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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월을 향한 순례와 대화8_수도원과 승가은둔과 중생구제 그 절묘한 경계
은둔소 안에는 은수자들이 머무는 은수자의 집이 여러 채 있다.

버스는 점점 작아지는 느낌이고, 수평의 시선은 수직으로 바뀌었다. 30분 전만 해도 버스는 커다랗고 우리 일행의 마음은 평안했다. 낮은 구릉 사이로 가없이 펼쳐진 초원, 풀 사이로 아네모네를 비롯한 꽃들이 빨강·주황·노랑 때깔로 너울거리고 포도밭 너머로는 양떼가 한갓지게 풀을 뜯고 있었다. 그러더니 아레쪼(Arezzo)를 지나 ‘포레스테 카센티네시 국립공원(The National Park of Foreste Casentinesi)’으로 접어들자 풍경이 확 달라졌다. 버스는 우리나라의 백두대간처럼 반도의 등뼈 구실을 하는 아펜니노 산맥의 깊은 산중을 지나고 있다. 차창으로 보이는 산들은 갈수록 험준한 형상을 더하고, 가끔씩 보이는 냇물은 낭떠러지 아래로 아득하다.

세상의 불빛이 보이지 않는 수도원

첩첩산중을 달리다가 모퉁이를 도니, 거기 까말돌리 수도원(Monastero di Camaldoli)이 있었다. “수도원에서는 세상의 불빛이 보이지 않아야 하고, 세상에서는 수도원의 불빛이 보이지 않아야 한다.”는 설립자 로무알도 성인(St. Romualdo , 951 또는 953~1027)의 뜻이 그대로 재현된 자리다. 정갈한 밥상처럼 장식 없이 흰 벽을 두르고 기와지붕을 두른, 나그네를 전혀 위압하지 않은 채 호텔처럼 평안하게 환대하는 수도원이었다.

정원으로 들어서니, 1012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1,000년의 세월과 기억이 구성한 주름들의 켜가 느껴졌다. 다만, 현대 기보법을 개발한 귀도 다레쵸(Guido d'Arezzo, 991?~1033?), 〈그라시아노 법령집〉을 발간해 교회법의 체계를 세운 그라시아노(Gratianus, ?~1179?) 등 그 수많은 성인과 현인들이 이곳에서 사색하고 번민했다는 것만 알 뿐, 그 주름의 한 자락도 제대로 풀지 못했다.(까말돌리 수도원 홈페이지 참조)

우리는 코로나 19로 인해 물리적 거리가 심리적 거리가 되고, 사회적 거리로 확대하는 양상을 잘 체험했다. 세속의 불빛이 보일 때 세속의 모든 향락과 탐욕을 내려놓은 수도자의 가슴에 욕망의 불씨가 다시 피어오르고 그리움이 밀물질 것이다. 수도원의 불빛이 보일 때 세속의 사람들은 수도원의 물질적이거나 정신적인 가치를 소유하려는 욕망에 휩싸일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더 많은 권력·재물·욕망과 향락을 좇아 의미 없는 삶을 살려고 아귀다툼을 벌이는데, 홀로 일어나 이를 멀리하고 거룩함과 초월과 무한을 지향하려는 이들이 있었다. 오로지 예수처럼 살려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사막으로 갔다. 그로도 부족한 이들은 기둥 위로 올라가기도 했다. 기도하고 명상했다. 그들은 모든 탐욕을 버리고서 대자유를 획득했고, 극단의 고통 속에서 진리를 깨달았으며, 절대 고독 속에서 신의 음성을 들었다.

금욕과 은둔, 명상을 함께 하면서 수도원이 만들어졌다. ‘혼자’라는 뜻의 그리스어인 ‘모노스(Μόνος)’에 ‘고독한’의 뜻인 ‘모나키코스(μοναχικός)’가 더해져 ‘홀로 독특하게 사는 사람들’이란 뜻의 ‘모나코스(μοναχός)’란 단어가 생겨났고, 여기에서 ‘기독교 수도자’라는 뜻의 라틴어 ‘모나쿠스(Monachus)’가 자리잡게 되었다. 이 단어에서 ‘수도원’을 뜻하는 ‘모나스테리움(Monasterium)’이 파생되었으니, 수도원은 “홀로 수행하는 이들의 공동체”를 뜻한다.(최형걸, 〈수도원의 역사〉)

공동체생활을 하면서 규칙이 제정되고 노동도 필요했다. 수도자는 함께 기도하고 함께 예배하고 함께 공부하고 함께 일하며 더불어 살았다. 자연스레 수도자들의 삶은 ‘금욕, 은둔, 노동, (하느님과 규칙과 상위자에 대한)순종’을 필수요건으로 삼게 되었다.

