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전래 초기부터 전승돼
당대(唐代) 지역문화 중심 자리매김

서안의 진시황병마용(秦始皇兵馬俑)박물관 소장 묘벽화. 탑을 향해 예불하는 장면을 새겼다.
서안의 진시황병마용(秦始皇兵馬俑)박물관 소장 묘벽화. 탑을 향해 예불하는 장면을 새겼다.

설법으로 민중 일깨운 ‘창도사’

초기 중국불교에서는 스님을 ‘교화자(敎化子)’라고 부른 적이 있다. ‘대중을 불교의 가르침으로 이끌어 교화한다.’는 뜻에서 붙여진 말이다. 당시 스님들은 인도 승가와 마찬가지로 탁발을 했는데, 중국에서 걸인을 ‘화자(花子)’·‘규화자(叫化子)’라고 부르는 것도 ‘교화자’에서 유래되었다.

불교가 중국에 처음 전해졌을 때는 경전이 번역되지 않아서 탁발 걸식으로 유행(遊行)하며 중생을 교화해야 했기에 초기 스님들의 노력은 눈물겨운 것이었다. 스님들은 대중의 흥미를 끌기 위해 운문 형식의 경구를 노래처럼 들려주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불법을 전해야 했으니, 중국의 속강은 1세기경 불교의 전래와 함께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위진남북조시대(3∼6세기)에 들어오면, 대중포교를 맡아 활약하는 스님들의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소리’와 ‘언변’이 꼽히기도 한다. 〈양고승전(梁高僧傳)〉에는 뛰어난 고승을 업적에 따라 열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소개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범패에 능한 ‘경사(經師)’·‘창도(唱導)’ 두 유형이 있다. 경사에는 아름답고 뛰어난 소리로 감명을 준 스님들을 실었고, 창도에는 소리와 더불어 설법에 능한 스님들을 실었다. 이들은 모두 ‘민중을 일깨우는’ 덕목으로 존경받은 고승이었다.

속강과 관련해 주목해야 하는 것은 ‘창도’라는 포교방식이다. 〈양고승전〉의 기록을 보면, 당시 창도사(唱導師)로 크게 활약하려면 ‘소리·언변·재능·박식[聲辯才博]’을 두루 갖추어야 했음을 알 수 있다.

소리가 좋지 않으면 대중을 일깨우기 어렵고, 언변이 없으면 시절에 맞게 표현할 길이 없으며, 재능이 빈약하면 골라 쓸만한 말이 없고, 박식하지 않으면 말에 근거가 없다. …… 이를테면 군왕과 장자를 대상으로 할 때는 세속의 고전을 함께 인용해 유려하고 핵심적인 말로써 설법하고, 범부와 서민이 대상일 때는 사실적인 일과 구체적인 형태로 직접 보고 듣는 것을 예로 들어 설법해야 한다.

군왕에서 서민에 이르기까지 눈높이에 따라 설법방식과 내용을 달리했으니, 그야말로 대기설법(對機說法)의 속강이 펼쳐진 것이다. 따라서 〈고승전〉에 이름이 오를 만큼 존경받았던 창도사는, 소리만 뛰어난 게 아니라 박식하여 많은 분야를 꿰뚫고 있었으며, 적재적소에 쓸 수 있는 재능과 언변을 갖추고 있었다. 불경은 물론 유교의 경전·시문·역사·고전에도 밝아 풍부한 스토리텔링의 자원을 지니고 있었다.

창도사는 각종 재회(齋會)와 법회에 초청돼 기량을 발휘했다. 이를테면 팔관재(八關齋)에서는 “향로를 받쳐 들고, 강개한 목소리로 머금고 토하며 누르고 드러내어 희로애락과 무상함, 윤회전생과 삼세인과의 불법을 파헤치면 듣는 이들의 몸과 마음을 전율케 해 큰 감동을 주었다.”고 한다. 이들 창도사의 활약은 속강 전승의 훌륭한 모델이 되었을 것이다.

