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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태용의 ‘이야기 〈유마경〉’1_ 불국품완전한 세상 완전한 개인 실현하는 대승의 길 드러낸 경전
‘유마힐소설경직소 변상도’ 중 암라원(菴羅園)법회.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불교기록문화유산 아카이브(ABC) 자료〉

분수에 넘치게 〈유마경(維摩經)〉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분수에 넘치는 짓을 왜 하느냐?”고 물으신다면 나름의 변명은 있습니다. 고승대덕이나 석학들께서 강설하는 방식과는 다르게, 즉 심오하고 근엄한 방식이 아니라 부담 없이 읽으며 〈유마경〉의 맛을 느낄 수 있는 방식으로 풀어보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가운데 시대에 맞은 새로운 감각으로 〈유마경〉을 읽는 조그만 시도를 해볼 수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이런 가벼운 마음으로 〈유마경〉을 풀어갈 예정이기에, 이 경이 어떤 경이고 유마거사는 어떤 사람인가 하는 딱딱한 방식으로 시작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런 전문적인 풀이는 번거롭더라도 다른 책에서 찾아주시길 부탁드리고, 바로 〈유마경〉 속으로 뛰어 들어갑니다.

그런데 어떤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갈지에 대한 간단한 이야기는 연재 도입부에서 해두어야 하겠습니다. 〈유마경〉은 어떤 경전보다도 역동적이고 활발발한 이야기로 가득한 경전입니다. 다른 경전은 싱겁다는 생각이 들 정도지요. 전개 자체가 현대의 판타지소설 못지않은 구성을 보이고 있습니다. 부처님 십대제자 모두 유마거사에게 야단을 맞기도 하고, 딴 세상에서 사자좌를 빌려오기도 하고, 밥을 얻어오기도 합니다. 한 장면 한 장면이 멋진 소설이나 연극이라 할 정도이지요. 본 연재에서는 〈유마경〉의 특징을 간명하게 드러내기 위해 먼저 주요 장면의 △무대 △등장인물 △이야기의 전개 과정에 대해 간략히 소개하겠습니다. 그 후 음미해야 할 대목이라고 생각되는 부분에 대해 나름의 해설을 붙이는 방식으로 풀어나가겠습니다. 〈유마경〉을 읽은 후 제 글을 읽으시겠지만, 그래도 저만의 흐름을 정리하고 그 바탕 위에 저의 관점에서 〈유마경〉 이해를 붙여보겠다는 의미입니다. 이제 첫 번째 품(品) ‘불국품(佛國品)’으로 들어갑니다. 부처님의 나라라는 의미지요.

 부처님의 나라[佛國品]

• 무대 - 인도 바이샬리 성 암라팔리 숲

• 주요 등장인물 - 부처님, 장자의 아들 보적, 사리불, 나계 범천왕

• 함께 한 대중 - 비구 스님 8,000명, 보살 3만2,000명

• 주요 전개과정

리차비족 장자의 아들 보적이 500명의 리차비족 청년과 각각 보배 양산을 들고 와 부처님께 바친다. 부처님께서는 그 양산을 하나로 합치시고, 하나가 된 양산으로 온 세상을 뒤덮은 후 양산 가운데 온갖 세계의 장엄하고 찬란한 모습을 나타내신다.

이에 보적이 부처님에 대해 찬탄의 게송을 바치고, 불국토를 청정하게 하는 보살의 수행에 대해 여쭌다. 부처님께서는 보살의 수행과 마음이 청정해지는데 따라 불국토가 청정해진다고 설하신다.

이때 사리불이 의심을 일으킨다. ‘세존께서 보살 수행을 하실 때 얼마나 마음이 청정치 못했으며, 이 불국토가 이토록 더러움으로 오염되었을까?’ 그 생각을 아신 부처님께서는 해와 달과 맹인을 비유하며 “나의 불국토는 청정한데 네가 보지 못하는 것일 뿐”이라고 일러주신다.

나계범왕도 석가모니 부처님의 불국토가 얼마나 청정한가를 사리불에게 일러주지만, 사리불은 잘 납득하지 못한다. 결국 부처님께서는 신통을 통해 발가락으로 대지를 누르니 한량없는 세계가 보배로 장엄된 찬란한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모두가 보배 연좌에 앉아있다는 걸 발견하게 된다.

