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백(淸白)을 보물 삼던 김계행
사화(史禍) 피해 낙향, 만년 보내

안동 만휴정은 조선 연산군 때 사화를 피해 낙향한 김계행 선생이 독서와 사색으로 만년을 보내고자 건립한 정자다.
안동 만휴정은 조선 연산군 때 사화를 피해 낙향한 김계행 선생이 독서와 사색으로 만년을 보내고자 건립한 정자다.

경북 안동(安東)은 안동 권씨와 김씨, 풍산 류씨 등 권문세족이 뿌리내리고 살아온 대표적인 ‘양반고을’ 중 한 곳이다. 유교문화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안동 하회마을과 경주 양동마을에 이어 한국의 서원 9곳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는데, 이 중 도산서원과 병산서원이 안동에 자리하고 있다. 이렇게 유교문화가 깊게 스며있는 고장이지만, 그렇다고 불교 유적이 없는 것도 아니다. 불교가 국교였던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법흥사지 칠층전탑(국보)·조탑리 오층전탑(보물)·운흥동 오층전탑(보물)·평화동 삼층석탑(보물)을 비롯해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방문한 천년고찰 봉정사 등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불교문화유산이 많이 남아 있다.

사화에 연루돼 고초 겪어

안동시 길안면 묵계리에는 국가 명승으로 지정된 만휴정 원림(晩休亭 園林)이 있다. 만휴정 원림의 규모는 4만 2,336㎡에 달한다. 고랭지 사과 생산지로 유명한 청송이 지척이다 보니 만휴정 주변에는 사과 재배 농가가 많다.

안동 시내에서 길안면으로 가는 왕복 2차선 도로를 따라 가다 보면, 도로 왼쪽에는 묵계서원, 오른쪽엔 만휴정 푯말이 나온다. 만휴정 푯말을 따라가면 다리가 나오고, 지나자마자 오른쪽에 만휴정 주차장이 보인다. 주차 후 마을을 지나 계곡을 따라 구불구불한 시멘트 포장길을 걸어 오르다 보면 왼쪽은 산비탈, 오른쪽은 낭떠러지다. 오르막길이 끝난 곳에서 소나무 사이로 높이 24m의 폭포가 눈에 띄고, 그 위로 정자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바로 만휴정이다. 입춘을 보름여 앞둔 어느 날, 만휴정을 찾았다. 평일인데도 관광객이 심심찮게 오갔다.

한파로 전국이 꽁꽁 얼어붙었는데, 만휴정 인근도 예외는 아니었다. 폭포 아래로 떨어지던 물도, 만휴정 앞을 흐르던 계곡물도 꽁꽁 얼었다. 만휴정 위쪽 너럭바위에도, 주변 산책로에도 얼음이 깔려 있어 자칫 한눈을 팔다간 낭패를 보기 십상이었다.

만휴정으로 가려면 10m가 넘는 나무다리를 건너야 한다. 다리 위에 시멘트를 덧발라 돌다리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아래에서 보면 네 개의 굵고 긴 통나무가 놓여 있다. 다리를 건너기 전에 살펴보니, 흙돌담에 둘러싸인 만휴정의 모습은 단아했고 기품이 있었다. 청렴결백한 선비의 고고함이 느껴졌다.

폭포 위로 보이는 정자가 만휴정이다.
폭포 위로 보이는 정자가 만휴정이다.

조심해서 다리를 건넌 후, 다시 좁고 낮은 대문을 지나니 파도 모양의 거대한 바위가 만휴정 일원을 감싸듯 내려다본다. 만휴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이루어진 건물인데, 정면은 누마루 형태여서 앉아서 자연경관을 감상할 수 있다. 양편으로 군불 때는 온돌방이 있는데, 독서와 사색의 공간이다. 문화재보호 차원에서 정자에 앉는 것은 금하고 있다. 담장 내에는 매실·감나무 등이, 담장 밖에는 배롱나무·소나무·오동나무 등이 식재돼 있다. 또 주변에는 소나무와 노간주나무 등 다양한 식물이 자라고 있다. 만휴정 담장 내부에 인공과 자연의 조화로움이 있다면, 외부는 천연 그대로의 자연이다. 대청마루 안에는 ‘쌍청헌(雙淸軒)’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만휴정을 건립한 김계행(金係行, 1431~1517) 선생의 장인 당호다.

