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과 오롬이

〈삽화=이지미〉
〈삽화=이지미〉

잡초

날씨가 궂은 날이 아니면 짬이 날 때마다 잡초를 뽑는다. 잡초는 가꾸지 않아도 저절로 나고 자란다. 여름에는 잡초가 매우 버겁다. 다루기가 어렵다. 그나마 늦가을부터는 그 기세가 꺾이니 이런 겨울날에 시간이 날 때마다 잡초를 뽑는다. 그냥 두어도 시들 것을 무엇 하러 굳이 뽑느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잡초를 이기기에는 이 겨울의 시간만 한 때가 없다. 겨울에 그 뿌리를 뽑아 봄에 잡초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일어나는 것을 조금은 막고자 하는 것이다.

봄에서 가을까지 자란 잡초의 뿌리는 한껏 깊어져 뿌리의 그 근거를 떼어내기가 쉽지 않다. 쉬운 노동이 아니다. 그러나 호미질을 하고 손아귀로 풀을 잡아 뽑아 올리는 일만을 계속 하다보면 내가 이 일을 하는 이유가 다른 데에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것은 어떤 이점을 얻게 되기 때문인데, 마음이 단순해지고 심지어 순일해지는 것도 그 하나의 이익이 아닐까 싶다. 번잡한 생각-마음의 작용이 줄어드는 것이다.

힘에 겹거나 거북해하던 것이 줄어들고 그냥 잡초를 뽑고 있는, 비록 힘들지만 간단한 일만을 하고 있는 나와 그래서 덜 복잡해진 내 마음이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내가 좀 순진해지고 좀 어수룩해진 듯한 느낌도 드는 것이다. 그러니 잡초를 뽑는 때는 이 한겨울 만한 때가 없다.

잔돌

제주에는 돌담이 많다. 돌담은 쌓기가 어렵다. 밭에서 굴러다니는, 밭에서 캔 돌로 담을 쌓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나도 이 돌담을 쌓겠노라고 몇 번 나섰다 물러선 일이 여러 번 있다. 담을 쌓긴 했지만 태가 나지 않았고, 또 버티지 않고 곧 무너져 내렸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돌담 쌓는 일은 능숙한 분들에게 내맡겼다. 그리고 이제 내가 온전히 맡아 하게 된 일은 잔돌을 갖고서 아랫돌과 윗돌 사이에 생긴 빈 공간을 메꾸는 것이었다.

나는 요즘 이 역할에 크게 만족하여 돌담에 뚫려 있거나 비어 있는 곳을 잔돌로 채우고 있다. 대충 짐작해서 잔돌을 골라 그 빈틈에 넣어 보지만 그 눈대중이 엇나가는 때가 잦다. 골라 집어든 돌을 다시 내려놓고 다른 돌을 손에 드는 때가 대부분이지만, 이 작고 가벼운 잔돌이 높고 묵중한 돌담을 풍우에 견디게 한다는 생각이 드니 내 일이 결코 작고 사소한 일만은 아닐 것이다. 잔돌이 하는 일을 깔보거나 업신여길 수 없다.

하늘이 이만큼 크시니

시골에 들어와서 사는 일에 좋은 점이 무엇일까? 주변에서 걱정이 없지 않았다. 마당과 텃밭, 몇 그루의 과일나무와 꽃나무, 정을 주는 이웃을 얻었지만 적지 않은 것을 할 수 없는 불편이 사실은 있기도 하다. 그렇지만 일일이 다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시골에서 살려는 사람들의 계획을 무너뜨릴 수 있기에. 그런데 어느 날 내 집에 찾아온 한 사람이 이렇게 얘기해서 나를 놀라게 했다.

“여긴 진짜 하늘이 이만큼이나 크네요.”

하늘은 사실 크긴 크다. 사방이 하늘이니까. 사방이 푸른 하늘이요, 사방이 먹구름의 하늘이요, 사방이 햇살과 바람 몰고 오는 하늘이니까. 게다가 밤하늘은 또 어떤가? 달은 밝고 깨끗하고, 별은 보석처럼 박혀 빛난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이 하늘이 왜 내겐 평소에 잘 보이지 않았을까 싶은 것이다. 이만큼이나 큰 하늘이 말이다.