까말돌리 수도원의 전경.

그럼에도 바깥세상과 인연에 따라, 사람에 따라 수도원은 타락했다. 타락은 두 길로부터 왔다. 하나는 수도자들이 세속의 탐욕·향락에 물들어 금욕을 어기는 것이다. 또 하나는 국가나 권력자들이 수도원을 권력에 이용하고 수도자들도 이에 야합한 것이다. 이를 극복하고자 로무알도 성인은 세속으로부터 완전히 단절된 아레쪼의 1,000미터가 넘는 산 속에 까말돌리 수도원을 세우고 베네딕트 규칙을 준수할 것을 요청한 것이다.

6세기경 만들어진 ‘베네딕트 규칙서(Regula Sancti Benedicti)’는 서방의 기독교 수도원의 표준이 되었다. 이는 수도자가 행할 도리에 대해 잘 정리한 때문만이 아니다. 〈스승의 규칙서〉 등을 참고하되, 인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중용을 취하면서 하느님으로 가는 여정을 체계적으로 조합했기 때문이다. “베네딕트의 영성은 ‘그리스도보다 아무것도 더 낫게 여기지 말라.(72장 11조)’ 표현한 대로 그리스도 중심적이다.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향해 있다.”(허성석, 〈그리스도교 영성 안에서 베네딕도의 영적 가르침〉)

그럼에도 신과 인간, 공동체와 개인, 순종과 겸손 사이에서 중용을 잘 취하고 있다. 순종을 강조하되 하나님과 상위자의 권위와 두려움에 따른 무조건적인 맹종을 강요하지 않고, 영적인 부모와 자녀 사이의 상호적인 사랑과 신뢰를 바탕으로 한 미덕을 강조한다. 공동체의 의무와 동시에 개인의 영성 생활의 조화를 꾀하고 있다. 단조롭고 반복되는 삶 속에 하나님을 향해 가는 여정의 리듬이 있는 차이의 삶을 놓치지 않는다.

절대고독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곳, 은수처

까말돌리 수도원에서도 더 높고 더 후미진 곳에 은수처(Sacred Hermitage, Sacro Eremo)가 자리한다. 아래 모원(母院)의 수도자들과 위의 은수자들과 조화를 지향하는 것이 까말돌리 수도원의 전통이다. “기도하고 묵상하고 순종하고 일하고 읽어라.”는 것은 베네딕트 규칙을 준수하는 수도원의 공통점이다. 그러면서도 수도원의 수도사들이 공동체에 충실한 노동과 예배에 치중한다면, 은수자들은 홀로 기거하며 절대고독 속에서 기도하고 묵상하고 관상하는 데 집중한다. 수도원의 수도자들은 포도를 재배하고 포도주를 담그고 약초나 허브를 캐거나 재배해 그 유명한 까말돌리 약품·화장품·크림·오일을 만든다. 여기에서 남는 이윤은 모두 건축물을 관리하고 은수자들을 지원하는 데 쓰인다.

1,000년의 시간과 기억이 주름을 이룬 수도원의 정원.

우리는 짐을 풀자마자 버스를 타고 수도원에서 100여 미터 더 높고 3km 정도 더 떨어진, 투스카나 아펜니노 산의 정상 바로 밑에 자리한 은수처로 갔다. 아름드리 전나무가 둘러싼 원시림 사이로 평지를 이룬 곳에 에레모 디 까말돌리(Eremo di Camaldoli) 성당의 종탑이 하늘을 향해 수직의 경배를 취하고 있고, 그 옆으로 낮은 집들이 수평의 묵상을 하고 있었다. 울타리 너머로 올리브나무로 세운 십자가가 보이고, 그 뒤로 길 양쪽으로 20여 명의 은수자들이 머물고 있는 은수처 20여 채가 있었다.

우리는 고 바오로 신부의 안내를 받아 은수처를 본떠 전시용으로 만든 방으로 들어갔다. 방과 거실, 난로와 장작을 두는 창고·화장실 그리고 개인 경당과 책상 하나가 놓여있다. 집 앞에는 정원을 겸한 텃밭이 있다. 여기서 은수자들은 오로지 기도하고 묵상과 관상을 하고 성경과 글을 읽는 것만 행한다. 여름에도 불을 때야 하고 지형적인 요인으로 자주 비가 내리고 겨울에 눈이 오면 완전히 고립되는 곳에서 은수자들은 고독과 뼛속까지 스며드는 한기와 싸우며 오로지 진리를 깨우치기 위해 정진한다. 고 바오로 신부에 따르면,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1965) 이전에는 기도와 미사도 각자의 은수처에서 혼자 했다. 집집마다 담벼락에 작은 문이 하나씩 있었는데, 이 문을 통해 식사를 넣어 주었다. 하지만 지금은 시간전례와 미사·식사를 공동으로 한단다.