부처님 회상의 수많은 보살은 누구

부처님께서 바이샬리성의 암라팔리 숲에 계실 때의 일입니다. 그곳에는 비구 스님 8,000명과 보살 3만2,000명도 함께 계셨어요. 참으로 성대한 부처님의 회상(會上)입니다. 〈유마경〉에서 여기 모인 스님들과 보살님들의 위신력을 열거하는 대목을 보면 찬탄이 저절로 나옵니다. 욕망과 번뇌의 오염에서 해방된 존재들, 부처님의 정법을 수호하고 위대한 가르침을 시방세계에 펴시는 분들. 그 수많은 스님과 보살님들 가운데 부처님은 찬란하게 빛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물음을 던지고 싶네요. 8,000명의 스님은 그렇다고 치고, 웬 보살님들이 이렇게 많았을까요? 스님 수의 4배나 되는 보살님들이 구름처럼 모였다니, 참으로 찬탄이 나오는 한편 의문도 생깁니다. 도대체 이 보살님들은 어떤 보살님들이고, 또 어디서 오셨을까요? 끝없는 삼천대천세계에서 신통력으로 한 자리에 모인 건데 왜 의심을 하느냐고요? 물론 그렇게 보면 더더욱 신심이 날지 모르겠지만, 저는 너무 뜬구름 잡는 식으로 찬탄과 신심을 일으키는 것은 지양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합리적으로 생각해 봐야지요. 그렇다고 해서 신심이 줄어드는 건 절대 아닙니다. 오히려 사실에 근거할 때 견고한 신심이 생깁니다. 뜬구름 잡는 식으로 믿었다가는 부실공사처럼 와르르 무너지는 수도 있으니까요.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선 거기 모인 보살님들은 우리가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관세음보살님이나 문수·보현·지장보살님과 같은, 부처님 되기 직전의 높은 경지에 오른 보살님들만이 아닙니다. 그럼 어떤 보살님이냐고요? 아마도 대승불교 초창기에 헌신적으로 불교운동에 동참한 불자들을 ‘보살’이라고 불렀는데, 이 분들이 아닐까 합니다. 제 생각에 그치는 건 아닙니다. 실제 보살의 연원에 대한 매우 유력한 학설입니다. 지금부터는 제 생각인데, 그렇게 대승 운동에 앞장을 선 대다수가 재가불자였다고 생각합니다. 절에 가서 법당에 모신 보살상을 보세요. 모두 재가불자의 모습이지요. 보관을 쓰고 화사한 옷을 입는데, 스님들은 그런 복장을 절대 금기시했습니다. 오직 가사만을 걸칠 수 있었지요. 

보살상 가운데 지장보살상만 스님의 모습과 비슷한데, 그것도 확실치는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스님은 보살이 될 수 없나요? 그럴 리가요. 보살도를 행하면 모두 보살입니다. 그리고 10지(十地) 보살을 거쳐 부처님이 됩니다. 제가 초창기의 보살들이 대부분 재가불자였다고 보는 이유는 대승운동의 중요한 측면 중 하나가 출가 승려 위주로 제한돼 있던 불교에서 재가불자까지 포괄해 사부대중을 함께 아우르는 ‘큰 불교’로 바꾸려는 것이거든요. 이렇다보니 재가불자들의 호응이 남달랐고, 뛰어난 보살들이 많이 배출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보살을 바라보는 이런 관점에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바로 여러분이 보살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승의 정신에 투철해 대승의 길을 걷기로 마음먹는 그 순간, 여러분들은 바로 보살입니다. 우리가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보살님들, 아득히 먼 존재가 아니란 얘기지요. 여러분이 대승불교에 신념을 가지고 꾸준히 나아가면 닿는 경지이고, 궁극적으로는 부처님에 이르는 과정이지요. 

〈유마경〉 이야기를 시작하는 이 마당에 독자여러분도 당시 부처님 회상에 모였던 3만 2,000명의 보살 중에 한 명이 된다는 마음으로 이야기에 참여해 주십사 부탁드리고자 장황한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유마경〉은 대승불교운동이 일어나던 초창기 경전이고, 대승의 근본정신이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는 경전입니다. 이 경전을 읽으면서 대승의 근본을 알아가는 당신은 바로 ‘보살’입니다.

