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오백년 도읍 영욕 간직한 황궁터

고려왕조의 수도였던 개성 황경(皇京) 복원도(이남구 화백 제작).

고려의 수도 개성(開城)은 생각보다 가깝다. 서울에서 약 80km 거리인데, 자동차로 가면 불과 40분이 소요된다. 경기도 파주시 도라산 남북출입사무소(CIQ)를 통과하면 바로 개성이다. 고려시대에는 ‘개경(開京)’으로 불렸는데, 건국 이듬해인 919년부터 약 470년 간 고려 왕조(918~1392)의 도읍으로 자리매김했다.

개성은 상업이 매우 발달한 도시였다. 개성 인근을 흐르는 예성강 하류에는 벽란도(碧瀾渡)라는 무역항이 존재했다. 벽란도는 고려와 무역을 하기 위해 이슬람 상인까지 방문했을 정도로 번창한 국제무역항이었다.

우리나라가 서양에 ‘코리아(KOREA, 고려)’로 알려진 것도 바로 이때부터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분단으로 인해 지금은 가보고 싶어도 쉽게 갈 수 없는 곳이 되고 말았다.

개성의 다양한 문화재

조선의 수도인 한양(서울의 옛 명칭)에 한양도성이 존재했듯, 개성에는 나성(羅城)이 있다. 나성은 개성의 외곽을 둘러싼 성곽을 말하는데, 북쪽 송악산(松岳山)에서 남쪽의 용수산(龍首山)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따라 조성돼 있다. 거란(契丹)의 2차 침입(현종 2년, 1010년) 때 도성이 쉽게 함락됐던 고려는 1020년 강감찬(姜邯贊, 948~1031) 장군의 건의에 따라 이듬해부터 성곽을 쌓아 20년 만인 1029년에 완공했다. 송악산의 남쪽 사면에서 남산까지 둘러 시가지 전체를 포위하듯 축조했는데, 약 23만 명의 인부와 8,450명의 공장(工匠)을 동원했다고 전한다. 성곽 둘레는 약 23km인데, 이는 18km에 이르는 한양도성보다 5km나 더 길다.

참고로 고려는 황제의 나라였다. 고려 궁중가요 ‘풍입송조(風入松調)’에 나오는 ‘해동천자’, ‘천지(天墀, 황제의 궁궐)’ 등의 단어가 이를 뒷받침한다. 이밖에도 통천관(通天冠)·자황포(赭黃袍) 등 의복과 황제가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원구단(圓丘壇) 등이 그 근거다. 지금도 개성에는 궁궐터인 만월대(滿月臺)·선죽교(善竹矯) 등 고려 왕조의 전성기를 떠올릴 수 있는 수많은 문화유산이 남아있다.

조선시대 화가 강세황이 그린 송도기행첩(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개성 시내에 산재한 주요 문화유산은 총 12개의 개별유산으로 구성돼 있는데, 그 중 5개는 고려의 방어체계인 3중 성곽 방어체계의 일부다. 성곽 안에 만월대가 건축돼 있다면, 밖에는 △첨성대(瞻星臺, 천문 및 기상 관측소) △남대문(내성의 남문) △성균관(成均館, 국가관리를 양성하던 국립교육기관) △정몽주(鄭夢周, 1337~1392)의 집터에 세운 교육기관 숭양서원(崇陽書院) △선죽교 △표충비각(表忠碑閣, 정몽주를 기리는 2개의 석비) △왕건릉(王建陵)·칠릉군(七陵群)·명릉군(明陵郡)·공민왕릉 등이 있다.

이중 만월대는 황궁을 짓기 위해 송악산 아래 경사지를 깎아서 만든 여러 개의 넓은 단을 말하는데, 이 단 위에 궁궐에 해당하는 여러 전각을 세웠다. 궁궐은 아쉽게도 1361년 홍건적의 침입으로 소실되고 만다. 산의 지세에 맞춰 몇 개의 단지로 터를 닦은 형태는 강화도에서 발굴된 고려 강도 임시 궁궐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송악산 앞쪽으로는 ‘개성분지’가 형성돼 있는데, 현재 평양~개성 간 고속도로와 이어져 있다. 개성 시내로 들어가는 중심도로의 이름은 ‘개성 통일거리’다. 과거에는 개성 입구에 만부교(萬夫橋)가 있었는데, ‘낙타교’라고도 불렸다. 그 유래는 〈고려사(高麗史)〉 세가(世家) 권제2에 기록돼 있다.

