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식의 전환과 적극적인 사회성 요구

사리불의 수기 보고 감격
부처님께 각각 수기 받아

중생들 의식주 문제로 고민 않도록 노력
부처님 수기설법 통해 교화하는데 주력


신해품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눠서 이해할 수 있다. 첫째는 부처님의 자비를 비로소 믿고 깨우치기 시작한 부분이며, 두 번째는 부처님의 자비를 비유로 설명하는 장자궁자 이야기가 그것이다. 여기서는 우선 첫째 부분에 관한 내용을 살펴보기로 한다.

 신해품의 전품인 비유품에서 사리불에게 수기를 주는 장면이 나온다. 이에 감동을 받은 수보리, 마하가전연, 마하가섭, 마하목건련 등이 마음에 진한 전율을 느끼고 존경하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해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저희들은 대중의 지도자들이었지만 이미 늙었습니다. 스스로 ‘이미 열반을 얻었다'고 생각해 더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찾지 않았습니다. 옛날부터 세존에게 설법을 들었지만 공, 무상(無相), 무작(無作)만 생각했을 뿐, 보살의 법과 신통을 즐거워 함과 부처님 국토를 청정히 함과 중생을 성취하는 일은 즐거워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세존께선 저희들이 삼계에서 벗어나 열반을 얻도록 하셨으며, 저희들도 나이가 들었으매 부처님께서 보살을 교화하시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는 조금도 좋아하는 생각을 내지 않았습니다.”

이상의 고백은 짧은 구절이지만 《법화경》이 전개하는 불교운동의 방향을 여실하게 알려주고 있음을 살필 수 있다. 물론 대강의 방향은 방편품에서 다 언급하고 있지만 기회가 있을 때마다 법화행자들이 추구하고 있던 불교운동의 방향을 강조하는 것이라 생각하면 무리가 없을 것이다. 인용문의 내용을 분석하면 다음의 사실들을 유추할 수 있다.

첫째 부처님의 십대 제자로 알려진 불세출의 스님들이 사리불의 수기를 보고 감격하는 장면이다. 따라서 이후의 품에서 각각 부처님에게 수기를 받게 된다. 이미 아라한의 경지를 체득한 분들로 알려진 그들이 다시 수기를 받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이미 열반을 얻었다'고 생각해 더는 노력하지 않고 안주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나아가 공, 무상, 무작이라는 고정화된 관념에 갇혀 있었다는 점이다. 공, 무상, 무작은 고정적인 관념의 틀에 갇히지 말라는 것이다. 때문에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설파된 가르침인데 반대로 교조적인 생각에 빠졌다는 고백이다. 또한 삼계를 벗어나 열반을 얻도록 가르쳤다는 착각이다. 몇 가지 사실을 통해 십대 제자로 대표되는 성문승들이 다시 수기를 받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이미 열반을 얻었기 때문에 더는 얻을 것이 없다는 교만한 마음, 그리고 관념에 닫혀 버린 형식화된 사고, 삼계를 벗어나 있는 것이 열반이라고 생각하는 비현실성 내지 관념적 사고 등이다. 이러한 점을 감안해 말하자면 《법화경》에서 성문승들에게 수기를 주는 것은 단순히 ‘깨달음의 세계를 예언한다는 차원을 넘어 인식의 전환과 적극적인 사회성의 요구'라 해석할 수도 있다.

둘째 성문승들의 반성적인 고백을 통해 《법화경》에서 중시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다는 점이다. 중요한 문제이므로 그 내용을 일별해 보기로 하자. 우선 보살법과 신통을 즐거워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 문제는 6바라밀의 실천과 직결되어 있다. 즉 6바라밀 중에서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은 보살법의 실천적 윤리이기 때문이다. 개인적 완성과 사회적 완성을 동시에 희구하는 대승불교사상의 이념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신통을 즐거워하는 것'은 바로 반야의 완성을 지칭한다고 본다. 신통을 반야로 해석하는 것은 전통적인 해석 방법이다. 즉 삼명육통(三明六通)에서 말하는 명과 통은 바로 지혜를 완성했을 때 체득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어서 ‘국토를 깨끗이 하는 일'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는 자책이다. 불교의 전통에서 불국정토는 불교의 가르침을 통해 완성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사회를 지칭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 개인적 인격을 완성하더라도, 그 인격의 완성이 사회적으로 확산되어 불국정토를 만드는 일에 기여할 수 없다면 높이 평가받을 수 있는 일은 아니라고 보았다.

