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에 대한 바른 견해 일깨우려 병을 앓다

〈삽화=전병준〉

유마거사가 방편으로 병을 앓다[方便品]

• 무대 - 인도 바이샬리 성

• 주요 등장인물 – 유마거사

• 함께 한 대중 – 국왕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

• 주요 전개과정

당시 바이샬리 성에 유마힐이라는 거사가 살고 있었다. 그는 큰 깨달음을 성취하고, 온갖 신통과 위의를 갖추고 있었다. 또 출세간(出世間)의 마음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세간을 훌륭하게 가꿔가는 이상적인 모습을 보였으며, 온갖 방편을 자유롭게 썼다. 훌륭한 품성과 덕성으로 사회에서 가장 존경받는 어른이 되어 모든 중생에게 이익을 주는 교화를 베풀었다.

이 유마거사가 중생을 교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병을 앓는다. 국왕과 대신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문병을 하자, 이를 계기로 ‘몸은 덧없는 것이며 의지할 것이 못된다.’는 것을 깨우쳐 준다. 이에 반해 ‘여래의 몸은 훌륭한 수행의 결과로 얻어진 것이니 응당 여래의 몸에 대해 마음을 내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자! 이제 우리가 읽어나갈 〈유마경〉의 주인공이라고 할 유마거사가 등장하는 대목입니다. 보통 우리가 극적인 등장을 묘사할 때, “짜잔!”하는 표현을 쓰지요? 지금 유마거사가 “짜잔!”하는 대목이라는 말입니다. 극적인 구성을 잘 갖춘 〈유마경〉답게 그 등장을 아주 멋있게 처리하고 있습니다. 그 시작은 유마거사에 대한 찬탄입니다. 이에 대한 묘사 가운데 몇 가지로 유마거사의 특징을 알아보도록 하죠.

세간에 살면서 세간에 집착 않은 거사

우선 유마거사는 깊은 경지에 오른 수행으로 마군의 항복을 받았고, 신통이 자재했으며, 법을 능숙하게 설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부처님께서도 그를 칭찬하고, 모든 신이 공경하는 존재였습니다. 그는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바이샬리 성에 재가자로 살았는데, 재가자로 있으면서도 세간의 일에 집착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출세간의 마음에 매달려 세간의 일을 무시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른바 중도(中道)의 도리를 지켰다고 할까요? 그것을 묘사한 표현 몇 가지를 들어볼까요?

“가정을 꾸렸지만 삼계에 집착하지 않고, …… 처자 권속을 가졌으나 항상 멀리 떠남을 즐겼으며, …… 장기나 바둑 같은 오락을 했으나 그것으로 사람을 제도했으며, 세간의 여러 전적에 대해 밝게 알았으나 항상 불법을 즐겼다.” 더 나아가서는 “창가(娼家)와 같은 음란한 곳에 가서는 욕망에서 오는 허물을 보여주었고, 술집에 들어가서도 바른 뜻을 세울 수 있었다.”고 하는 표현까지 나옵니다.

요약하면 유마거사의 활동무대는 우리 삶의 전 영역입니다. 어떤 곳도 더럽다고 하여 피하지 않았고, 어떤 곳도 불법과 맞지 않는다고 하여 재껴 놓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언제나 불법을 바탕으로, 청정한 수행과 중생교화라는 근본 위에서 그러한 일들을 영위해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의 모습에서 우리는 세간과 출세간이라는, 불교의 바탕에 놓여 있는 근본문제에 대한 통찰을 얻을 수 있습니다.

불교는 자이나교와 더불어 인도 사상의 흐름에서 출세간적인 성향을 띄는 대표적인 종교입니다. 대부분의 인도 사상과 종교는 해탈(解脫)이라고 하는, 요즘말로 궁극적 대자유를 지향합니다. 그런데 그 해탈을 지향해가는 방식에는 여러 갈래가 있지요. 일반적으로 정통이라 부르는 흐름, 즉 고대의 4베다서(리그베다·사마·야주르·아타르바)를 뿌리에 둔 지금의 힌두교에 이르는 흐름은 세간적인 것을 포용하면서 차츰 해탈을 지향해갑니다.

인도의 바라문들은 삶을 네 시기로 나누어 살아간다고 하지요. 어린 시절은 규범과 진리에 대해 배웁니다[學習期, 또는 梵行期]. 그 다음은 결혼을 해 자손을 두고, 집을 일구고 조상의 제사를 받듭니다[家住期]. 그 후에는 세간적인 일에서 물러나 조용히 숲에 머물면서 청정한 삶을 살아가고[林棲期], 마지막은 한 곳에 머무는 것조차 넘어서서 세상을 떠돌면서 궁극적 해탈을 찾는 수행을 합니다[遊行期]. 오로지 세속적인 것에만 매몰돼 있고, 늙어서까지 가정과 자녀에 매달려 사는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게 합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궁극적 해탈을 위한 삶이 놓여있다 하더라도 그 이전의 삶은 세간의 삶을 영위하는 것이고, 그 또한 매우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이런 정통의 흐름과는 전혀 다른 종교와 사상이 등장합니다. 불교와 자이나교가 그것입니다. 부처님의 생애를 보세요. 젊은 시절에 삶의 근본 문제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왕자라는 신분을 팽개치고 출가를 결행합니다. 불교에서는 찬탄해 마지않는 큰 결단이지만, 어떤 측면에서는 세속적 의무를 팽개친 무책임한 도피라고도 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바로 지금!” 삶의 본질을 정면으로 마주보고, 온 삶을 바쳐 궁극적 해탈을 향해 길을 걸어가야 한다는 것이 부처님의 출가를 표현하는 말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출가 승단이 중심이 되는 불교가 가지는 근본적 성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흙에서 연꽃 피듯, 삶은 깨달음의 토양

