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월간금강
성태용의 ‘이야기 〈유마경〉’5_보살품유마거사의 지혜와 변재에
보살들도 모두 감복해
문병 부촉을 사양하다
  • 글 성태용·삽화 전병준
  • 승인 2021.09.27 14:39
  • 댓글 0
‘유마힐소설경직소 변상도’ 중 ‘유마힐불소(維摩詰佛所)’.〈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불교기록문화유산 아카이브(ABC) 자료〉

여러 보살들이 문병 사절 부촉을 사양하다
• 무대 - 인도 바이샬리 성

• 주요 등장인물 – 부처님, 미륵보살, 광엄동자, 지세보살, 장자의 아들 선덕.

• 주요 전개과정

부처님께서 미륵보살 등 여러 보살들에게 유마거사에게 문병 사절로 가라고 부촉(咐囑)하신다. 여러 보살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그 임무를 감당할 수 없다고 사양한다.

미륵보살(彌勒菩薩)은 수기에 관한 이야기로 유마거사에게 꺾였다.

광엄동자(光嚴童子)는 보리의 도량에 관한 유마거사의 가르침을 받았다.

지세보살(持世菩薩)은 마왕 파순과의 관계에서 유마거사의 신통과 지혜에 감복했다.

장자의 아들 선덕(善德)은 유마거사에게서 법보시에 대해 가르침을 받았다.

이러한 일들로 법거량에서 유마거사에게 꺾이거나 감복하였기에 단순히 문병만 하는 것이 아니라 유마거사를 상대로 진리를 토론해야 할 문병 사절의 임무를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십대제자가 다 물러났습니다. 그럼 이제 누구 차례일까요? 당연히 보살님들 차례입니다. 〈유마경〉의 첫머리에 말씀드렸죠? 스님은 8,000명이요, 보살은 3만 2,000명이 모였다고요. 8,000명 모인 스님들의 대표, 즉 성문(聲聞)의 대표가 바로 십대제자입니다. 성문의 대표선수인 십대제자가 모두 문병 사절을 감당치 못하겠다며 물러났으니, 스님들은 모두 물러난 셈이 되겠네요. 남은 것은 3만 2,000명 모였던 보살들입니다. 당연히 보살들 가운데 문병 사절 임무를 감당할 분을 찾는 순서가 되겠네요.

그런데 첫 이야기에서 ‘보살’은 대승운동에 앞장섰던 분들에게 붙였던 이름이라고 말씀드렸죠? 그 증거가 〈유마경〉에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네요. 이 글을 연재하면서 구마라집 삼장의 번역과 현장 삼장의 번역을 대조하게 되었는데, 특히 현장 삼장의 번역에서 확실한 증거들이 나옵니다. 우선 구마라집 삼장의 번역에서는 릿차비족 젊은이들을 이끌고 부처님께 일산을 바쳤던 이를 단순히 장자의 아들 ‘보적(寶積)’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현장 삼장의 번역에서는 ‘보성(寶性=寶積)’ 보살이라고, 분명하게 보살 칭호를 붙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이야기할 ‘보살품(菩薩品)’에서는 부처님께서 문병 사절을 부촉하실 때 광엄동자(光嚴童子)와 장자의 아들 선덕(善德)에게도 부촉을 하십니다. 지금 이야기하는 품은 ‘보살품’이니까 이분들도 당연히 보살이라고 보아야겠지요? 광엄동자도 그렇지만 장자의 아들 선덕은 분명하게 그 당시의 재가불자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들도 대승의 정신을 확실하게 알아서 이 시대에 대승을 편다면 바로 보살이 된다는 것! 이 글의 처음에서 말했던 것이지만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이 마음이 〈유마경〉을 읽어가는 근본적인 마음이어야 한다는 것도요.

<삽화=전병준〉

미륵보살, 자신의 수기에 대한 법문 들어

자, 그럼 부처님께서 어떤 보살들에게 문병 사절을 부촉하시는지 차례로 봅시다.

첫 번째는 미륵보살입니다. 잘 아시지요? 다음 세상에서 부처되어 오실 분, ‘당래하생(當來下生) 미륵존불(彌勒尊佛)’이라고 불리시는 분이죠? 석가모니 부처님께 수기(授記, 다음 생에 성불할 것이란 예언)를 받았다고 합니다. 한 번 더 생을 거치면 부처를 이룰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 미륵보살님도 유마거사에게 된통 당하셨다고 하네요. 바로 그 수기 문제를 빌미로 유마거사가 법문을 들려주었거든요. 어떤 내용이냐 하면, 우선 ‘다음 생’이라는 말 자체가 어폐가 있다는 겁니다. 〈금강경〉에서 과거의 마음, 현재의 마음, 미래의 마음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은 결국 과거·현재·미래라는 시간의 구분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시간이라는 것, 자체가 원래 그런 거지요. 무한한 연속 가운데 잠시를 고정해본 것인데, 실제로는 잠시도 고정될 수가 없는 것이 시간이지요.

