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례의 집 매화나무가
먼저 꽃을 피운 까닭은?

백양사 고불매는 350년 넘게 경내에서 수없이 많은 예불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꽃잎은 붉음을 버리고 백매가 되어가고 있다. 천연기념물(485호)로 지정돼 보호 중인데, 아직도 봄날이면 주변을 압도하는 화려함을 자랑한다.
백양사 고불매는 350년 넘게 경내에서 수없이 많은 예불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꽃잎은 붉음을 버리고 백매가 되어가고 있다. 천연기념물(485호)로 지정돼 보호 중인데, 아직도 봄날이면 주변을 압도하는 화려함을 자랑한다.

매화의 가장 큰 매력은 긴 겨울 혹독한 추위에 지친 이들에게 봄소식을 알려주는 전령 역할을 맡고 있다는 데 있다.

옛 사람들은 매화를 빨리 보고 싶은 마음에 당나귀를 타고 먼 길 여행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심매객(尋梅客)’ 혹은 ‘탐매객(探梅客)’이 생기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이들이 매화를 기다린 까닭은 봄소식을 듣고 싶은 마음도 있겠지만, 돌덩이처럼 얼어붙은 고목에서 얇고 여린 꽃잎을 피워내는 강인함과 절개를 지녔기 때문이다. 그리고 매화에서 새로운 봄[세상]에 대한 희망을 보았으며, 고목에서 꽃을 피우는 회춘을 보았기 때문이다.

탐매의 긴 여정 끝에 매화를 만나면 그 반가움과 향기에 취해 시를 지으며 음주가무를 즐겼고, 그림이나 시 한수 남기지 않은 이들이 없었다. 탐매 길에 오르지 못한 이들은 그 아쉬움에 채 피지 않은 가지를 꺾어 방안에 놓아두기도 했다. 선비들은 그들이 최고의 이상(理想)으로 즐겼던 사군자(四君子)는 물론이고 오청(五淸)·칠향(七香)·사우(四友) 등에 매화를 포함했다.

매화는 생김새·개화 시기와 장소·분위기에 따라 다르게 불렀다. 꽃잎 색으로는 홍매·청매·백매·황매로 나누었다. 또한 늙은 고목에서 핀다하여 고매(古梅), 눈 속에서 핀다하여 설중매(雪中梅), 달빛에서 보는 매화가 아름답다하여 월매(月梅) 혹은 야매(夜梅), 동짓날 추위에도 핀다하여 동매(冬梅), 심지도 않았는데 저절로 자라나 핀다하여 들매(野梅) 등으로 불렀다.

그렇다고 매화가 선비들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삼국유사〉를 남긴 일연 스님은 신라에 불교가 들어온 사실을 기록하며 찬(贊)하는 시를 지었다.

선암사의 봄날은 매화향기로 가득하다. 족히 400년이 넘는 고매 50여 그루가 꽃망울을 터트리면 고색창연한 고찰은 화사하고 산뜻한 꽃으로 장엄된다. 
선암사의 봄날은 매화향기로 가득하다. 족히 400년이 넘는 고매 50여 그루가 꽃망울을 터트리면 고색창연한 고찰은 화사하고 산뜻한 꽃으로 장엄된다. 

금교에는 눈이 쌓이고 얼음도 녹지 않았다.
계림에는 봄기운이 채 돌지도 않았는데
재주가 많은 봄의 신은 영리하게도
모례의 집 매화나무에 먼저 꽃을 피웠네.

불교 전래 이전의 신라를 겨울에 비유했고, 선산 모례의 집에 초전(初傳)된 불교를 매화가 핀 봄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처럼 매화는 불가에서 사랑받는 나무였다. 매화가 가진 특성이 수행자들이 지녀야 할 품성과 맞았기 때문이다. 깊은 산속 산사에서 느끼는 겨울은 유난히 춥고 길다. 겨우내 쌓인 눈은 녹을 줄 몰랐기에 매화의 피어남은 지쳐가던 수행자들에게 반가움 그 자체였다. 또한 나목에서 불현듯 피어나 짙은 향기를 전하는 매화는 그들의 수행 목적과도 많이 닮았기에 큰 절은 물론 작은 암자에도 매화나무는 항상 곁에 있었다. 그렇다보니 지금도 고찰에는 오래된 매화나무들이 수많은 탐매객을 불러들이고 있다.

