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문화·생활상 보여주는 고분벽화는 생생한 역사영화관

안악 3호분 가상체험 장면.

고구려 고분은 지금까지 90여 개 발견됐다. 평양과 대동강 근처에 60여 개, 압록강 근처에 20여 개 등이다. 이 중 벽화가 그려져 있는 고분은 주로 돌로 쌓은 ‘돌방흙무덤’이다. 고분 벽화는 당대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남다르다. 고구려를 대표하는 고분벽화는 안악 3호분에 그려져 있다.

우리나라에는 고구려 유적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고구려 영토가 광대했던 만큼 유적들도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을 테고, 북한에 남아 있던 유적들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훼손됐거나 이미 유실돼 아쉬움이 더하다. 이에 우리는 고구려 고분 속 벽화를 통해 과거 고구려인들의 생활상과 문화를 엿볼 수밖에 없다.

지금으로부터 1,500년 전인 5세기 고구려의 영토는 서쪽으로는 요하, 북쪽으로는 송화강, 동으로는 연해주에 이르는 한민족 역사상 전무후무한 대국이었다. 또한 남북조와의 교류를 통해 중국 문화가 유입됐고, 북방 중앙아시아를 거쳐 실크로드 문화도 지속적으로 전해졌다. 이렇다 보니 고구려 문화는 독자적인 전통 위에 여러 문화의 장점을 접목한 매우 높은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이런 문화적 성취는 고구려 고분벽화에 고스란히 반영된다.

고구려 고분벽화의 백미로 불리는 안악 3호분의 외관.

고구려 고분벽화의 특징

고구려 고분벽화의 발전은 크게 3단계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인물풍속도이고, 둘째는 인물풍속과 사신도, 세 번째는 사신도이다.

첫 번째 시기에 해당하는 인물풍속도에는 4~5세기 고구려인들의 생활 전반이 묘사돼 있다. 대표적인 벽화가 안악 3호분, 약수리 고분, 덕흥리 고분, 안악 2호분, 사신총 등이다. 대체적으로 인물풍속도에는 고구려인 집안의 일상생활과 해·달·별·장식·무늬 등이 나타난다. 고분 벽화에서 보이는 전형적인 건축구조는 대들보·기둥·두공·도리 등으로 목조건물의 형식을 잘 재현하고 있다.

집안생활에서는 가족 외에도 시중드는 사람과 호위 등 남녀 인물이 묘사되어 있다. 내용은 행렬·사냥·씨름·전쟁·무악 등이 보인다. 또한 성곽·부엌·마구간·외양간·우물 등 각종 건물도 묘사돼 있으며, 천장에는 해·달·별 그리고 출입구 부분에는 문지기도 등장한다.

두 번째는 말 그대로 인물풍속도와 함께 사신도가 있는 고분이다. 이 벽화는 대체적으로 인물풍속도보다 복잡한 형태를 보인다. 즉, 인물 외에 청룡·백호·현무·주작과 사신·비천·신선 등이 등장하고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의 백미는 규모나 벽화 내용의 풍부성으로 볼 때 단연 안악 3호분(安岳 3號墳, 북한국보 제67호)이다. 황해남도 안악군 오국리에 위치한 이 고분은 현무암과 석회암의 큰 판석으로 짜여 있다. 1949년에 처음 발견된 후 한국전쟁 이후인 1957년에 북한 고고학의 아버지인 도유호(1905∼1982) 박사에 의해 조사됐으며, 50년이 지난 2004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북한에서는 고분의 벽에서 ‘영화(永和)13년’이란 묵서명이 발견됐다. 이 명문은 동진의 연호인데, 이를 근거로 고분의 축조시기를 고국원왕(?~371) 27년(357년)으로 추정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 고분이 선비족 중 모용부 출신으로 고구려에 귀화한 동수(冬壽, 289~357)의 묘라고 보고 있지만, 북한에서는 고국원왕릉으로 보고 있다.

앞서 고구려에 남북조 문화와 실크로드를 통한 서역문화가 유입되었다고 언급했는데, 이에 대한 근거들을 고구려 고분벽화, 특히 안악 3호분에서 찾아볼 수 있다. 대표적인 형태가 천정의 각을 줄여가며 만들다가 마지막에 덮개돌을 얹는 말각조정(抹角藻井, 모줄임) 양식이다. 필자는 2003년 아프가니스탄 바미안 지역에서 동일한 형태의 천정을 보았는데, 이런 양식은 중국 신강이나 중앙아시아 지역의 건축 특징 중 하나로 원래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 시작된 건축기법이다.

