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5호

“점 하나가 부처님 눈과 코
획 하나가 부처님 팔, 다리”
사경은 거룩하고 성스러운 佛事

코로나19가 발생한 지 2년이 흘렀다. 하지만 그 기세는 좀처럼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변이가 잇따르며 장기화로 가는 모양새다. 코로나19로 종교시설 방역수칙이 강화되면서 불자들의 신행활동에도 적신호가 켜졌다. 그렇다고 수행의 고삐를 늦출 수는 없는 일. 이번 호에는 불교수행법 중 하나인 ‘사경(寫經)’의 역사와 유래, 그리고 사경 수행을 하는 천태불자들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경전을 옮겨[베껴] 쓰는’ 사경(寫經)의 역사는 언제부터 시작됐을까? 부처님 입멸 직후 오백 비구는 한자리에 모여 그 가르침을 합송한 후 구전했다. 이런 방식은 수백 년간 이어졌고, 경전 결집에 문자가 사용되는 기원전 3세기 전후 최초의 경전이 만들어졌다.

경전은 불교의 전파 경로를 따라 한반도까지 전해졌다. 고구려·백제·신라인들은 한반도에 유입된 불교를 종교·문화적으로 성숙시켰다. 고대 삼국은 불교를 국가 통치이념으로 삼았기에 국가 차원에서 사찰 건립 등 대규모 불사를 벌이면서 불교문화를 꽃피울 수 있었다. 왕실과 귀족 중심의 불교는 점차 백성들에게도 널리 퍼져 불교는 개인과 가족의 행복,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는 종교로 확고하게 자리매김했다.

이와 함께 스님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참선·염불·사경·절하기 등 불교의 수행법은 대중에게 널리 확산됐다. 특히 사경은 대표적인 신행·수행법으로 불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오래된 불·보살상의 복장이나 탑의 내부에서는 〈법화경〉·〈화엄경〉·〈능엄경〉을 비롯한 다양한 경전과 다라니 사경본이 발견된다. 최근에도 불상이나 탑 조성 시에 사경본을 봉안할 정도이다.

국보 제196호 신라백지묵서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1~10, 44~50. 〈사진=문화재청〉
국보 제196호 신라백지묵서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1~10, 44~50. 〈사진=문화재청〉

우리나라 최초의 사경은?

우리나라 사경의 역사는 1,700여 년 한국불교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한다.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고(最古) 사경본은 리움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신라백지묵서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1~10, 44~50(국보 제196호)’이다. 신라 경덕왕 13년(754) 연기법사(緣起法師)가 속가의 부모를 위해 썼고, 이듬해 완성했다. 책머리에 변상도(變相圖)가 나오는데, 자색 닥종이에 금·은니로 그리고 먹으로 경문을 썼다. 말미에는 사경에 참여한 19명에 대한 자세한 내용과 제작방법, 간행 절차를 적은 14행의 발문도 나온다. 이 〈화엄경〉 사경본은 80권 〈화엄경〉을 저본으로 만들었다.

온전한 사경본은 아니지만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석가탑]에서 발견된 목판 인쇄본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과 해인사 팔만대장경도 사경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 김경호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사경장(寫經匠)은 “경판을 만든 후에는 경판 크기에 맞는 한지에 경전을 사경하는데 이를 ‘판하본(板下本)’이라고 한다. 판하본을 뒤집어 경판에 붙이고 기름을 먹이면 글자가 보이고, 이를 보고 각수가 새기기 때문에 경판도 사경의 한 종류라고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고려 문헌에 ‘사경’ 기록 다수

우리나라 사경은 고려시대에 크게 유행했다. 〈고려사〉 등 당시 문헌에는 사경과 관련한 내용이 다수 수록돼 있다. 〈고려사〉의 ‘작제건이 부친을 찾아가다가 서해용왕을 구해주다’편에는 태조 왕건의 할아버지인 작제건과 사경에 관한 설화가 나온다.

…… 바위 위에 한 채의 전각이 있었다. 문이 활짝 열렸고 안에 금자(金字)로 사경하는 곳이 있어 나아가서 보니 붓으로 쓴 점획(點劃)이 아직도 촉촉하였다. 사방을 돌아보아도 사람이 없는지라 작제건이 그 자리에 앉아 붓을 잡고 불경을 베끼노라니 어떤 여인이 홀연히 와서 앞에 섰다. …… 다시 자리에 앉아 불경을 오랫동안 베끼고 있으려니 그 여인이 다시 나타나 “나는 용녀(龍女)로서 여러 해 동안 불경을 베꼈으나 아직도 다 쓰지 못하였습니다. 다행히 그대는 글씨도 잘 쓰시고 또 활도 잘 쏘시니 그대가 머물면서 제 공덕(功德) 닦는 일을 도와주셨으면 하고, 또 우리 집안의 어려움을 없애 주셨으면 합니다.”라 하였다.

