이 ‘이춘풍 난봉기’(2009).

‘잘했다!’ 칭찬하는 추임새 필요해

김성녀는 마당놀이를 은퇴한 뒤 2012년부터 2019년까지 국립창극단 예술감독을 맡았다. 그녀는 ‘창극’의 대중화를 목표로 파격적인 개혁을 단행했다. 기존의 창극은 소리꾼의 창(唱)과 극이 잘 어우러지지 않는다는 맹점이 있었다. 그녀는 창극의 현대화, 사라진 판소리 일곱마당의 복원, 세계 명작 창극 제작을 활동 방향으로 잡았다.

내부에서 개혁안에 대한 반발이 있었지만, 김성녀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사업을 추진했다. 그 과정에서 스릴러 창극 ‘장화홍련(2012)’이 탄생했다. 많은 우려 속에 막을 올린 공연은 첫날부터 매진세례였다. ‘창극의 패러다임을 바꿨다.’는 찬사도 이어졌다. 이러한 흐름에 힘입어 그녀의 도전은 계속 이어질 수 있었다.

특히 판소리 마당 중 하나인 ‘변강쇠전’을 바탕으로 제작한 ‘변강쇠 점 찍고 옹녀(2014)’는 국내에서 극찬을 받았고 ‘차범석 희극상(2014)’을 수상했다. 또 프랑스 파리의 극장 테아트르 드 라빌(Theatre de la ville)에 최초로 공식 초청됐고, 해외에 수출되는 등 큰 인기를 얻었다. 이 후에도 메디아(2013)·적벽가(2015) 등 다양한 창극을 선보였다.

예술감독 퇴임 후 그녀는 다시 연극배우로 돌아와 연극 ‘벽속의 요정’을 통해 열연을 펼치고 있다. ‘벽속의 요정’은 2005년 초연을 올린 이후 계속 사랑받는 연극이다. 김성녀는 “연극 ‘벽속의 요정’은 저를 마당놀이 배우에서 연극배우로 인정받게 해준 작품”이라며 남다른 애정을 보였다. 또 불교음악원의 불음꽃합창단 예술감독으로 활동하며 찬불가 대중화에도 힘쓰고 있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왕성한 활동을 펼치는 배우 김성녀. 그녀의 인생 목표는 ‘아름답게 살기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지금 있는 자리에서 늘 최선을 다하고자[隨處作主] 힘쓰고 있다. 이와 함께 어린이를 위한 ‘불극(佛劇)’ 제작의 꿈도 가지고 있다. 어린 시절 교회에서 본 ‘성극(聖劇)’처럼 감동적인 내용의 ‘불극’이 있다면, 아이들에게 백 마디의 설교보다 더 큰 포교효과를 낼 수 있으리라 기대감을 내비쳤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묻자 그녀는 “우리사회에는 ‘추임새’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판소리에 추임새라는 게 있어요. 공연을 하는 사람의 흥을 돋우기도 하고, 내용에 공감하며 내뱉는 일종의 리액션이에요. 인생길을 걷는 동안 힘든 일은 반드시 따라오게 돼있죠. 그때 자신에게, 또 서로에게 ‘잘한다!’하며 추임새를 건네다보면 조금 더 유쾌하게 길을 걸을 수 있지 않을까요?”

도전과 열정, 의지로 자신의 인생을 촘촘히 채워낸 배우 김성녀. 유쾌하게 자신의 길을 걸으며 또 다른 도전을 향해 묵묵히 나아가는 그녀에게 응원과 찬사를 보낸다.

어린시절의 김성녀(오른쪽). 사촌동생과 환하게 웃고 있다. 
어린시절의 김성녀(오른쪽). 사촌동생과 환하게 웃고 있다. 
1995년 중앙대학교 대학원에서 음악학 석사를 취득했다. 졸업식 에서 어머니 박옥진 여사(왼쪽)와 졸업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다. 
1995년 중앙대학교 대학원에서 음악학 석사를 취득했다. 졸업식 에서 어머니 박옥진 여사(왼쪽)와 졸업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다. 
김성녀의 가족사진. 아버지인 연출가 김향은 1999년 별세했다. 
김성녀의 가족사진. 아버지인 연출가 김향은 1999년 별세했다. 
1992년 4월 6일부터 14일까지 문예회관 대극장에서 공연된 연극 ‘죽음과 소녀’. 남편 손진책이 연출을 맡았다. 
1992년 4월 6일부터 14일까지 문예회관 대극장에서 공연된 연극 ‘죽음과 소녀’. 남편 손진책이 연출을 맡았다. 
김성녀·손진책 부부. 손진책은 2003년에, 김성녀는 2010년에 ‘이해랑연극상’을 수상했다.
김성녀·손진책 부부. 손진책은 2003년에, 김성녀는 2010년에 ‘이해랑연극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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