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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승길 순례3_군위 일연테마로드
  • 글·사진 이강식 기자
  • 승인 2020.07.15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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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연테마로드 일부 구간.이 길을 따라 올라가면 조형물,일연 스님 모친 묘소, 일연공원,원부도탑지가 나오는 산 정상, 전망대,인각사로 이어진다.

노모 봉양 위해
국존 지위 내려놓고 낙향한
일연 스님 효행의 길

〈삼국유사(三國遺事)〉는 우리나라 고대사를 연구하는데 있어 자료적 가치가 절대적인 책이다. 이 책은 일연(一然, 1206~1289) 스님이 세수 78세에 국존(國尊)의 지위를 내려놓고 95세의 노모(老母)를 봉양하고자 고향으로 돌아와 군위 인각사(麟角寺)에 주석하며 집필했다. 사찰 인근에는 스님의 행적과 효행을 기리는 순례길, 일연테마로드(일명 효행의 길)가 조성돼 있다.

한국불교는 1,700여 년의 역사 동안 수많은 고승을 배출했다. 그 중 몇 분을 손꼽는다면 일연 스님도 빠지지 않을 듯하다. 〈삼국유사〉는 초·중·고 교과서는 물론이고, 어린이·청소년용 교양서로도 재편집돼 많이 보급돼 있기 때문이다. 일연 스님의 고향은 경상북도 경산이다. 경산에는 삼성산(三聖山)이 있는데, 인근에서 원효(元曉, 617∼686) 스님과 아들 설총(薛聰, 655~?), 일연 스님이 태어났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14세에 설악산 진전사로 출가

군위 인각사 보각국사비(普覺國師碑)에 따르면 일연 스님은 1206년 경주의 속현(屬縣)이었던 장산군(章山郡, 현 경산)에서 태어났다. 속성(俗性)은 김 씨(또는 全 씨)다. 아버지의 휘(諱)는 언필(彦弼)이며, 어머니는 이 씨다. 아버지는 벼슬은 하지 않고 교사(敎師)로만 일생을 살았는데, 사후에 좌복사직(左僕射職)을 추증(追贈) 받았고, 어머니는 낙랑군부인(樂浪郡夫人)으로 봉해졌다. 보각국사비는 일연 스님의 태몽에 관한 내용을 이렇게 전한다.

어느 날, 어머니의 꿈에 태양이 방안에 들어와 그 빛이 복부에 비추기를 사흘 밤을 계속하는 태몽을 꾸고 임신하여 태화(泰和) 병인년 6월 신유일에 탄생했다. 태어날 때부터 준매(俊邁)하여 의표(儀表)가 단정하고, 풍준(豊準)한 몸매에 입은 방구(方口, 입을 다물면 상하 입술이 모가 난 듯 단정함)이며, 걸음은 우행(牛行)이고, 살핌은 호시(虎視)와 같았다.

스님의 휘는 견명(見明)이며 자는 회연(晦然)이었으나, 일연으로 바꾸었는데 ‘일연’은 법명으로도 쓰였다. 호는 목암(睦庵), 시호는 보각(普覺)이다. 9세 때인 1214년 전라도 해양(海陽, 현 광주광역시)의 무량사(無量寺)로 들어가 공부했는데, 매우 총명했다. 1219년 14세 때 설악산 진전사(陳田寺)에서 대웅 스님을 은사로 출가, 구족계를 받고 제방선원에서 수행했다. 진전사는 도의국사가 당나라 서당지장(西堂智藏) 선사 문하에서 수학한 후 우리나라에 처음 남종선(南宗禪)을 전한 도량이다.

1227년(고종 14) 승과(僧科)의 선불장(選佛場)에 응시해 장원급제했고, 비슬산(琵瑟山) 보당암(寶幢庵)에서 수년 동안 참선 수행했다. 1236년 10월 몽골군이 침입하자 문수보살의 계시로 보당암 북쪽 무주암으로 거처를 옮겨 깨달음을 얻었다. 이 해에 삼중대사(三重大師) 승계(僧階)를, 1246년 선사(禪師) 법계(法界)를, 1259년 대선사(大禪師)의 승계를 받았다.

