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 서사극 불교적으로 각색
포교·사회간접시설 확충 큰 역할

티베트의 한 사원 천장에 그려진 만다라. 
티베트의 한 사원 천장에 그려진 만다라. 

밀교, 라마가 이끄는 비밀 수행

티베트 불교에서 스님과 신도들이 만나는 방식은 독특하다. 교리와 법문을 직접 설하기보다는, 그들만의 상징적 의식을 통해 교감하고 이끌어주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는 ‘밀교(密敎)’와 ‘라마(Lama) 제도’라는 티베트 불교의 두 가지 특성과 깊은 관련이 있다.

밀교는 문자나 언어로 가르침을 펼치는 현교(顯敎)와 반대되는 개념이다. 비밀스러운 수행법과 의식으로 종교적 목적을 달성하고, 교의는 스승과 제자 사이에 구전으로 직접 전수된다. 티베트 불교는 인도에서 건너온 밀교적 성격이 강한 불교와 토착신앙 본(Bön)교가 결합해 형성되었다. 그러나 밀교 또한 대승불교에 속하듯이, 오랜 기간 현교를 수행해 근기가 성숙한 스님만 밀교를 닦을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다.

라마는 ‘스승’이라는 뜻으로, 승가의 존경을 받으며 대중을 이끄는 큰스님에 해당하는 존재이다. 티베트 사람들은 기도할 때 라마를 포함해 사귀의(四歸依)를 한다. “라마 없이 어떻게 부처님을 가까이 할 수 있는가?”라는 그들의 말처럼, 라마는 부처님과 중생을 이어주는 존재이다. 부처님은 우리 눈앞에 없지만, 라마를 통해 그 가르침을 전해 받으니 인간의 몸을 빌린 부처와 다를 바 없다고 여기는 것이다.

티베트 불교에서는 스승이 제자에게 수행을 할 수 있는 힘을 부여하는 ‘관정(灌頂)’ 의식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관정은 개개인이 지닌 불성을 드러나게 하는 의미도 지녔는데, 라마 중에서도 활불(活佛)이라 불리는 린포체에 의해 집전이 이루어진다. 밀교를 수행하려는 제자가 받는 관정은 물론, 입문하는 재가자·출가자가 불보살과 인연을 맺는 ‘결연관정(結緣灌頂)’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각자 전생 인연이 깊은 불보살을 본존으로 삼아 기도수행을 하는데, 이때 반드시 관정이라는 인가절차를 거치도록 하고 있다.

라마는 세심하게 수행을 이끌어주는 안내자이기도 하다. 그들의 수행법은 근기에 따라 달라지나, 몸으로 수인(手印)을 짓고 입으로 만트라[진언]를 외우며 마음으로 관상(觀想)하는 밀교 보편의 방식이 활용된다. 이때는 혼자 수행하다가 잘못된 길로 빠지는 걸 막고, 이타행의 참된 기도가 되어야 하므로 라마의 인도가 필요하다. 이처럼 티베트에서 스님과 신도들의 만남은 한국에서 일상화된 현교의 법회와 달리, 밀교적 만남이 생활화돼 있다.

국토 대부분이 식물한계선을 넘는 해발 4,000m의 혹독한 자연환경과 중국에 의해 국토를 점령당한 정치상황에서도 티베트사람들의 신앙심은 참으로 깊다. 불교의 가르침과 토착신앙인 본교의 주술성이 하나가 된 신앙적 삶이다. 이러한 배경과 티베트 불교의 특성이 어우러져 ‘중생의 눈높이에 맞추어 설하는 속강(俗講)’ 또한 밀교의 직관적 이미지, 의식과 연행(演行)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게 됐다. 따라서 티베트의 스님들은 어느 나라보다 의식집전과 연행에 뛰어나다.

속강에서 불화와 불상은 부처님의 성스러움과 위대함을 드러내는 가장 중요한 시각자료다. 사진은 분노존(좌측)과 자비존.
속강에서 불화와 불상은 부처님의 성스러움과 위대함을 드러내는 가장 중요한 시각자료다. 사진은 분노존(좌측)과 자비존.