선비들이 매향에 취해 음주가무를 즐겼다면, 불가에서는 차(茶)를 만들어 향기를 마시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이른 봄 따스한 온기가 있는 찻물에 매화 한 잎 떨구면 그 향기가 녹아들어 코와 입으로 스며들었다. 지금이야 차가 흔하지만 오래전 매화꽃차는 겨우내 동안거를 마친 수행자들을 절로 미소 짓게 하는 봄의 기운이었다.

이러한 매화사랑은 지금까지 이어져 봄이면 매화를 찾아 상춘객들이 몰려든다. 돌담장을 등진 한 그루 고목에서 피기도 하고, 언덕을 통째로 덮은 수많은 나무에서 한꺼번에 피어 장관을 이루기도 하는 매화는 심어진 목적과 풍경은 달라도 모두 우리에게 봄이 왔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다.

통도사 홍매는 높이보다 넓이를 택했다. 유난히 가지가 번성한 홍매는 법당 높이를 넘지 않고 스스로 법당의 장엄을 선택했다. 
통도사 홍매는 높이보다 넓이를 택했다. 유난히 가지가 번성한 홍매는 법당 높이를 넘지 않고 스스로 법당의 장엄을 선택했다. 

 

달마산 미황사 승방의 홍매는 담장에 기대어 피어나지만 담장보다 더 오랜 세월 꽃을 피울 것이다. 아무나 갈 수 없는 곳이기에 그 붉음은 더 짙다
달마산 미황사 승방의 홍매는 담장에 기대어 피어나지만 담장보다 더 오랜 세월 꽃을 피울 것이다. 아무나 갈 수 없는 곳이기에 그 붉음은 더 짙다

 

화엄사 각황전의 봄날은 너무나 강렬하다. 그 장엄한 각황전이 유난히 작아 보이는 시기도 봄날이다. 350년 수령의 고매, 너무나 붉어 흑매 로까지 불리는 이 홍매는 사찰에서 만날 수 있는 매화 중에 가장 붉고 가장 크고 가장 화려하다. 
화엄사 각황전의 봄날은 너무나 강렬하다. 그 장엄한 각황전이 유난히 작아 보이는 시기도 봄날이다. 350년 수령의 고매, 너무나 붉어 흑매 로까지 불리는 이 홍매는 사찰에서 만날 수 있는 매화 중에 가장 붉고 가장 크고 가장 화려하다. 
백매가 아니었다면 옥천사의 봄은 너무나 평범한 계절이 될 뻔했다. 가람의 배치가 권위와는 먼 조용한 산사지만 절 입구의 백매는 어떤 대찰보다 큰 여유로움을 안겨준다.
백매가 아니었다면 옥천사의 봄은 너무나 평범한 계절이 될 뻔했다. 가람의 배치가 권위와는 먼 조용한 산사지만 절 입구의 백매는 어떤 대찰보다 큰 여유로움을 안겨준다.
선암사 응진전 앞 백매는 무우전 돌담길 홍매 두 그루와 더불어 천연기념물(488호)로 지정되었는데 수령이 모두 600년이 넘는다. 스님들의 지극한 보살핌에도 세월에 흐름은 어쩔 수 없는 듯 꽃피움이 점점 힘들어 보인다.
선암사 응진전 앞 백매는 무우전 돌담길 홍매 두 그루와 더불어 천연기념물(488호)로 지정되었는데 수령이 모두 600년이 넘는다. 스님들의 지극한 보살핌에도 세월에 흐름은 어쩔 수 없는 듯 꽃피움이 점점 힘들어 보인다.
가장 화려한 봄날이 오면 백양사 고불매는 대낮보다 한밤중 월매(月梅)가 더 잘 어울린다. 중국과 일본 그리고 한반도 모두 매화를 사랑하지만 그중에 가장 매화답게 피는 곳은 한반도이고 아름다운 곳은 저녁 산사인 듯하다.

 

저작권자 © 금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