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림의 거두 우암 송시열
말년에 후학 양성하던 서재

남간정사는 조선시대 유학자 우암 송시열 선생이 말년에 경학을 하며 후학을 양성하던 서재다. 
남간정사는 조선시대 유학자 우암 송시열 선생이 말년에 경학을 하며 후학을 양성하던 서재다. 

예로부터 ‘한밭’으로 불리는 대전(大田)은 유구한 역사를 지녔지만, 고려시대 이전의 문화유적은 별로 없다. 다만 보문산 보문사지, 보문산 마애여래좌상, 식장산 고산사 등 불교유적에서 지난 역사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조선시대 성리학[朱子學]의 대가로 손꼽히는 인물 중 한 사람인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 선생은 말년에 이곳 대전의 소제동 일원에 터를 잡았다. 송시열 선생의 유흔(遺痕)이 남아 있는 가양동 인근에는 선생을 기리는 우암사적공원이 조성돼 있다. 사적공원 내에는 우암이 말년에 건립해 경학을 하며 후학을 양성한 남간정사가 남아 있다.

노년에 지은 별당식 건축물

우암은 1666년경 괴산 화양동에 들어가 화양구곡 중 4곡인 금사담의 바위 위에 암서재(巖棲齋)를 짓고 공부하며 수양했다. 이후 대전 소제(현 대전 동구 소제동)에 살면서 근처 흥농촌에 서재 ‘능인암(能仁庵)’을 세웠고, 희수(喜壽, 77세)가 되던 1683년에 능인암 아래에 서당을 새로 건립했는데, 이것이 남간정사(南澗精舍, 대전광역시 유형문화재)다. ‘남간’은 ‘양지바른 곳에 흐르는 개울’이라는 뜻이며, 송대의 유학자 주자(朱子, 1130~1200)의 시 ‘운곡남간(雲谷南澗)’에서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우암은 이곳에서 강학하며 후학을 양성했으며, 병자호란 때의 치욕을 씻기 위해 북벌정책을 강구했다. 우암 사후에는 유림에서 그의 문집을 모아 목판에 새겨 〈송자대전〉을 펴냈던 유서깊은 곳이다.

남간정사는 현재 우암사적공원 초입에 자리하고 있는데, 사방은 낮은 담장으로 둘러쳐져 있다. 매화와 산수유, 목련 등 봄꽃이 화려하게 핀 봄날의 남간정사는 화사했다. 외부에서 남간정사를 바라보면, 둥치가 굵은 나무 여러 그루가 눈에 들어온다. 담장 가까이 거대한 목련 한 그루, 뒤쪽으로 큰 왕버들이 우뚝하다.

남간정사로 들어가는 정문은 높이가 낮아서 허리를 숙이고 들어가야 문에 머리를 부딪치지 않는다. ‘늘 자신을 살피라.’는 우암 선생의 가르침에 따라 문 높이를 낮게 만들어 놓은 듯했다. 선불교의 가르침인 ‘조고각하(照顧脚下, 자기 발아래를 잘 살피라.)’와도 상통한다.

남간정사 입구에서부터 대유학자의 겸양(謙讓)이 느껴져 발걸음을 가벼이 할 수 없었다. 문을 지나 내부로 들어서면 정면에 둥근 형태의 연못이 있고, 그 뒤로 남간정사가 모습을 드러낸다. 연못 물결 따라 일렁이는 수려한 남간정사와 수목의 반영(反影)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연못은 인공으로 쌓은 석축과 자연 암반석이 어우러져 있다.

남간정사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목조건물이다. 가운데 4칸은 넓은 대청이고, 왼쪽 2칸은 온돌방이다. 특이하게도 일반 건물과 달리 건물 뒤로 출입할 수 있게 만들었다. 대청 밑으로는 계곡에서 내려오는 물이 연못으로 흘러 들어가도록 설계돼 있다. 자연을 최대한 훼손하지 않으려 한 우암의 배려와 식견에 감탄할 뿐이다.