자비존의 또 다른 모습

티베트의 불교미술은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특징을 지녔다. 철학과 논리학을 뛰어넘는 고도의 정신세계가 반영되어 있는가 하면, 때로 파격적이고 무시무시하기까지 하다.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분노존(忿怒尊)’이다. 어느 나라든 불보살은 모두 자애로운 자비존(慈悲尊)으로 표현한다. 그런데 티베트에는 원만한 상호의 부처님과 함께 검은 몸에 여러 개의 얼굴과 팔을 지닌 채 무서운 표정으로 해골을 들고 화염에 휩싸인 부처님이 나란히 존재한다.

속강의 관점에서 볼 때 불화와 불상은 중생에게 부처님의 성스러움과 위대함을 드러내는 가장 중요한 시각자료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티베트 불교미술의 예외성은 중생에게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걸까? 험상궂고 기괴한 모습의 이들 존상은 다름 아닌 자비존의 또 다른 모습이다. 이를테면 관음보살은 온몸이 검은 ‘마하카라’, 문수보살은 ‘야만타카’라는 분노존 등으로 나투게 된다. 마치 자애로움 속에서도 때로는 엄한 질책으로 자식을 기르는 부모처럼, 불법에 장애가 되는 마장(魔障)을 없애고 중생의 나쁜 성정을 일깨우기 위함이다.

이때 해골은 인간의 번뇌를 나타내고, 3개의 얼굴은 법신·보신·화신의 구족을, 여러 개의 눈과 팔은 시방[十方]의 관찰과 바라밀을 뜻한다. 그림 속에 숨은 이러한 상징이 중생의 내면을 다스리고 마장을 제압하니, 분노존은 천수천안 관음보살과 화엄성중의 특성을 두루 갖춘 존재인 셈이다. 분노존 앞에 선 신도들은 이마 한가운데 있는 제3의 눈이 인간의 속마음을 꿰뚫어 본다고 여겨, 스스로를 돌아보고 마음을 가다듬는다.

이들 존상은 티베트 불교의 의식무용 ‘참(Cham)’에도 빠짐없이 등장한다. 나태한 수행을 경책하듯 검푸른 얼굴에 해골 장식의 분노존과 마왕이 춤을 추며 성큼성큼 다가서면, 마음속의 삼악도는 저절로 멀어지고 만다. 이때 쓰는 탈은 〈조상경(造像經)〉의 내용에 따라 스님들이 몇 달간에 걸쳐 만들고, 법회를 마치면 남김없이 태운다. 중생을 깨우쳐 인간 내면과 외부의 악을 없애고 선으로 이끄니, ‘참’은 부처님의 뜻을 온몸으로 전하는 ‘역동적 속강’이라 할 수 있다.

티베트 불화의 핵심은 만다라와 탕카(Thanka)에 있다. 설계도처럼 기하학적 구성으로 그려진 만다라는 마치 거대한 다라니와 같은 느낌을 준다. 불교의 우주관 속에 진리를 비밀스럽게 구상화한 밀교적 성격이 짙은 그림이기 때문이다. 신도들은 자비존·분노존을 자비와 경책의 존재로 받아들이고, 만다라를 부적처럼 몸에 지니며 가피를 바란다.

또한 그들은 오래전부터 불화를 두루마리처럼 말아 다니면서 벽에 걸거나 펼쳐놓고 예불과 기도를 올렸다. 유목민으로 떠돌아다녀야 했기에 간편하게 모실 수 있는 걸개그림 탕카를 창안해낸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탱화(幀畵)나 중국의 족자는 티베트 불교를 수용한 원나라의 영향권 속에서 비롯된 것이라 볼 수 있다. 탱화를 ‘정(幀)’이라 쓰고 ‘탱’이라 읽으니 발음도 ‘탕카’와 유사하다.

특히 중요한 명절이나 행사 때면 수십 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탕카를 언덕에 펼쳐놓고 의식의 문을 연다. 이때 탕카를 보기 위한 이들이 구름처럼 모이고, 먼 야산 등성이에 서서히 펼쳐지는 탕카를 보며 저마다 간절한 기도를 한다. 이처럼 티베트 불교에 전승되는 여러 유형의 그림은 비밀스러운 가르침을 전하는 속강의 시각자료로 오랜 역사를 지녔다.