1261년 원종(元宗, 1219~1274)의 부름을 받아 강화도 선월사(禪月寺)에 주석하며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 1158~1210) 스님의 법을 계승했다. 이후 오어사(吾魚寺), 비슬산 인홍사(仁弘寺) 주지를 맡아 후학을 지도했다. 1274년 스님이 인홍사를 중수하자 원종은 ‘인흥(仁興)’으로 사명을 고치고 제액(題額)을 하사했다. 스님은 또 비슬산 동쪽 기슭에 자리한 용천사(湧泉寺)를 중창하고 불일사(佛日寺)로 이름을 바꾼 뒤 ‘불일결사문(佛日結社文)’을 쓰기도 했다.

1282년 충렬왕에게 선(禪)을 설하고 개경 광명사(廣明寺)에 머물던 스님은 이듬해 국존(國尊)으로 책봉돼 ‘원경충조(圓經冲照)’라는 호를 받았다. 이때 충렬왕은 문무백관을 거느린 채 구의례(摳衣禮, 옷의 뒷자락을 걷어 올리고 절하는 예)를 올렸다. 국사(國師)가 아닌 ‘국존’이 된 것은 원나라의 제도인 ‘국사’ 칭호를 피하기 위함이었다.

일연 스님이 〈삼국유사〉를 집필하며 말년을 보낸 인각사.

어머니 타계 후 〈삼국유사〉 완성

일연 스님은 ‘국존’으로 받들어졌지만 충렬왕에게 95세의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청했다. 왕은 스님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다가 결국 허락했고, 스님은 세수 78세 때 고향으로 내려와 어머니를 봉양했는데, 어머니는 이듬해인 1284년 세상을 떠났다. 관련된 내용이 이능화(李能和, 1869~1943)의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 하편 이백품제(二百品題) ‘보조후시설조계종(普照後始設曹溪宗)’에 수록된 보각국존비명에 나온다.

… 또 노모를 모시기 위해 구산(舊山)으로 돌아가도록 허락을 청하는 그 사의(辭意)가 심(甚)히 간절했다. 임금께서 거듭 그 뜻을 받아들이지 않다가 윤허(允許)했다. 근시좌랑(近侍佐郞) 황수명(黃守命)에 명해 귀산(歸山)을 호행(護行)하여 영친(寧親)토록 했다. 조야(朝野)가 모두 출가자로서 희유(希有)한 효심이라고 칭찬이 자자했다. 그 다음 해에 노모께서 96세로 별세했다. …

어머니가 타계한 뒤 일연 스님은 그간 진행해오던 〈삼국유사〉를 완성했다. 그리고 1289년 주석하던 인각사 방장실에서 금강인(金剛印) 수인을 맺고 입적했다. 법랍(法臘) 71년, 세수 84세였다. 스님 입적 후 인각사 동쪽 언덕에 부도탑이 세워졌는데, 탑호는 ‘정조(靜照)’이다. 보각국사비에 따르면 일연 스님은 입적 직전 제자들과 선문답을 주고받으며 가르침을 남겼으며, 입적 후 오색 광명이 일었다.

일연 스님은 육신을 버리고 떠났지만, 민족의 위대한 유산 〈삼국유사〉를 남겼다. 〈삼국유사〉에 대해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 1890~1957)은 〈신정삼국유사(新訂三國遺事)〉에서 ‘만일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중에서 어느 하나만 지녀야 한다면 〈삼국사기〉를 내려놓아야 한다. 그 대부분은 중국의 서적을 인용한 것이고, 약간 인용된 우리 기록도 명실상부하게 중국화한 것이기 때문이다. …… 〈삼국유사〉가 이른바 괴이한 면이 없었다면, 〈삼국사기〉 외에 어떠한 내용이 독특한 점을 갖췄겠는가. 괴이함과 난삽함은 진정 〈삼국유사〉로 하여금 고대사 무대의 한복판에 우뚝 서서 활보하게 한 요체’라고 기술하고 있다.

퇴경 권상로 선생은 〈불교(佛敎)〉 제34호에 게재한 글에서 “〈삼국유사〉는 조선고대사의 최고원천(最高源泉)이며 일대백과전림(一大百科典林)으로 일연의 공(功)을 서방의 ‘헤로도투쓰’에도 비할 것이니라.”고 평했다. 헤로도토스(Herodotos)는 기원전 5세기의 그리스 역사가로 전 9권으로 된 역사서 〈역사〉를 저술한 인물이다.