아마 이들에게 유일한 사치는 산책이리라. 이들은 이곳에 홀로 머물며, 오후 7시 반에 취침하고 자정에 일어나서 수시로 몰려드는 잠과 싸워가며 오로지 “렉시오(Lecio, 읽기), 메디따시오(Metitatio, 묵상), 오라시오(Oratio, 기도), 콘템프라시오(Contemplatio, 관상)를 했다. “악보대로 음악가가 연주하면 악보의 음악이 살아나듯이 성경 악보를 성경 말씀을 통해 몸과 마음에 살아있게 하는 것”이라는 고 바오로 신부의 표현이 너무도 적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육일치를 통한 영성회복의 최전선이 바로 이곳이리라.

우리는 단 한 시간이라도 그들의 삶에 근접하고자 묵상을 하며 걸어서 모원까지 내려왔다. 군데군데 고목들이 쓰러져 있고 나무 밑동은 이끼로 뒤덮여 있고 안개까지 자욱하게 깔려 있어 태고의 숲과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아름드리 전나무들이 하늘을 덮어 어둑한 길을 걸으며 ‘초보자를 위한 성 로무알드의 7규칙’을 떠올렸다.

“천국처럼 방에 앉아라, 세상의 모든 기억을 던져버려라, 훌륭한 어부가 물고기를 관찰하듯이 생각을 주의 깊게 관찰하라, 초보자의 열정을 가지고 시편을 멈추지 말고 집중하여 읽어라, 황제 앞에 서 있는 사람처럼 두려움과 떨림으로 하나님 앞에 임재(臨在)하라, 자신을 완전히 파괴하라, 그리고 아무 것도 주지 않더라도 어미 품에 있는 병아리처럼 앉아 신의 은총에 만족하라.”(까말돌레스 홈페이지 참조)

깨치고 자비를 행하는 이들의 공동체, 승가

부처님께서 깨달은 이후 녹야원에서 다섯 비구에게 처음으로 설법을 하자 사람들이 모여 들면서 자연스럽게 승가(僧伽, Samgha)가 형성되었다. 어느 날 아난다가 부처님께 물었다. “참다운 친구를 사귀고 착한 벗들과 함께 하는 것은 도(道)의 절반을 이룬 것이 아닙니까?” 이에 대해 부처님은 이렇게 대답했다. “도의 절반이 아니라 그 전부를 이룬 것이다.”(〈잡아함경〉, 27권 15)

에레모 디 까말돌리 성당의 종탑과 은수자들의 집.

그만큼 불교에서 승가는 중요하다. 승가는 세속의 향락을 떠나 궁극적 깨달음에 이르고 자비를 실천하려는 이들의 공동체다. 자연히 평등과 화합을 두 축으로 하고, 계율의 준수를 조건으로 한다. 대승불교 이후 승가는 출가자만이 아니라 재가불자도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고, 보살도 구현을 목표로 하게 됐다. 다만, 탁발을 하려면 도시 가까이 있는 것이 유리했고, 보살도를 행하려면 민중들의 삶 가운데 있어야 했다. 진정 깨달은 이들은 시장 가운데 있어도 흔들림이 없지만, 초심자들의 수행은 탐욕과 물리적으로 거리를 두는 데서 출발한다.

이에 수많은 이들이 깨달음이나 해탈에 이르기 위해 세속을 떠나 은둔했다. 〈삼국유사〉를 보면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한다.

“신라 문무왕(文武王, 661∼681) 때 사문 광덕과 엄장은 어느 날 하루 문득 깨달아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삶이란 것이 배불리 먹고 즐거이 노는 것만은 아니지 않은가? 우리 이 사바세계를 떠나 진정 깨달음의 세계에 이르세.’

‘그래, 이제부터 수행정진하여 해탈의 세계에 이르기로 하지. 대신 누구든 먼저 극락세계에 왕생하면 알리기로 하세.’

저녁 햇살이 하루의 마지막 빛으로 사물들의 형해(形骸)를 드러내고 소나무는 긴 그림자를 뿌려 어둡고 밝은 분별을 하나 둘 지워갈 때 엄장의 집 창밖에서 소리가 들렸다.

‘나는 이제 서방으로 가니 그대는 잘 있다가 속히 나를 따라오시게.’

엄장이 문을 열고 나가 둘러보니 문득 이제까지 들어보지 못한 아름다운 풍악소리가 들려 창가를 보니 그 소리를 따라 그곳에서부터 구름 너머 저 편으로 눈부신 빛의 길이 뻗쳐 있었다.