또한 후실의 가면희도(假面戱圖)에는 중앙아시아 소그드 출신으로 보이는 춤꾼이 가면을 착용하고 등장한다. 이 인물은 코가 큰 탈을 썼으며, 다리를 꼬고 손벽을 치는 듯한 자세로 춤을 추고 있다. 이 ‘발 꼰 춤사위’는 인도와 서역계의 춤동작이다. 모자 역시 인도계 터번이다. 그러므로 이 사람은 분명 중앙아시아에서 온 소그드(Sogd)계 무용수로 볼 수 있다. 이렇게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는 중국 혹은 간다라, 나아가 로마의 벽화와 연결할 수 있는 개연성을 찾아볼 수 있다.

안악 3호분 무덤의 남자 주인 모습 복원도.
안악 3호분 무덤의 여자 주인 모습 복원도.

안악 3호분, 고구려 생활상 한눈에

안악 3호분은 황해남도 안악읍에서 약 7km 가량 떨어진 용순군 유설리 대지형의 구릉 서편 끝 등마루에 위치해 있다. 3호분은 남북 33m, 동서 30m이며, 봉분의 높이는 6m 정도다. 안악 3호분은 지금까지 알려진 고구려 고분벽화 중에서 규모나 벽화 내용 풍부함에서 단연 으뜸이다. 지하궁전을 방불케 하는 스케일과 4∼5세기 동아시아 문화를 대표하는 고구려의 힘과 사회상을 가장 잘 보여준다.

안악 3호분은 현실(玄室, 시신이 있는 방)과 전실(前室)·후실(後室)·좌우 측실(곁방)·회랑이 있는 구조의 봉토석실분이다. 마치 현세의 가옥을 상징하는 듯한 구조로 한(漢)·위(魏)·진(晉) 대에 요동지역에 유행했던 구조이다. 즉, 안악 3호분의 구조는 중국계 석실의 영향이 짙다. 고구려인들은 죽어도 영혼은 영원히 남는다고 믿었다. 그래서 살아서 누리던 호화로운 생활을 죽은 뒤에도 누리기 위해 살았을 때의 생활을 무덤 속에 동일하게 묘사했다.

고분의 구조와는 달리 벽화의 내용이나 화풍은 고구려만의 특징을 보여준다. 무덤의 주인[墓主] 부부로 추정되는 그림을 비롯해 부엌·도살실·차고·행렬도 등의 벽화는 고구려의 사회상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또 측근들의 생활상, 전실에는 무사·의장대·고취악대·씨름꾼의 모습이 보인다. 이외에 부엌 살림살이와 수레와 우마(牛馬)도 그림에 등장해 고구려인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특히 부엌 아궁이의 불이 선명하게 보이는데, 부엌 앞마당에는 군침을 흘리는 두 마리의 개가 보이고, 지붕 위에는 새가 앉아 아래를 굽어보고 있다. 고분의 구조와 벽화는 4세기 고구려 귀족의 대저택을 재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고구려적인 토속성을 짙게 담고 있다고 하겠다.

벽화는 회를 칠하지 않고 석벽 위에 직접 그렸는데, 무덤 주인 부부의 모습은 서쪽 측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유일한 정면상인데, 넓은 얼굴에 진한 눈썹, 가늘고 긴 눈매와 팔자수염을 하고 있다. 검은 내관 위에 하얀 덧관을 썼는데, 백라관(白羅冠)이다. 이 백라관은 무덤 주인이 고국원왕 또는 미천왕, 귀화한 모용부의 장수 동수라는 등의 여러 설이 나온 게 한 배경이다.

중국 역사서에는 고구려왕이 백라관을 썼다고 적고 있다. 무덤의 주인이 쓴 모자가 백라관이라고 추정하는 이유는 책(幘)의 앞부분에 금테가 둘러있고, 그 위에 섬세하게 짠 흰색 비단 ‘라(羅)’로 만든 덧관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무관이 백라관을 쓴 경우도 있지만, 이 경우 관의 끈이 5촌(11.5cm)으로 매우 짧은 반면, 무덤의 주인은 끈이 가슴부분까지 내려온다.

무덤의 주인은 또 두루마기를 입은 채 오른손에는 손잡이에 귀면을 새긴 털부채 주미(麈尾)를 쥐고 있다. 반대쪽에는 3단으로 늘어뜨린 붉은 의장기가 세워져 있다. 무덤 주인의 얼굴은 여러 번 고친 흔적으로 볼 때 화가의 고심어린 정성이 엿보인다. 좌우에는 무덤의 주인에게 보고를 하고 지시를 받는 문·무관들이 묘사돼 있다. 부인은 구름무늬 긴 저고리와 잔주름 치마를 입었다.

