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은유법 詩로 풀어내

까마득한 고조선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 백수광부 부부의 죽음을 슬퍼한 여옥의 노래 이후, 왕의 힘으로도 붙들지 못한 아내의 떠남을 탄식한 고구려 유리왕의 노래 황조가(黃鳥歌) 이후, 행상 나간 남편의 무사를 기원한 백제 여인의 노래 정읍사(井邑詞) 이후, 신라 향가들의 아름다움 이후, 이 땅에는 얼마나 많은 시의 별들이 명멸했던가? 오늘은 그 가운데 미당 서정주(1915~2000)를 생각한다.

미당의 정신적 배경은 불교

미당 선생 탄생 100주년이 되는 2015년 6월, 그의 문학을 집대성한 전집 스무 권이 출간되었다. 간행위원회는 발간사에서 “선생은 겨레의 말을 가장 잘 구사한 시인이요, 겨레의 고운 마음을 가장 잘 표현한 시인이다. 우리가 선생의 시를 읽는 것은 겨레의 말과 마음을 아주 깊고 예민한 곳에서 만나는 일이 되며, 겨레의 소중한 문화재를 보존하는 일이 된다.”고 밝히고 있다.

1915년. 태어나니 식민지였다. 민족의 수난기에서 그의 시 몇 편이 보여준 친일. 그의 85년 생애는 일제하 30년 그리고 전쟁과 개발독재로 점철된 한국 현대사 속의 55년이었다. 그 가운데 친 군사정권 성향을 보여준 몇 편의 시와 행적.

그가 세상을 떠난 지 21년. 우리는 이제 미당 서정주의 시와 생애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평가해야 한다. 그에 대한 비난에 못지않게 항일·반공·모국어에 대한 헌신도 제자리에 놓여야 한다. 그것이 한국 최고의 시인에 대한 올바른 대접이 아니겠는가?

미당 시의 정신적 배경은 불교다. 1925년 줄포보통학교를 수료하고, 1929년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1930년 광주학생운동과 관련해 구속되었다가 기소유예로 석방됐으나 이로 인해 퇴학당했다. 1931년 고창고등보통학교에 편입했으나 곧 자퇴하고 방랑을 하다가 고승 정호(鼎鎬. 속명 박한영) 문하에 입산했다. 그러나 박한영 스님은 그가 승려가 될 수 없는 사람이란 것을 알아보고 서울 대한불교전문강원에 입학토록 했다고 한다. 그는 중앙불교전문학교에서 공부했다.

그는 1968년 8월에 출간한 제5시집 〈동천(冬天)〉의 서문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신라초〉에서 시도하던 것들이 어느 만큼의 진경(進境)을 얻은 것인지, 하여간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대로의 최선은 다해 온 셈이다. 특히 불교에서 배운 특수한 은유법의 매력에 크게 힘입었음을 여기 고백하여 대성(大聖) 석가모니께 다시 한 번 감사를 표한다.”

그가 ‘불교에서 배운 특수한 은유법’이란 어떤 것인가?

내가
돌이 되면

돌은
연꽃이 되고

연꽃은
호수가 되고

내가
호수가 되면

호수는
연꽃이 되고

연꽃은
돌이 되고

― 시 ‘내가 돌이 되면’

시는 나와 돌, 연꽃, 호수가 별개의 것이 아니고 서로가 맞물려 끊임없이 윤회함을 보여주고 있다. 내가 돌이 되는 운명을 피하려 호수가 되면 다시 연꽃이 되어 마침내 돌이 되니 윤회의 굴레는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미당은 이런 윤회의 세계를 단순하고도 아름답게 그리고 있다. 이런 것이 바로 그가 ‘불교에서 배운 특수한 은유법’이 되는 것이다.

