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주 송광사 목조불·불영사 불연은 보물

구례 화엄사 목조비로자나삼신불좌상(전체). <사진=문화재청>

전남 구례 화엄사 목조비로자나삼신불좌상 등 불교문화재 3건이 국가지정문화재인 국보와 보물로 지정됐다.

문화재청(청장 김현모)은 6월 23일 “보물 ‘구례 화엄사 목조비로자나삼신불좌상(木造毘盧遮那三身佛坐像)’을 국보로 승격 지정했다.”고 밝혔다. 또 ‘울진 불영사 불연(佛輦)’과 ‘완주 송광사 목조석가여래좌상 및 소조십육나한상 일괄’ 등 불교문화재 2건과 ‘송시열 초상’은 보물로 지정했다.

화엄사 목조비로자나삼신불좌상은 현존하는 우리나라 불교조각 중 비로자나불·노사나불·석가모니불로 구성된 유일한 ‘삼신불(三身佛)’로, 조선시대 불교사상과 미술사 연구의 중요한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화엄사 대웅전에 봉안된 삼신불좌상은 1635년(인조 13) 당대의 이름난 조각승인 청헌(淸軒 또는 淸憲)·응원(應元)·인균(印均) 스님과 이들의 제자들이 조성한 17세기를 대표하는 불교조각으로. 모두 3m가 넘는 대형 불상이다.

특히 최근 발견된 삼신불 관련 기록에 의하면, 임진왜란 당시 소실된 화엄사를 재건(1630∼1636)하면서 대웅전에 봉안하기 위해 삼신불을 제작한 시기(1634∼1635년)·과정·후원자·참여자들이 명확하게 밝혀졌다.

발원문에 따르면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을 역임한 벽암 각성(碧巖 覺性, 1575∼1660) 스님의 주관 아래, 선조의 여덟 번째 아들 의창군(義昌君) 이광(李珖, 1589∼1645) 부부와 선조의 사위 동양위 신익성(東陽尉 申翊聖, 1588∼1644) 부부 등 다수의 왕실 인물과 스님 580여 명을 포함한 총 1,320명이 시주자로 참여했다.

문화재청은 “17세기에 제작된 목조불상 중 크기가 가장 크고, 불교조각으로 유일하게 비로자나불-노사나불-석가모니불로 표현된 삼신불 도상이라는 점에서 불교조각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크고 중요할 뿐 아니라 예술‧조형적 수준도 조선 후기 불상 중에서 단연 돋보이므로 국보로 지정해도 손색이 없는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울진 불영사 불연’은 1670년(현종 11) 화원(畵員)으로 추정되는 광현(廣玄)·성열(性悅)·덕진(德眞) 스님 등이 참여해 조성한 2기의 불교의례용 가마다. 현재까지 알려진 약 20기의 조선 후기 불연(가마) 중 형태가 가장 온전하다. 불연이 보물로 지정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불연은 불보살상·사리·경전·불패(佛牌, 불보살의 명호나 발원 내용을 적은 나무패) 등 예배의 대상과 영가(靈駕, 불교에서 망자를 부르는 말) 위패 등을 싣고 의식이 거행되는 장소로 모셔오는 시련의식(侍輦儀式)에서 사용되는 매우 중요한 의식법구다.

불영사 불연 2기 모두 1670년이라는 분명한 연대와 학종(學宗) 스님이 좋은 장인을 만나 불연을 제작하게 된 배경, 제작에 동참한 시주자, 불연의 제작자로 추정되는 스님 등이 일목요연하게 기록돼 있어 조선 후기 불교목공예 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완주 송광사 목조석가여래삼존좌상 및 소조십육나한상 일괄’은 1656년(효종 7) 조성된 불상으로, 당시 제작된 나한상 중 수량과 규모면에서 가장 크다. 제작 당시 수조각승 무염(無染) 스님의 통솔 아래 조각승들이 1∼4명씩 분담해 제작했다. 참여 조각승들은 무염·승일파(無染·勝一派), 현진·청헌파(玄眞·淸憲派), 수연파(守衍派) 등 역량이 뛰어났던 17세기 조각장들을 계승한 인물들로, 당시 불교계를 대표한 벽암 각성 스님의 요청에 의해 제작한마큼 완주 송광사 나한전 불사의 중요성을 짐작케 한다.

완주 송광사 불상은 조각과 더불어 개금(改金)·개채(改彩) 작업 등 조각승과 불화승간의 협업 체계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송광사를 본산으로 활약했던 조각승들의 활동체계와 제작태도, 경향 등을 밝힐 수 있는 자료라는 점에서 조선 후기 불교조각사에 있어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송시열 초상(宋時烈 肖像)’은 조선 중기 정치와 학문에서 뚜렷한 자취를 남긴 성리학의 대가 송시열(宋時烈, 1607~1689) 선생의 74세 때 모습을 그린 18세기 초상화다. 충북 제천 황강영당(黃江影堂)에 300년 넘게 봉안돼 왔고, 내력이 분명하다.

작품 상단에는 ‘우암 송선생 칠십사세 초상(尤庵宋先生 七十四歲 眞)’이라는 화제가 적혀 있는데, 1680년 23세의 김창업이 74세의 송시열을 그린 초본(初本)을 참조해 후대의 뛰어난 화가가 그린 것으로 추정한다. 유려하면서도 단정한 필선, 정교한 채색으로 뛰어난 예술성을 구현했다는 점에서 국보 ‘송시열 초상’(국립중앙박물관)과 견주어도 수준이 크게 차이 나지 않는 작품으로 평가받았다.

완주 송광사 목조석가여래삼존좌상. <사진=문화재청>
완주 송광사 소조십육나한상. <사진=문화재청>
울진 불영사 불연 옆면. <사진=문화재청>
송시열 초상. <사진=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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