일연 스님의 사리탑인 인각사 보각국사탑(왼쪽)과 비. 비는 많이 훼손돼 있다.

군위군 조성한 5.3km 테마로드

스님이 말년을 보낸 인각사 주변에는 군위군이 2017년 6월 스님의 효행 정신과 선 사상을 기리기 위해 조성한 ‘일연테마로드(효행의 길)’가 있다. 이 순례길은 인각사에서 출발해 전망대→산 정상→원부도탑지→조형물(만남·출가)→징검다리→인각사로 돌아오는 A코스(4.2km)와 일연공원에서 시작해 일연 스님 모친 묘소→일연공원으로 돌아오는 B코스(1.1km)가 있다.

일연테마로드는 일연 스님의 사상과 정신을 선양하기 위해 조성한 길이지만, 어머니를 봉행하고자 낙향한 스님의 효행정신을 기리는 측면이 더 크다. 그래서 일연테마로드 뒤에 ‘효행의 길’이라는 명칭이 따로 붙어 있다. 두 코스 중 하나만 선택하면 온전한 순례길을 걷는 게 아닌듯해 기존의 코스를 조정해 걷기로 했다. 수정한 순례길은 인각사에서 출발해 학소대→징검다리(출가 조형물)→다리(만남 조형물)→일연공원→일연 스님 모친 묘소→일연공원→원부도탑지→산 정상→전망대를 거쳐 다시 인각사로 돌아오는 5.3km 코스다.

6월 초 인각사를 찾았을 때 절은 불사가 진행 중이어서 번잡했다. 순례에 앞서 ‘보각국사탑 및 비’(보물 제428호), 10~11세기에 조성된 석불좌상 등을 둘러봤다. 일연 스님의 사리탑인 보각국사탑은 팔각형이며, 탑신 정면에는 ‘보각국사 정조지탑(普覺國師 靜照之塔)’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사리탑과 조금 떨어진 곳에 일연 스님의 행적을 기록해 놓은 보각국사비가 있다. 일연 스님의 제자인 법진(法珍) 스님이 세웠는데, 비문은 당대의 문장가인 민지(閔漬)가 왕명을 받들어 지었다. 글씨는 왕희지의 글씨를 집자해 만들었다. 현재 남아있는 비는 많이 파손돼 있어 비문의 내용을 알 수 없다. 다행히 오대산 월정사에 비문 사본이 남아있고, 비문 전체가 담긴 탁본이 전해 비문의 내용을 짐작할 수 있다. 비문에 의하면 비를 세운 시기는 충렬왕 21년(1295)이고, 부도탑은 1289~1295년 사이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순례길의 출발지는 인각사지만, 본격적인 길은 도로 건너편 학소대에서 시작한다. 학소대는 병풍처럼 펼쳐져 있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인데, 학이 둥지를 틀고 서식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풍광이 뛰어나 예부터 시인묵객들이 풍월을 읊던 곳이다. 일연 스님도 이곳을 포행하며 정진했으리라. 학소대 앞을 흐르는 위천(渭川) 상류 방향으로 난 비포장길을 걸어가면, 소쿠리를 든 어머니가 하천 건너편에서 출가를 위해 떠나는 자식(일연 스님)을 지켜보는 조형물이 있다. 무덤덤한 표정에 자식 걱정을 하는 어머니의 마음이 잘 표현된 듯하다. 위천(渭川)에 놓인 징검다리를 건너면 등에 괴나리봇짐을 메고, 오른손에 주먹밥을 들고 어머니를 쳐다보는 어린 일연 스님의 상이 있다. ‘출가’ 조형물이다. 효심이 지극한 스님이 어머니를 홀로 두고 떠나는 마음은 어떠했을까? 홀어머니를 두고 돌아서서 옮기는 발걸음은 또 얼마나 무거웠을까?

출가를 위해 길을 떠나는 어린 시절의 일연 스님을 표현한 조형물. 징검다리 건너에는 아들을 떠나보내는 어머니 조형물이 서 있다.