서안의 진시황병마용박물관 소장 벽화. 중생들의 다채로운 이야기를 새겼다.
서안의 진시황병마용박물관 소장 벽화. 중생들의 다채로운 이야기를 새겼다.

강창(講唱)문학 중심에 선 불교

이처럼 중국불교에서는 일찍부터 속강이 전승되고 있었으나, ‘속강’이라는 용어가 생겨난 시기는 당나라에 들어와서이다. 경전을 해설하는 강경(講經)의 대상을 출가자와 재가자로 구분해서 재가자를 위한 강경을 ‘대속강경(對俗講經)’이라 했고, 이를 줄여 ‘속강’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속강은 ‘강창(講唱)’이라는 문학 장르와 밀접한 관련을 지녔다. ‘강창’은 사설(辭說)과 노래를 섞어가며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려주는 일인극 공연형식을 말한다. 유능한 종합예능인이 역사·설화·사건 등의 스토리를 흥미롭게 풀어가는 방식이다. 이러한 중국의 강창문학이 발전을 이루게 된 데는 불교의 영향이 컸다. 불교 경전과 설화에 담긴 무궁무진한 이야깃거리는 누구나 공감하는 보편의 가치와 함께 핵심을 꿰뚫는 흡인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불교로 인해 강창의 소재와 구성이 풍부하고 치밀해졌을 뿐만 아니라, 불교의 속강 또한 강창 형식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오늘날 강창문학을 논할 때 불교가 핵심을 이루게 되었다. 이처럼 강경 중심에서 벗어나 문학·연희적 요소를 도입해 경전 내용을 알기 쉽고 재미있게 전하는 일을 전문으로 하는 스님을 속강법사·화속법사(化俗法師)라고 불렀다.

특히 당나라의 사원이 대중과 활발하게 소통하면서 지역공동체 문화의 중심이 된 점은 주목할 만하다. 사원 마당에 회장(會場)을 설치해 대형의례나 집회는 물론 많은 이들이 자유롭게 모여 문예·오락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따라서 사원은 연중 사람들로 북적거렸고, 속강법사는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설법하기도 했지만 본격적인 속강은 사원 회장에서 펼쳐졌다.

일본의 승려 엔닌(圓仁)이 9세기에 당나라를 순례하면서 기록한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는 당시 중국에 성행했던 속강의 다양한 모습이 담겨 있다. 연초가 되면 여러 사찰에서 〈화엄경〉·〈법화경〉·〈열반경〉 등의 강의가 한 달간 이어졌고, 사찰마다 법사를 정해 속강을 펼쳤다. 841년의 기록을 보면, 회창사(會昌寺)에서 〈법화경〉을 강설한 문서법사(文漵法師)가 당시 속강의 일인자로 이름이 높았다고 한다.

문서 스님은 속강에 탁월한 재능을 지녀 수십 년간 대중에게 최고의 권위를 인정받았던 인물이다. 속강으로 대덕(大德)의 지위까지 올랐으나 835년(문종 9) 사회기강을 해친다는 비판과 함께 유배되고 속강도 폐지되었다. 이후 속강은 무종의 즉위와 함께 7년 만에 다시 복원된다. 비판세력에 의해 ‘사회기강을 해친다.’는 공격을 받고 폐지되었을 정도로 당시 속강은 규범적인 경전 해설과 함께 다양한 대중포교의 방식을 포함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입당구법순례행기〉에는 9세기 중국에 성행했던 속강이 당나라의 신라사찰인 적산법화원(赤山法華院)에서도 자연스레 이루어진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추후 한국 편에서 다루겠지만, 우리나라 속강의 본격적인 흔적을 찾을 수 있는 소중한 자료이다.

