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을 통한 방편의 무게 알기에 사리불도 목건련도 문병 회피해

<삽화=전병준>

유마거사 문병은 누가 갈 수 있을까? 
[부처님의 10대 제자-1]

• 무대 - 인도 바이샬리 성

• 주요 등장인물 – 부처님, 유마거사, 사리불을 비롯한 부처님의 10대제자.

• 주요 전개과정

유마거사는 방편으로 병을 앓으면서 ‘부처님께서 문병 사절을 보내주시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생각한다. 문병 사절과의 법담의 자리에서 당신이 행한 방편을 통해 큰 진리의 마당을 펼치고자 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유마거사의 뜻을 아시고 문병하러 갈 사람을 찾는다. 우선 사리불을 비롯한 10대 제자에게 유마거사의 문병을 부촉(咐囑, 부탁하여 맡김)하시는데, 10대 제자들은 차례대로 그러한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아뢴다. 사리불은 ‘좌선의 근본에 대하여’, 목건련은 ‘올바르게 법(法)을 설하는 법에 대하여’ 등 이런저런 주제로 유마거사에게 꺾임을 당했기에, 단순한 문병이 아니라 유마거사를 상대해 큰 진리의 마당을 여는 소임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아뢴 것이다. 이러한 10대 제자의 술회에는 대승의 근본 입장과 시각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몸은 몸일 뿐이다!”

몸은 더러운 것도 깨끗한 것도 아니라는 것이 올바른 견해라는 것은 누가 뭐라고 해도 틀림없는 진실입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그렇게 보기가 무척 힘듭니다. 그래서 부처님도 유마거사도 몸에 대한 탐착을 끊기 위해 독한 처방을 내렸습니다. 그 간곡하신 마음에서 나온 방편의 의미를 올바르게 이해하면 참으로 몸을 제대로 보고, 또 제대로 대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몸의 덧없음을 드러낸 병

뭐니 뭐니 해도 우리 몸의 정체를 단박에 알 수 있게 하는 것은 바로 ‘병’이지요. 몸에 병이 들었을 때 우리는 몸의 정체성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몸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도 고민하게 됩니다. 병은 어떻게 해서 들게 되지요? 내 몸을 잘못 보고 잘못 대접해서 들게 되는 겁니다. 즉, 몸의 욕구에 지나치게 따르게 되면 병이 납니다. 거꾸로 몸의 욕구를 무시해도 병이 납니다. 그러니 참으로 “몸은 몸일 뿐이다!”는 진실을 바로 알고 그렇게 대접하는 것이 병의 괴로움을 줄이는 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조심을 해도 몸에 병이 들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성인들도 병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지요. 공자(孔子)가 병을 앓은 이야기가 〈논어〉에 여러 번 나옵니다. 부처님도 병 때문에 고생을 하셨지요. 춘다의 공양을 받으시고 매우 심하게 앓으셨다는 것은 잘 알고 계시지요?

아무리 조심해도 결국은 병이 들고, 그래서 죽어간다는 사실! 이것은 무상(無常)과 덧없음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 줍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무상함을 똑바로 봐야 합니다. 병의 괴로움에 빠져 허우적거리면서, 거기에 그렇게 오롯하게 드러나는 덧없음에 대해 눈을 감고 지나가면 안 됩니다. 눈을 환하게 뜨고 똑바로 봐야 합니다.

그런데 ‘덧없음을 본다.’는 것과 ‘덧없음에 감정적으로 빠진다.’는 것을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감정적으로 빠지는 데는 두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아, 슬프다! 모든 것은 이리도 덧없는 거야!” 하며 비탄으로 기우는 유형이지요. 다른 하나는 “덧없는 일에 굳이 마음 쓸 필요가 있나?” 하면서 세상일을 무시하며 냉소적으로 기우는 유형입니다. 둘 다 옳지 않습니다. 똑바로 보는 것이 중요할 뿐입니다. 그 덧없는 것들에 매달리던 덧없는 삶에서 벗어나되, 한편으론 그 세계를 버리지 않고 끊임없는 불(佛)세계 건설을 위해 나아가야 합니다. 덧없음을 바로 보는 것을 다른 측면에서 말하면, 지혜와 자비의 길로 첫걸음을 떼어놓는 것이 됩니다. ‘무상게(無常偈)’를 아시나요? “덧없음을 아는 것이 열반에 들어가는 문이며 고해를 건너는 배이니라!” 그러니 우리 불자님들 “몸은 몸일 뿐이다!”에 덧붙여, 다시 “덧없음은 본디 덧없음일 뿐이다!”라고 보는 ‘중도불이(中道不二)’의 푸른 눈을 뜨고 앞으로 나갑시다. 덧없음에 괜히 슬픈 느낌을 칠하거나 허무함에 빠져 허우적대지 마세요.