고려 스님들은 사경 솜씨가 매우 뛰어났다. 원나라의 사경승 파견 요청에 선발해서 보낸 사례도 있다. 〈고려사〉 권30·31·32·33·34에 따르면 충렬왕(忠烈王) 16년(1290)부터 15년 간 165명 이상의 사경승을 원나라에 보냈다. 원나라는 직접 사신을 보내 사경승을 징발하기도 했다. 또 충선왕 원년에는 원나라가 고려에 사신을 보내 사경에 쓸 종이를 요구하기도 했고, 충선왕은 1312년 〈금자장경(金字藏經)〉을 사경해 모후(母后)의 명복을 빌도록 했다. 명종 11년(1181)에는 왕이 〈은자장경(銀字藏經)〉의 사경을 명하자, 사람들이 경쟁적으로 재물을 냈고, 무뢰배들이 그 재물을 훔치려 불을 지르기도 했다.

사경은 목적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신행·수행·기도·예술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이에 대해 김경호 사경장은 “사경은 부처님의 법사리인 경전을 사성(寫成)하는 성스러운 일이므로, 매 순간 정성을 다해야 한다.”면서 “점 하나가 부처님 눈·코·입·귀이며, 획 하나가 부처님의 팔·다리라고 생각하면 정성을 다하지 않을 수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일반적으로 불자들이 행하는 사경은 신행에 가깝다. 수행은 신행보다 훨씬 차원이 높은 경계로, 몸·마음가짐뿐만 아니라 모든 면에서 최상의 상태를 유지하고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여법하게 해야 한다.”면서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불자들이 경건하고 성스러운 마음가짐으로 사경하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코로나19로 신행활동이 위축된 이 시기, 사경으로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고 자신의 신심을 더욱 증장해보길 권한다.


성룡사 강북지회장을 맡은 김미선 씨는 가정에서 사경을 할 때 책상에 다포를 깔고, 하얀 저고리와 법복바지를 입는다. 
성룡사 강북지회장을 맡은 김미선 씨는 가정에서 사경을 할 때 책상에 다포를 깔고, 하얀 저고리와 법복바지를 입는다. 

“〈법화경〉 사경 통해 부처님 가르침에 다가서는 불자 많아지길”
김미선 불자 / 서울 성룡사 신도회 강북지회장  ― 글 문지연 기자

천태종 서울 성룡사(주지 세운 스님)가 2월 7일 경내에 ‘전통사경반’을 개원했다. 전통사경반은 매주 월요일 오후 7시와 금요일 오후 2시에 운영된다. 강의는 김경호 사경장의 제자인 박경빈 사경작가가 맡고 있다.

전통사경반은 성룡사가 올해부터 신도들에게 권장하고 있는 ‘오종법사(五種法師) 운동’의 일환으로 개설됐다. 성룡사는 전통사경반 수강생을 사경지도자로 양성하고, 도제식 교육을 통해 전통 사경을 널리 보급한다는 계획이다. 또 〈법화경〉 사경집(전 7권)을 제작해 2월 15일 정월대보름에 신도들에게 배포하기도 했다. 성룡사 관계자는 “사경으로 오종법사의 행업을 완성해 시대의 고난을 극복하고, 일체중생의 구경성불을 발원해보길 바란다.”며 “정성껏 사경한 사경집을 잘 보관했다가 임종 후 관에 넣어서 극락까지 함께 지니고 가시라 권하고 있다.”고 말했다.

성룡사 강북지회장을 맡고 있는 김미선 불자(51·법명 법향심)는 이날 개강한 전통사경반의 수강생이다. 김미선 씨는 천태불자인 사촌언니를 따라 구인사에 방문한 뒤, 천태불자가 됐다. 그녀가 사경을 처음 접하게 된 시기는 20여 년 전이다. 당시 천태종에서 〈묘법연화경〉을 새로 발행했는데, 8~12대 천태종 종의회의장을 역임했던 덕산 스님이 신도들에게 〈묘법연화경〉 사경을 권했다. 천태종 소의경전인 〈법화경〉을 제대로 배우고 싶었던 그녀는 곧장 문구점에서 노트와 볼펜을 사와 사경을 시작했다.