남간정사를 중심으로 오른쪽과 뒤쪽에는 넓은 정원이 있다. 정원에는 명자나무·소나무·버드나무·매실나무·감나무·대나무·배롱나무 등 다양한 수종이 심겨 있다. 특히 건물 뒤쪽 언덕에는 우암이 직접 심었다고 전하는 배롱나무가 있다. 그 뒤로 대나무숲이 건물의 바람막이 역할을 한다. 다시 그 뒤로 펼쳐진 숲은 울타리다.

남간정사에는 앉을 곳이 마땅치 않아 정원의 바위에 걸터앉아 연못과 바깥세상을 바라보았다. 혹이 여럿 붙은 듯한 우락부락한 거대한 나무가 남간정사의 유구한 역사를 대변해주는 듯했고, 연못으로 흘러 들어가는 물소리가 세상의 시름을 잊게 할 정도로 청량했다. 대유학자가 왜 이곳에서 말년을 보내고자 했는지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지금이야 앞에 큰 도로가 생겼고, 아파트와 상가·대형 건물이 들어서 있지만 당시는 산 아래 조용한 마을이었을 것이다.

남간정사 오른편에는 ‘기국정(杞菊亭)’이 있다. 우암이 손님을 맞기 위해 세운 정자인데, 당초 소제동 인근에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소제호가 매몰되면서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건립 당시에는 ‘연당(蓮堂)’이었는데, 주변에 구기자와 국화가 무성해 구기자의 ‘기’자와 국화의 ‘국’자를 따서 ‘기국정’으로 바꿨다고 한다.

남간정사 정문은 키가 낮아 허리를 숙이고 들어가야 한다. ‘늘 자신을 살피라.’고 강조한 선생의 가르침이 스며있는 듯하다
남간정사 정문은 키가 낮아 허리를 숙이고 들어가야 한다. ‘늘 자신을 살피라.’고 강조한 선생의 가르침이 스며있는 듯하다

문중 사찰 ‘비래암’ 현판 써

남간정사와 관련된 불교 이야기는 전하는 게 없다. 다만 송시열 선생은 간접적으로 불교와 인연이 있어 보인다. 〈우암 송시열〉(곽신환, 서광사)에 수록된 우암의 연보를 보면 19세 때인 1625년 금천사(金泉寺)에서 독서를 했고, 41세 때 비래암(飛來菴)에 들어가 학문을 강론했고, 이듬해에는 비래암에서 송준길·유계와 회동했다. 그리고 우암은 1661년 목천(木川) 승천사(勝天寺)에서 이운거와 모여 〈예기(禮記)〉를 강론했고, 1665년에는 의성 고운사에서 스승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1548~1631)의 유고를 교정했다고 한다. 1674년에는 의종황제의 어필 ‘비례부동(非禮不動)’ 네 글자를 화양동 벼랑 암벽에 모각(模刻)한 뒤, 그 옆에 환장암(煥章庵)을 지어 스님들로 하여금 지키게 하고 어필 진본을 보관했다고 한다.

비래암(현 비래사)은 조선 중기 은진 송씨 종친들이 당대의 고승 학조 스님에게 부탁해 창건한 암자다. 학조 대사는 〈금강〉 295호에서 소개한 안동 만휴정의 주인이었던 보백당 김계행 선생의 조카다. 비래암 현판은 송시열 선생이 썼다고 전하며, 우암을 비롯해 많은 유생들이 노닐면서 공부하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은진 송씨 문중 종친들의 기도처였다고도 한다. 비래암과 관련한 다른 설로는 은진 송씨 문중 후손들이 강학소를 사용하고자 세웠다가 스님들에게 지키게 한 게 계기가 돼 사찰로 바뀐 것이란 추정도 있다.