942년(태조 25) 10월 거란에서 사신을 파견해 낙타 50필을 보내왔다. 왕은 거란이 발해와 화목하게 지내다가 갑자기 맹약을 어기고 멸망시켰으니 이웃으로 삼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교빙(交聘)을 끊고 사신 30인을 섬으로 유배 보냈으며, 낙타는 만부교 아래에 묶어두니 모두 굶어죽었다.

오백년 도읍의 디지털 복원

개성의 남대문은 서울 남대문과 형태는 비슷하지만 크기가 작다. 필자는 개성을 두 차례 방문했는데, 갈 때마다 유독 한옥이 눈에 들어왔다. 도로에 자동차만 다니지 않았다면 영락없는 고려시대 모습 그대로가 아닐까 상상했다. 조선 후기에 간행한 개성부 읍지인 〈중경지(中京誌)〉(1824년 김이재가 편찬)에 “고려 때 살림집이 즐비하게 늘어서서 비 오는 날에도 오정문(午正門)에서 후서강(後西江)까지 비를 맞지 않고 건물의 추녀 밑을 따라 시내로 들어왔다.”는 기록이 전할 정도로 민가가 밀집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개성에는 동쪽에 숭인문(崇仁門), 서쪽에 선의문(宣義門), 남쪽에 회빈문(會賓門), 북쪽에 태화문(泰和門) 등 4대문을 비롯해 중문 8개와 소문 13개가 있었다. 현재 4대문은 모두 소실된 상태이다. 도심은 북남대로와 서동대로가 만나는 십자가(十字街)에 형성돼 있다. 남대가(南大街)에는 시전(市廛)이 조성됐고, 중앙을 가로지르는 오천(烏川)을 따라 각종 시장(市場)이 번성했다.

개성 경천사지에 있던 경천사 10층 석탑의 현재 모습. 일제 강점기 개성에서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가 다시 서울로 옮겨졌다. 지금은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중이다. 오른쪽은 경천사10층 석탑에 프로젝션 매핑을 적용해 실감콘텐츠로 만든 모습이다.

우리나라 문화재 디지털 복원 역사를 살펴보면 지난 2000년 신라왕경(新羅王景)을, 2010년 백제 사비도성(泗批都城)을 복원한 사례만 있을 뿐 고려 황도(皇都) 개성을 복원한 사례는 없다. 이에 필자는 인구 50만의 국제도시 개성을 세계 최초로 3D 디지털로 복원했다.

필자는 먼저 황경(皇京) 내 원형복원 3D모델 제작을 위해 △개성 외성·내성·황성 △고려황궁 만월대 △고려 첨성대 △선죽교 △경천사 10층 석탑 △개성 남대문 등을 대상으로 선정해 작업을 진행했다. 이어 개성 유적을 고증하고자 고려 ‘광여도(廣輿圖)’,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 조선시대 화가 강세황의 ‘기로세연계도(耆老世聯溪圖)’, 성균관 고려박물관 자료, 1872년 그린 개성 전도, 〈고려사〉의 기록, 송나라 사신 서긍의 〈고려도경(高麗圖經)〉 등을 연구했다. 이 과정에서 고려 역사의 최고 권위자이자 개성 전문가인 홍영의(국민대학교 한국역사학과) 교수의 자문을 받아 황성 복원의 고증적 정확성을 높이고자 했다.

디지털 복원을 위한 고증자료로는 롯데월드 민속관에 있는 만월대 모형과 일본 동대사(東大寺)에 있는 고대시대 목조건축물을 참조했다.

잠시 시대를 고려에서 일제강점기로 돌려보자. 1928년 서울 단성사(團成社)에서 신파극단 취성좌(聚星座)의 공연이 열렸다. 무대에서 배우 이애리수(1910~2009)는 막간을 이용해 고려왕조와 관련된 가요를 불렀다. 당시 공연을 본 사람들에 의하면 곡조는 매우 구슬펐고, 가사는 애잔했다고 한다. 순회극단 연주자 전수린(1907~1984)이 고향 개성에서 공연을 하다가 작곡한 ‘황성옛터’다. 이애리수의 노래가 끝나자마자 관중석에서는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황성옛터’는 순식간에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경성(京城) 최고의 화제로 떠올랐다.