전통사경반 수강생들은 첫 수업에서 먹을 가는 법(왼쪽)과 선을 긋는 법(오른쪽)을 배웠다. 
전통사경반 수강생들은 첫 수업에서 먹을 가는 법(왼쪽)과 선을 긋는 법(오른쪽)을 배웠다. 

김미선 씨는 당시 직장을 다니고 있었다. 그래서 시간을 정해놓고 사경을 하기가 쉽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사경을 하기 전에 늘 몸을 정갈하게 하고, 책상에 흰 다포를 깔아놓았다. 남들보다 빠르게 완성하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았지만, 뜻을 마음에 새기며 한 자 한 자를 천천히 적었다. 그렇게 완성한 〈법화경〉 사경집 한 권을 구인사에서 개최한 수륙영산대재에 가져가 부처님 전에 공양했다. 몇 십 권의 사경집을 가져온 불자가 부럽기도 했지만, 한 권이라도 스스로 완성해 부처님 전에 올릴 수 있었다는 사실이 기뻤다.

이후 김미선 불자는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을 했고, 두 아이를 낳았다. 직장을 그만두고 육아에 전념했는데, 주로 아이들이 노는 시간을 이용해 사경을 했다. 그녀는 흰 저고리와 법복 바지를 사경 복장으로 정해뒀다. 옷은 늘 깨끗이 관리했고, 사경 중에 부득이하게 다른 일을 해야 할 경우에는 옷을 갈아입었다. 누가 알려주지 않았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정성을 다하고 싶은 마음에 정한 규칙이다. 또 사경하는 동안에는 마음을 온화하게 하고, 아이들을 꾸짖지 않으려고 주의를 기울였다.

그 후에도 사경을 지속하고 싶었지만, 삶에 쫓겨 시간 내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도 사경집을 구입해 틈틈이 사경을 했고, 서울 관문사 사경반인 ‘법화림’에 들어가 사경수행을 이어왔다. 사경 외에도 매일 관음주송을 하고, 자모회·합창단 활동을 하는 등 신행활동을 했다. 자모회장을 맡았을 때는 회원들과 〈법화경〉을 독송하고, 스님의 특별 법문을 청해 듣기도 했다.

전통사경반 수강생들이 박경빈 강사의 강의를 듣고 있다.
전통사경반 수강생들이 박경빈 강사의 강의를 듣고 있다.

그녀는 사경을 하면서 특별한 원력이나 발원을 세우지는 않았다. 그저 자녀들이 자신이 수행하는 모습을 보고 자연스레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길 바랐다. 이런 마음으로 가정에서의 수행에 더욱 힘썼다. 그런 그녀의 바람이 닿았는지, 아이들은 자연스레 천태불자로 성장했다. 현재 그녀와 함께 구인사 안거에 동참하고, 큰 아들은 청년회 활동을 하는 등 신행활동을 함께하고 있다. 남편도 퇴직 후에는 사찰에서 봉사하고 싶다는 뜻을 넌지시 비치고 있다.

김미선 불자에게 성룡사 전통사경반에 가입한 이유를 묻자 “부모님께 효도하고 싶은 마음에 수강신청을 하게 됐다.”고 대답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올해 94세, 어머니는 91세로 두 분 모두 연로하다. 언젠가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그녀가 한 글자씩 정성스레 적은 사경집을 관에 넣어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김미선 불자는 “첫 수업을 들으며 가진 초심(初心)이 전통사경반을 마치는 날까지 변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면서 “많은 사람이 〈법화경〉 사경을 통해 부처님의 가르침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길 바란다.”며 사경 수행을 추천했다.

“붓을 잡는 방법부터 점을 찍고 획을 그리는 방법까지 전통사경을 배우는 과정이 낯설지만, 기존에 일반 펜으로 하던 사경보다 정성이 더 들어가는 것 같아요. 또 코로나19의 확산으로 대면 신행활동이 어려워졌는데, 소규모라도 다른 사람들과 모여 사경하는 기회가 생겨서 더없이 반갑습니다. 전통사경은 사경을 접하는 사람에게 올바른 사경의 길을 열어주고, 사경에 익숙한 분들에게도 수행이 성장하는 계기를 만들어 줄 거에요.”

 

2009년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사경 수행을 해오고 있는 박귀숙 재무가 자택에서 사경을 하고 있다.  
2009년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사경 수행을 해오고 있는 박귀숙 재무가 자택에서 사경을 하고 있다.  

