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 그거
별거 아니데이”

사랑이 그대에게 손짓하거든 따라가셔요.
그 길이 비록 험하고 괴로울지라도
사랑의 날개가 그대를 품을 때는 안기셔요.
날개 속에 숨겨진 칼이 그대를 상하게 하더라도
사랑이 그대에게 말할 때는 믿어 주셔요.
비록 그의 음성이 뜰 안을 황폐케 하는 폭풍처럼
그대의 꿈을 휩쓸어 버릴지라도.

사랑은 그대에게 면류관을 씌우듯이
그대를 십자가에 못박을 터이니까요
사랑은 곡식단을 묶듯이 당신을 그 안으로 모읍니다.
사랑은 그대가 알몸이 되게 도리깨질을 합니다
사랑은 그대의 껍질을 벗기고 자유롭도록 채찍질을 합니다

사랑은 반드시 이 모든 일을
그대의 마음이 신비를 깨닫도록 하리이다.
그러면 그 지각으로 그대는
생명이 심장의 한 부분이 되리이다.

이 시는 칼릴 지브란(Kahlil Gibran, 1883~1931)의 〈선지자〉에 나오는 ‘사랑’ 중 일부다. 칼릴 지브란은 레바논계 미국인으로 시인이자 화가이기도 하다. 이 책은 〈선지자〉에서 〈예언자〉로 번역되기도 했는데 나는 1959년에 처음 접했다. 1955년 발간으로 되어 있었는데, 내가 소장한 이 책은 현재 매우 낡아서 종이상태가 위태롭기까지 하다. 그 시절 번역이라 맞춤법도 한국어도 서툴게 번역되어 있기도 하다. 그러나 그 어느 책보다 나를 문학쪽으로 기울게 한 충격과 황홀과 몰입과 환희를 준 책이기도 하다.

칼릴 지브란과 아버지

1960년 여고 3학년이었다. 서울이란 도시를 처음 본 해다. 부산에서 수학여행을 서울로 갔는데, 나와 친한 고향친구가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던 시기라 그 친구를 만났다. 바로 그날 학교에서 그 책을 샀다고 하면서 내게 선물로 주었다.

친구가 책의 10페이지를 열면서 ‘사랑’에 대한 시를 읽어 주며 킥킥 웃었던 기억이 난다. 처음엔 그 책에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러다 부산으로 내려간 뒤 어느 날, 그 책을 읽으며 고스란히 밤을 새웠다. 우정·깨달음·기도·종교·가르침·먹는 일과 마시는 일에 대한 남다른 사유에 설레었던 모양이다.

무엇보다 여고생에게 관심이 컸던 제목을 나열해 설명해 주었기 때문에 읽기가 편했고 정이 갔다. 사랑은 아름답고 기쁨이고 팔만 들면 날 수 있을 것 같은 충만한 것이라고 생각할 때였다. 그런데 사랑은 험한 길이며 칼이며 십자가이라고, 그야말로 내가 생각하던 사랑과는 반대되는 말만 하는 것 같은 의구심은 나를 흔들었다. 특히 “사랑은 소유되지 않는 것으로 대개 사랑은 사랑으로서 족한 것”이란 글은 더욱 나를 혼란하게 만들었다.

‘이 사람 사랑을 잘 모르네. 내가 가르쳐줘야 할 것 같아.’

이런 어처구니없는 생각도 했다. 또한 “그대 마음속에 사랑하는 그이를 위하여 기도와 그대 입술에 찬양의 노래를 머금고 잠들기를 원하세요.”로 끝나는 사랑의 시를 ‘의미 뒤집기’라 생각했다. 그러나 천만 급의 의미가 거기에 담겨 있음을 서서히 깨닫기 시작했다. 시는 보이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보이지 않는 물줄기를 찾아내는 것으로, 사랑을 시를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선지자〉란 책은 나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그 시절 아버지의 일기장으로 혼란을 겪으며 ‘사람의 마음을 볼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고민했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은 시가 아닐까 생각할 때였다. 칼릴 지브란과 아버지는 나에게 혼란을 주었고, 그 혼란은 나를 더 깊이 문학 쪽으로 밀고 갔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의문은 관심으로 기울게 했고, 더 깊이 나를 밀고 갔다. ‘나는 지브란의 사랑처럼 시의 심장 한 부분이 되기는 할까? 시의 심장이 되어야지. 아니 내 심장이 시의 덩어리가 되어야지.’ 그렇게 잠을 뒤척이기도 했다. 모든 것은 정답이 없었고 혼란스러웠다. 그래서 스스로 “…이런 것이 될 수 있을 거야.”로 비약하며 생각을 굴리던 그런 시절이었다.