그리고 시간이란 절대적으로 정해진 분량이 있는 게 아닙니다. 왜 그런 이야기 있잖습니까? 천상계의 하루가 인간계의 1년이라는 이야기 같은 것 말입니다. 인도 신화에는 브라만신이 한 번의 삶을 사는 것이 우리 세상의 한 겁(劫)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 브라만신도 비슈뉴라는 신의 배꼽에서 연꽃처럼 피어난다던가요? 아무튼 시간성이라는 것 자체가 문제라는 거죠. 그리고 깨달음을 얻는다는 말도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진여성’이라는 것은 차별을 떠난 것이지요? 거기에는 ‘깨달았다.’, ‘깨닫지 않았다.’는 말 자체가 붙을 수가 없습니다. ‘깨달았다.’는 말 자체가 붙는 순간, 깨닫지 않음과 상대가 되고, 그런 순간에 절대적인 진여는 상대성 속으로 떨어져 버립니다. 그런 절대적인 관점에서는 미륵보살이 수기를 받았다면 일체중생이 모두 수기를 받았다고 말해야 합니다. 중생과 부처, 그리고 미륵이라는 상대성을 넘어선 것이 진여이니까요.

자, 여러분! 미륵보살이 수기를 받았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하기로 하지요. 유마거사의 말대로라면 우리 모두가 수기를 받은 것이 되니까요. 얼마나 좋습니까? 그리고 저는 여기서 우리가 모두 수기를 받았다는 것을 진심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봅니다. 여러분도 언젠가는 부처가 되실 것 아닙니까? 이미 부처님 문중에 들어오셨으니, 그리고 부처가 되겠다는 마음을 내셨으니, 언젠가는 그 마음이 성취되어 올바른 깨달음을 얻으실 것이 분명하지요?

의상조사의 법성게에 “처음 낸 그 마음이 바로 올바른 깨달음이다.”라고 했지요? 그러니 우리 모두 부처가 될 수기를 받은 것이 틀림없습니다. 좀 이리저리 헤매느라 좀 늦어질 수는 있겠지만요. 이런 말을 들으니 힘이 나지 않습니까? 여기서 〈유마경〉을 읽는 우리의 좌우명 하나를 정하고 갈까요? “못 깨닫는 척하지 말기!” 깨닫지 않았으면서 깨달은 척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지만, 스스로에게 중생상을 덧씌워 놓고 깨닫지 못하는 존재라는 생각을 하는 것은 더 위험하니까요.

광엄동자, ‘삶 전체가 수행처’란 가르침 들어

부처님은 다음 차례로 광엄동자에게 부촉하려 하지만, 그에게도 나름의 사정이 있습니다. 광엄동자는 성문을 들어오는 유마거사에게 “어디서 오십니까?”하고 묻습니다. 그에 대해 유마거사는 “오묘한 보리[妙菩提]에서 옵니다.”라고 대답하고, 그가 다시 “오묘한 보리는 어느 곳입니까?”하고 묻자 유마거사가 오묘한 보리에 대해 상쾌하게 설합니다. “사무량심, 삼십칠 보리분법, 사무외, 십팔불공법 등 모든 수행이 바로 오묘한 보리의 도량이라는 것이지요.”

상당히 어려운 이야기 같지만 유마거사의 마지막 말이 그 모든 이야기를 꿰뚫는 통쾌한 진언으로 울립니다. “보살이 진정으로 올바른 깨달음을 향한 마음을 정하고 수행한다면 가고 오고 멈추고 발을 들었다 내리는 등의 모든 행동거지가 다 오묘한 보리의 도량에서 오는 것이다!” 더 일반적인 말로 하자면 우리의 삶 전체가 깨달음을 향한 수행처라는 말입니다. 대승의 가장 중요한 정신이 바로 삶과 수행이 떨어져 있는 것을 극복하는 것이라 할 수 있지요. ‘수행 따로 삶 따로’의 불교에서 삶의 현장이 바로 수행도량이 되게 하는 것이 대승불교라는 말입니다.

