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에서만 연꽃 피듯
추악·저열한 세속에
성불의 길 열려 있어”

∷ 무대 - 인도 바이샬리 성, 유마거사의 방

∷ 주요 등장인물 - 유마거사, 문수사리보살, 마하가섭, 보현일체색신 보살.

∷ 함께 한 대중 - 많은 보살대중과 성문대중

∷ 주요 전개 과정
문수사리보살이 “어떻게 하면 보살이 불법을 성취하는 길을 가는 것인가?”를 묻는다. 이에 대해 유마거사는 참으로 역설적인 표현으로 불법을 성취하는 길을 설파한다. “‘길 아닌 길’을 따를 때 불법을 성취하는 길을 따르는 것이다.”
그것은 중생을 위해서라면 어떤 곳이라도 가리지 않고 들어가되, 그곳에서 참된 길을 열어가는 것이다. 이곳은 더러운 곳이요, 이것은 가서는 안 될 것이라는 분별 자체를 다 놓아버리는 동사섭(同事攝)의 길이다. 그러자 문수사리보살은 “여래가 될 성품[種性]은 무엇인가?”를 묻고 이에 대해 유마거사는 “모든 삿되고 거짓되고 악한 것들의 종성이 바로 여래의 종성”이라고 대답한다. 모든 번뇌를 완전히 벗어 던져버린 자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낼 수 없다는 것이다. 비유를 들자면 우트팔라 꽃이라든가, 파드마 꽃 등의 진귀한 꽃들은 낮고 습한 진흙 속에서야 피어나는 것과 같다. 쉽게 말해 “연꽃은 진흙 속에서 피어나지만 진흙에 더럽혀지지 않는다.”가 아니라 “연꽃은 진흙 속이라야 피어난다.”는 것이다.
이런 문답을 듣고 마하가섭은 찬탄을 하면서도, 자신들처럼 번뇌를 완전히 여의어버린 아라한들은 부처를 이루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일으킬 수가 없다고 탄식한다.
이때 보현일체색신이라는 보살이 유마거사에게 “부모와 처자, 그리고 모든 권속은 어디 있느냐?”고 묻고, 이에 대해 유마거사는 “지혜바라밀이 어머니요, 훌륭한 방편은 아버지이며…….”로 시작하는 풍부한 상징성을 지닌 게송으로 응답한다.

 

둔황(敦煌) 막고굴(莫高窟)에 그려진 유마힐경변(維摩詰經變)을 당나라때 임모 (臨摹, 베껴서 그림)한 작품.
둔황(敦煌) 막고굴(莫高窟)에 그려진 유마힐경변(維摩詰經變)을 당나라때 임모 (臨摹, 베껴서 그림)한 작품.

〈유마경〉은 한 품 한 품이 모두 신선하고도 충격적인, 대승의 근본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지난 ‘관중생품(현장 역에서는 ‘관유정품’)’에 나오는 천녀의 이야기는 그 가운데서도 대승의 근본정신을 드러내면서, 우리 현실의 문제에 대해서도 근본적 관점을 제시하는 것이었지요. 그것이 우리 현실을 바꿀 수 있는 핵폭탄급의 파급력을 가졌다는 것도, 그런 핵폭탄급의 이야기를 불발탄으로 만들어온 우리 불자들에게 부끄러움이 있다는 것도 모두 인정하실 만하지요? 그리고 그런 부끄러운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고, 부처님의 말씀으로 나 자신과 세상을 바꾸어 나가는 불자가 되기로 모두 다짐하셨지요?

그런 다짐을 하신 여러분께 〈유마경〉은 계속 충격적인 소식들을 전해옵니다. 이번 이야기 ‘불도품(佛道品)’에서도 천녀 이야기 못지않은 충격적이고 활발발한 대법문이 펼쳐집니다. 그중에 하나를 미리 풀어놓고, 그것을 실마리로 삼아서 나가볼까요?