따라서 그러한 부류의 수행자들을 벽지불 내지 연각이란 칭호로 폄하했다. 다만 인용문을 통해선 불국토를 정화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지칭하는지 알 수 없지만 수기의 내용에 나오는 토상(土相:불국토의 모습)을 통해 유추할 수 있다. 아쉬움이라면 지금도 불교도들 사이에 팽배된 의식은 불교가 단지 개인적 수행을 중시하는 종교로 각인되어 있다는 점이다. 아직도 우리들은 대승불교 내지 《법화경》의 가르침을 망각하고 있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반성적인 고백의 마지막은 ‘중생을 성취하는 일'에 마음을 쓰지 않았다는 내용이다. 중생을 성취한다는 구절의 의미는 매우 다의적이라 볼 수 있는데 여기선 몇 가지만 적시하기로 한다. 우선 중생들이 의식주 문제로 고민하지 않도록 앞장서 노력하는 것이다. 그들의 의식이 이기적이고 천박한데서 벗어나 남을 생각할 줄 알고 고상한 마음을 지니도록 만드는 것이다. 어떠한 상황 속에서라도 마음의 평안을 지니고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기설법을 통해 그들을 교화하는데 주력했으며, 그들의 잠자는 의식을 일깨워 주기 위해 평생토록 인도 전역을 순회한 것이다. 

위대한 성문승들의 고백을 통해 무엇이 잘못되었으며, 무엇을 중요시해야할 가치인가를 알게 된다. 그리고 뒤이어 장자궁자의 비유를 설명하기 시작한다. 비유를 들어 설명하는 이유는 “여러 부처님들/ 자재한 법 얻으시고/ 중생들의 모든 욕망과 좋아함/ 골고루 아시며/ 또한 그 뜻과 힘에/ 감당할 바 아시고/ 무량한 비유로써/ 미묘한 법 말씀하실새”라며 게송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상의 내용을 감안하면 왜 신해품이란 이름을 붙였는지 알 수 있다. 즉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잘못된 믿음과 깨우침'을 올바른 믿음으로 재정립한다는 의미를 강하게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고전적인 해석을 간략하게 소개하기로 한다. 천태 스님은 신해품(信解品)에 대해 ‘이제 비유를 듣고 기뻐 펄떡 펄떡 뛰는데 믿음과 깨우침이 생기고, 의심이 제거되어 이치가 분명해지기 때문'이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믿음과 깨우침을 단계적으로 해석하여 “처음 의혹을 깨뜨리고 대승의 견도(見道)에 들어가기 때문에 믿음이라 이름하며, 나아가 대승의 수도(修道)에 들어가기 때문에 깨우침[解]이라 이름한다”고 전제하고, 전체적으로는 “불도의 음성을 일체 중생들이 듣게 하고, 원교(圓敎)를 듣고 원위(圓位)에 들어가게 하기 때문에 신해품이라 부른다”고 정의한다.

천태 스님과 달리 길장 스님은 삼론사상에 입각해 독특한 해석을 시도하고 있다. 첫째 “의심을 제거하면 믿음이라 말하고, 집착을 깨뜨리면 깨우침[解]이라 한다. 의심은 머뭇거리는 것을 말한다. 믿음은 결정한다는 뜻이다. 성문은 권실(權實)을 의심하며, 일과 삼에 머뭇거린다. 이러한 의심이 이미 멈추었기 때문에 믿음이라 부른다. 즉 삼은 방편이며, 일은 진실임을 믿는 것이다. 집착을 깨뜨리는 것을 깨우침이라 하는 것은 ‘깨우침[解]은 깨달음[了悟]으로 의미를 삼고, 집착은 미집(迷執)이란 말'이기 때문이다. 둘째 “믿음은 사견을 깨뜨리는 것이며, 깨우침[解]은 무명을 깨뜨리는 것이다. 믿음은 있으나 지혜가 없으면 무명을 기르는 것이요, 지혜는 있으나 믿음이 없으면 사견을 기르는 것이다”라고 하여 믿음과 지혜는 동전의 양면과 같이 서로 보완적인 관계에 있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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