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딱지에 팔다리 당겨 넣듯
생각 거둬들이는 수행자 되길”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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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사랑한 거북

사람들은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내 집 뿐이리.”하는 노래를 부르며 집이 가장 안전하고 편안한 곳이라고 말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안락한 장소인 집을 등에 늘 짊어지고 다니는 나는 거북입니다. 등딱지의 무게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무겁지만 위험한 상황에 부닥쳤을 때 사지와 머리를 등딱지 속으로 쏙 집어넣으면 걱정할 일이 없습니다.

얼마나 편하고 좋은가요? 여차하면 쏙~ 숨어버릴 수 있고, 무척 단단하여 웬만큼 억센 이빨을 가진 동물이 아니면 으스러뜨리지 못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곳,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 세상에서 가장 튼튼한 곳이 바로 내 등딱지, 내 집입니다. 사실 좀 무겁기는 합니다. 하지만 5천만 년에 걸쳐 갈비뼈가 진화해서 딱딱한 등딱지가 되어버렸으니 벗어놓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죽을 때까지 등딱지를 짊어지고 다녀야 하는 것이지요.

〈이솝우화〉에서는 우리 거북이들이 이 등딱지 집을 짊어지고 다니게 된 사연을 이렇게 들려줍니다. 아주 오래 전 제우스신이 자기 결혼식 파티에 모든 동물들을 초대했습니다. 동물들은 저마다 기쁜 마음에 달려가서 제우스신과 그 신부를 축복했겠지만 나는 가지 않았습니다. 이튿날 제우스신이 찾아와서 “왜 오지 않았느냐?”고 따져 묻더군요. 나는 말했습니다.

“나는 집이 좋아요. 이 세상에서 집보다 더 편하고 좋은 곳이 어디 있습니까? 이 집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당신의 결혼파티에도 가지 않았지요.”

제우스신이 노발대발하더군요. 그러더니 내게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그렇게 좋은 집, 평생 짊어지고 다녀라!”

그 이후로 나는 어디를 가든 딱딱하고 무거운 집을 등에 짊어지고 다니게 됐습니다.

아무튼 좋습니다. 집이 좋은 건 진리입니다. 세상 어디를 가도 집보다 더 좋은 곳이 없다는 걸 부정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며 여행을 즐기는 사람도 결국은 돌아갈 고향과 집이 있다는 것에 안도하지요. 집은 안식처입니다. 아무리 누추해도 내 한 몸 눕힐 수 있는 곳이니까요.

사람들은 집 한 채 마련하느라 소중한 삶을 다 바칩니다. 융통할 수 있는 모든 자금을 총동원합니다. 오죽하면 영혼까지 끌어모은다고 해서 ‘영끌’이라는 말이 생겨났겠습니까. 집을 장만했다는 데에서 오는 안도감은 그만큼 유혹이 큽니다. 내가 그 무거운 등딱지를 평생 짊어지고 다니는 것과 사람들이 집 한 채 장만하는 것에서 평생 자유롭지 못하는 것은 무척 닮은 꼴입니다.

집은 의지처인가? 파멸처인가?

이 세상에서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내 한 몸을 뉘고, 가족을 이루고, 사랑하고, 평생을 안락하게 보낼 집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견고하지 않지요. 그런데 너무 편하고 좋다 보니 사람들은 그런 사실을 깜박 잊어버리곤 합니다. 집이 무너지는데도 벗어날 줄 모르고 집에 집착해서 재앙을 맞이하는 일도 벌어집니다. 집이 안식처가 아닌 파멸처가 되어버리는 것이지요. 이번에는 집을 떠나지 못해 슬픈 최후를 맞이했던 나의 전생을 들려드리겠습니다.

옛날, 브라흐마닷타왕이 나라를 다스리고 있을 때, 바라나시에 커다란 자연호수가 생겨났습니다. 비가 많이 와서 물이 불어나면 호수는 거대한 강이 되어 도도하게 흘렀고, 가물어 물이 줄어들면 생물이 살기 어려운 실개천으로 변했지요.