어느 날 내가 산수유 꽃나무에 말한 비밀은
산수유꽃 속에 피어나 사운대다가······
흔들리다가······
낙화하다가······
구름 속으로 기어들고,

구름은 뭉클리어 배 깔고 앉었다가······
마지못해 일어나서 기어가다가······
쏟아져 비로 내리어
아직 내 모양을 아는 이의 어깨 위에도 내리다가······

빗방울 속에 상기도 남은
내 비밀의 일곱 빛 무지개여
햇빛의 프리즘 속으로 오르내리며
허리 굽흐리고

나오다가······
숨다가······
나오다가…···

― 시 ‘산수유 꽃나무에 말한 비밀’

내가 산수유 꽃나무에 비밀을 말하면, 그 비밀은 마침내 구름 속으로 기어들고, 그 구름은 비가 되어 내리고, 그 빗방울 속에 내 비밀의 일곱 빛깔 무지개가 나오다가 숨다가 나온다는 상상력도 역시 불교적이다. 미당은 불교적 은유를 매우 아름다운 언어로 표현하고 있다. ‘사운대다가’, ‘뭉클리어 배 깔고 앉었다가’, ‘햇빛의 프리즘 속으로 오르내리며’ 등의 옷을 입고 나옴으로써 이 불교적 상상력은 설법이 아니라 시가 된다. 미당의 시가 얼마나 놀라운가?

미당 선생의 시간의 개념

그는 1968년 부처님 오신 날에 이런 시를 발표했다.

사자(獅子)가 업고 있는 방에서
공부하던 소년들은
연꽃이 이고 있는 방으로
1학년씩 진급하고,

불쌍한 아이야.
불쌍한 아이야.
세상에서 제일로 불쌍한 아이야.
너는 세상에서도 제일로
남을 불쌍히 여기는 아이가 되고,

돌을 울리는 물아.
물을 울리는 돌아.
너희들도 한결 더 소리를 높이고,

만 사람의 심청이를 가진
뭇 심봉사들도
바람결에 그냥 눈을 떠 보고,

텔레비여.
텔레비여.
도솔천 너머
무운천 비상비비상천 너머
아미타 불토의 사진들을 비치어 오라, 오늘은······

삼천 년 전
자는 영원을 불러 잠을 깨우고,
거기 두루 전화를 가설하고
우리 우주에 비로소
작고 큰 온갖 통로를 마련하신
석가모니 생일날에 앉아 계시나니.

― 시 ‘부처님 오신 날’

이 시는 TV 수상기 앞에 불상을 설치한 백남준의 작품을 떠올리게 한다. 천재들의 세계는 서로 만나는 것처럼, 미당의 상상력은 백남준의 상상력과 만나고 있다. 왜 부처님이 TV 앞에 앉아 있는가? 그것은 이제 TV라는 매카니즘을 통해 몇 백 만, 몇 천 만, 몇 억 명과도 동시 소통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코로나19 이후 우리는 줌(Zoom)을 통한 비대면 소통을 체험하고 있다. 이제 시간과 공간을 투자해서 먼 거리를 이동할 필요가 없어졌다. 앉은 자리에서 동시에 여러 곳을 소통할 수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TV화면 안에 삼천대천세계가 다 들어 있다. 이제 5,500만 광년 떨어진 우주의 블랙홀을 보고, 명왕성 언저리에서 창백한 한 점 지구를 보고, 화성의 속살을 보고 있다. 미당은 TV의 출현에서 ‘도솔천 너머/무운천 비상비비상천 너머/아미타 불토의 사진들을 비치어 오라’고 말한다. 이 얼마나 놀라운 발견이며 예언인가?

만일에
이 시간이
고요히 깜작이는 그대 속눈섭이라면

저 느티나무 그늘에
숨어서 박힌
나는 한 알맹이 홍옥이 되리.

만일에
이 시간이
날카로히 부딪치는 그대 두 손톱 끝 소리라면

나는
날개 돋쳐 내닫는
한 개의 화살.

그러나
이 시간이
내 사막과 산 사이에 늘인
그대의 함정이라면

나는
그저 포효하고
눈 감는 사자.