만휴정은 깊은 골짜기에 모습을 감춘 채 세월을 따라 흐르고 있었다. 안동 김씨 문중 사람과 지역민·학자·시인 묵객·화가·사진가 등 일부를 제외하고 만휴정을 아는 이도, 찾는 이도 그다지 많지는 않았을 터. 그런데 2018년 모 드라마가 인기를 끌면서 촬영지였던 만휴정에 관광 인파가 끊이질 않고 있다. 특히 드라마 촬영무대였던 나무다리는 첫 손에 꼽히는 포토존이 됐다. 드라마보다 더 멋진 사진을 찍고자 계곡물에 들어가거나 경사가 급해 위험한 폭포 아래로 내려가는 수고로움도 마다하지 않는다. 오죽하면 안동시에서 ‘인생샷 건질라다 큰일납니데이’라는 경고 문구를 붙여놓았을까.

‘만년에 쉬는 정자’라는 뜻을 지닌 만휴정은 조선 전기의 문신인 김계행 선생이 무오(戊午)·갑자(甲子) 사화(士禍)를 피해 고향으로 돌아와 말년을 독서와 사색으로 보내고자 1500년 경 건립한 정자다.

김계행의 자는 취사(取斯), 호는 보백당(寶白堂)이다. 그는 50세의 늦은 나이에 과거급제했다. 그러다 연산군 때 일어난 사화에 연루돼 태장을 맞는 등 고초를 겪었다. 그 후 고향인 안동 풍산으로 내려와 집 근처에 작은 집을 짓고 ‘보백당(寶白堂)’이라 이름 붙였다. ‘보백당’은 김계행 자신이 읊은 시 ‘오가무보물(吾家無寶物) 보물유청백(寶物惟淸白)’에서 따왔다. “우리 집에는 보물이 없다. 있다면 오직 청백만이 보물이다.”라는 뜻이다. 이 글귀는 만휴정 위쪽 너럭바위에 새겨져 있고, 만휴정에도 걸려 있다.

만휴정에서 보이는 계곡의 바위 위에는 ‘보백당만휴정천석(寶白堂晩休亭泉石)’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이처럼 김계행 선생은 거대한 자연 속에 인공의 작은 집 한 채를 짓고, 자연을 벗 삼은 듯하다. 만휴정이 위치한 지역의 지명은 원래 ‘거묵역’이었는데, 김계행 선생이 ‘묵계’로 바꿨다고 한다. 〈대산집〉 제46권 ‘묵계서원 읍청루 상량문(上樑文)’의 주석에는 ‘묵계의 본래 지명은 거묵역(居默驛)이었는데, 1500년(연산군 6)에 김계행(金係行)이 내려와 만휴정(晩休亭)을 짓고 살면서 정자 앞 시내를 보고 마을 이름을 묵계(默溪)라고 고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승려가 된 조카에 매 들어

보백당 김계행은 청백리로 유명하다. 그의 청렴결백하고 고결한 인품은 〈조선왕조실록〉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성종실록〉 283권, 성종 24년(1493) 10월 24일(을유) ‘홍치(弘治) 6년 이문흥과 이거인에게 관직을 제수하다’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이문흥(李文興)을 통정대부(通政大夫) 성균관 사성(成均館司成)으로, 이거인(李居仁)을 절충장군(折衝將軍) 전라좌도수군절도사(全羅左道水軍節度使)로 삼았다. 사신이 논평하기를 “이 정사(政事)에 김계행(金係行)을 성균관 사성으로 삼았는데, 김계행은 학행(學行)이 있었다. 형의 아들인 중[僧] 김학조(金學祖)가 일찍이 광묘(光廟)에게 사랑을 받았는데, 김계행에게 말하기를 ‘아저씨가 만약 벼슬을 얻고자 하시면 마땅히 이를 도모하겠습니다.’라고 하자, 김계행이 노여워하여 매를 쳤으니, 이때 의논이 이를 아름답게 여겼다.”고 하였다.……”

여기서 ‘광묘’는 세조를 일컫는다. 이 일화는 김계행이 서른두 살 때, 성주고을에서 유생을 가르치는 교수로 있을 당시의 일이다. 보백당 선생이 회초리를 친 학조 스님(學祖, ?~?)은 김계행의 형이자 한성부 판관을 지낸 김계권(係權)의 5남 6녀 중 장남이었다. 당시 학조 스님은 세조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 스님은 과거에 실패한 숙부가 벼슬길에 뜻이 있다면 돕겠다고 했지만, 보백당은 크게 화를 냈다고 한다.

13살의 어린 나이에 안동 학가산 애련사(艾蓮寺)에서 출가한 학조 스님은 관악산 삼막사 등곡대에서 득도했다. 세조 때부터 연산군까지 국사(國師)를 지냈다. 도호(道號)는 등곡(燈谷) 또는 황악산인(黃岳山人)이다. 스님은 세조가 불교에 귀의한 후 왕실의 후원으로 중종 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불사를 관장했다. 학덕이 뛰어났고, 웅문거필(雄文巨筆)의 문호로 칭송받았다.