우암은 율곡 이이(栗谷 李珥)에서 김장생으로 이어진 조선 기호학파의 학통을 충실히 계승한 인물이다. 그래서 ‘율곡 이이가 불교에 입문해 삭발했다.’는 이유로 배척을 당하고, 스승 김장생이 여기에 연루돼 곤욕을 치를 때 적극 나서 이이와 김장생을 옹호했다. 〈숙종실록〉 16권, 숙종 11년 9월 30일 ‘송시열이 스승 김장생을 변호하자 답하다’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가만히 듣건대, 근자에 사헌부 신하들이 상소해 이이가 머리를 깎았다는 말을 제기하면서 김장생을 끌어다가 증거를 삼았다고 합니다. 문성공(文成公) 이이는 타고난 자질이 매우 높아 5~6세에 이미 학문을 하는 방법을 알았으며, 열 살이 되어서는 경서(經書)를 모두 통달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말하기를 ‘성인(聖人)의 도(道)가 다만 이것뿐이겠는가?’하고는 불교와 노교(老敎)의 여러 서적들을 두루 보았는데, 그 가운데서 가장 좋아했던 것이 〈능엄경(楞嚴經)〉 한 책이었습니다. …… 그러기에 그가 풍악(楓岳)에 들어갔을 때 여러 승려들이 불경을 설명하는 것이 대부분 달랐는데, 이이가 ‘이곳은 아무개의 말이 옳고, 이곳은 아무개의 말이 틀리다.’고 말하니, 승려들이 놀라면서 탄복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합니다. …… 머리를 깎았다는 말에 이르러서는 지극히 무망(誣罔, 속여 넘김)한 것이니, 그에게 과연 이러한 일이 있었으면 노승이 어찌 ‘조대(措大)’라고 불렀겠습니까? 그리고 임억령(林億齡)은 어찌하여 ‘이생(李生)’이라고 하였겠습니까?

풍악은 ‘금강산’을, 조대는 ‘뜻을 이루지 못한 가난한 선비’를 말한다. 송시열은 이 같은 이유를 들어 “율곡이 불문(佛門)에 들어가긴 했어도, 삭발은 하지 않았다.”며 옹호했다. 이후에도 줄곧 이이를 옹호하는 상소를 올렸다고 한다.

남간정사 전경. 송대의 유학자 주자의 시 ‘운곡남간’에서 이름을 따왔다.
남간정사 전경. 송대의 유학자 주자의 시 ‘운곡남간’에서 이름을 따왔다.

서인의 영수로 파란만장한 삶

송시열 선생은 현재의 충청북도 옥천(沃川) 구룡촌(九龍村)의 외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사옹원봉사(司饔院奉事) 송갑조(宋甲祚), 어머니는 임진왜란 때 조헌(趙憲)과 함께 금산(錦山) 전투에서 전사한 곽자방(郭自防)의 딸 선산 곽씨다. 곽씨 부인은 명월주(明月珠, 보배 구슬)를 삼키는 꿈을 꾼 후 우암을 잉태했다. 아버지는 출산 직전에 기이한 꿈을 꾸었다. 어느 날, 공자가 제자들을 거느리고 집으로 찾아온 꿈을 꾸고 아내의 해산 소식을 들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암의 어린 시절 이름을 ‘성인이 내려 준 아들’이라는 뜻의 ‘성뢰(聖賚)’로 지었다고 한다.

선생의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재(尤齋)·파옹(巴翁) 등이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호는 우암이다. 친구 김익희가 지어 주었다고 한다. 이외에 화양동주(華陽洞主)·남간노수(南澗老叟)·교산노부(橋山老父)로도 불렸는데, ‘화양동주’는 화양동계곡, ‘남간노수’는 대전 남간정사에서 머문다고 해서 붙여진 호다. 선생의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우암은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27세 때(1633년) 생원시험에 장원해 경릉참봉(敬陵參奉)에 제수됐다가 보름 만에 사직했다. 1635년 대군사부(大君師傅)에 제수돼 1년간 봉림대군에게 학문을 가르쳤다. 봉림대군은 훗날의 효종임금이다. 이때 인연으로 효종은 왕위에 오른 직후 우암을 조정으로 불러들였다. 우암은 효종의 북벌 의지와 뜻이 맞아 두터운 신임을 받았지만, 김자점 일파가 이를 청나라에 밀고하자 한동안 낙향하기도 했다.