14세기 탕돈걀뽀 스님은 본격적인 서사극을 사원에 들여와 ‘라모(Lhamo)’라는 종합연극으로 발전시켰다. 험준한 지역에 사는 주민들을 위한 사회간접시설 확충 비용마련이 목적이었다. 2019년 7월 라다크의 한 사원에서 열린 ‘참’ 공연. 
14세기 탕돈걀뽀 스님은 본격적인 서사극을 사원에 들여와 ‘라모(Lhamo)’라는 종합연극으로 발전시켰다. 험준한 지역에 사는 주민들을 위한 사회간접시설 확충 비용마련이 목적이었다. 2019년 7월 라다크의 한 사원에서 열린 ‘참’ 공연. 

티베트 속강 ‘참’과 라마들

티베트의 위대한 라마들은 속강에 뛰어났다. 금강무(金剛舞)라고도 불리는 ‘참’은 749년 고승 파드마삼바바가 사원을 완공하면서 악귀를 제압하기 위한 춤을 춘 데서 비롯되었다. 이 춤은 만다라형 구도에 다양한 탈이 등장하는 가면극 형태로, 1,300년이 지난 지금까지 활발하게 전승되는 티베트의 불교 공연예술로 세계에 널리 알려져 있다.

‘참’이 대사 없이 등장인물의 상징성으로 의미를 전한 의식무(儀式舞)라면, 14세기 탕돈걀뽀 스님은 본격적인 서사극을 사원에 들여와 ‘라모(Lhamo)’라는 종합연극으로 발전시켰다. 당시 탕돈걀뽀 스님은 사람들이 험준한 산악지역을 오가면서, 위험을 무릅쓴 채 깊은 계곡을 건너다가 목숨을 잃는 것을 목격했다. 이때부터 계곡을 잇는 다리를 건립하는 일에 일생을 바치겠다고 원력을 세웠으나, 엄청난 비용을 마련하는 데 한계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장터에서 유랑극단의 공연을 보고 아이디어를 얻는다. 스님은 공연단을 찾아가서 이전부터 내려오던 대본을 구해 불교적으로 다듬고 보강해 한 차원 높으면서 흥미로운 예술작품을 만들어냈다. 이후 스님이 기획한 공연은 가는 곳마다 서민들은 물론 귀족·영주들의 호응을 받았다. 〈탕동걸포전(湯東杰布傳)〉에는 “탕돈걀뽀가 세운 대형철교는 58개, 나무다리는 60개, 나루터는 118개였다.”고 기록하였다.

승려라면 사원이나 동굴에서 수행하는 것을 전부로 여겨서는 안 된다.

천하를 돌아다니며 백성들이 실제 봉착한 어려움이 무엇인지 알고 이를 도와야 한다.

탕돈걀뽀 스님은 평소 신념처럼 대승불교의 보살도를 몸소 보여준 실천적 지식인이었다. 이 종합연극은 ‘라모’·‘장극(藏戱)’ 등으로 불리며 발전을 거듭해, 2009년 ‘티베트 가극(Tibetan opera)’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기에 이른다. 그에 의해 본격적으로 시작된 티베트 전통극 라모는 700여 년간 100여 편을 갖추게 되고, 티베트 국민의 사랑을 받으며 1960년대 이후 새로운 창작이 활발해졌다. 이 중 전통극 가운데 예술성이 뛰어나고 널리 전파된 8편을 따로 묶어 ‘라뫼슝계’라 부른다.

이들 여덟 가지 주제는 참으로 다양하다. 부처님의 전생을 다룬 〈자타카〉를 각색한 이야기에서부터, 불교와 외도의 투쟁을 그린 설화, 봉건 농노제의 문제점을 고발한 사실주의적 작품, 당 태종의 딸인 문성(文成) 공주가 출가한 역사적 사실에 바탕을 둔 이야기, 이타적 실천을 덕목으로 다룬 비구니의 일생 등이 있다.

라모는 초기부터 지금까지 불교의 전유물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전문극단의 공연으로 사랑받고 있다. 탕돈걀뽀 스님이 내용을 각색할 때 민간과 불교의 공연요소를 적절히 추가해 딱딱하거나 종교적 색채가 짙지 않았고, 대중의 공감과 흥미를 얻을 수 있었다. 쉽고 자연스럽게 불법을 전한 탕돈걀뽀 스님의 위대함이 더욱 돋보이는 대목이다. 민간의 예능을 재편해 다시 민간에 돌려줌으로써 가장 사랑받는 불교적 종합예술로 널리 퍼져나가게 했으니, 그를 ‘티베트 속강의 아버지’라 불러도 좋을 법하다.