“코로나19로 인한 비대면 시대 사경 시작하기 좋은 적기예요!”
박귀숙 불자 / 서울 삼룡사 신도회 재무위원 ― 글 조용주 기자

서울 삼룡사(주지 무원 스님·천태종 종의회의장) 박귀숙(62·법명 자재통) 재무는 2009년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사경 수행을 해오고 있다. 박 재무는 사경 수행을 하기 전 염불 수행을 먼저 시작했다. 염불 수행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천태종 불자였던 친언니의 영향이 컸다.

결혼생활 10년이 넘도록 자녀가 생기지 않아 고민하던 박 재무에게 어느 날 친언니가 찾아와 “단양 구인사에 가서 기도를 하면 한 가지 소원을 이룰 수 있다고 하더라.”하고 말해줬다. 긴가민가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주저않고 그 길로 구인사를 찾아갔다. 박 재무는 2대 종정 대충대종사를 친견했고, 곧바로 관음기도를 시작했다. 그리고 구인사 기도를 다녀온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기적같이 임신해 아들을 낳았다. 신심 돈독한 천태불자가 된 박 재무는 공무원이었던 남편의 직장을 따라 의성 월룡사·울릉도 해도사·김천 금강사·구리 금성사·서울 삼룡사 등 전국의 천태사찰을 다니며 염불 수행에 매진했다.

박귀숙 재무가 완성한 〈무량의경〉 사경집과 ‘관세음보살’ 다섯 글자가 적힌 노트. 박 재무는 완성한 사경 집을 상자에 담아 장롱 깊숙한 곳에 보관하고 있다.
박귀숙 재무가 완성한 〈무량의경〉 사경집과 ‘관세음보살’ 다섯 글자가 적힌 노트. 박 재무는 완성한 사경 집을 상자에 담아 장롱 깊숙한 곳에 보관하고 있다.

꾸준히 집과 사찰에서 염불 수행을 하던 박 재무는 중년에 접어들면서 염불 수행이 힘에 부쳤다. 목이 아프기도 하고, 오랜 시간 동안 앉아 있다보니 다리가 저릴 때도 있었다. 그러던 차에 우연히 사경 수행을 접하게 됐다.

“아들이 태어난 후 꾸준히 염불 수행을 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부터 염불하기가 너무 힘들어 잠깐 멈추고 쉬었는데, 마음이 불편하더라고요. 날마다 하던 수행을 중간에 멈춰버렸으니까요. 그래서 가지고 있던 노트에 ‘관세음보살’ 다섯 글자를 쓰기 시작했어요. 그게 제 사경 수행의 시작이었죠.”

사경 수행을 접한 박 재무는 처음에는 염불과 사경을 병행했다. 염불 수행을 하다가 힘에 부치면 사경을 했다. 그러다 2009년 구리 금성사에서 〈묘법연화경〉 사경집을 받아 본격적인 사경 수행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수행이라기보다 단순히 경전 베껴 쓰기에 가까웠다. 그러다 금강불교대학에 다니면서 본격적으로 사경 수행을 하게 됐고, 지금까지 〈불설아미타경〉·〈무량의경〉·〈육방예경〉 등을 사경했다. 현재는 삼룡사 주지 무원 스님의 권유로 〈묘법연화경〉 사경을 하고 있다.

박 재무는 예전에는 집에서만 사경을 했는데, 지금은 사찰에서도 틈나는 대로 사경을 하고 있다. 집에서 사경을 할 때는 주로 하루일과를 마친 후 잠들기 전에 한다. 깨끗하게 정리한 식탁 위에 사경집을 올려 두고 “앞으로도 변치 않는 불제자가 되겠습니다. 오늘도 천태불자로 살아갈 수 있어서 행복하고 고맙습니다.” 등의 합장 기도를 한 후 사경을 한다. 보통 30분 정도 집중하지만, 시간을 엄격하게 정해 놓지는 않는다. 사경을 마칠 때는 시작할 때와 마찬가지로 합장 기도로 마무리한다.

박 재무는 사경집을 두 종류로 구분해 보관한다. 개인적으로 완성한 사경집은 상자에 담아 장롱 깊숙한 곳에 보관하고, 주지 스님 권유로 완성한 사경집은 부처님 전에 올린 후 상자에 담아 별도 보관한다. 특히 최근에 완성한 〈불설아미타경〉·〈무량의경〉·〈육방예경〉은 삼룡사에서 조성한 ‘지구위기 극복기원 사경탑’에 봉안했다. 이 사경탑은 주지 스님이 △코로나19로 인한 세계위기 극복 △남북통일 세계평화 △세계인과 함께 우리 가족 행복 △생명존중(자살 예방)과 환경보존(탄소 중립·지구 온도 지키기) △국태민안 정토발원 등을 기원하며 조성했다.