만일에 이 시간이
45분만큼씩 쓰담던
그대 할아버지 텍수염이라면
나는 그저 막걸리를 마시리.

― 시 ‘고대적 시간’

나는 우연한 기회에 미당으로부터 이 시간개념에 대해 직접 설명을 들은 적이 있다. 선생과의 인연은 꽤 길어서 내 결혼식 주례를 서주기도 하셨고, KBS 파리 특파원으로 있을 때 프랑스를 방문한 선생 내외가 나를 찾기도 했다. 귀국 후 남현동 선생댁에 갔을 때였을 것이다. 선생은 시간의 개념을 시, 분, 초가 아니라 눈의 깜작임, 두 손톱의 튕김, 할아버지가 수염을 한 번 쓰다듬음으로 말씀하셨다. 눈이 깜작이거나 손톱이 튕기는 시간은 얼마나 짧은가? 그리고 할아버지가 턱수염을 한 번 쓰다듬는 시간을 선생은 45분으로 보았다.

참으로 유장(悠長)한 시간이다. 이 역시 찰나에서 무한대에 이르는 시간에 대한 불교적 발상이다. 미당은 이렇게 불교적 상상력에서 시의 보고(寶庫)를 발견했고, 그것을 명작으로 남겼다.

이용당하기 쉬운 난세의 천진함

2000년 12월 22일, 선생이 위독하단 전갈이 왔다. 입원하고 계신 삼성의료원으로 갔더니 왼쪽 팔목에 염주를 감고 계셨다. 선생이 작품에서뿐 아니라 평생 의지하고 산 세계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이었다. 나는 저렇게 큰 시인도 생의 마지막을 믿음에 의지해야 한다는 사실이 약간은 생소하기도 했다.

엑스레이 기사가 오더니 사진을 찍어야 한다며 환자를 좀 안아서 올려달라고 했다. 두 팔로 안아 올렸는데 아기처럼 가벼웠다. 부인이 돌아가신 후 곡기를 끊다시피 했던 것이다. 내가 만난 선생은 천생 시인이었다. 선생을 만나면 늘 시가 쓰고 싶어졌다. 선생은 자신이 위대한 시인임을 넘어 만나는 사람도 시가 쓰고 싶어지게 만드는 분이었다.

그런 시인적 속성은 천진함과도 통한다. 난세에 천진함은 얼마나 이용당하기 쉬운 것이었을까? 일제는 이용만 하고 떠났고, 정권도 이용만 하고 떠났다.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았다. 조롱하지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그 자리에 천진한 시인만 남아 피투성이가 되어 돌을 맞고 있다. 아무런 벼슬도 해본 바 없이, 진실된 도움도 받은 바 없이.

그러지 말아야 하는 것이었다. 정치를 하는 사람, 군국주의자. 식민지배자들과 시인. 그들은 만날 수 없는 거리에 있다. 시인은 시를 쓰며 개결(介潔)하게 시대를 지키거나 싸워야 하는 것이었다. 시적 가치와 세속적 권력은 사는 세상이 다르다. 시인은 권력과 거리를 둘 때 오히려 힘을 갖는다. 가난이, 서민적 삶이 시인에게는 오히려 힘이 된다. 희생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시인이 있다. 그것은 숙명이다. 미당은 그런 무서운 가르침을 생애로서 우리에게 보여 주었다.

내가 선생을 뵌 것은 의식이 있는 선생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로부터 이틀 후 선생이 작고했다는 연락이 왔다. 그날은 눈이 펑펑 내리는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흰 눈이 세상의 더러운 모든 모습을 덮고 있었다. 맑고 투명한 영혼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유자효
시인. KBS 유럽총국장·SBS 이사·한국방송기자클럽회장을 역임했다. 시집 〈신라행〉·〈세한도〉·시집소개서 〈잠들지 못한 밤에 시를 읽었습니다〉·번역서 〈이사도라 나의 사랑 나의 예술〉을 펴냈다. 공초문학상·유심작품상·현대불교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 (사)구상선생기념사업회장, 지용회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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