자! 그런데 그 덧없음 속에서 유마거사는 크게 방편을 펼치려 합니다. 바로 덧없음을 드러내는 몸의 병을 통해서 말입니다. 그리곤 생각을 하죠. ‘내가 이렇게 방편을 펼치려고 하는데 부처님께서는 어찌 문병하는 사람도 보내주시지 않는가?’ 그때 부처님께서 유마거사의 생각을 아시곤 사리불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대가 유마힐을 찾아보고 문병하여라.”

손바닥도 부딪혀야 소리가 나는 법이지요? 유마거사는 몸의 덧없음을 드러내 보이는 방편을 크게 펼쳤습니다. 그런데 그 장단에 맞춰주는 이가 없으면 더 이상의 울림은 없겠지요. 유마거사는 이 사건을 계기로 큰 법의 무대를 펼쳐 보이고 싶으셨던 겁니다. 부처님께서 문병의 사절로 눈 밝은 이를 보내시면 그 눈 밝은 이와 더불어 위대한 진리를 논하는 찬란한 무대를 펼쳐 중생들에게 방편을 통한 일깨움을 주려고 했던 거지요. “유마거사의 이런 속내를 아시고 부처님은 싱긋이 웃으셨다.”는 말이 〈유마경〉에 나올 듯 하지요? 이런 대목이 나오지는 않습니다만 당시에 그러셨을 것만 같습니다. 그리고 앞서 이야기한 대로 먼저 지혜제일 사리불에게 유마힐의 문병을 부촉하십니다.

<삽화=전병준>

고요함에 안주하지 않는 게 대승

여기서 한 번 더 짚고 넘어가기로 하죠. ‘이야기 〈유마경〉’을 시작할 때 “〈유마경〉 자체가 엄청난 규모의 연극과 같다.”는 말씀을 드렸었지요. 그 〈유마경〉이라는 무대에서 10대 제자는 ‘소승(小乘)’을 대표하는 배역입니다. 유마거사는 바로 대승(大乘)의 견해를 드러내는 배역입니다. 그 큰 무대 가운데서도 가장 중심이 되는 무대가 바로 유마거사의 방에서 펼쳐지게 되는데, 이때 10대 제자는 그 중심배역이 되지 못합니다. 초반에 등장해서 유마거사의 대단함을 돋보이게 하고 또 대승을 빛나게 하기 위해, 또 소승의 부족함을 연기하는 배역을 맡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유마거사를 뚜렷하게 드러낸 다음, 유마거사와 문수사리보살이 대승의 진리를 설파하는 것이 〈유마경〉이라는 전체 무대의 진행방식입니다. 그래서 사리불을 비롯한 부처님의 10대 제자가 차례로 “그 어른은 도저히 제가 상대하지 못해요.”라고 말하며 머리를 절레절레 흔듭니다. 그러면서 구체적으로 유마거사한테 당했던(?) 이야기를 풀어 놓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 속에 대승의 본질, 아니 불교의 본질적인 가르침이 구름 사이의 번개처럼 번득입니다. 대승운동이 왜 일어났는지를 보여주는 정말로 생생하고도 소중한 이야기들입니다. 그런 만큼 이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살펴보고 가야 하겠지요?

그렇지만 이야기들 속에 나오는 깊은 진리는 제 깜냥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자신이 없습니다. 다만,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이야기들의 가장 기본적인 틀을 추려 요약하고, 그것들이 당시 불교의 어떤 문제점들을 짚고 있는지, 그것이 대승불교운동의 지향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드러내는 정도입니다.