정통이라는 흐름과 불교와 자이나교가 대표하는 흐름은 각각의 장단점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눈에도 그것은 쉽게 보일 것입니다. 여기서는 자세히 다루지 않고, 불교가 가진 문제를 살펴보기로 하지요.

“바로 지금, 여기!” 삶의 근본문제에 도전해 깨달음을 이루어야 한다는 이상은 참으로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근본문제를 젖혀두고 안일한 삶을 살아가고 있느냐? 하루하루 죽어가는 삶을 언제까지 태평하게 누리려는 것이냐?” 하는 엄한 질타가 뒤따르지요. 그렇다고 우리 모두가 현실의 삶을 때려치우고 궁극적 깨달음에 몰두하는 삶으로 전환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인류 멸종이라는 비극이 바로 닥치게 될 것입니다. 이 문제를 좀 더 드러내기 위해 약간 도발적인 질문들을 던져보지요.

세속적인 삶은 하잘것없고 가치 없는 것이지만, 정말 어쩔 수가 없어서 울며 겨자 먹듯이 살아나가는 것이고, 언제나 궁극적인 목표는 완전한 해탈에 두고 있어야 하는 것인가요? 아니면 궁극적인 해탈이라든가 깨달음이라는 것은 이 삶과 배치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이 삶을 더 온전하게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일까요? 또 일상적인 삶 속에서 궁극적인 깨달음을 추구하는 길은 아예 없는 것일까요? 반드시 모든 것을 버리고 출가라는 형식을 빌어야만 궁극적인 해탈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일까요?

물음표가 몇 개나 찍혔는지 한번 세어봐야겠군요. 아무튼 이렇게 많은 물음표가 필요할 정도로 세간과 출세간의 문제는 간단치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마경〉은 이 문제에 대한 중도적인 해답을 주는 경전이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그러니 이런 물음표를 마음에 간직하고 〈유마경〉을 읽어나가다 보면 각각 나름대로 답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일단 저의 생각을 살짝 말씀드려 볼까요? 〈유마경〉에서는 우리 삶을 그렇게 부질없는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출가의 삶을 지향하는 과정에 피치 못하게 거치는 군더더기로 보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이 삶의 현장이야말로 우리가 깨달음을 성취하기 위한 근본 무대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나올 이야기를 잠시 당겨 말해볼까요? 보통 “연꽃은 진흙에서 피어나지만, 진흙에 물들지 않는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유마경〉의 말은 다릅니다. “연꽃은 진흙에서만 피어난다.”입니다.

잘 음미해 보세요. 굉장히 다릅니다. 우리 삶이야말로 깨달음의 꽃이 피어나는 바탕이라는 생각이 〈유마경〉의 입장입니다. 우리 삶에 대한 커다란 긍정이 〈유마경〉에는 깔려 있지요. 그런 〈유마경〉이 우리 삶을 부질없는 것으로, 가치 없는 것으로, 군더더기로 여길 리가 없지요. 그렇다고 하여 성급하게 어떤 결론을 내리려고 하지는 말고, 차분하게 해탈을 향해 가는 길에 우리의 삶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생각하면서 〈유마경〉을 읽어보기로 하지요.

〈삽화=전병준〉

유마거사가 ‘독한 처방’ 한 까닭

그런 마음으로 한 걸음 더 나가볼까요? 묘사한대로 엄청나게 훌륭한 유마거사는 사회적으로도 큰 역할을 하며, 많은 존경을 받습니다. 어느 곳에 가더라도 어른으로서 그들을 이끌었고, 모든 신까지도 어른으로 존경하는 높은 위상을 지녔습니다. 그런 그가 중생을 교화하는 방편으로 병에 걸린 모습을 보입니다. 몸의 병을 방편으로 중생을 깨우치려는 것이지요. 무엇을 일깨우려 하느냐고요? 바로 ‘몸이라는 것이 덧없고, 의지할만하지 못된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자,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중요한 하나의 주제가 나옵니다. 바로 ‘몸’입니다. 이 몸이라는 것을 어떻게 봐야할까 하는 문제입니다. 우선 유마거사의 몸에 대한 표현을 들어볼까요? “사대(四大)가 합해 이루어진 이 몸은 무상한 것이요, 오래 간직할 수 없는 것이며, 고통과 괴로움의 병주머니며 ……. 번뇌와 갈애로부터 생겨난 아지랑이 같은 것이며 …… 허깨비 같은 것이며 …… 깨끗하지 않아 더럽고 추악한 것이 가득 차 있으며 …….”