박귀숙 재무는 주지 무원 스님의 권유로 〈묘법연화경〉 사경을 하고 있다. 완성한 사경집은 경내에 설치된 ‘지구 위기 극복기원 사경탑’에 봉안할 계획이다.
박귀숙 재무는 주지 무원 스님의 권유로 〈묘법연화경〉 사경을 하고 있다. 완성한 사경집은 경내에 설치된 ‘지구 위기 극복기원 사경탑’에 봉안할 계획이다.

“주지 무원 스님께서는 ‘사경을 하며 자신을 돌아보고, 혼란한 시기라는 핑계를 대면서 놓치고 가는 게 없는지 되돌아보는 기회로 삼아라.’면서 사경 수행을 항상 강조하세요. 사경 수행을 하다 보니 어느 순간 저 자신을 되돌아보고, 나 아닌 다른 사람의 마음도 배려해야 한다는 마음이 생기더라고요.”

박 재무는 코로나19로 사람이 많이 모이면 안 되는 요즘이야말로 사경 수행을 시작하기 좋은 적기라고 말했다. ‘비대면’이 일상화된 시대이다 보니 사찰에서 염불 수행을 할 때도 불안한 마음이 없지 않다. 하지만 집에서 사경 수행을 하면 그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돼 가족들도 좋아한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박 재무가 알려준 사경 노하우는 “조급해하지 말고 한 글자를 쓰더라도 최선을 다해 기도하면서 쓰라.”이다.

염불 기도와 사경 수행을 병행하면서 부처님의 큰 가피를 받아 항상 건강하고 행복한 신행생활을 하고 있다고 웃음 짓는 박귀숙 재무. 그녀는 오늘도 하루를 돌아보며 지극한 마음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써 내려가며 사경 수행을 하고 있다.

 

김민정 불자는 11년째 법화림 반장 소임을 맡아 묵묵히 사경 수행을 해오고 있다.
김민정 불자는 11년째 법화림 반장 소임을 맡아 묵묵히 사경 수행을 해오고 있다.

“사경을 하면 부처님 말씀 닮아가려는 의지가 생겨요.”
김민정 불자 / 서울 관문사 법화림 반장 ― 글·사진 정현선 기자

천태종 서울 관문사는 〈법화경〉 사경수행반인 ‘법화림(法華林)’을 11년째 운영하고 있다. 법화림 회원들은 코로나19 장기화로 대면 활동이 위축되고 있는 가운데에도 사경을 통해 꾸준히 수행정진을 이어가고 있다.

‘법화림’은 2011년 처음 개설됐다. 초기에는 경내 소강의실에서 ‘사경반’이라는 명칭으로 운영했다. 당시 주지였던 영제 스님은 사경반이 있으면 좋겠다는 신도들의 요청에 흔쾌히 사경실을 꾸며주었다. 2016년경 사경반 회원이 급속히 늘어 100여 명에 이르자 당시 총무였던 진성 스님은 관문사 5층 반야당에서 7층 대불보전의 넓은 공간으로 사경실을 옮겨주면서 ‘법화림’이라는 이름을 새롭게 지어주었다. ‘법화림’에는 ‘〈법화경〉 오종법사행으로 육근청정을 이뤄 숲의 만 생명이 부처님 법을 듣고 점차 깨달음을 얻게 된다.’는 의미가 담겼다.

처음 개설될 때 20명 정도였던 법화림 회원은 늘고 줄고를 반복하다가 현재 70여 명의 도반이 함께하고 있다. 사경 수행을 하면서 10년 넘게 신행모임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건 원력과 신심으로 뭉친 도반들이 늘 함께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8월 30일에는 법화림 창립 10주년을 기념해 사경 봉안식을 열었는데, 법화림 회원을 비롯해 전국의 천태 불자 500여 명이 정성껏 사경한 〈법화경〉을 대불보전 상월원각대조사님 존상 안에 봉안했다.

‘사경하는 시간만큼은 온전히 자신의 것’이라는 김민정 불자. 좌복에 고요히 앉아 펜 끝에 마음을 모으면 사경 삼매에 빠져든다.
‘사경하는 시간만큼은 온전히 자신의 것’이라는 김민정 불자. 좌복에 고요히 앉아 펜 끝에 마음을 모으면 사경 삼매에 빠져든다.