진흙 속에서만 피는 연꽃

앞서 ‘주요 전개과정’에서 말했듯이 “연꽃은 진흙에서 피어나지만 진흙에 더럽혀지지 않는다.”가 아니라 “연꽃은 진흙 속이라야 피어난다.”라는 말, 저는 이 말에서 참으로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유마경〉 이야기’를 시작할 때도 잠시 꺼냈던 이야기지요. 물론 〈유마경〉의 이 대목에서는 연꽃이 아니라 우트팔라 꽃, 파드마 꽃, 쿠무다 꽃, 푼다리카 꽃이라는 이름을 열거하지만 귀하고 아름다운 꽃이라는 의미에서 연꽃이라는 이름으로 바꿔도 문제는 없을 겁니다. 가벼운 이야기 같지만 참으로 세상을 보는 근본적인 시각, 그리고 스스로를 닦아나가는 자세와 방법에 획기적인 전환을 일으킬 수 있는, 정말로 핵폭탄급의 파급력이 이 말속에 숨어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엄청난 의미를 제대로 밝히려면 앞뒤를 제대로 밝혀야 하고요.

우선 앞부터 밝혀 보겠습니다. 이야기의 실마리는 문수사리보살이 ‘불법을 성취하는 길’을 묻고 그에 대해 유마거사가 ‘길 아닌 길’을 제시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길 아닌 길’, 참으로 역설적인 표현이지요? 정해진 길로는 다니지 말고, 없던 길을 새로 만들어가라는 뜻일까요? 혹시 이 말에 따르다가, 산속에서 길 아닌 길을 찾아가다가 조난이라도 당하면 어떡하나요? ‘군자대로행’이라는 말과는 반대되는 말 아닌가요? 이런 여러 가지 물음이 나올 수 있겠지요? 그런데 아무리 물음표 붙이는 게 중요하다 해도, 여기서 그러다간 끝이 없겠네요. 그 말을 한 유마거사가 친절하게 해설해 주고 있으니 그 말을 들어보는 게 먼저겠지요? 유마거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보살들은 …… 축생의 길로 다시 들어가더라도 모든 어둠과 무명을 벗어나며 …… 세간의 모든 번뇌의 길에 다시 들어가도 성품이 청정해 끝내 오염되지 않고 …… 온갖 사도에 다시 머물더라도 정도로 세간을 제도하고…….”

한마디로 말해 못 갈 곳이 없고, 어느 곳에 가더라도 그곳에서 바른길을 찾아 따른다는 말씀입니다. 아주 당연한 말씀이지요. 어느 곳에 가더라도 중심을 잃지 않는다. ‘수처작주(隨處作主)’라는 말의 뜻도 바로 그런 것 아닐까요? 그런데 그런 당연한 말씀을 왜 이렇게 힘주어 하시는가, 그 상황이 문제겠어요. 아마도 소승의 작은 규모를 비판하는 뜻이 담겨있다고 생각해야 할 것 같아요. 우리 인생살이의 모습은 얼마나 다양한가요? 깨끗하기만 할 수도 없고, 소설보다도 더 소설 같은 온갖 일들이 벌어지는 현장이 바로 우리의 삶이지요. 소승은 그런 삶의 모든 영역을 수행의 마당으로 삼지 않고, 더러운 곳이나 법답지 못한 곳은 피하고 젖혀놓는 모습을 보였던 것이지요. 그것을 대승의 기치를 높이 든 유마거사가 질타하는 것이라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더럽고 깨끗한 것 분별하지 말아라! 어느 곳에 가더라도 자신을 성숙시키고 중생을 제도하는 그 길을 열어야 한다.” 그것이 ‘길 아닌 길’을 따르라는 의미라 하겠습니다. 그렇게 해야만 진정으로 불법을 성취시킬 수 있다는 것이지요.

〈삽화=전병준〉
〈삽화=전병준〉

여래가 될 성품

이런 유마거사의 말에 대해 다시 문수사리보살이 묻습니다. 불법 성취의 가능성이라 할 수 있는 여래가 될 성품은 어떤 것이냐고요.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앞에서 말한 유마거사의 사자후가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모든 무명과 삶에 대한 애착이 바로 여래의 종성이며, 탐진치(貪瞋癡) 삼독심의 종성이 바로 여래의 종성이며…. 온갖 잘못된 견해와 악한 법, 착하지 못한 법들이 가진 종성이 바로 여래의 종성입니다.”