일본 나라시 평성경(平城京) 유적지에 실물 복원된 태극전(太極殿)의 모습. 오늘날 남북 모두 남아있는 고려시대 목조건축물이 없어 동시대 중국과 일본사찰 건축물을 최대한 참고했다.(사진제공=박진호)

황성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月色)만 고요해. 폐허의 설운 회포를 말하여 주노나. 아 가엾다 이 내 몸은 그 무엇 찾으려고 끝없는 꿈의 거리를 헤매어 있노라. 성은 허물어져 빈터인데 방초만 푸르러 세상이 허무한 것을 말하여 주노라.

- ‘황성옛터’ 중에서

역사의 무상함이 짙게 드리운 쓸쓸한 가사와 애수 어린 곡조는 일제의 폭압에 암울함을 느끼고 있던 조선 민중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급기야 1932년에 음반으로 발표됐고, 당시로는 파격적인 부수인 10만 장 가까이 팔려나갔다. 실제 음반에 적혀 있는 공식 명칭은 ‘황성(荒城)의 적(跡)’이다.

일제 강점기 일본인들에게 의해 조사된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에 실려 있는 만월대터 흑백사진.

황궁과 터를 포함하는 ‘만월대’

개성에 남아 있는 고려의 대표 유적은 북한 국보유적 제122호로 지정된 만월대다. 만월대는 송악산을 배경 삼아 남쪽 구릉에 넓게 펼쳐져 있다. 흙을 높이 돋운 터가 만월대인데, 이곳에 궁궐 전각을 세웠다. 송악산 자락의 지기(地氣)를 훼손하지 않은 동시에 높은 지대에 건물을 배치함으로써 고려 왕조의 위엄을 강조하려 했다. 만월대는 동서 길이 373m, 남북 길이 725m, 둘레 2,170m에 이른다.

만월대라는 명칭은 당초 높은 축대를 쌓아서 지은 회경전(會慶殿) 앞뜰을 지칭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고려 궁궐 전체를 가리키는 대명사로 정착됐다.(이후 본고에서 만월대는 고려 황궁의 의미로 사용한다) ‘만월대’란 명칭은 조선시대인 1530년에 펴낸 인문지리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명칭은 만월대가 아니라 ‘망월대(望月臺)’로 나온다. 황궁 안에 있던 누각 이름인데, 언제부턴가 사람들이 ‘만월대’라고 바꿔 부르게 된 것이다.

고려왕궁 만월대의 초입인 신봉문을 디지털 복원한 모습(이용규 교수 제작).

만월대는 개성에 있던 여러 궁궐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법궁(法宮) 역할을 했다. 만월대는 외곽의 황성과 내부의 궁성으로 나눠져 있었다. 궁성 권역은 크게 정전인 회경전 중심의 외전 일곽(一廓)과 장화전(長和殿) 중심의 내전 일곽, 서북쪽의 침전 일곽으로 구성돼 있었다. 만월대의 건축물은 남북 중심축을 따라 일직선으로 배치하지 않고, 지형에 따라 축을 다르게 해 자유롭게 배치한 게 특징이다. 이런 건물 배치는 고구려 황궁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고 볼 수 있다. 고구려를 계승하려 했던 고려의 건국정신을 황궁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셈이다. 하지만 만월대를 태조 왕건(877~943)이 기둥부터 세운 건 아니다. 엄밀히 말하면 원래 궁예(?~918)가 세운 태봉국(후고구려)의 황궁을 왕건이 고려 건국 이듬해인 919년에 확장한 건물이다.

