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세와 절연된 대규모 무문관 수행종풍 도움될 것

금강산 내금강의 마하연(摩訶衍)은 근세 한국 불교 선승들의 고향이며 귀의처였다. 그러나 6ㆍ25전쟁 중 소실돼 터만 남아있는 채 ‘갈 수 없는' 북한 땅에 방치돼 왔다.

근세 한국 불교의 내노라 하는 선객(禪客)치고 마하연 선방을 거치지 않은 사람이 없다. 다시 말해 한 철이라도 마하연 선방 안거를 하지 않고는 제대로 된 선승 대접을 못받았던 것이다. 이처럼 마하연은 선수행의 산실로 이곳을 거쳐간 많은 고승대덕과 그들의 법손들에게 마음의 고향이며 수행의 요람이었다. 1998년 금강산 외금강과 해금강 관광이 개방된데 이어 지난 5월 내금강 관광도 개방됐다. ‘금강'이라는 이름부터가 불교에서 유래했기 때문에 금강산은 한국 불교의 성지임에 틀림없다.

10월13일 금강산 신계사 복원 낙성 회향은 분단시대 남북불교 교류의 매우 성공적이고 기념비적인 불사였다. 남측 불교 조계종과 북측 조선불교도연맹이 민족 통일에의 염원을 담은 간절한 원력으로 3년 반 만에 발굴과 고증을 거쳐 15동의 전각을 옛 모습대로 복원했다. 유점사ㆍ장안사ㆍ표훈사와 함께 금강산 4대 고찰의 하나인 신계사는 이번 복원을 통해 외금강의 관광 명소로서 뿐만 아니라 성지 고찰의 면모를 되찾는 법열(法悅)을 만끽했음직 하다.

신계사 복원의 환희심은 이제 마하연 복원으로 이어져 본색이 선종인 한국 불교 선방의 본산이었던 마하연 선실을 새롭게 일으켜 세워야 한다. 이는 곧 참선 위주인 한국 불교 수행 종풍의 진작이기도 하다.

마하연은 범어의 마하야나(Mahayana)의 음역이고 의역하면 ‘대승(大乘)'이다. ‘마하(大)'는 크다는 뜻이고 ‘야나(乘)‘는 생사의 고해로부터 열반의 피안으로 실어나른다는 뜻이다. 마하연寺는 화악지탁선사(1750~1839)의 《마하연중건기》에 따르면 신라 의상대사가 창건했던 고찰이다. 신라ㆍ고려때의 마하연 연역은 기록이 없다.

1831년 월송선사의 중창 불사로 전각과 요사채 50여동이 중건됐고 1848년 대운선사가 절 뒤에 선방을 짓고 ‘마하선실(摩訶禪室)'이라 했다. 1923년 화응정진선사가 들어와 정진하다가 1932년 59칸의 당우를 중창하는 3차 중건불사로 장엄한 선사(禪寺)의 위용을 갖추었었다.

낙파인성선사(1794-1877)는 27세 때 마하연에 들어와 평생 산문 밖을 나가지 않은 채 참선만 했고 율봉청고ㆍ화담경화선사 등도 마하연에서 주로 정진했다. 근세에는 만공월면선사(1871~1946)를 조실로 모시고 지월ㆍ고송 스님 등이 마하연 선실에서 정진했고 봉암사 결사의 주역이었던 자운(1911~1992)ㆍ성철 스님(1912~1993)과 금봉 스님 등도 마하연 선방을 거쳤다. 고송 스님은 생존시 “마하연 선방은 200여명이 앉는 큰 방이었는데 말석에서는 앞의 조실스님이 까마득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내금강 만폭동 법기봉 아래 위치한 마하연터는 아래로는 유일하게 보존된 금강산 4대 사찰의 하나인 표훈사와 보덕암 등이 있고 위로는 마애불인 묘길상(妙吉祥)이 잘 보존돼 있어 금강산 내 최고의 불교 환경을 갖추고 있다. 마하연 선실이 복원되면 최적의 참선 수행처로서 대규모 ‘무문관(無門關)' 역할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북한 땅이고 깊은 산중이라 산문 밖 출입이 자동 통제되고 입실과 동시에 속세와의 절연이 자연스럽게 이루어 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방이 복원돼 안거 경력과 법랍을 갖춘 수좌들을 엄선해 방부(房付)를 받아 정진하게 하면 한국 불교 ‘최고의 선방 명성'을 오늘에 되살릴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마하연 복원은 최근 봉암사결사 60주년 대법회를 통해 점화된 한국 불교 수행종풍의 진작을 가속화 시키는 실천적 상징이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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