(왼쪽) 돈황석굴에서 발견된 〈시왕경〉의 ‘제5 염라대왕 변상도’. 망자가 염라대왕 앞에서 업경대에 비친 생전의 자신을 바라보는 장면이다.(오른쪽) 돈황석굴에서 발견된 〈시왕경〉의 ‘제10 오도전륜대왕 변상도’. 아홉 왕을 거치며 차례로 심판을 받은 뒤 다음 생으로 윤회하는 장면이다.
(왼쪽) 돈황석굴에서 발견된 〈시왕경〉의 ‘제5 염라대왕 변상도’. 망자가 염라대왕 앞에서 업경대에 비친 생전의 자신을 바라보는 장면이다.(오른쪽) 돈황석굴에서 발견된 〈시왕경〉의 ‘제10 오도전륜대왕 변상도’. 아홉 왕을 거치며 차례로 심판을 받은 뒤 다음 생으로 윤회하는 장면이다.

변문·변상은 속강의 시청각 자료

20세기 초, 돈황석굴의 벽 안쪽에서 5만 점이 넘는 문서가 발견돼 인류를 놀라게 했다. 그 가운데 대량으로 나온 9∼10세기의 변문(變文)은 속강과 밀접한 관련을 지닌다. ‘변문’은 강창류의 연행을 기록한 것이 많아 속강의 대본과 같은 역할을 했다. 강창·속강의 내용은 문자화되지 않고 입에서 입으로 구비전승되었으나, 한편으로는 이를 기록하는 작업도 병행한 것이다. 아울러 연행의 내용을 그림으로 그린 다양한 변상(變相. 경전 내용을 형상화한 그림)이 전해졌는데, 변문과 변상은 속강의 시청각 자료라고 할 만하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불교 고사(故事) 변문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인 8세기 중반의 ‘항마변문(降魔變文)’을 꼽을 수 있다. ‘항마변문’은 부처님의 제자 사리불과 육사외도(六師外道) 간의 신통력 대결을 다룬 내용으로 〈현우경〉 등을 참조해 창작한 것이다.

그런데 이 변문과 똑같은 내용을 담은 긴 두루마리 그림이 돈황 석굴에서 발견되었다. 이 변상도는 길이 약 571cm에 폭 28cm 크기로, 현재 프랑스국립도서관에 ‘펠리오 돈황사본 P4524’이라는 이름으로 소장돼 있다. 이야기의 전개에 따라 그려나간 그림 뒷면에는 각 장면에 해당하는 내용이 운문으로 쓰여 있어, 구연을 위한 장치임을 알 수 있다.

특히 많은 변문에는 ‘이 장면을 보십시오(看∼處)’, ‘이 장면으로 말할 것 같으면(∼處 若爲陳說)’ 등의 상투어가 등장해 그림을 보며 설명하는 텍스트임을 짐작하게 한다. 변상의 뒷면이나 여백에 적은 이런 글귀는 연행에서 활용하기 위한 용도만이 아니라, 해설과 어우러진 변상도의 완성도를 높이는 일이자 암기학습에도 유용한 자료였을 것이다.

또한 돈황석굴 17동에서는 두루마리 형태의 〈시왕경〉 변상도가 발견되었다. 제1 진광대왕부터 제10 오도전륜대왕까지, 망자가 각 대왕 앞에서 생전의 업을 심판받는 장면을 그리고 그 옆에 운문으로 ‘찬(讚)’을 적었다. 제5 염라대왕 변상도를 보면, 염라대왕은 망자의 생전기록을 펼친 채 앉아 있고, 목칼을 찬 망자는 업경대(業鏡臺)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찬’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다섯 번째 7일 염라에는 다투는 소리 그치고
죄인들의 마음에 한이 서려 달가워하지 않네.
머리채 잡힌 채 고개 들어 업경대 바라보니
비로소 생전에 지은 일 분명하게 알게 되네
.

망자는 중죄인처럼 취급받는 것이 억울했으나, 업경대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잘못을 뉘우치게 된다는 내용이다. 마지막 제10 오도전륜대왕 변상도에는 아홉 왕을 거치며 차례로 심판을 받은 뒤 각자 다음 생으로 윤회하는 장면을 담았다. 속강법사가 시왕도 두루마리를 가지고 마을을 다니며, 인과응보와 윤회의 이치를 설법하고 중생을 선(善)으로 이끄는 모습이 절로 그려진다.