다음날 광덕의 거처를 찾아가니 과연 광덕이 죽어 있었다. 이에 광덕의 아내와 함께 유해를 거두어 장사를 치렀다. 장사를 다 마치고 얼마가 지난 후 광덕의 아내에게 ‘남편이 이미 죽었으니 이제 저와 같이 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그 처가 ‘그러시죠.’라고 대답하였다.

곧 밤이 되어 정을 통하려 했는데, 광덕의 처는 완강히 거부하며, ‘이러고도 스님이 정토를 구하는 것은 가히 고기를 잡으러 나무에 오르는 격입니다. 제 남편은 같이 산 지 10여 년이었지만 일찍이 하룻밤에 한자리에서 잔 적이 없소. 그저 밤마다 몸을 단정히 하고 반듯이 앉아서 한 마음으로 아미타불만 외었소. 혹은 16관법을 하여서 그것이 이루어져, 밝은 달이 문에 들어오면 때로는 그 빛에 올라 정좌하고 앉았습니다. 정성을 이만큼 쏟았는데 서방정토로 아니 가고 어디로 가겠습니까?’(〈삼국유사〉, ‘광덕과 엄장’조 일부)

광덕은 처를 두고 살면서도 모든 탐욕을 물리치고 수행을 해 결국 부처가 되었다. 엄장은 광덕 처의 말을 듣고 얼마나 부끄러웠을까? 그 후 원효 법사를 찾아가 쟁관법(錚觀法)을 배우고 뼈를 깎는 수행을 하여 그 또한 부처가 되었다.

고대의 설화나 역사만이 아니다. 월정사의 한암 선사는 참선·간경·염불·봉사·포교를 승가오칙으로 정하고 45년을 한결같이 이를 지키며 살았다. 보름 동안 물만 마시며 육신을 비우고는 1951년 3월 21일 아침에 제자인 만화 스님에게 “오늘이 음력으로 2월 14일이지?” 묻고는 가사와 장삼을 찾아 입고 단정히 앉은 채 좌탈입망(坐脫立亡)했다. 다비를 해 법구가 물·불·흙·바람으로 돌아가는데, 갑자기 밝고 환한 빛이 법구에서 뿜어져 나와 하늘로 솟구쳤다.(이도흠, 〈오대산 월정사 이야기〉)

에레모 디 까말돌리 성당의 천장.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꿈꾸다

수도원과 승가를 비교하면 ‘은둔, 금욕’을 공통으로 하고, 규칙이나 계율을 엄격하게 준수한다. 불교의 경우 교(敎)와 선(禪)이 다르지만, 읽거나 염불하고 묵상하거나 명상하면서 궁극적 진리와 초월적 존재로 거듭나는 것은 유사하다. 하지만, 수도원이 상위자에 대한 순종을 강력하게 요청한다면 승가는 평등을 추구하며 갈마제도와 같은 민주적 방식으로 운영한다. 수도원은 베네딕트 규칙에 따라 노동을 필수로 삼지만, 승가는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一日不作 一日不食)”고 강조한 백장선사를 따르는 승려를 제외하고는 노동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공통적인 점이 있다. 그것은 수도원이든 승가든, 은둔만 강조하고 중생을 돌보지 않았을 때 교세가 하락했고, 반면에 중생구제에 적극적으로 나설 때 교세가 번창했다는 점이다.

하버마스는 “유토피아의 오아시스가 말라 버리면 진부함과 무력함의 사막이 펼쳐진다.”(Jürgen Habermas, 〈The New Conservatism-Cultural Criticism and the Historians' Debate〉)고 했다. 사막의 은둔자들이 설혹 깨달음에 이르렀을지언정, 그들이 세상을 변화시킨 것은 없다. 은수처와 암자에 머물더라도 나만이 아니라 타인도 영성을 획득하거나 해탈을 하게 돕겠다는 일념을 가질 때, 이 땅에 반드시 천국이나 정토를 건설하겠다고 서원하고 실천할 때 그들의 수행은 비로소 참다운 빛을 발했다.

이도흠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현재 정의평화불교연대 상임대표, 한국언어문화학회 회장, 한국시가학회 회장을 맡고 있다.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상임의장  ·   한국기호학회 회장    ·   〈불교평론〉 편집위원장    · 한국학연구소장  ·  〈문학과 경계〉 주간을 역임했다. 원효학술상  · 유심학술상을 수상한 바 있다. 저서로 〈인류의 위기에 대한 원효와 마르크스의 대화〉    ·   〈화쟁기호학, 이론과 실제〉  · 〈신라인의 마음으로 삼국유사를 읽는다〉 등이 있다.

글·사진 이도흠  ggbn@ggb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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