신미(信眉)·학열(學悅) 스님 등과 함께 세조 5년(1459) 〈월인석보(月印釋譜)〉를 간행하는 등 많은 불경을 한글로 번역·간행했다. 특히 신미대사를 도와 한글 활용에 기여한 공적이 있다. 또한 금강산 유점사를 중건하고, 합천 해인사 및 팔만대장경을 보관하는 대장경판당을 중수했다. 또한 팔만대장경을 3부 간인(刊印)했다. 그러나 이권 청탁과 궁녀·하인을 사적으로 이용하는 등 물의를 빚어 지탄을 받기도 했다. 말년에는 출가사찰인 학가산 애련사로 돌아와 입적했다.

아무리 숙부라고 해도 출가수행자에게 회초리를 든다는 것은 현시대에서는 상상조차 못 할 일이다. 하지만 조선시대임을 감안하면 수긍이 간다. 김계행은 후손들에게도 철저하게 청렴을 가르쳤다. 만휴정에는 ‘지신근신(持身勤愼) 대인충후(待人忠厚)’라는 글이 적힌 현판이 있다. “몸가짐을 삼가고, 타인을 대할 때는 진실하라.”는 뜻으로, 김계행이 후손들에게 남긴 말이라고 한다.

김계행은 묵계서원과 만휴정을 오가며 만년을 보내다가 91세 때인 1517년 생을 마감했다. 당시의 평균 수명을 감안하면 장수를 누린 셈이다. 선생 사후 지방의 유생들이 숙종 32년(1706)에 김계행을 추모해 만휴정 인근에 묵계서원(默溪書院)을 짓고 향사(享祀)했다. 철종 10년(1859)에는 이조판서에 추증됐다.

마루에 앉아 바깥 풍경을 바라보았을 선비들의 여유로움이 느껴진다. 지금은 문화재 보호를 위해 마루 출입을 금하고 있다.
마루에 앉아 바깥 풍경을 바라보았을 선비들의 여유로움이 느껴진다. 지금은 문화재 보호를 위해 마루 출입을 금하고 있다.

만휴정 옆에 앉아 풍경을 바라보노라니 바람에 소나무 가지가 부딪히며 내는 소리와 계곡물 소리가 시원스레 들렸다. 산골짜기여서 해는 산 아래에 비해 일찍 졌지만, 그 또한 한가로움과 여유로움으로 다가왔다. 다리 아래에 잠시 앉았다. 그때 “여긴, 이것밖에 없나보네. 너무 볼 게 없다.”고 아쉬워하는 관광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앞서는 지역민으로 보이는 서너 명이 와서 건물과 주변을 한참 동안 살펴보고 자리를 떠났다. 만휴정에 얽힌 역사와 뒷이야기 등을 나누면서 말이다.

각자의 성향에 따라 볼 게 없을 수도, 볼 게 많을 수도 있다. 필자에게 만휴정은 볼 것이 별로 없는 곳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게 많은 명소였다. 가장 높은 건물을 세우려고 하고, 휘황찬란한 건물에 살고 싶어하는 욕망의 시대, 만휴정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법구경〉에 “한가하고 지극한 곳에 머물러라. 그러면 수행자는 마음의 평화를 얻고 하늘의 즐거움을 맛보게 될 것이며, 저 진리의 깊은 뜻을 깨닫게 될 것이다.”라는 경구가 있다. 김계행이 세속과 격리된 깊은 산골짜기에 정자를 짓고 만년을 보낼 때의 마음도 이러하지 않았을까 싶다.

(왼쪽)만휴정 현판, 뒤쪽에 쌍청헌 현판도 보인다.​​​​​​​(오른쪽)만휴정 위쪽 너럭바위에는 김계행 선생이 읊은 시 구 절 ‘吾家無寶物 寶物惟淸白’ 글귀가 새겨져 있다.
(왼쪽)만휴정 현판, 뒤쪽에 쌍청헌 현판도 보인다.​​​​​​​(오른쪽)만휴정 위쪽 너럭바위에는 김계행 선생이 읊은 시 구 절 ‘吾家無寶物 寶物惟淸白’ 글귀가 새겨져 있다.
만휴정은 10m 길이의 나무다리 너머에 있다. 다리 위를 시멘트를 덧발라 돌다리처럼 보이기도 한다.
만휴정은 10m 길이의 나무다리 너머에 있다. 다리 위를 시멘트를 덧발라 돌다리처럼 보이기도 한다.
만휴정은 흙돌담으로 외부와 경계를 삼았다. 마당에는 매실나무 등 다양한 수목이 식재돼 있다.
만휴정은 흙돌담으로 외부와 경계를 삼았다. 마당에는 매실나무 등 다양한 수목이 식재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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