서안 소림사(少林寺) 천불전 내벽을 두른 벽화. 천불전에 달마대 사를 모셨고, 현판에 ‘서방성인(西方聖人)’이라 적은 것으로 볼 때 전법을 찬탄하는 장면으로 보인다.
서안 소림사(少林寺) 천불전 내벽을 두른 벽화. 천불전에 달마대 사를 모셨고, 현판에 ‘서방성인(西方聖人)’이라 적은 것으로 볼 때 전법을 찬탄하는 장면으로 보인다.

중생과 함께하는 음악

중국불교는 공산화와 함께 회복 불가능할 정도의 타격을 받았다가 새롭게 깨어나는 중이다. 현재 스님들이 중생과 만나는 모습은 하나의 잣대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하지만, 신도들과 만남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 중 하나는 ‘함께하는 음악’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영산재·수륙재와 같은 의례에 전문적인 기량을 지닌 스님들이 범패와 작법을 맡지만, 중국에서는 의식을 전문으로 하는 스님이 따로 없다.

따라서 불교예술 영역이 발달하지 않은 반면, 의례의 전 과정에 신도가 참여하는 비중이 높다. 함께 합창하거나, 스님이 운을 떼면 대중이 뒤를 이어 주고받는 식으로 대구(對句)를 이루며 의식을 이끌어가는 것이다. 실제 대만의 사원에 며칠 머문 적이 있는데, 수시로 울려 퍼지는 청아한 스님들의 염불소리가 따라 부르기 쉬워 함께 흥얼거리곤 했다.

또한 수륙재·우란분재 등의 불교의례에서는 멜로디악기(선율악기)를 배제하고 타악기만 연주하는 반면, 그 밖의 행사나 시주집에서는 여러 악기를 다채롭게 쓰는 전통이 있다. 음악인류학 전공자인 윤소희 선생에 따르면, 이렇듯 사원에서 법기(法器)만 갖추는 것을 ‘선문불사(禪門佛事)’라고 하고, 민가에서 응수승(應酬僧)이 다양한 악기를 편성해 사용하는 것을 ‘응문불사(應門佛事)’라 한다.

여기서 ‘응할 응(膺)’에 ‘갚을 수(酬)’를 쓰는 ‘응수승’이라는 말이 흥미롭다. 응수란 서로 주고받는다는 말이니, 중생의 뜻과 근기에 응하는 스님이라는 의미이다. 본격적인 응수승 사찰도 있어, 중국의 속강은 이들 응수승에 의해 활발하게 펼쳐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응문불사 또한 ‘세련되고 우아한 악풍의 경음악(京音樂)’과 ‘농촌의 토속적 성격이 강한 겁음악(怯音樂)’의 두 갈래가 있다고 하니, 그야말로 적재적소의 응수이다. 대표적인 응수승 사찰로는 옛 스님들의 수많은 악기를 보관하고 있는 북경의 지화사(智化寺)를 들 수 있다. 명나라 때 세운 이 사찰은 악대까지 만들어 불교음악을 연주하며 민속행사를 열었고, 문화혁명 때 폐허화 되었다가 근래 다시 불악단(佛樂團)을 결성해 대중과 만나고 있다.

오늘날 강창으로 연행하던 옛 속강의 모습은 찾을 길이 없지만, 중국의 응수 스님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대중과 만나고 있을 것이다. 빅터 메이어(Victor H. Mair)가 “거대한 중국 땅덩어리의 어느 외진 구석에서 아직까지 이러한 이야기 구연이 계속되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가슴 설레었듯이 말이다.

대만 불광산사 대웅보전 앞에서 행해진 저녁예불. 스님들이 계단 앞 광장에 모인 신도들과 함께 예불을 올리고 있다. 

구미래
불교민속학 박사. 동국대ㆍ중앙대ㆍ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등에서 불교의 의례ㆍ무형유산ㆍ세시풍속 등에 대해 강의했고, 현재 불교민속연구소 소장으로 있다. 저서로 〈한국불교의 일생의례〉ㆍ〈한국인의 죽음과 사십구재〉ㆍ〈존엄한 죽음의 문화사〉ㆍ〈한국인의 상징세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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