쉽게 말해볼까요? 우리가 악하다, 더럽다, 잘못되었다고 하는 것들에 숨겨져 있는 가능성이 바로 부처를 이루는 가능성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비유적으로 말하여 “연꽃은 진흙 속이라야 피어난다.”고 하는 것이지요. “연꽃은 진흙 속에서 피어나지만, 진흙에 더럽혀지지 않는다.”는 말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아시겠지요? 우리들, 그리고 우리 세상의 온갖 추악하고 저열한 모습들. 그것에 숨어있는 가능성이 바로 부처를 이루는 가능성이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것을 저열하다고 무시하고 없애고 젖혀놓는다는 것은 부처를 이룰 가능성 자체를 없앤다는 것입니다.

매우 어렵고 심오한 이야기 같지만 실제로는 불교의 근본 가르침이 바로 그렇습니다. 조금 다른 예를 통해 말해볼까요? 불교의 목표는 괴로움을 벗어나 열반을 이루는 것이지요?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무리 많고 다양하다고 해도 네 가지의 거룩한 진리인 사성제(四聖諦)를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는 불자는 별로 없지요. 괴로움의 진리, 괴로움의 원인의 진리, 괴로움의 소멸의 진리, 괴로움을 없애는 길의 진리, 그것이 바로 사성제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없애려고 하는 괴로움의 영역을 한번 살펴볼까요? 생로병사의 괴로움은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괴로움입니다. 슬픔과 불안, 그것들이 괴로움의 진리에 속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겠지요. 그런데 좀 세밀하게 들어가 보지요. 우리가 정진하여 해탈하려는 마음을 낸다면, 그 마음은 괴로움의 영역에 있는 것일까요? 아닐까요? 높은 선정 속에서 얻어지는 지극한 평화로움은 괴로움에 속하는 것일까요? 아닐까요? 부처님에 대한 깊은 신앙은 괴로움에 속하는 것일까요? 아닐까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은 괴로움의 진리에 속하는 것일까요? 아닐까요?

모두가 괴로움의 진리에 속합니다. 그것들 또한 영원한 것이 아니며, 어떤 조건에 의지해 있는 것이며, 변한다는 점에서 괴로움의 진리에 해당합니다. 그것들은 매우 바람직한 것이며, 그것들을 통해 괴로움을 없애고 열반에 이를 수 있지만, 역시 괴로움의 진리에 속하는 것입니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괴로움을 없애는 가능성도 바로 괴로움에 속하는 것들에게서 나온다는 말이지요. 보조지눌 스님이 말했던가요? 땅에 걸려 넘어진 자는 땅을 짚고 일어서야 한다고.

그런데 이런 수많은 괴로움의 진리에 속하는 것들에 대해 분별을 일으켜 “이쪽은 깨끗하고 선한 것이니까 키우고, 이쪽은 더럽고 악한 것이니까 없애버려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런 생각을 바탕으로 수행하고 정진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잘 될 것 아니냐고요? 아닙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이미 저것은 나쁜 것이고, 그 나쁜 것이 참으로 있다는 생각을 일으키는 것 자체가 잘못된 방향성을 가지는 것이라서 오히려 번뇌를 늘리고 수행에 장애를 가져옵니다.

쉬운 예를 하나 들어서 말해볼게요. 절에 다니다 보면 “욕망을 없애라.”는 말을 자주 듣게 됩니다. 그런데 욕망을 없애면 무슨 힘으로 살아가나요? 욕망을 더러운 것, 악한 것으로 못 박고 그것을 없애려고 하면, 자칫 삶의 원동력 자체가 사라져 버립니다. 그러면 어째야 하나요? 그저 욕망에 충실하며 살라는 말인가요? 그래선 안 되겠죠. 서원을 바로 세워야 합니다. 서원이 우리 삶을 이끌고 가도록 해야지요. 그것이 바로 불자의 근본 마음가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욕망은 없애고 서원은 키워나가는 그런 구조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욕망의 힘이 서원의 힘으로 전환되는 것입니다. 불법의 올바른 눈을 뜨면 자연스레 욕망이 서원으로 전환된다는 말입니다. 아집에 매달려 나를 중심으로 모든 것을 소유하려던 욕망이, 나와 이웃, 국가와 사회, 나아가 온 중생이 함께 잘되는 큰 목표를 향해 나가는 힘으로 전환되는 것, 그것이 바로 서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욕망은 없애고 서원은 키운다? 서원을 일으키는 힘마저 소멸하고 맙니다. 애초에 둘이 아닌 거지요.