그 호수에 깃들어 살고 있던 어류들은 홍수가 날지 가물지를 본능적으로 알아차렸습니다. 그런데 그해에는 몹시 가물 것으로 예측을 했습니다. 그러면 호수가 말라붙어버릴 테니 그들은 서둘러 큰 강으로 옮겨가기로 했습니다.

모든 물고기와 거북이들이 거처를 옮기기 전에 내게 와서 말했습니다.

“이보게. 우리와 함께 가세. 이곳은 곧 말라붙어서 살 수 없게 될 거야.”

하지만 난 싫었습니다.

“이 호수는 내가 태어나서 자란 곳이야. 부모님이 살고 계신 곳이기도 하지. 그러니까 나는 이곳을 버릴 수가 없어.”

동무들은 나를 설득할 수 없음을 알고 그냥 떠나버렸습니다. 나는 홀로 그곳에 남았습니다. 집을 떠나다니요.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여름이 되어 호수의 물이 말라가기 시작했습니다. 뜨거운 볕을 피하고 물을 찾아서 나는 필사적으로 땅을 파헤쳤습니다. 그리고 깊숙하게 땅속으로 들어가서 숨었습니다.

그때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가만 귀를 기울였더니, 때때로 그릇 빚을 흙을 퍼가려고 오는 도공이었습니다. 그는 연장을 들고 흙을 파내기 시작했습니다.

퍽~ 퍽~.

내 몸 위로 흙을 퍼내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조금 긴장했지만 괜찮습니다. 이곳은 내 집이니, 나를 지켜줄 것입니다. 게다가 내 등딱지가 여간 딱딱해야 말이지요. 웬만한 연장으로는 조그만 상처도 내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하는 순간 내 등딱지에 강한 충격이 느껴졌습니다. 아픔을 느끼기 무섭게 내 몸이 공중으로 붕 떠올랐고, 그러다 냅다 뜨거운 바닥에 내동댕이쳐졌습니다. 아, 이럴 수는 없습니다. 도공의 커다란 호미가 그만 내 등딱지를 찍었고, 흙덩이인 줄 알고 힘껏 들어 올려 패대기를 친 것입니다.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 튼튼한 등딱지가 빠개지고 말았습니다. 몸의 아픔도 아픔이지만 그 깊은 굴이 허무하게 파헤쳐지자 거주지에 대한 배신감이 엄습했습니다. 세상의 그 어떤 위협에서도 나를 안전하게 지켜 주리라 믿어 의심하지 않았던 집! 모두가 떠나가도 나는 그 집에 대한 사랑과 은혜를 저버릴 수가 없었기에 꿋꿋하게 버티고 있었는데 말이지요.

“사는 곳을 버릴 수가 없었어. 어떻게 이곳을 버리고 떠날 수 있냔 말이야. 하지만 그 애착이 나를 파멸로 몰아넣었구나. 집에 집착한 결과가 이렇게 허망한 죽음이란 것인가.”

나는 마지막 힘을 끌어 모아 소리쳤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은 어디일까요? 세상에서 가장 견고한 곳은 어디일까요? 세상에서 나를 가장 안심시켜줄 곳은 어디일까요? 그곳은 집입니다. 하지만 그 집도 허무하게 무너져 내리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내가 마지막까지 애착을 가지고 고수해야 할 만한 것은 무엇일까요? 가족은 영원할까요? 재산은 영원할까요? 내 명예와 권력이 영원할까요? 이 몸은요? 마음 맞는 것은요?

그 모든 것이 인연을 따라 생겨났다가 인연이 다하면 흩어집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도 내 곁에 영원히 머물 수 없고, 아무리 굳은 마음도 세월에 빛이 바래집니다. 저 웅장한 건축물도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바스러집니다. 집착의 끝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허무한 죽음, 파멸뿐입니다. (〈자타카〉 178번째 이야기)

수덕사 전각 외벽에서 찾아볼 수 있는 나무로 조각된 거북이.