춘향과 심청과 장화홍련

딸이라거나 여자라거나 하는 이름에서 나는 늘 약자였고, 지는 쪽에 있었다. 딸 부잣집 다섯째는 딸이라는 이름에서 늘 양보해야 하는 일이 많았다. 바로 밑의 남동생에게 뭐든 양보하고 뭐든 이해하고 뭐든 맞아주고, 그렇게 남자 앞에선 머리를 숙여야 하는 그런 감정의 동굴 속에서 내 감정을 누르고 살았던 경험이 어쩌면 종이 위에서 춤추게 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여자라는 이름이 갖는 갖가지 불이익은 절규의 씨앗이 되어 내 몸에 남아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초등학교 때 〈심청전〉이나 〈춘향전〉·〈장화홍련전〉 같은 고전을 배웠다. 여자라는 이름은 노예와 같았을 때, 운명적이라는 운명을 수용할 수밖에 없던 시대에 그런 고대소설은 잘 와닿지 않았다. 다른 학교와 달리 ‘모자장수’ 국어선생님이 교양과목으로 강의하셨던 것이 고대소설이었다. 그때 나는 고대소설을 새삼스럽게 느끼기 시작했다. ‘조선 후기, 여자가 인간으로 대접받기가 하늘의 별따기였던 시대에 어찌 이런 여자이야기가 태어났을까?’ 흥미로웠다.

흔히 〈춘향전〉을 연애소설로 보지만 나는 그렇게 보지 않았다.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불타는 연애담이 아니라 여자의 강인한 힘, 그리고 여자의 약속에 대한 하늘의 천둥소리 같은 이야기라고 느꼈다.

춘향은 이도령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놓는다. “나는 사랑을 약속한 여자다. 나는 죽음을 각오하고 이 약속을 지킬 것이다.” 그리하여 춘향은 죽음 앞에 놓이게 된다. 이도령이 약속을 잊고 춘향에 대한 기억이 가물가물할 때 춘향은 약속에 목숨을 걸었다. 심청이도 아버지의 철없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다. 쌀 한 톨 없는 아버지가 공양미 삼 백석을 약속했으니 어쩌랴. 어이없는 아버지의 약속을 심청이가 목숨으로 대신한 것이다. 〈장화홍련전〉은 여자가 내뱉은 진실의 힘에 대한 소설이다. 쥐의 피를 이불에 묻혀 부정한 누명을 씌워 죽였지만 죽음 후에도 ‘귀신’이라는 이름으로 군수를 일곱 명씩 죽이면서까지 결국 자신들의 진실을 밝힌다.

그 시대 여성에게 이런 힘이 존재했던 것일까? 아니다. 없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여자의 내면에 그런 힘이 존재한다는 것을 누군가는 알아차린 것이리라. 눈부신 내면 관찰의 그 천재성을 지닌 주인공은 누구였을까?

고대소설에 나오는 여성들은 모두 어머니나 아버지가 없는 결손가정의 딸이다. 사랑받지 못하고 꿈을 펼칠 수도 없다. 가난하고 부족하고 억울한, 수평에서 기울어진 결손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이 주인공들은 여자의 힘을 쏟아내며 활약한다. 감격이 여기에 있지 않겠는가? ‘고난과 시련이 성공의 열매를 키운다.’는 속담도 여기에서 나왔는지 모르겠다.

겨우 여고 3학년이었는데, ‘나는 정신적으로 풍족하고 완벽하다.’는 너무나 큰 착각에 빠져서 섣부른 여성론을 펴기도 했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다 안다고 난 모르는 게 없다고 겁 없이 우쭐거렸던, 어린 시절의 생각이었다.