500개의 양산과 하나의 양산

보적 장자가 500명의 청년과 함께 바친 칠보 양산, 그것을 하나로 합친 부처님, 하나가 된 양산 속에 펼쳐지는 드넓은 세계의 신묘한 모습. 보적 장자는 이 장면을 보고 찬탄의 게송으로 표현합니다. 이 찬탄을 바탕으로 저의 깜냥대로 이 상황을 헤아려 보겠습니다.

부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500명의 청년이 왔지만 그들의 마음은 제각각일 것입니다. 그것은 500개의 보배 양산이 각각인 것과 같습니다. 부처님은 그 양산을 하나로 합쳤습니다. 그리고 그 양산 속에 찬란한 세상을 나투셨지요. 이 상황은 그들 각각의 작은 마음들을 하나의 커다란 마음으로 묶으시는 부처님의 모습입니다. 

여러분도 그런 체험을 해 보신 적이 있을 겁니다. 한 위대한 인격이 있음으로써 그 아래 모든 대중의 마음이 하나로 모아지는 경우 말입니다. 단지 하나가 되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 위대한 인격의 이끌림으로 인해 자그마한 개인의 마음이 크나큰 한마음으로 뚜렷이 빛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부처님은 그런 위대한 인격 가운데서도 가장 위대한 분이고, 세상에서 가장 높으신 분입니다. 그분의 크나큰 인격이 보적과 리차비족 청년 500명의 마음을 하나로 결집시킨 겁니다. 개개인의 마음을 온 누리와 함께하는 커다란 빛으로 승화시킨 거지요.

우리가 부처님을 믿는다는 것은 바로 이런 위대한 신통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작은 마음들이 부처님의 드넓은 품속에서 찬란한 빛으로 뭉쳐져 온 누리를 뒤덮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기도가 이렇게 커다란 인드라망의 세계로 이어지는 체험을 해보셨나요? 많은 분이 고개를 끄덕이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그렇지 못한 분들은 이제라도 〈유마경〉의 세계 속에서 그런 체험을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눈물겹도록 환희에 찬 보적의 찬탄. 이 찬탄은 〈유마경〉을 이끌어가는 마중물이 됩니다. 보적 장자라는 한 개인의 조그만 찬탄이 크나큰 부처님의 가피를 통해 위대한 설법으로 되돌아 나오는 것이지요. 한 스승께서는 보적 장자의 찬탄으로 말미암아 부처님께서 큰 설법을 펼쳐신 것을 빗대 “미꾸라지로 용을 낚는구나!”라고 해학적 표현을 하셨지만, 작을망정 진정어린 찬탄은 이와 같이 무량한 법문을 이끌어내는 소중한 마중물이 됩니다. 그러니 우리들도 찬탄합시다. 부처님의 크신 위신력을 찬탄합시다. 그 찬탄으로 우리들의 작은 마음이 온 누리를 찬란하게 장엄하는 커다란 빛으로 승화하는 감격을 맞볼 수 있을 것입니다.

사리불이 어리석은 질문을 한 까닭

불국토의 청정함에 대한 사리불의 의문 또한 부처님의 위없는 가르침을 이끌어내는 마중물입니다. 〈유마경〉에서 부처님의 십대제자, 특히 사리불은 여러 번 어리석은 생각이나 질문으로 한 방망이씩 맞는 역할을 합니다. 지혜제일 사리불이 말입니다. 그것은 〈유마경〉의 설정일 뿐입니다. 그러니 부처님의 십대제자가 그렇게 어리석다고 생각하지는 맙시다. 본디 대승이라는 것이 출가자 중심의 불교를 벗어나 모든 재가불자의 삶을 포괄하려는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에 출가자들의 대표 격이라 할 수 있는 십대제자, 그중 지혜제일 사리불 존자를 못난이 역할로 삼은 것입니다. 

아무튼 사리불은 앞에 언급한대로 부처님의 국토, 즉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더럽다고 생각했고, 부처님의 보살 시절을 의심합니다. 그 생각을 읽은 부처님의 대답은 “네 마음이 문제”였습니다. 깨끗한 것을 보지 못하는 건 네 마음이 깨끗하지 못하기 때문이란 말이겠지요? 