젊은 스님들이 의식에 맞춰 둥첸을 연주하고 있다. 
젊은 스님들이 의식에 맞춰 둥첸을 연주하고 있다. 

벽화 앞에서 설창하는 본생담

‘설역고원(雪域高原)’이라 부르는 티베트에도 봄과 여름은 찾아든다. 드넓은 초원에 풀이 무성한 생명력 넘치는 여름이면, 일명 ‘요구르트 축제’라는 ‘쇼뙨(Shoton)’이 펼쳐진다. 고산지대에 사는 티베트사람들은 주로 육식을 하기 때문에 위장이 좋지 않아, 우유를 반쯤 발효시킨 ‘쇼르’를 일종의 소화제처럼 즐겨 마시는데, 이와 관련한 티베트 최대의 국민축제다.

쇼뙨은 4월부터 시작된 석 달의 하안거가 끝나는 날, 한철 수행에 힘쓴 스님들을 위한 대중공양에서 비롯됐다. 수십 년간 티베트를 연구한 김규현 선생은, 해제일(解制日)이면 산문 밖에서 기다리던 가족과 신도들이 음식을 준비해 스님들께 공양을 올리는 모습을 기록했다. 이날을 국민축제를 승화시킨 이는 제5대 달라이라마 롭쌍갸초다.

그는 해제일인 7월 1일에 맞추어 쇼뙨을 성대하게 열고, 전국의 극단을 초청해 경연대회를 열었다. 이후 쇼뙨 축제는 400년간 불교와 함께 전승되고 있으니, 롭쌍갸초는 민중의 마음을 읽을 줄 아는 뛰어난 지략가였다. 따라서 티베트 사원 곳곳에서는 이날 거대한 탕카를 언덕에 모시고 관불의식을 행하며 며칠간 축제를 이어간다. 축제의 하이라이트 또한 라모 공연이니, 관객들은 배우들의 사설과 몸짓에 따라 희로애락을 함께 나눈다.

티베트의 전통 연극은 불교가 들어오기 전부터 이야기꾼이 사설과 노래를 섞어 청중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설창(說唱)·강창(講唱)에 뿌리를 두고 있다. 티베트 연구자인 박성혜 선생에 따르면, 이러한 설창은 당나라 문성공주가 티베트 왕과 혼인할 때 한족을 통해 전해졌을 가능성, 인도 밀교에서 직접 전해졌을 가능성과 함께, 토착종교인 본교(本敎)의 영향도 클 것이라 보았다.

본교에서는 초기부터 ‘중(仲)’이라는 고사사(故事師)를 두어 경전과 전설·신화·역사 등을 외워 후대로 이어가게 했는데, 이들은 설창을 전문적으로 하는 사제이기도 했다. 청중에게 다양한 고사를 들려줌으로써 흥미를 불러일으켜 입에서 입으로 끊임없이 전승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들의 설창 형식은 티베트에 불교가 흥성하기 시작하면서 불법 포교의 효과적인 도구로 인정받아 널리 사용되었다.

특히 불교 전파를 목적으로 한 ‘라마마니’를 설창할 때면 부처님의 본생담(本生譚)을 묘사한 그림 앞에서, 스님들이 작은 막대기로 그림을 짚어가며 설창하곤 했다. 이러한 라마마니 탕카와 벽화는 지금도 죠캉사원·포탈라궁·용왕담(龍王潭) 등에 남아 있어 그 옛날 속강의 흔적을 엿보게 한다.

‘아체라모’는 ‘티베트 가극(Tibetan opera)’이란 이름으로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중국(티베트)에서 공연된 아체라모의 한 장면. 〈사진=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아체라모’는 ‘티베트 가극(Tibetan opera)’이란 이름으로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중국(티베트)에서 공연된 아체라모의 한 장면. 〈사진=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구미래
불교민속학 박사. 동국대ㆍ중앙대ㆍ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등에서 불교의 의례ㆍ무형유산ㆍ세시풍속 등에 대해 강의했고, 현재 불교민속연구소 소장으로 있다. 저서로 〈한국불교의 일생의례〉ㆍ〈한국인의 죽음과 사십구재〉ㆍ〈존엄한 죽음의 문화사〉ㆍ〈한국인의 상징세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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