자신을 지켜라, 거북처럼

경전에서는 나를 무거운 등딱지를 집으로 삼아 평생 짊어지고 다녀야 하고, 그런 습성이 남아서 자신의 거처에 애착한 나머지 파멸을 겪게 되는 어리석은 중생으로 보고 있으니 사실 속이 상합니다. 그게 다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는 바깥에 위험이 닥치면 목과 사지를 딱딱한 등딱지 안으로 감춰 넣고 버팁니다. 성마른 자들은 제 성질에 위험을 자초하지만 은근과 끈기의 상징인 나는 한번 목과 사지를 감추고서 버티면 나를 노리던 사냥꾼들은 제풀에 지쳐 떠나갑니다.

아주 오래 전,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저녁 무렵 일입니다. 나는 어슬렁어슬렁 강가를 따라 기어나갔습니다. 혹시 먹을거리가 있는지 찾아볼 셈이었지요. 그런데 저 맞은편에서 뭔가 기척이 느껴졌습니다. 가만히 지켜보자니 승냥이 한 마리가 강가를 거슬러 오고 있었습니다. 분명 저 녀석도 사냥감을 찾아 나선 것이 분명합니다. 녀석이 나를 보았습니다. 빠른 속도로 내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나는 목과 네 다리를 등딱지 속에 감춰 넣었습니다. 그리고 움츠린 채 꼼짝하지 않았습니다. 과연 굶주린 승냥이가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아무 소리도 내지 않지만 나는 눈치를 챘습니다.

‘틀림없이 저 승냥이는 내가 목을 내밀거나 사지를 내밀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때를 노려 잡아채서 찢어 먹으면 한 끼 밥으로 충분할 것이니까 말이다.’

승냥이 생각을 알아차린 내가 등딱지 밖으로 목이나 사지를 내밀 수는 없습니다. 누가 이기나 버티기로 들어갔지요. 조금도 방심하지 않고 틈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잡아먹을 기회를 노리던 승냥이가 슬그머니 멀어져 갔습니다. 나는 살았습니다.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말씀하십니다. 승냥이는 사람의 번뇌 혹은 악마를 상징한다고요. 거북이는 수행자를 상징합니다. 사람에게는 여섯 가지 문이 있어 세상을 향해 활짝 열려 있습니다. 여섯 가지 문이란 바로 눈·귀·코·혀·몸·의지입니다. 이 여섯 가지를 단속하지 못하면 보이는 대로, 들리는 대로, 냄새나 맛, 촉감이 느껴지는 대로 집착하고 휘둘립니다. 번뇌가 스멀스멀 피어올라 그 사람을 덮어버리고, 번뇌에 사로잡힌 사람은 악업을 저지를 것이며, 악업의 결과로 찾아오는 괴로운 과보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세상을 살아가는데 눈을 감고 살 수는 없습니다. 귀를 닫고, 코를 막거나 입을 봉한 채로 살 수는 없습니다. 무엇을 보고 듣고 맛보고 느끼더라도 거기에서 품게 되는 이미지[相]에 이끌리지 않도록 단단히 자신을 지켜야 합니다. 그러는 수밖에 없습니다. 번뇌라는 악마에게 틈을 보이지 말아야 합니다.

부처님은 이렇게 게송으로 노래하였습니다.
거북이 자기 등딱지에 팔다리를 당겨 넣듯
수행자는 생각을 거두어들여야 한다.
집착을 떠나 남을 해치지 않으며
집착을 완전히 소멸하여
그 누구도 비난하지 말아야 한다.

- 〈쌍윳다 니까야〉 ‘거북이 비유경’ 중에서

당신은 등딱지가 견고하니 절대 부서질 일이 없다고 안주하고 그에 집착하느라 파멸에 이르겠습니까? 아니면 등딱지 속으로 세상을 향한 관심을 잘 거둬들여 스스로를 단단히 길들여서 해탈에 이르겠습니까? 우리 거북이의 두 가지 모습에서 종교인으로서의 당신 자신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이미령
동국대학교에서 불교학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경전번역가이자 불교대학 전임강사·북칼럼니스트이며, 경전이야기꾼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붓다 한 말씀〉·〈고맙습니다 관세음보살〉·〈이미령의 명작산책〉·〈시시한 인생은 없다〉 등이 있다. 또 〈직지〉·〈대당서역기〉 등 다수의 번역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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