현재 법화림은 주·야간반으로 나눠서 운영된다. 주간반은 매주 월요일 오후 1시 대불보전에서 주지 경혜 스님의 법문에 이어 경전을 한 시간가량 사경한 후 독송하는 순서로 진행한다. 야간반은 매주 수요일 오후 8시 20분 반야당에서 진행한다. 야간반은 재무 법기 스님이 법문을 한다.

사경 수행을 할 때는 앞서 자리를 깨끗이 정돈한 후 ‘정구업진언(淨口業眞言)’을 독송하고 마음속에 잡념이 사라지면, 경전 한 자 한 자를 정성껏 옮겨 적는다. 몸과 마음을 펜 끝에 집중해서 경전을 옮겨쓴 후에는 회향게(廻向偈)를 외우며 마무리한다.

김민정(55·법명 춘초심) 불자는 법화림 창립과 함께 반장 소임을 맡아 지금까지 수행을 이어오고 있다. 그는 도반들이 오기 전에 미리 도착해, 법당을 청소하고 책상을 펴는 등 도반들이 사경 수행하기에 불편하지 않도록 준비한다.

“사경 수행하는 불자들이 지금보다 훨씬 많아질 수 있도록 가교가 되고 싶어요. 많은 불자들이 마음 밭에 사경이란 씨앗을 심어두고, 그 씨앗이 자라나 싹트는 상상을 해봐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따로 없어요. 누구든 와서 편안하게 사경하고 갈 수 있도록 돕는 거예요. 사경을 하면서 제가 겪었던 여러 가지 크고 작고 변화들을 그분들도 경험해보길 바라는 마음이에요.”

김민정 불자는 큰딸의 입시기도를 위해 사찰을 찾은 인연으로 사경 수행을 시작했다. 독실한 불자였던 어머니 손을 잡고 어려서부터 집 근처에 있던 부산 삼광사에 다니곤 했는데, 결혼 후 서울 생활에 바빠 신행생활을 못하다가 딸아이의 대학입시를 앞두고 가까운 관문사를 찾게 된 것이다. 다행히 큰딸은 원하는 대학에 입학했고, 이후 부처님 가르침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교리를 배우고 익히며 독실한 불자로 신행활동을 하고 있다.

법화림 회원들은 지난해 11월 관문사 템플스테이에 참가해 금니로 ‘보왕삼매론’과 〈반야심경〉 사경을 했다
법화림 회원들은 지난해 11월 관문사 템플스테이에 참가해 금니로 ‘보왕삼매론’과 〈반야심경〉 사경을 했다

꾸준한 사경 수행은 삶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부처님 말씀을 옮겨 적다보니 신심은 더 깊어졌는데, 그렇다 보니 교리 공부에 갈증이 찾아왔다. 배움의 갈증을 풀기 위해 2015년 금강대학교 불교학과에 입학했고, 같은 과에서 석사를 수료한 후 2020년에는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법화경〉 사경 수행으로 자신의 삶을 성장시켜온 김민정 불자는 마음속에 간직한 발원을 이렇게 되뇌었다.

“경구 한 획 한 획에 집중하며 써 내려가다 보면 마음이 깃털처럼 가벼워지면서 부처님의 생각과 말씀을 닮아가려는 의지가 생겨요. 요즘 코로나19가 확산되면서 대면활동이 조심스러워졌잖아요. 하지만 사경은 장소에 상관없이 얼마든지 수행할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장점이에요. 저는 사경 수행을 통해 신행을 한 단계 성장시키는 기회로 삼고자 해요. 〈법화경〉 사경을 하며 부처님 법과 인연을 맺고, 함께 수행할 도반들이 더욱 많아지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법화경〉 사경의 공덕 ①
경전 속 황금빛 글자에 놀라 佛法 귀의 후 〈법화경〉 수행

당나라 태종 때 장만복(張萬福)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성품이 교만하고 거칠었으며, 불교를 신앙하지 않았다. 정관 연중(627~649)에 낙주자사(洛州刺使)로 부임했을 때도 스님들을 괴롭힐 일이 없을까 생각했을 정도였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관속들에게 “이 고을에서 어떤 중이 가장 유명한가?”하고 물었다. 관속들은 영문도 모른 채 비구니 묘지(妙智) 스님을 천거했다.