그 여성론에는 분명히 어머니가 숨어 있었다. 내 어머니는 과연 어떤 여자일까? 구멍가게 하는 외할머니를 아파했던 어머니는 외딸의 외로움 속에서 여성의 강건한 힘을 키웠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개인적인 행복은 아예 문을 닫은 것처럼 보였고, 그렇다고 모두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내가 못한 것을 딸이라도 이루기를’ 고대하며 집착하는 어머니는 어이없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한, 한 많은 여성이었을 것이다. 그런 평범한 여성이었을 것이다.

오직 대리만족의 딸을 어찌어찌 자신의 꿈 위에 앉혀 보려고 안간힘을 다하는 어머니의 본성은 춘향이일까? 심청이일까? 장화홍련이었을까?

그 시절 그런 생각을 참 자주 했던 것 같다. 그 여성들의 피 한줄기가 어머니 몸 안에 흘러들기나 했을까?

진정한 행복이란?

행복이란 무엇인가? 누가 나에게 묻는다면 “행복이란 내가 나에게로 가져오면 행복할 수 있는 것이고, 나에게 있는 데도 행복이라고 불러 주지 않으면 불행한 것”이라고 말하겠다. ‘행복’이란 매우 흔한 말이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행복’이라는 단어사용에 대해 아직 서툴고 인색하고 활용가치를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행복론은 무조건 무엇을 소유하는 것이다. 그러나 행복의 본질은 소유에서보다 내가 가진 것에 대해 발견하는 것에 있다. 작고 사소한 것에 대한 배려와 무(無)를 유(有)로 이끌어 가는 노력이 행복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여자의 행복은 무엇이며 어디서 오는 것일까? 단편적으로 생각하면 좋은 학벌, 좋은 직장, 좋은 남편, 좋은 시댁 그리고 좋은 자녀를 두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좋은’이란 단어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개인적인 시선으로 보는 ‘좋은’일까? 아니면 남들이 만들어 놓은 ‘행복’을 의미하는 것일까? 어느 것이 우리를 기쁘게 하는 것일까?

보편적이고 상식적인 행복은 늘 남들과 비교해 그 우월성을 찾게 된다. 이때 행복은 주어진 것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고, 주어지지 않은 것을 열심히 노력해서 나의 것으로 가까이 가져오는 것이다. 돈이 많으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주변에 부자들이 많으면 절대 행복하지 않다. 오히려 갈등이 잦은 걸 볼 수 있다. 내 주변에는 권력이나 명예를 가진 사람들도 많은데 그들 역시 보기보다 행복하지 않다. 정말 행복한 사람들은 불평을 갖지 않고 주어진 자신의 생활을 개척하고 좀 더 사랑을 가지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무엇무엇 때문에’라고 핑계 대면서 자신이 노력하지 않는 것을 합리화하면 행복은 자기 것이 되지 못하는 것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다’는 신념이 필요하다. 우리의 생활은 늘 마음 다치기 쉽고, 외롭고, 미래는 불투명하다. 나만 외톨이로 사는 것이라는 생각에 절망할 때가 많다. 그러나 사람들의 생활은 대부분 비슷하지 않을까? 우리가 이 모든 걸 극복해내고 한 명의 인간으로 한 명의 여자로 행복할 수 있는 건 그나마 가족이라는 울타리 덕분일 것이다.

‘가족’, ‘가정’이라는 낱말보다 더 아름다운 말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가정과 가족이 있는데도 우리는 왜 외롭고 쓸쓸하고 눈물겨운가? 내가 행하는 것보다 받고 싶은 것이 더 많기 때문은 아닐까? 거듭 말하지만 우리의 생활은 부족하고 고단하고 때때로 날카로워져서 남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으면서 이해를 바라기만 할 때가 많다. 서로 그렇게 생각하다가 부딪치고 금이 가고 회복되기 어려운 곳으로 가기도 한다. 하지만 나의 어머니는 달랐다. 이해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독단적으로 자신이 생각한 일을 우격다짐으로 끌고 가려 했다. 이미 이해와 사랑은 길을 빗겨 갔고, 바닥이 난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니는 국문과 가라!”