더 들어 볼 필요가 있을까요? 정말로 몸을 부정하는 말의 향연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이런 말을 들으면서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요즘의 세태와는 너무 동떨어진, 정말로 아득한 딴 나라의 말 같지 않은가요? 오늘날 우리에게는 몸이 전부 아닌가요? 온갖 건강법이 난무하고, 모든 예뻐지는 방법이 총출동되고, 정력에 좋다면 뭐든지 먹기도 하지요.

그래도 부처님 법이 있어서 그런지 힐링이라든가, 명상이라는 것이 조금씩 사회적인 유행으로 떠오르고는 있지만, 그 흐름은 아직 미미하기 짝이 없습니다. 말로는 “마음이 중요하지!”하면서 정작 마음에 얼마나 신경을 쓰고 있는지 되돌아보면, 참으로 참혹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런 점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었다고 생각됩니다. 유마거사께서 위에서 말한 대로 그렇게 혹독하게 몸의 덧없고 가치 없음을 말씀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그런 유마거사의 말씀에 정말 감동해서 느낌표 팍팍 찍으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저는 여기서도 물음표 한번 찍어보겠습니다.

몸이란 무엇일까요? 몸일 뿐이지요. 무슨 싱거운 소리를 하느냐 물으신다면, 저는 싱거운 이 말이 정답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불교의 근본 입장은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저는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있는 그대로!’가 근본 시각이라고 생각합니다. 몸은 몸일 뿐입니다. 유마거사께서 말씀하신대로 덧없는 것, 의지할 바가 못 되는 것,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한 걸음 더 나가서 더러운 것이고, 추악한 것으로 가득 차 있다는 표현은 ‘있는 그대로!’를 넘어서는 표현입니다. 느낌과 감정을 자극하여 부정적인 마음을 일으키는 말들이지요. 부정적인 마음을 일으켜서 보는 것, 그것은 ‘있는 그대로!’에 어긋납니다.

그런데 그런 표현을 하는 까닭은 무엇인가요? 중생의 병이 깊기 때문이겠지요. 그러한 표현들은 덧없는 몸에 매달리고, 끊임없는 애착을 일으켜 괴로운 윤회의 바퀴를 돌고 있는 중생의 깊은 병을 치료하기 위해 베푼 ‘독한 처방’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 독한 처방을 들으면서 우리가 얼마나 몸에 집착하는가를 반성하고, 우리의 깊은 병을 치료하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감정적인 표현으로 일으켜진 몸에 대한 견해가 올바른 견해일까요? 왜 몸이 더럽습니까? 그냥 몸일 뿐이지요. 몸에 대한 애착을 끊어내려는 방편에 걸려 다시 다른 집착을 일으키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냥 몸은 몸일 뿐이라고 바로 보는 것이 옳다는 말씀입니다. 깊은 병을 치료하기 위해 항상 독한 약을 먹으면 어떻게 될까요? 과연 건강해질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이 오히려 더 큰 부작용을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몸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들, 그것은 몸에 대한 집착을 끊는 선에서 멈춰야 합니다. 그 때문에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을 보지 못하게 되면 오히려 더 큰 병이 생길 수 있습니다.

불교 역사에 흑역사로 남아있는 한 사건이 저의 견해를 뒷받침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몸에 대한 집착을 떨쳐내는 방편으로 부정관(不淨觀)을 가르치셨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실 겁니다. 몸을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한 주머니로 보는 관법이지요. 피와 고름의 주머니! 그런데 그 결과, 참혹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수십 명의 스님들(적어도 60명 이상)이 부정적이고 염세적인 생각에 빠져 자살하고, 남에게 죽여주기를 부탁해 맞아 죽습니다. 결국 부처님께서는 부정관을 금하시고 수식관을 가르치셨습니다.

〈유마경〉을 읽는 여러분도 유마거사의 간곡한 마음에서 나온 가르침에 감사를 느낄지언정 유마거사가 베푼 독한 처방을 상시 복용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는 않았으면 합니다. 혹시 젊은 분들이 이런 처방에 당할 경우, 자칫 연애를 못할 수도 있습니다. 몸은 몸일 뿐입니다. 몸에 집착해 많은 문제가 생기기도 하지만, 또 몸이 있기에 좋은 점도 얼마나 많습니까? 이런 관점을 가질 때 유마거사는 오히려 기뻐하지 않을까요? “오, 후세의 불자들이 영민하기도 하구나. 내가 던진 문자의 함정에 걸리지 않고 중도의 눈을 바로 뜨고 있구나!” 이렇게 유마거사의 찬탄을 받을 수 있도록, 푸른 눈 바로 뜨고 〈유마경〉을 함께 읽어봅시다.

성태용

―전 건국대 철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한 후 한국고등교육재단의 ‘한학자 양성 장학생’으로 선발돼 故임창순 선생에게 한학을 배웠다. EBS에서 ‘주역과 21세기’라는 제목으로 강의했으며, 한국철학회 회장과 학술진흥재단 인문학단장을 역임했다. 저서로 〈주역과 21세기〉·〈어른의 서유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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