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 수난기
상원사 지켜낸
시대의 큰스승

대한불교조계종 초대 종정(宗正)을 지낸 한암(漢巖) 대종사의 일대기를 다룬 책이다. 스님은 구한말인 1876년 강원도 화천에서 온양(溫陽) 방씨(方氏) 기순(箕淳)과 선산(善山) 길씨(吉氏)의 3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속명은 중원(重遠)이다.

22세 때인 1897년, 금강산 장안사에서 행름선사(行凜禪師)를 은사로 출가했다. 1899년, 금강산 신계사에서 보조국사(普照國師)의 〈수심결(修心訣)〉을 읽다가 크게 발심했고, 김천 청암사 수도암에서 만난 경허(鏡虛)화상의 〈금강경(金剛經)〉 법문을 듣고 첫 깨달음을 얻었다. 합천 해인사 퇴설선원에서 동안거 중 첫 오도송(悟道頌)을 지어 경허 스님에게 바쳤다.

이듬해인 25세 때, 통도사 백운암에서 입선(入禪)을 알리는 죽비소리를 듣고 두 번째 깨달음을 얻었다. 그로부터 3년 뒤 경허 스님으로부터 인가를 받고, 해인사 선원에서 하안거 해제 후 〈전등록〉을 보다가 세 번째 깨달음을 얻었다.

1911년, 평안북도 맹산군 애전면 우두암에서 동안거에 들었는데 이듬해 초봄, 부엌에서 불을 붙이다가 수도암에서의 첫 깨달음과 조금도 다름없는 네 번째 깨달음으로 확철대오했다.

법제자로는 탄허·난암·보문 스님 등이 꼽히는데, 가장 신임하고 아낀 제자는 탄허(呑虛) 스님이다. 탄허 스님의 법맥은 만화(萬化) 스님으로 이어진다. 책을 쓴 원행(遠行) 스님은 만화 스님의 법제자이다. 50여 년 전 오대산 월정사로 출가했고, 현재 조계종 원로위원이며, 대종사이다.

한암 스님의 승가오칙

한암 스님이 봉은사 조실이던 1925년 7월 8일부터 19일까지 장맛비가 퍼부어 수십만 채의 집이 떠내려가고 647명의 사망자를 낸 대홍수가 있었다. 잠실과 신천 지역의 주민 수백 명이 지붕 위에 올라가거나 두 그루의 커다란 느티나무에 매달려 살려달라고 아우성치는 위급한 상황이었다. 한암 스님은 주지 청호(晴湖) 스님에게 주민을 구하라고 명을 내렸다. 청호 스님은 뱃사람을 수소문해 구조에 나설 것을 독려했지만 워낙 위험한 일이라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자 한암 스님은 “곳간 문을 열어 한 사람 구하는데 쌀 한 가마를 주라.”고 지시했다. 당시 쌀 한 가마는 큰돈이었다. 그 말을 듣고 모여든 뱃사람들이 노약자와 어린이부터 차례로 배에 옮겨 싣고 봉은사로 돌아왔다. 708명을 무사히 구조해내자마자 느티나무 한 그루가 뿌리째 뽑혀 거친 물살에 떠내려갔다.

한국불교 역사상 유례없이 네 차례나 조계종 종정에 올랐던 한암 스님은 1925년 오대산으로 들어온 후 스스로 불출동구(不出洞口)의 원칙을 세우고 지켰다. 이듬해는 ‘승가오칙(僧伽五則)’을 제정해 선포했다. 제1칙, 선(禪)은 수행자의 본분사이다. 제2칙, 염불(念佛)은 부처님을 생각한다는 뜻이다. 제3칙, 출가 수행인은 불경을 읽음으로써 밝은 지혜와 중생을 교화할만한 식견을 갖추어야 한다. 제4칙, 의식(儀式)은 종교적인 가르침을 표현하는 행위이자 중생을 교화하는 종교행사이니 의식이 없는 종교는 존재할 수 없다. 제5칙, 가람을 지키고 보호하는 일은 사원의 보호와 중창은 물론 궁극적으로 웅장하며 위엄 있는 청정 불국토를 구현하려는 정신이다. 참선(參禪)·염불(念佛)·간경(看經)·의식(儀式)·수호가람(守護迦藍)의 승가오칙은 중국 선종의 의식과 규율을 정한 ‘백장청규’에 비견된다.