위에서부터 안악 3호분 복원 전 행렬도. 프로젝션 매핑(Projection Mapping)을 통해 재구성한 행렬도. 디지털로 복원한 행렬도 원형. 〈사진=국립중앙박물관 디지털 실감영상관〉

회랑의 동쪽 벽면에는 250여 명의 사람들이 등장하는 ‘행렬도’가 그려져 있다. 소가 끄는 수레에 탄 주인공을 중심으로 앞쪽에는 악대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나아간다. 수레 뒤쪽으로는 호위무사대, 중장기병, 호위대장처럼 보이는 말을 탄 관원이 뒤따른다. 이러한 웅장한 행렬은 당시 무덤 주인공의 지위가 매우 높았음을 보여준다. 참고로 〈삼국사기〉에는 김유신이 죽었을 때 왕이 내린 고취악대가 100여 명 정도였다고 적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200명이 넘는 고취악대는 무덤의 주인이 고구려왕이었다는 주장의 근거 중 하나다.

앞서 서술한 바와 같이 행렬 규모가 웅장한 고구려 고분벽화는 그림의 묘사도 뛰어나고, 그림 속 악기들이 뿜어낼 것 같은 음향성도 매우 풍부하다. 또한 벽화마다 각각의 이야기를 담고 있어 스토리텔링 요소까지 고루 겸비한 ‘멀티미디어 콘텐츠’의 총아라 할 수 있다. 즉, 고구려 고분벽화는 그 자체만으로도 역사인 동시에 예술이다. 이런 뛰어난 예술성 때문에 2004년 6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 인류사에서 수백 점의 벽화가 한 지역권 내에 집중 분포된 사례는 고구려 고분벽화가 거의 유일하다.

그리스 신화는 기록속에 존재하는 신화인 반면 고구려 벽화는 당대 고구려인의 생생한 삶이 그대로 살아있는 역사책이다. 사진이 없었던 고대 시대를 엿볼 수 있는 ‘고구려식 영화관’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천년 이상 땅 속에 묻혀 있었기에 천연의 색을 유지하고 있어, 고구려 미술의 높은 수준에 찬탄을 금할 수 없게 한다.

안악 3호분의 천정(왼쪽)과 아프가니스탄 바미안 석불의 천정. 둘 다 말각조정 양식의 천정이다.

가상현실 디지털 복원과정

디지털 복원은 2차원의 고분벽화를 가상현실로 불러들여 생동감 있는 3차원의 동적(動的) 이미지로 재탄생시키는 과정이다. 고구려 고분벽화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지만 남북한의 정치상황으로 말미암아 현장 접근이 불가능하다. 이에 가상현실 기술을 이용, 실제와 흡사한 체험 콘텐츠로 제작했다. 사용자가 자유자재로 공간을 걸어다닐 수 있는 워킹형 가상현실(Walking VR) 기술을 적용했다. 이는 관람자가 VR기기의 컨트롤러를 이용해 가고자하는 고구려 고분 속의 벽화를 자유자재로 선택할 수 있는 ‘디지털 문화유산형’ VR콘텐츠다.

먼저 가상현실 복원을 위해 헤드 마운티드 표시장치(HMD, Head Mounted Display)라는 가상현실기기를 활용했다. 이마에 헤드셋을 장착하면 움직임에 따라 그 방향으로의 영상을 보여주는 기술이다. 또한 HMD안에 장착된 고굴절 렌즈는 좁은 화면을 오목하게 굽어진 파노라마 영상으로 제공한다. 넓은 시야각을 제공해 체험자의 시각적 몰입감을 높여주는 효과가 있다. 또 사용자는 컨트롤러를 이용해 원하는 고분 벽화를 선택해 확대할 수 있고, 3D로 복원된 벽화 상의 중갑보병을 마치 실물크기로 만날 수도 있다. VR구동엔진에는 ‘유니티(Unity)’라는 기술을 활용했다. 이것은 VR환경을 구축하는 프로그램으로 고분에서 실시간 내비게이션이 가능한 기술이다.

남북 분단 상황으로 말미암아 북한의 문화유적지를 실제로 가볼 수는 없지만, 디지털 복원 기술을 이용하면 일종의 ‘가상관광(가상관광, Virtual Travel)’은 가능하다. 이런 첨단기술은 분단된 국토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접할 수 없는 우리문화유산을 현장감 있게 경험하게 해준다는 측면에서 매우 큰 의미가 있다.

안악 3호분의 무악도 속 소그드(Sogd)인 광대.
안악 3호분 부엌도. 고구려의 생활상을 잘 살펴볼 수 있다.
안악 3호분 행렬도를 바탕으로 재현한 고구려 왕의 행차도. 〈사진=서울 롯데월드 민속관〉

박진호
문화재 디지털복원전문가. 한양대 문화인류학과를 졸업한 후 동국대 미술사학과에서 석사, 상명대 글로벌문화콘텐츠학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서라벌 왕경·백제 무령왕릉·고구려 고분벽화·바미안 석불·앙코르와트를 디지털 복원했고,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서 디지털 석굴암을 전시하는 등 20여 년 간 70개의 디지털 복원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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