그 사람의 말을 들은 이후로 내겐 하늘을 올려보는 버릇이 생겼다. 명경 같은 하늘이 아니라 활발한 하늘을 보는 습관이 생겼다. 어떤 기운이, 어떤 느낌이 모여들고, 흩어지는 하늘 아닌가. 웃고 우는 하늘 아닌가. 노여워하고 기뻐 어쩔 줄 모르는 하늘 아닌가. 바위 같고 폭포 같은 하늘 아닌가. 내 마음 같고, 내 님의 마음 같은 하늘 아닌가. 정말이지 활동 공간이 큰 하늘 아닌가.

눈사람

눈을 주먹만하게 뭉쳐서, 그 눈을 굴려서, 두 덩이를 굴려서 눈사람을 만들어 놓고 아이는 떠나갔다. 내 마당에 눈사람이 겨울밤 내내 흰 빛으로 서 있었다. 노란 귤껍질로 웃는 입술을 만들어 놓아서 검은 밤에도 웃는 눈사람이여. 날개를 만들었더라면 아이의 꿈속으로 날아가 그 따뜻한 공터에서 사르르 녹았을 텐데.

〈삽화=이지미〉
〈삽화=이지미〉

오롬이

강아지 한 마리를 데려왔다. 그가 돌보지 않던 강아지를 데려왔다. 이름을 ‘오롬이’로 지었다. 깡마른 몸을 씻기고 털을 깎고 내 집 마당에 들여놓았다. 겁에 잔뜩 질린 어린 강아지를 데려와서 함께 살았다. 보살핌을 받은 적이 없는 것 같은 작은 생명이었다.

나는 오롬이가 빗속에서 쪼그려 앉아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는 것을 지난해 여름에 보았다. 아주 많은 날을 함께 산 후 흰 털이 다시 자라났고, 곯은 배를 채웠고, 이럴 줄 모르게 붙임성이 좋아졌다. 그리고 내 살림에 조금씩 조금씩 들어섰다.

짖고, 반기면서. 나를 따라오고 나를 끌고 가면서. 네 덩이의 똥을 치우면서. 밥과 물을 주면서. 그리고 한 데가 너무 추워서 집으로 데려왔더니 안방을 들락거리고, 내 베개를 베고, 내 이불을 날카로운 이빨로 찢어 놓으면서. 오롬이가 내게 왔다.

겨울 동백나무

겨울 내내 동백이 피고 지는 것을 본다. 한 그루 동백나무에서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꽃이 피고 지는 것을 본 것은 처음이다. 이르게 피는 꽃이 있는가 하면 늦게 피는 꽃도 있다. 한 그루 꽃나무에서 꽃 피는 시간이 이처럼 지속될 줄은 짐작조차 못했다.

이 한 그루의 동백나무는 내내 꽃피는 나무인 셈이다. 오늘처럼 겨울 볕이 좋은 때에도 꽃이 있고, 얼음처럼 추운 날에도 꽃이 있고, 눈이 내리는 날에도 붉은 꽃이 있다. 어느 날에는 툇마루에 앉아 동백나무를 보았는데, 이 꽃피는 꽃나무가 하나의 이야기 아닌가 싶었다.

가지마다 꽃이 피는 때가 다르니 거기에는 반드시 사연이 있을 것이다. 일찍 피는 꽃에는 그만큼의 연유가 있을 것이요, 늦게 꽃이 오는 가지에는 또 그만한 까닭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가지마다 꽃이 온다니 이 얼마나 좋은 예감이요, 소식인가. 이 꽃불을 보고 있으면 나도 꿋꿋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한 그루 동백나무요, 한 그루 꽃나무이니 오늘에 그 기쁨이 적더라도 내일에는 꽃이 오리라는 생각을 갖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동백꽃은 떨어져서도 그 시듦이 더디다. 똑 부러지듯이 낙화한 꽃송이는 여러 날이 지난 뒤에도 꽃의 빛깔이 사라지지 않는다.

위로도 꽃빛이요, 아래에도 꽃빛이다. 낙화한 꽃들이 낭자한 나무 아래도 꽃나무 같으니 나는 빗자루를 들어 쓸지 못하고 두고두고 꽃빛을 본다. 내 마음에 빛이 머무는 것을 느낀다. 우리의 삶에도 빛이 오리니, 이 동백나무의 꽃핌과 같다고 여겨볼 일이다.