종무총장 인선의 기준

한암 스님은 1930년 〈불교〉 제70호에 조계종의 종조(宗祖) 확립을 주장하는 ‘해동(海東) 초조(初祖)에 대하여’를 발표했다. 조계종의 법통 연원을 밝히는 이 글에서 스님은 당시 불교인들이 해동 초조를 태고보우국사로 정하려는 움직임에 강한 이의를 제기했다. 그러면서 종조, 즉 선종의 초조는 육조혜능의 4세손 서당 지장(西堂 智藏) 화상에게 인가를 받은 신라의 승려 도의(道義) 국사로 추대되어야 하고, 범일 국사·보조지눌로 이어지는 해동 조계종의 줄기를 바로 세워야 한다는 소신을 강력하게 펼쳤다.

한암 스님은 조선불교조계종 초대 종정에 추대된 후, 종무총장(현 총무원장) 선출을 앞두고 엄격한 인선 기준을 제시했다.

“소승이 외람되게 정리를 해보자면, 첫째가 신심(信心)입니다. 믿음이 확고해서 불사에 시작과 끝맺음이 분명한 사람입니다. 두 번째는 청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금전상 과실이 없고 욕심이 없어야 합니다. 세 번째는 인내입니다. 어떤 어려운 일에 처하더라도 잘 참아낼 수 있어야 합니다. 네 번째는 배려와 화합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리가 분명하고 원만해야 하고 대중을 기쁘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섯 번째가 겸손입니다. 불사 문중에 공로가 많아도 자랑하거나 남을 업신여기지 않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이 다섯 가지 덕목이 어찌 종무총장의 자격에 한한 것이겠습니까? 승(僧)과 속(俗) 모두가 청정한 기쁨에 이르는 길이 여기에 있습니다.”

상원사를 지켜내다

3년 동안 이어진 6·25전쟁은 사찰에도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 1951년 1·4 후퇴 때, ‘국군 제1군단 작전 지역 안에 있는 사찰을 포함한 모든 민간 시설물을 소각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북한군의 은폐물이나 보급기지로 활용될 가능성을 없애기 위한 조치였다.

시도 때도 없이 퍼붓는 비행기 폭격으로 오대산 일대가 쑥대밭이 되었다. 상원사 마당에도 포탄이 떨어져 아수라장이었다. 월정사와 암자들이 불타고 하늘 가득 시커먼 연기가 피어오르는 가운데 한 국군 장교가 소대 병력을 이끌고 한암 스님과 만화 스님, 평등성 보살뿐인 상원사에 들이닥쳤다. 오대산에 있는 모든 사찰을 태워 없애라는 상부의 명령에 따라 상원사 또한 불 지를 것이니 서둘러서 짐을 챙겨 떠나라는 것이었다.

만화 스님과 평등성 보살이 허둥지둥 어찌할 줄 몰라하고 있는데 한암 스님께서는 담담하게 장교에게 잠시 말미를 달라고 청하신 뒤 안으로 들어가 가사 장삼을 갖춰 입었다. 이윽고 불당 법상 앞에 정좌한 한암 스님이 장교를 불러 “준비가 다 되었으니 이제 불을 지르시오!”라고 말했다. 소스라치게 놀란 장교가 발을 구르며 “이러시면 안 됩니다. 어서 나가십시오!”라고 소리쳤지만 한암 스님은 “그대는 군인이니 명령을 따르는 것이 본분이고, 나는 출가수행자이니 법당을 지키는 것이 본분 아니겠소. 죽으면 어차피 다비를 할 몸, 둘다 본분을 지키는 일이니 내 걱정은 말고 어서 불을 지르시오.”하고는 돌이 되어버린 듯 꼼짝하지 않았다.

부하 사병들은 갑론을박하며 웅성거리고, 만화 스님과 평등성 보살은 한암 스님을 살려달라고 장교에게 울면서 애원을 하는 팽팽하고 긴장된 시간이 흘러갔다. 장교가 결단을 내린다. “문짝을 모두 뜯어다가 마당에 쌓아라! 어서!”

소대원들의 손에 의해 전각에서 뜯겨 나온 수십 개의 문짝이 폭격을 맞아 커다란 구덩이로 변해버린 절 마당에 가득 쌓였다. “불을 질러라!” 매서운 겨울 바람 속에 굳게 입을 다물고 그 광경을 지켜보던 장교의 명령이 떨어졌다. 휘발유가 뿌려지고 문짝은 순식간에 타올랐다. 절을 태웠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문짝을 태워 연기를 냈던 것이다. 군인들이 수십 개의 문짝을 부수거나 뜯을 때나, 그것들이 절집마저 집어삼킬 듯 시뻘건 불꽃 속에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타오를 때도 한암 스님은 법당 안에 정좌하고 있었다.