이후 효종이 승하할 때까지 확고한 신임을 받으며 정치 쇄신과 북벌 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남인 세력 및 현종의 장인 김우명과 갈등을 빚었고, 효종의 장지(葬地)를 잘못 정했다는 비판을 받자 충청도 회덕(懷德)으로 낙향했다. 우의정과 좌의정을 잠시 지낸 기간을 제외하곤 대부분 회덕·여산·화양동 등지에서 지내며 서인의 영수로서 중앙정치에 영향력을 끼쳤다. 이후 삭탈관직 당하고 유배지에 위리안치되기도 했다. 74세 때인 1680년 청풍(淸風)으로 유배지를 옮기라는 명을 받았다가 서인이 다시 집권하자 회덕으로 돌아와 영중추부사의 자리에 올랐다. 1683년에는 벼슬을 내놓고 국가 원로에게 주는 명예직인 ‘봉조하(奉朝賀)’가 됐다. 1686년에는 주자(朱子)의 촌사(村舍)를 본떠 회덕에 남간정사(南澗精舍)를 짓고 만년을 보냈다. 1689년 숙종이 두 살배기 원자(元子, 장희빈의 아들로 훗날 경종)를 세자로 책봉하려 하자, 반대 상소를 올렸다가 제주에 유배됐다. 국문을 받으라는 명을 받고 상경하던 중 전라도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길었던 생을 마감했다.

우암은 사림의 거두답게 고지식한 사람이었다. 공자가 언급한 ‘아침에 도(道)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 夕死可矣]’는 말을 마음 깊이 새기고 있었던 것 같다. 사약을 받기 직전인 1689년 5월 권상하에게 남은 일처리를 부탁하는 편지를 썼는데 다음의 내용이 있다.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것은 성인의 가르침인데, 팔십여 살의 나이에도 끝내 듣지 못하고 죽게 되었으니 하늘이 준 그 소중한 본성을 저버리게 된 것이 마음에 부끄럽고 한스러울 뿐이네. …… ‘직(直)’이란 한 글자를 주시며 천지가 만물을 생육하는 것과 성인이 만사에 대응하는 것은 오직 ‘직’일 뿐이다 하셨네.

후학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대유학자였지만, 우암은 겸손했다. 그의 사상과 정신이 깊이 스며든 별서정원 남간정사의 공간이 현재의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가볍지 않다.

남간정사를 방문한 날은 평일이었지만, 나들이 나온 이들이 제법 많았다. 주변 공간의 멋스러움에 감탄하는 이도, 수령이 오래된 나무 주변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이들도 모두 한결같이 밝은 표정이었다. 넉넉한 공간의 여유가 마음에 안정을 주는 듯하다. 남간정사를 건립한 우암 선생의 정갈하고 고결한 마음가짐이 이곳에 깊이 스며들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남간정사에는 둥근 형태의 연못이 있다. 연못에 비친 남간정사와 정원 나무의 그림자가 운치를 더해준다.
남간정사에는 둥근 형태의 연못이 있다. 연못에 비친 남간정사와 정원 나무의 그림자가 운치를 더해준다.
남간정사 뒷 공간에는 여유로움을 만끽할 수 있는 넓은 정원이 있다.
남간정사 뒷 공간에는 여유로움을 만끽할 수 있는 넓은 정원이 있다.
송시열 선생이 손님을 맞기 위해 세운 정자 기국정. 일제강점기 때 소제호가 매몰되면서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송시열 선생이 손님을 맞기 위해 세운 정자 기국정. 일제강점기 때 소제호가 매몰되면서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명자나무[산당화] 등 초목과 어우러진 단아한 모습의 남간정사.
명자나무[산당화] 등 초목과 어우러진 단아한 모습의 남간정사.
괴산 화양구곡 금사담 인근의 암서재. 
송시열 선생이 학문을 닦고 후학을 양성하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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