“이 고을에는 묘지라는 법명을 쓰는 비구니 스님이 고명하십니다. 수행력이 매우 뛰어날뿐더러 〈법화경〉을 한 질을 써서 법당에 모셔 놓고 공양을 하는데, 그 지극함이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만복은 그 〈법화경〉이 궁금해 사람을 시켜 가져오게 했다. 그러나 묘지 스님은 “아무리 자사라고 할지라도 경전을 보려면 먼저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법답게 청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면서 경전을 보내주지 않았다, 이에 만복은 매우 화가 나서 “만약 경전을 보내지 않으면 혼을 내겠다.”고 위협을 했다. 묘지 스님은 사찰의 대중에게 피해가 갈까봐 어쩔 수 없이 경전을 비단보자기에 싸서 보냈다. 그런데 만복은 교만한 마음에 손도 씻지 않은 채 보자기를 풀어서 경전을 펴보았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경전은 한 글자도 적혀있지 않은 백지상태였다. 만복은 묘지 스님이 자신을 속였다고 생각하고, 당장 잡아오라고 명했다. 만복은 스님이 잡혀오자 “어찌 요망하게 글자도 없는 책을 경전이라고 하면서 나를 속였느냐?”하고 호통을 쳤다. 묘지 스님은 “그럴 리가 없습니다.”하면서 경전을 받아서 공손하게 펴들었다. 그랬더니 경전에서 황금빛 글자가 환하게 나타났고, 그 주변에는 집금강신(執金剛神)이 금강저를 들고 경전을 옹위(擁衛)했다. 깜짝 놀란 만복이 자리에서 일어나 댓돌 아래로 내려가 납작 엎드려 묘지 스님에게 참회를 했다. 그리고 “도대체 어떻게 경전을 만들었길래 이런 신기한 일이 일어났습니까?”하고 여쭈었다.

“이 경전은 그냥 만든 것이 아닙니다. 경전을 만들 생각을 하고 먼저 산중에 닥나무를 심고 늘 향수를 뿌려 잘 자라게 했습니다. 닥나무가 크게 자란 다음에는 종이 만드는 사람을 불러 종이 뜨는 집을 짓고, 닥나무 껍질을 벗겨 법식대로 종이를 만들었습니다. 그런 뒤 원근에서 글씨를 가장 잘 쓰는 사람을 뽑아 〈법화경〉을 베껴 쓰게 했습니다. 이때도 진흙에 향수를 섞어 깨끗한 집을 짓고 49일 동안 재를 올린 뒤, 깨끗한 옷을 갈아입고서야 글씨를 쓰게 했습니다. 만약 사경하는 사람이 외출을 하고 돌아오면 다시 목욕재계를 하고 손에 향수를 바른 다음에 하도록 했습니다. 필경사가 글씨를 쓸 때 저는 향로에 향을 피워 그 앞에 놓고 무릎을 꿇고 앉아서 그를 공양했습니다. 이 경은 이처럼 조금도 모자람없이 정성을 다해 완성한 것입니다. 그리고 경전이 완성된 후에는 법당에 모셔두고 공양을 계속해 왔습니다. 만약 이를 친견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가 누구라도 목욕재계를 하고 미리 준비한 깨끗한 옷을 갈아입은 뒤에야 친견을 허락했습니다. 이렇게 이 경전이 만세토록 훼손되지 않는 최고의 성보가 되길 기원했습니다.”

묘지 스님의 얘기를 들은 만복은 그동안 잘못을 크게 참회한 후 진실로 불법(佛法)을 믿겠다면서 크게 신심을 일으켰다. 그리고 〈법화경〉 1,000질을 만들어 널리 유통시켰으며, 자신도 열심히 경전을 읽었다. 〈홍찬전〉에 전하는 이야기다.

〈법화경〉 사경의 공덕②
사경 하려고 종이 사자 바로 하늘나라에 왕생

낙양에 하현령(河玄玲)이란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는 당나라 고종 황제 때인 용삭(龍朔) 2년(662)에 죽었는데, 저승에 가서 죽은 사람의 명부를 맡아보는 주부(主簿)의 일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하현령은 그곳에서 저승에 온 고향 사람을 만났다.

현령이 그에게 물었다.

“그대는 무슨 연유로 여기에 왔는가?”

“저승사자에게 붙들려서 여기까지 오게 되었소이다.”

“내가 오랫동안 저승에 올 사람의 명부를 맡아 왔는데 기록을 들춰 보니 아직 올 때가 아니오. 내가 그대를 다시 이승으로 돌려보내 주겠소.”

그가 하현령의 배려로 석방되어 이승으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누가 숨넘어가는 소리로 불렀다. 돌아보니 어떤 노파가 펄펄 끓는 가마솥에 죄인을 삶고 있었다.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어 고개를 돌리려 하자 노파가 말했다.