우선 사리불의 이야기부터 들어보기로 하겠습니다. 사리불이 큰 숲의 나무 아래에서 좌선(坐禪)을 하고 있을 때 유마거사가 다가와서 좌선에 대해 말했는데, 그 요체는 다음과 같습니다.

“멸진정(滅盡定, 모든 마음작용이 소멸된 선정)에서 나오지 않고 일상의 행동을 나타내는 것이 좌선이다. 성인의 깨달은 경지를 버리지 않으면서도 범부의 모든 성품을 드러내는 것이 좌선이다. …… 열반을 증득했더라도 거기에 머물지 않는 것이 좌선이다 …….”

유마거사와 사리불의 대화는 다른 여러 제자와의 대화에 비해 매우 짧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속에는 앞으로 나올 이야기들의 가장 기본적인 구조가 잘 드러나 있습니다. 유마거사의 이야기는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앞의 구절은 ‘멸진정’, ‘성인의 깨달은 경지’, ‘열반’을 말하지요. 뒤 구절에서는 ‘일상의 행동’, ‘범부의 모든 성품’, ‘열반에 머물지 않음’ 등이 나옵니다. 이 구조를 간단히 줄여서 말해볼까요? 앞의 이야기에 머무는 것은 소승적인 지향점입니다. 그것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뒤의 이야기, 다른 표현으로는 우리의 일상적인 삶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것을 버리지 않는 것이 바로 대승의 지향점입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소승과 대승은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소승불교·대승불교와는 의미가 다릅니다. 흔히 동남아시아 등에 전해진 불교는 소승이고, 중국·한국·일본 등에 전해진 불교는 대승이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소위 대승불교를 표방한 쪽에서 하는 일방적인 이야기일 뿐입니다. 지금 중국·한국·일본의 불교가 진정한 의미에서 ‘대승’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남방불교라고 말해지는 것이 ‘소승’이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그럼, 〈유마경〉에서 말하는 소승과 대승이란 표현은 오늘날과 어떻게 다를까요? 승려들을 중심으로 아라한과를 얻는 것을 지고(至高)한 목표로 삼는 불교는 무언가 부처님의 참 가르침을 벗어나 있고, 그것을 혁신하여 부처님의 참뜻을 세상에 실현하려는 것을 대승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 부처님의 참 가르침을 세상에 널리 실현하려는 것이 대승운동입니다. 대승의 의미를 이렇게 본다면 오늘날에도 부처님 가르침의 의미를 널리 참되게 실현하기 위한 움직임을 펼친다면 대승운동이 되겠고, 깨달음을 추구하되 개인의 해탈과 열반에 안주하고 머문다면 그것은 바로 소승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자, 그럼 여러분께 묻겠습니다. 지금 오늘날의 불교는 부처님 가르침의 참뜻[大乘]을 제대로 실현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완전하게 실현한 경우는 없겠지요. 그러니까 좀 속되게 묻겠습니다. 오늘날 불교에 점수를 매긴다면 몇 점을 주시겠습니까? 만약 저에게 점수를 매겨보라고 한다면, 제가 좀 인색한지는 모르겠지만 아쉽게도 낙제점입니다. 이렇게 점수를 매긴 저 역시 말만 앞세우고 실천은 잘하지 못한 ‘낙제 불자’라고 생각합니다만, 백번을 물러서도 오늘날의 한국불교는 참으로 부처님 뵙기 부끄러운 점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런 이야기들은 앞으로 〈유마경〉을 이야기하면서 보다 진진하게 할 참이니, 여기서는 이렇게 운만 띄워 두겠습니다. 〈유마경〉은 당시 불교의 잘못된 점을 가장 날카롭게 비판하면서 대승의 관점을 가장 뚜렷하게 드러낸 경전입니다. 그 〈유마경〉의 비판이 오늘의 불교가 가진 문제점들을 어찌나 날카롭게 찌르는지, 시공을 초월한 지혜의 눈에 전율을 느끼시게 될 것입니다.