필요한 것들

칼데콧 아너상을 수상한 세계적인 그림책 작가 레오 리오니(Leo Lionni, 1910~1999)의 작품 〈프레드릭〉은 주인공 들쥐의 이름이다. 겨울을 앞두고 다른 들쥐들은 옥수수와 나무 열매 그리고 밀과 짚을 모으지만 프레드릭은 이 일을 하지 않는다.

프레드릭이 겨울에 쓸 요량으로 미리 모은 것은 햇살과 색깔과 이야기였다. 추운 날을 위해 햇살을 모은다는 거였고, 겨울에는 잿빛투성이인 만큼 색깔을 모은다는 거였고, 겨울엔 얘깃거리가 동이 날 테니 이야기를 모은다는 거였다.

이 겨울철에 이 그림책을 보면서 나는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무용해 보이는 것이 때로는 유용하다는 것! 우리에겐 꼭 물건뿐만이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것! 예를 들면 내가 누군가와 나눈 대화의 내용, 겪은 일, 마음의 쪽지, 안심과 공감, 눈물, 사랑과 친절, 용서와 연민 같은 것이 함께 필요하다는 것! 그런 것들이 곧 겨울철에 쓸 옥수수요, 나무 열매요, 밀과 짚이기도 하다는 것!

나는 쉬고 싶다

나의 습관 가운데 하나는 누군가의 집을 방문했을 때 그 집 벽에 걸린 글씨나 그림, 액자 같은 것을 유심히 들여다보는 일이다. 언젠가 지인의 집에 갔더니 그는 ‘나는 쉬고 싶다’라고 큼직하게 쓴 손글씨를 벽에 붙여 놓았다.

그런데 묘하게도 그 글씨를 본 순간 마음이 잠잠해지고 차분해졌다. 호흡이 안정되고 느려졌다. ‘뭐, 그런 걸 다 고민하고 있어?’라고 내게 작은 목소리로 묻게 되었다. 볕이 좋은 날에 보았던 해변의 금빛 모래알처럼 마음이 윤이 났다. 그래, 파도처럼 고단한 우리는 때때로 쉬고 싶다.

자라나는 말씀

어른들을 찾아뵙고 살아가는 일에 대한 조언의 말씀을 들을 때가 더러 있다. 대개는 내 일이 원하는 대로 술술 풀리지 않을 때 그런 말씀을 청해서 듣게 된다. 근래에 내 마음에 남은 말씀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다들 어렵다고 하지만 나보다 어디가 더 어려운가 생각해야 해요. 그런 데를 도와야 해요.”라는 말씀이었다.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이 있다는 생각을 하고, 또 그런 쪽이 어디이고 누구인가를 살펴보라는 것이었다. 내 음지만 보지 말고 더 짙은 음지를 살펴보라는 것이었다.

둘째는 “도둑질만 안하면 살아갈 일이 떳떳해요. 다리 뻗고 잠도 잘 자게 되지요.”라는 말씀이었다. 굽힐 것이 없이 스스로 당당하려면 남의 재산이든 남의 이익이든 공짜로 갖고 오려고, 빼앗으려고 하지 말라는 뜻일 것이다. 결백하고 깨끗하면 삶의 형세가 꺾이거나 구김살이 질 일이 없을 것이다. 결백과 깨끗함이 좋은 침대라는 말씀일 테다.

나는 이 두 말씀을 내 방에 공손하게 들고 와서 화분처럼 놓아두었다. 그 말씀이 내 공간에서 자라나는 것을 매일매일 바라보는 행복이 내게 비로소 온 것이다. 물론 그 말씀이 시들지 않도록 잊지 않고 때맞춰 물을 부어주어야겠지만. 어쨌든 말씀도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운다.

문태준
시인. 1994년 〈문예중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수런거리는 뒤란〉·〈맨발〉·〈가재미〉·〈그늘의 발달〉·〈먼 곳〉·〈우리들의 마지막 얼굴〉·〈내가 사모하는 일에 무슨 끝이 있나요〉 등이 있다. 소월시문학상·노작문학상·애지문학상·서정시학작품상·목월문학상·정지용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 BBS 제주불교방송 총괄국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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