유마거사는 참으로 상쾌한 변재로 이러한 이야기를 이끌어내고, 그 이야기를 들은 수많은 사람이 보리심을 냈는데, 광엄동자는 묵묵히 대꾸를 못했다고 하네요. 그래서 광엄동자도 문병 사절을 사양합니다.

지세보살, 만이천 천녀 교화에 탄복

그다음 지세보살 이야기는 무척 재미있습니다. 마왕 파순이 제석천왕으로 가장하고 지세보살에게 만이천 명의 천녀를 바쳤다네요. 와! 삼천궁녀도 아니고 무려 만이천 명의 천녀입니다! 그런데 지세보살은 참으로 확고한 마음으로, 그 일은 ‘법답지 않다.’고, ‘온당치 않다.’고 거절합니다. 그때 유마거사가 와서 마왕 파순의 정체를 밝히고, 대신 만이천의 천녀를 받겠다고 합니다. 마왕 파순은 놀라서 달아나려 하지만 유마거사의 신통력에 달아나지 못하고 천녀들을 바칩니다. 유마거사는 마왕 파순의 권속인 천녀들을 받아 그들을 교화시키고, 돌아가지 않으려는 그들에게 ‘꺼지지 않는 등불[無盡燈]’의 가르침을 줘서 파순에게 돌려보냅니다.

몇 가지에 초점을 맞춰서 살펴볼까요? 천녀를 거절하는 지세보살과 마왕 파순의 권속임을 알면서도 받아들이는 유마거사의 대비가 재미있지요? 교화했는데 왜 다시 파순에게 돌려보내죠? 또 꺼지지 않는 등불이란 무슨 의미일까요?

우선 마왕이라는 존재에 대하여 살펴보지요. 기독교에는 사탄이 있는데, 이 사탄은 ‘절대악’으로 묘사되지요. 용서할 수 없는 존재, 소멸시켜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런 사탄에 비해 마왕 파순은 귀여운 점이 있지요? 적어도 〈유마경〉에서는 그렇습니다. 지세보살을 타락시키려 하다가 실패하고, 유마거사에게 권속인 천녀를 빼앗기고, 다시 돌려달라고 사정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 인간적인 모습이 있는, 귀여운 구석이 있는 마왕이지요. 그런데 여기서 잠깐! 이 마왕 파순도 불성이 있을까요? 마왕도 성불할 수 있나요? 마왕이 성불할 수 있다면 우리가 한 번 수기를 내려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싶은데요. “그대도 언젠가는, 무량수겁이 걸릴지는 모르지만, 언젠가 성불하리라!” 터무니없는 소리라고 웃지 마세요.

〈서유기〉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손오공이 요괴 때문에 고생을 하다가 도저히 안 되어 관세음보살께 구원을 청합니다. 관세음보살이 요괴의 친구요괴로 변신을 하여 요괴 동굴에 잠입하고, 손오공은 그 요괴친구가 선물하려 했던 단약으로 변신을 하는데. 여차저차 해서 요괴가 손오공이 변신한 단약을 삼키고, 손오공이 요괴 뱃속에서 난리를 쳐서 요괴의 항복을 받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관세음보살이 요괴로 변신했을 때 손오공이 한마디 하지요. “요괴가 보살이 된 건지, 보살이 요괴가 된 건지 모르겠네요.” 여기서 관세음보살님이 말씀하십니다. “요괴나 보살이나 결국 한 생각일 뿐이니라!”

나와 다른 편은 악이라 몰아붙이며 극성스럽게 편 가르기를 하는 요즘 세태를 질타하는 사자후라고나 할까요? 실제로 〈서유기〉의 이 대목은 물리친 요괴를 관세음보살님이 보타낙가산의 산지기로 채용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요괴 가문(?)에서 보살 가문으로 이적을 하는 것이지요. 이 이야기 말고도 〈서유기〉의 여러 곳에서 요괴 가문과 보살 가문이 뒤섞이는 일이 벌어집니다. 그리고 ‘요괴나 보살이나 결국 한 생각’이라는 관점이 바로 불교의 관점이라 할 수 있지요. 유마거사가 파순의 권속을 받아들여 교화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그렇게 보면 천녀들을 교화하고 다시 파순한테 돌려보내는 것 또한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여기서는 꼭 돌려보내야 한다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렇지만 네 편 내 편을 가리지 않는 이상 꼭 내 곁에 두어야 하는 것도 아니지요. 그들이 어디에 가든 정법을 따르고, 주변에 그 정법을 전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유마거사가 천녀들에게 준 ‘꺼지지 않는 등불’의 가르침은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등불 하나로 수십만 등불을 붙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보살 한 사람이 수많은 대중에게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을 내도록 한다면, 이 보살의 보리심은 영원히 고갈되거나 쇠퇴하지 않으며 오히려 발전하고 강화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천녀들에게 그러한 역할을 하도록 당부하는 것입니다. “비록 마궁에 있더라도 그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을 잃지 않고, 또 다른 이들이 그런 마음을 내도록 하는 존재가 되어라!” 그것이 바로 꺼지지 않는 등불이 되는 것입니다.