“여보시게, 나를 모르겠는가? 나는 자네와 같은 마을에 살던 아무개의 할멈일세. 내가 이런 힘든 일을 하는데 모른 척하고 떠나려 하다니 무심하네.”

그때서야 그는 노파가 한마을에 살던 사람이란 걸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로서는 그 노파를 도와줄 수 없었다. 노파도 이를 알고 그에게 말했다.

“부탁 한 가지만 들어주시게. 자네가 이승으로 돌아가면 내 남편에게 이야기해서 나를 위해 〈법화경〉 한 질만 만들게 해주시게. 만약 내 남편이 승낙하거든 열흘 뒤에 고향 마을 물가로 나와 내게 알려 주게나.”

그는 저승에서 살아나와 노파의 남편에게 저승에서의 일을 전해 주었다. 그런데 그 남편은 글을 쓸 줄 몰랐다. 그래서 그 남편은 종이를 사다가 다른 사람을 시켜 경전을 베끼게 했다. 책이 다 만들어지자 저승에 갔다온 사람은 약속한 날에 물가로 나갔다. 그러나 저승에서 만났던 노파는 물가에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웬 낯모르는 노파가 나와 있었다. 그 노파는 “당신이 저승에 왔던 낙양 사람이요?”하고 물었다. 그렇다고 하자 노파는 그 사이에 있었던 일을 들려주었다.

“저승에서 가마솥에 죄인을 삶던 그 할멈은 남편이 〈법화경〉을 만들려고 종이를 사온 그날 바로 하늘나라에 왕생했다네. 그래서 내가 그 소식을 대신 전해주러 나온 것일세.”

노파의 말을 들은 그는 〈법화경〉의 공덕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게 되어 그날부터 자신도 〈법화경〉을 읽고 베끼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홍찬전〉 제10권에 전하는 이야기다.

〈법화경〉 사경의 공덕②
지옥에 빠진 어머니 위해 〈법화경〉 사경해 환생 도와

당나라 때 장안 통궤방(通軌坊)에 사는 유공신(劉公信)의 아내 진씨(陳氏)는 독실하지는 않았지만 부처님을 믿는 불자였다. 어느 날 그녀는 낮잠을 자다가 비몽사몽 간에 저승으로 가서 저승 구경을 하게 되었다.

그녀가 이곳저곳을 둘러보는데, 갑자기 지옥문이 열려 그 안에서 고통을 받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게 됐다. 그 사람들 중에는 진씨 부인의 친정어머니도 있었다.

친정어머니도 딸 진씨를 보았는데, 온갖 고통을 받으면서도 다시 이승으로 나가거든 자신을 위해 〈법화경〉 한 질을 사경해 공양해 달라고 부탁했다.

진씨가 잠에서 깨어나 남편에게 저승에서 겪었던 일을 말하니, 남편은 곧 매부를 불러 〈법화경〉 한 질을 사경하게 했다.

그때 마침 어떤 사람이 경전 한 질을 가져와 “새로 쓸 필요가 있겠소. 내가 베껴 쓴 것이 있으니 이것을 사시오.”하고 권했다. 유공신은 급한 마음에 경전을 사서 진씨에게 주면서 어머니를 위해 절에 경전을 봉안하고 공양을 올리라고 했다. 진씨는 남편의 말대로 절에 경전을 모시고 공양을 올렸다.

그날 밤, 진씨의 꿈에 어머니가 나타나 “왜 나를 위해 경전을 사경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진씨가 벌써 한 질을 사서 공양을 올렸다고 하자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범사(范家)라는 사람을 위해 쓴 것이지 나를 위해 쓴 것이 아니다. 나는 그것이 나를 위해 쓴 것인 줄 알고 옥졸에게 말했다가 도리어 등이 터지도록 매만 맞았다.”

진씨는 놀라서 꿈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사람을 시켜 어머니를 위해 경전 한 질을 사경했다. 책이 완성되자 딸은 다시 절에 봉안했다. 그날 밤 꿈에 어머니가 다시 나타나 이렇게 말했다.

“아가야, 고맙다. 네가 나를 위해 새로 경전을 베껴 쓴 덕분에 나는 지옥에서 벗어나 좋은 곳에 태어나게 되었다. 너는 사경을 하면서 신심을 굳건히 해 많은 공덕을 쌓아라.”

진씨는 그 뒤 어머니의 말씀대로 독실한 불자가 되어 사경을 했고, 많은 공덕도 쌓았다. 〈법원주림(法苑珠林)〉에 전하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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