만월대의 입구라고 할 수 있는 남문 승평문(昇平門)에 들어서면 구정(毬庭, 격구 경기를 하는 넓은 마당)이 나온다. 이곳을 지나 신봉문(神鳳門), 창합문(閶閤門) 마저 지나면 궁궐의 중심 전각인 회경전이다. 회경전은 33단으로 된 4개의 돌계단 위에 세워져 있었다. 회경전은 왕이 조회를 보던 정전(正殿)이다. 조선궁궐로 본다면 경복궁(景福宮)의 근정전(勤政殿)에 해당한다. ‘회경’이라는 의미에 걸맞게 대신들이 나랏일을 논의하고, 주요 의전을 행했던 공간이다. 기우제와 같은 국가 행사, 중국 사신의 접대도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회경전이 단층이었는지, 중층이었을지는 정확하지 않다. 기록이 남아 있지 않고, 아직 구조를 밝혀줄 만한 결정적 유구나 유물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회경전 서쪽에는 황제와 신하가 조회를 하는 건덕전(乾德殿), 황제의 집무공간인 선정전(宣政殿), 황제가 기거하는 중광전(重光殿)이 있었다.

만월대는 고려 현종 때 거란의 침입, 인종 때 이자겸의 난, 고종 때 몽골의 침입 등으로 파괴와 복구를 거듭하는 굴곡의 시간을 보낸다. 그러다 원나라 말기인 1361년 홍건적이 쳐들어와 공민왕이 파천을 할 당시 대화재로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현재 폐허로 남아있는 만월대는 홍건적이 파괴한 직후의 모습이다. 만월대의 웅장했던 건물은 이렇게 사라졌고, 빈터에는 주춧돌과 계단만 남아 있다. 만월대 터에서 가장 인상적인 곳은 궁궐의 중심 건물인 회경전에 오르는 33계단이다. 이 계단 앞에 서면 고려 500년의 영욕이 떠올라 웅장함과 쓸쓸함이 교차한다.

만월대의 중심건물인 회경전(會慶殿)을 디지털 복원한 모습(이용규 교수 제작).

개성 유적 디지털체험관, 애기봉 건립 예정

북한 개성 유적을 소재로 한 상설 디지털체험관이 경기도 김포시 애기봉에 건립될 예정이다. 한마디로 ‘북한 고려문화 디지털체험관’인데, 김포시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공모사업에 신청해 선정됐다. 체험관이 완공되면 마치 디지털 타임머신을 타고 천 년 전 고려 황도였던 개성을 돌아보는 시공여행(時空旅行) 형태의 가상현실콘텐츠를 즐길 수 있다. 아울러 이 체험관은 북한문화유산을 대상으로 한 국내 최초의 가상현실 체험콘텐츠이며, 개성의 주요 역사문화지역을 아우르는 상호작용형 체험관이다. 이 체험관은 디지털 유산을 통해 남북 간 상호협력 분위기 조성에 기여하고, 민족의 동질성 회복과 통일의 필요성을 고양시키는 역할도 해줄 것으로 기대된다.

역사학자들에 의하면 1,000년 전 인구 50만의 개성은 송(宋)의 개봉, 비잔틴제국의 콘스탄티노플, 이슬람제국의 바그다드와 함께 세계 4대 도시로 꼽혔다. 그런 가치성에 부합해 ‘개성역사유적지구’는 2013년 6월 23일 캄보디아의 프놈펜에서 열린 제37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개성의 역사적 기념물 및 유적’이란 명칭으로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한반도를 지배한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의 수많은 유적은 한민족(韓民族) 역사문화의 당당한 한 축이라 할 수 있다. 이 하나의 사실만으로도 우리가 개성의 고려 문화유산을 제대로 이해해야 하는 이유는 충분하다. 지금은 디지털복원을 통해 개성의 옛 모습을 대략적으로나마 그려보지만, 훗날 통일이 이루어져 우리 모두가 자유롭게 개성 유적을 돌아볼 수 있는 날이 하루빨리 오길 고대해본다.
 

* ‘디지털 복원한 우리문화유산 ❶ 개성 만월대 일원’편은 필자의 요청에 따라 인터넷판에 한해 일부 사진을 교체하였습니다.


박진호 
― 문화재 디지털복원전문가. 한양대 문화인류학과를 졸업한 후 동국대 미술사학과에서 석사, 상명대 글로벌문화콘텐츠학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서라벌 왕경·백제 무령왕릉·고구려 고분벽화·바미안 석불·앙코르와트를 디지털 복원했고,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서 디지털 석굴암을 전시하는 등 20여 년 간 70개의 디지털 복원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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