정혜쌍수·지관겸수는 불교수행의 핵심

원래 이야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대승’은 ‘큰 탈 것’, 또는 ‘큰수레’란 뜻입니다. 소승의 상대적 표현입니다. 이렇게 불린 이유는 ‘소승’ 불교가 우리의 삶을 현실 밖으로 내돌린 혐의가 있기 때문입니다. ‘깨달음 지상주의’라고 표현하면 적당할까요? 당시 스님들은 ‘아라한’을 목표로 삼았는데, 이 단어에는 ‘다시 이 윤회의 세계로 오지 않는다.’는 의미가 깃들어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안 되겠지만, 아무리 보아도 중생들이 살고 있는 세상을 내팽개치는 듯합니다. 중생들이 살고 있는 세상을 단번에 가치 없는 것으로 치부하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지난 호에서 세간과 출세간의 문제를 살펴볼 때, 우리의 현실적 삶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여러 각도에서 살펴보았지요? 〈유마경〉에서 말하는 소승은 바로 그때 보았던 ‘출세간 지상주의’입니다. 반면 소승에서 버려진 중생과 그들의 세간적인 삶을 모두 거둔 것이 바로 대승입니다. 그래서 ‘크다’라는 형용사가 붙는 것입니다.

무엇을 지향하는지는 수행의 방식을 결정합니다. 유마거사의 소승 비판은 곧 잘못된 지향에서 나온 잘못된 수행방식에 대한 비판입니다. “좌선이라는 것은 우리 삶을 팽개치는 것이 아니다! 좌선 자체에 들어앉지 말라!”는 것이 가르침의 요지입니다. 이리 살피고 저리 살펴도 답은 하나입니다. 세간을 치열하게 살아가면서도 그것에 집착하지 않는 대자유의 마음을 지니는 것, 그것이 바로 좌선이라고 갈파(喝破)한 것입니다.

여기서 불교 수행의 핵심을 한번 드러내보기로 하겠습니다. 불교 수행의 요체이며 핵심은 고요함과 깨어있음이 함께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려운 말로 “정(定)과 혜(慧)를 함께 닦는다.”[定慧雙修]고 하고, “지(止)와 관(觀)을 아울러 닦는다.”[止觀兼修]고도 하고, “깨어있음과 고요함을 함께 유지한다.”[惺寂等持]고 하기도 합니다. 조금씩 의미의 차이는 있지만 핵심은 동일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불교 수행의 대강령입니다. 이것을 벗어나면 불교 수행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물론 인도의 요가 수행에서 받아들인 선정(禪定)은 주로 고요함의 측면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깨어있음으로 열려야 비로소 불교 수행인 것이지요. 〈유마경〉에서 말하는 것도 이것입니다. 고요함에 해당하는 것은 ‘멸진정’, ‘성인의 깨달음’, ‘열반’ 등입니다. 거기에 파묻히거나 집착하지 않고 현실적인 삶으로 확대·연결하는 것이 바로 깨어있음의 측면입니다. 이렇게 현실적인 삶이 수행의 무대가 되는 게 불교의 수행입니다. 알라라 칼라마·웃다카 라마풋타 등의 걸출한 요가 수행자들에게 선정을 배워 그들이 추구하는 궁극적 경지까지 닦으셨던 부처님이 왜 그 수행을 멈추었을까요? 그 궁극의 선정 속에선 분명 괴로움이 없지만, 또한 우리의 생생한 현실적 삶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은 삶의 현장에서도 완전한 열반을 이루는 수행, 삶을 살아가는 중생에게 너무도 복되고 복된 혁명적 차원의 수행의 문을 열어젖히셨습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후대의 불교는 출가자들의 출세간적인 성향과 맞물리면서 부처님이 수행의 징검다리로 삼으셨던 고요함 위주의 선정에 치우치게 됐고, 부처님께서 열어놓으신 중생과 함께하는 참된 불교 수행의 물꼬는 막혀가게 된 것입니다. “열반을 증득하되 거기에 머물지 않아야 참된 선정이다!” 유마거사는 사리불과의 대화에서 이 점을 날카롭게 지적한 것입니다.

성태용
전 건국대 철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한 후 한국고등교육재단의 ‘한학자 양성 장학생’으로 선발돼 故임창순 선생에게 한학을 배웠다. EBS에서 ‘주역과 21세기’라는 제목으로 강의했으며, 한국철학회 회장과 학술진흥재단 인문학단장을 역임했다. 저서로 〈주역과 21세기〉·〈어른의 서유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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