그렇다고 “그래! 내 마음이 문제인 거야!” 이렇게 성급하게 고개를 끄덕이지는 맙시다. 우리가 여기서 〈유마경〉을 읽을 때는 느낌표[!]를 붙이기 전에 항상 한 번씩은 물음표[?]를 붙이도록 합시다. 물음표를 통해 더욱 단단하게 다져진 앎이 나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이 문제야!”하고 느낌표를 붙이면 무슨 문제가 있느냐고요? 정말 심각한 문제가 나올 수 있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더러워 보여도 결국 마음에 달렸어. 더러움이란 없는 거야!”하고 결론을 내리면 어떻게 될까요? 세상을 맑고 향기롭게 장엄하는 우리의 실천, 즉 불국토 건설은 완전히 실종되지 않겠습니까? ‘마음에 달렸는데 뭘 장엄하고 무얼 건설해? 그냥 청정하고 장엄한 불국토인데.’ 이렇게 모든 것을 마음에 몰아놓고 어떤 실천도 하지 않는 ‘마음타령 병’이 생길 수 있는 겁니다. 

이 병은 생각보다 무서운 병입니다. 우리 불자들이 자칫 걸리기 쉬운 병이기도 합니다. 한 번 걸리면 약이 없습니다. 코로나19보다 무서운 전염력도 가지고 있습니다. ‘마음에 달렸다.’라는 말은 참으로 멋지게 들립니다. 그러다가 느낌표 붙이고 무심코 끄덕이다 보면 ‘마음타령 병’에 전염되고 마는 것입니다. 

불국토의 청정함을 확인하는 일은 우리가 실천해야 할 이상세계의 온전한 가능성을 보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관점에서 시작하면 절대 이룰 수 없는 일입니다. “이 세계는 더럽다!”라는 생각은 부정적인 관점이고, 그런 부정적인 관점으로는 절대 온전한 이상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본래의 청정함, 그것을 온전히 회복시키는 것이 우리의 실천이고 수행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본디 부처’라는 관점에 확고하게 서서 부처가 되는 길을 걸어가는 과정과 같습니다. “나는 깨닫지 못한 중생이야!”하고 못을 콱 박아 놓으면 절대 깨달을 수 없습니다. 본디 부처임을 확고하게 믿고, 그것을 바탕으로 중생의 모습을 벗어나가야 하는 것이지요. 부처님 나라도 똑같습니다. 본디 청정한 부처님의 나라, 그 본래 모습을 온전하게 실현하는 것이 바로 불국토 건설인 것입니다. 

조선 왕조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서로 농(弄)을 하기로 하고 이성계가 “대사는 꼭 돼지 같소.”하고 말했더니, 무학대사가 “임금님은 꼭 부처님 같습니다.”라고 말했다지요? 그래서 이성계가 “에이, 농담하기로 해놓고 그렇게 점잖은 말을…….”이라고 했더니 무학대사가 덧붙여서 “부처님 눈에는 부처님만 보이고,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는 법이지요.”라고 했다는 이야깁니다. 앞서 불국토의 청정함에 대한 사리불의 의문도 같은 맥락의 이야기입니다. 모든 사람을 부처님처럼 보는 확고한 긍정은 신행(信行)의 출발점입니다. 그냥 부처님처럼 보는데 머물러도 안 됩니다. 확고한 긍정을 바탕으로 모든 이를 부처님으로 대접하고 그렇게 만들어가려는 실천, 이것이 바로 불자의 수행이며 실천일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발가락으로 대지를 꾸욱 누르며 보인 신통력을 통해 드러난 삼천대천세계는 헤아릴 수 없는 수십만의 묘한 보배로 장엄된 세계였습니다. 그리고 사리불은 모든 대중이 보배 연좌에 앉아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세상만 청정한 것이 아니라, 그곳에 살고 있는 존재인 우리 모두가 고귀한 존재로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보배로운 연좌에 앉아있는 귀한 몸이지요. 그러한 완전성에 대한 확고한 앎을 바탕으로 우리는 출발합니다. 〈유마경〉은 이렇게 완전한 세상과 개인을 바탕으로 그것을 실현하는 대승의 길을 드러내는 경전입니다. 

성태용
전 건국대 철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한 후 한국고등교육재단의 ‘한학자 양성 장학생’으로 선발돼 故임창순 선생에게 한학을 배웠다. EBS에서 ‘주역과 21세기’라는 제목으로 강의했으며, 한국철학회 회장과 학술진흥재단 인문학단장을 역임했다. 저서로 〈주역과 21세기〉·〈어른의 서유기〉 등이 있다. 

글 성태용  ggbn@ggbn.co.kr

행복을 일구는 도량, 격월간 금강(金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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