〈삽화=전병준〉
〈삽화=전병준〉

번뇌의 종성이 여래의 종성

마하가섭이 바로 이런 유마거사의 말을 증명합니다. 앞에서 앞뒤를 밝힌다고 했는데, 마하가섭의 말이 바로 뒤를 밝히는 것이 되는 셈이네요.

“생사를 일으키는 온갖 번뇌의 종성이 바로 여래의 종성입니다 ……. 그런데 (우리 아라한들은)생사윤회의 씨앗이 완전히 썩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절대로 일으킬 수 없습니다. 차라리 극악한 업을 지을지언정 우리처럼 완전히 해탈한(번뇌를 끝내버린) 아라한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 우리처럼 번뇌를 완전히 없앤 아라한들은 영원히 그럴 수가 없습니다(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일으킬 수 없습니다).”

‘번뇌를 없애야 한다는 방향으로 수행을 한 아라한들은 성불할 수가 없다!’, ‘부처 될 마음을 일으키는 힘 자체가 소멸해 버렸다!’ 참으로 얼마나 가차없는 표현입니까? 부처와 같은 급으로 여겨지던 아라한을 부처보다 훨씬 아래에 놓으면서 소승적인 수행에 매달린 아라한들은 부처가 될 수 없다고 극언을 한 것이지요. 아라한의 입을 통해 아라한의 문제를 드러내는 대목이랄까요?

그런데 앞서 계속 〈유마경〉의 구도를 말했지요? 10대 제자를 비롯한 아라한들은 바로 소승의 문제점을 드러내는 역할을 맡고 있다고요. 사리불·마하가섭·아난존자가 실제 여래의 종성이 섞여 있어서 부처가 되지 못하는 그런 분에 해당하겠어요? 단지 그분들의 입을 빌어, 그들의 못난이 역할을 통해 당시 불교의 문제점, 즉 〈유마경〉에서 소승이라 불리는 불교를 비판하고 있는 것일 뿐이라는 것은 다시 말하지 않아도 아실 줄 믿습니다.

아무튼 우리도 큰 자긍심을 가지고 불도를 이루어 나가야 합니다. 나의 못난 모습이 바로 ‘여래의 종성’이라고 바로 보고, 그것을 실현하는 수행에 힘있게 나서야 합니다. 오탁악세라고 하는 이 세상, 바로 그곳에서만 깨달음의 연꽃은 피어납니다. 우리는 그렇게 번뇌와 추악함을 자양 삼아 피어나는 연꽃이어야 합니다.

보현일체색신이라는 보살의 “당신의 처자권속은 어디에 있느냐?”는 물음에 유마거사가 게송으로 답합니다. 상징성과 문학성을 듬뿍 지닌 게송들이지요. 그것을 가족 관계를 중심으로 짜깁기해서 감상해보기로 하겠습니다. 유마거사의 주민등록열람(?)이 되는 셈인가요? 필자가 짜깁기한 것이라는 것 분명히 밝혀 둡니다.

청정한 보살에겐 지혜바라밀이 어머니요
훌륭한 방편이 아버지이며
미묘한 법의 기쁨은 아내가 되고
대자비심은 딸이 되며
진실한 법과 진리는 아들이고
여섯 바라밀은 권속이고
사섭법(四攝法)은 기녀이니
결집된 바른 법의 말씀들
미묘한 음악으로 여기노라…….

성태용
전 건국대 철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한 후 한국고등교육재단의 ‘한학자 양성 장학생’으로 선발돼 故임창순 선생에게 한학을 배웠다. EBS에서 ‘주역과 21세기’라는 제목으로 강의했으며, 한국철학회 회장과 학술진흥재단 인문학단장을 역임했다. 저서로 〈주역과 21세기〉·〈어른의 서유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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