아무튼 이런 사건으로 유마거사의 자유자재한 신통력과 지혜에 감히 대응할 자신이 없어진 지세보살마저 슬그머니 뒷전으로 물러납니다.

<삽화=전병준〉

법보시 공덕 가르침 받은 선덕

다음으로 장자의 아들 선덕에게 부촉이 넘어가네요. 그런데 선덕 또한 유마거사와의 법거량에서 한바탕 혼이 난 이야기를 합니다. 주제는 보시의 문제입니다. 선덕이 아버지의 집에서 칠일 간의 대보시회를 열어 많은 사람에게 공양을 했는데, 유마거사가 와서 ‘법의 보시회를 열어야지, 이런 재물의 보시회를 열어서는 안 된다.’고 야단을 쳤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중생들이 진리를 성취하고, 원만한 수행을 일으키게 하는 법보시의 공덕에 대해 찬란한 언변으로 설파를 했다는 겁니다.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재보시와 법보시의 이야기입니다. 재보시보다 법보시의 공덕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나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으셨을 겁니다.

그런데 그냥 그렇게 재보시와 법보시를 구분하고, “법보시가 그렇게 훌륭한 것이구나!”하고 끄덕여서는 안 됩니다. 재물과 법을 그렇게 이분법적으로 나눠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재물 가는데 마음 가는 게 인지상정입니다. 자꾸 마음타령 하면서 법보시는 오직 마음과 관계된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지요. 재물 보시를 청정한 마음으로 하고, 그 마음이 전해지면 그것도 법보시입니다. 물질적인 문제로 궁핍한 사람에게는 물질을 보시해야 합니다. 그럴 때 상을 내지 않고 청정한 마음으로 보시를 하면, 그 청정한 마음이 반향을 일으킵니다. 그러면 재보시와 법보시가 함께 이루어지지요. 이것이 바로 진정한 보시입니다.

〈유마경〉의 전개 또한 그렇습니다. 법보시의 공덕을 말하는 유마거사에게 감명을 받은 장자의 아들 선덕은 엄청난 가치를 지닌 보석 목걸이를 유마거사에게 바칩니다. 유마거사는 처음에는 사양하다 결국 이를 받아 둘로 나누어서 한쪽은 가장 빈천한 거지에게 주고, 다른 한쪽은 난승여래(難勝如來)에게 바칩니다. 그리고 신통력으로 대중이 난승여래의 장엄한 모습을 보고 신심을 일으키도록 해줍니다. 필요한 이에게 물질을 주어 평안을 얻게 하고, 또 재물을 통해 대중들의 청정한 믿음을 일으키도록 한 것이지요. 그리고는 말합니다. “보시를 하는 이가 평등한 마음으로 가장 천한 거지도 여래의 복전처럼 생각하고, 또 차별 없이 공평하게 주고, 대자대비한 마음으로 널리 보시하면서, 어떤 과보를 바라지도 않는다면 이를 원만한 법보시라 한다.”고 말합니다. 재물과 법을 나누는 생각조차 없지 않습니까?

자! 그러니까 ‘재보시’다, ‘법보시’다 하는 분별을 떼고, 열심히 보시를 하도록 합시다. 대승의 수행으로 제시되는 육바라밀에는 소승에 없던 보시가 그 첫머리에 있지요? 대승의 정신을 대표하는 것이 바로 보시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부처의 세계를 건설하기 위하여, 또 아픔 속에 놓여있는 중생들을 치유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청정한 보시행의 실천하는 것, 그것이 대승의 출발입니다.

성태용 ― 전 건국대 철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한 후 한국고등교육재단의 ‘한학자 양성 장학생’으로 선발돼 故임창순 선생에게 한학을 배웠다. EBS에서 ‘주역과 21세기’라는 제목으로 강의했으며, 한국철학회 회장과 학술진흥재단 인문학단장을 역임했다. 저서로 〈주역과 21세기〉·〈어른의 서유기〉 등이 있다. 

글 성태용·삽화 전병준  ggbn@ggbn.co.kr

행복을 일구는 도량, 격월간 금강(金剛)

<저작권자 © 금강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글 성태용·삽화 전병준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