‘모자장수’ 별명을 가진 국어선생님은 내게 단 한 마디로 진로를 정해주셨다. 더 이상 고민도 사라졌고, 진로 결정이라는 무서운 호랑이도 사라졌다. 나는 다만 학교를 정하는 일만 남아 있었다. 그 시절에도 학교는 많았다. 경남백일장 1등이면 국문과는 무시험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아버지는 그 당시 부산에 있었던 연세대 국문과를 가라고 하셨고, 어머니는 대학은 무조건 서울로 가라고 우기셨다.

누가 어머니를 이기겠는가? 어머니가 만세를 불렀다. 나도 은근히 서울을 생각했다. ‘서울!’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뛰었다. 서울, 서울, 내가 서울을 가다니. 경남 거창의 우리 집은 큰 길가에 있었다. 영일정미소가 우리 집이다. 나는 정미소 앞 큰길가에 쪼그리고 앉아 김천 쪽으로 가는 버스를 떠나는 애인처럼 바라보곤 했다.

여러 번 있었던 일이다. 저 버스를 타면 서울을 갈 수 있다는데. 나는 자주 김천 쪽 하늘을 바라보며 서울을 동경했다. 김천행 버스를 바라보기만 해도 서울의 바람을 마신 듯 가슴이 달달해 왔던 것이다. 그 서울, 바로 그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게 되었으니 나는 참으로 복이 많다고 생각했다. 늘 슬픔이었는데 반짝 빛이 돌았던 것이다.

서울에도 학교는 많았다. 이화여대 이야기가 나왔지만, 대학교를 알아보신 아버지가 결국 숙명여대를 택하셨다. 그 당시 지방 학생들이 숙명여대를 많이 선택한 게 이유가 아닌가 싶다. 뿐만 아니라 숙명여대 국문과에서 훌륭한 문인들이 배출되었다는 게 아버지의 뒷이야기였다.

그렇게 숙명여대 국문과로 정해졌다. 모든 서류문제를 끝내고 하숙집 짐도 거의 정리가 끝날 무렵, 나는 반드시 이별을 말해야 하는 그 대상을 찾아갔다. 바로 바다였다. 해운대·송도·광안리 바다를 걷고 또 걸었다. 이 바다는 무엇일까? 내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저 갈매기 저 하늘 저 파도 위를 나르는 바람도 모두 하나의 언어였다. 나는 무엇을 읽고 가는 것일까? 오래오래 두고 읽어야 할 무한 독서를 내 가슴에 저장했다.

그 많은 바다이야기는 내 삶의 모든 여정에서 함께 할 소중한 책이 될 것이다. ‘바다야! 너 우는 거니? 울지마. 우리는 이별이 아니란다. 나는 자주 너를 찾아 부산을 오게 될 거야. 부산생활은 2년 남짓 되지만 아주 중요한 내 생의 시간을 보낸 고향 같은 곳이란다.’

운동장에서 서면까지 가는 저 버스. 정말 많이 탔던 버스였고, 부산역은 오래 내 가슴에 기적소리를 남긴 추억의 장소가 될 것이다. 또 처음 부산 생활을 시작한 초량동, 광복동과 아미동, 친구집이 있었던 범일동,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학교운동장도 오랫동안 내 기억의 자산이 될 것이다.

그리고 어머니를 생각했다. 부산으로 가는 새벽 버스를 타기 5분 전. 어머니는 내게 말했다.

“남자, 그거 별거 아니데이. 니는 이 세 가지를 명심해라.”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다부지게 당부한 그 세 가지는 언제나 내 삶의 큰 빛이기도 했고, 희망이기도 했다.

신달자
시인. 한국시인협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다. 첫 시집 〈봉헌문자〉를 비롯해 수필집 〈나이 마흔에 생의 걸음마를 배웠다〉·〈백치애인〉, 소설 〈물 위를 걷는 여자〉 등 수많은 작품을 펴냈다. 만해대상 문예상, 대한민국문학상, 현대불교문학상, 공초 오상순문학상, 대산문학상, 김달진문학상(시부문), 석정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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