좌탈입망하다

상원사는 죽음 앞에서도 부처님의 제자로서 초연한 모습을 보여준 한암 스님의 기개와 국군 장교의 지혜로운 결단으로 건재할 수 있었다. 상원사 동종(국보 36호), 문수동자상(국보 221호), 중창권선문(국보 292호) 등의 문화재가 전쟁의 참화에서 벗어나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는 것은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을 보여준 한암 스님의 법력 덕분이다.

그 일이 있은 두 달 뒤인 3월 15일, 한암 스님은 가벼운 병을 앓기 시작해 7일째 되던 22일(음력 2월 15일) 아침, 피난을 마다한 채 상원사에 남아 스님을 시봉하던 손상좌 만화 스님에게 아랫마을에 가서 약을 지어오라는 심부름을 시켰다. 만화 스님이 산길을 내려간 사이, 한암 스님께서는 희섭 스님의 도움을 받아 목욕을 한 후 가사장삼을 갈아입었다.

희섭 스님을 내보내고 가부좌를 한 자세로 방석에 정좌하고 있던 한암 스님은 청소를 하기 위해 방에 들어온 평등성 보살에게 눈을 감은 채 “오늘이 2월 보름이 맞느냐?”고 물었고, “그렇다.”는 평등성 보살의 대답에 “나를 벽 쪽으로 붙여라.”하고 말했다. 방석을 벽 쪽으로 끌어다 드린 후 나오며 보니 스님은 벽에 기대지 않고 꼿꼿하게 앉아 있었다. ‘벽에 기대면 허리가 좀 덜 아플텐데.’ 하는 생각을 하며 문을 닫고 나오는데 뒤에서 한암 스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여(如如)라.”

아무래도 이상한 마음에 문을 열어 보니 ‘딸각’하는 소리와 함께 스님의 고개가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것이었다. 놀라서 방으로 뛰어 들어가 스님의 코끝에 손을 대본 평등심 보살은 숨기운이 느껴지지 않자 떨리는 몸을 억지로 진정하며 밖으로 나와 희섭 스님을 불렀다. 급히 방으로 들어가 한암 스님의 열반을 확인한 희섭 스님은 허겁지겁 산등성이까지 올라가 범룡 스님이 보궁 기도를 하고 있는 중대를 향해 울며 소리쳤다.

“노스님이 열반하셨습니다! 노스님이 열반하셨습니다!”

세수 76세 법랍 54세. 좌탈입망(坐脫立亡)이었다. 한암 스님은 민족의 수난기를 살았다. 종정 재임 시에도 오대산을 떠나지 않았고 총독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았다. 오히려 오대산을 찾아온 일본인 고관들이 스님의 고고한 자세에 존경의 마음을 품고 돌아갔다. 인민군에게 끌려가던 만화 스님이 어른 스님 걱정을 하자, 인민군 대장이 “그 어른이 누구냐?”고 물었다. “한암 스님”이라고 하자, 깜짝 놀라며 “방한암 스님을 말하는 것이냐? 그러면 당장 내려가 시봉을 하라.”며 풀어줬다고 하니 당시 스님의 명성은 남북한을 망라했다.

스님의 입적 후 달리 방법이 없었던 만화 스님은 군인들에게 한암 스님의 다비를 부탁해 나무로 사각형 가마를 만들고, 창호지로 주변을 둘러 스님의 법구를 운구했다. 나무와 숲을 이용해 불을 붙였다. 범룡 스님이 집전을 했고, 사리는 만화 스님이 수습했다. 다비가 끝나고 소대는 비로봉으로 이동했다. 만화 스님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다비를 도와준 군인들에게 도라지와 고사리 한 포대를 선물했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 등 난세에 정신의 등불이었던 시대의 큰스승 한암 대종사가 입멸하신 지 71년, 오대산 법맥을 이은 원행 스님이 방대한 자료를 정리해 한 권의 책으로 묶어 에세이 평전 형식으로 펴냈다. 아무쪼록 널리 읽혀 한국불교의 높은 정신세계가 이 시대를 구원하는 청정수가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유자효
시인. KBS 유럽총국장·SBS 이사·한국방송기자클럽회장을 역임했다. 시집 〈신라행〉·〈세한도〉·시집소개서 〈잠들지 못한 밤에 시를 읽었습니다〉·번역서 〈이사도라 나의 사랑 나의 예술〉을 펴냈다. 공초문학상·유심작품상·현대불교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 (사)구상선생기념사업회장, 지용회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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