모친 봉양한 당나라 진존숙 존경

이런저런 생각에 휩싸인 채 순례길을 걸었다. 뙤약볕이 내리쬐는 무더운 날씨 탓인지, 코로나19의 영향인지 일연테마로드를 걷는 이는 기자를 제외하곤 아무도 없었다. ‘출가’ 조형물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일연 스님이 국존의 지위를 내려두고 낙향해 어머니께 절을 올리는 장면을 표현한 ‘만남’ 조형물이 나온다. 노모는 출가한 아들을 만난 기쁨에, 나라의 스승이 된 아들은 고령의 어머니를 만난 기쁨에 눈물을 주르륵 흘렸으리라. 세속과의 인연을 끊고 출가한 수행자지만, 혈연의 정은 그 어떤 것으로도 끊을 수 없다. 그 또한 자연의 섭리요, 불법(佛法)이 아닐까 싶다. 일연 스님은 그 이치를 이미 깨치고 있었던 모양이다.

‘만남’ 조형물 앞에 놓인 다리를 건너 조금 더 올라가면 차로가 나오고, 이 길을 건너면 ‘일연공원’이라는 현판이 걸린 전각 형태의 문이 보인다. 이 문을 지나면 오른쪽에 일연공원이 있고, 왼쪽에는 일연 스님이 의자에 앉아 책을 들고 있는 조형물이 있다. 조형물 왼쪽에 난 길을 따라가면 일연 스님 모친 묘소로 갈 수 있다. 묘소까지는 1km. 700m는 평탄한데, 마지막 300m는 경사가 가파르다. 다행히 계단이 놓여 있어 안전하게 오르내릴 수 있다.

묘소는 산중턱에 위치해 있는데, 풍광이 좋다. 터 좋은 곳을 골라 어머니를 안장하고, 돌아가신 어머니를 뵈러 이 험한 길을 마다않고 오갔을 스님의 지극한 효심에 존경심이 일어난다. 일연 스님의 효심은 스스로 지은 호(號)인 ‘목암’에서도 느낄 수 있다. 스님은 당나라 고승인 목주 진존숙(睦州 陳尊宿)을 존경해 스스로 호를 지었다고 한다. 진존숙은 말년에 목주 개원사에 머물며 밤마다 왕골 짚신을 삼아서 곡식으로 바꿔 노모를 봉양했다. 모친 사후에도 짚신을 삼아 새벽녘에 남몰래 한 묶음을 지고 나가 큰길 나뭇가지에 걸어두고 오가는 길손들이 자유로이 신고가게 했다고 전한다. 〈삼국유사〉에 ‘효선(孝善)’편을 둔 것에서도 스님의 효 정신을 엿볼 수 있다.

일연 스님의 효행을 마음에 새기고 발걸음을 원부도탑지로 옮겼다. 원부도탑지는 ‘인각사 보각국사탑 및 비’가 본래 있던 자리다. 재현해 놓은 보각국사탑이 그 자리에 서 있다. 아침에 해가 뜨면 부도탑에서 나온 광채가 건너편 산중턱에 있는 모친의 묘소를 비추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설화에 가깝지만, 일연 스님의 효심이 그만큼 깊었다는 걸 느낄 수 있다.

‘국존’의 지위를 내려놓고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고향에 내려온 스님이 어머니에게 절을 하고 있는 조형물.

솔숲에 가득한 일연 스님의 법향

원부도탑지부터 산길로 접어드는데, 정상까지 줄곧 오르막이다. 소나무로 가득한 숲길을 천천히 오르면 바람을 따라 솔향이 코끝을 스치는데, 쌓인 피로가 조금 가시는 듯한 느낌이 든다. 멈춰 서서 호흡을 가다듬으면 한 줄기 바람이 몸에 베인 땀과 열기를 날려 보낸다. 산 정상에서 인각사까지는 1.2km다. 정상에서 약 30m 아래에는 전망대가 있는데, 그 앞쪽으로 일연공원과 주변 풍경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전망대에서 인각사까지는 가파른 내리막이다. 소나무 수령이 오래되진 않았지만, 무리를 지어 있어 솔숲의 정취를 제대로 느낄 수 있다.

이 길은 인각사 대웅전 뒤쪽으로 이어지는데, 여기에는 부도 3기와 재현해 놓은 보각국사비가 있다. 부도는 취진당법환대사지탑(就眞堂法還大師之塔), 연월당계훈대사지탑(燕月堂桂勳大師之塔), 청진당법장대사지탑(淸眞堂法藏大師之塔)이 있는데, 산기슭에 있던 것을 현 위치로 옮겨 놓은 것이다.

일연 스님도 어머니 묘소를 오가거나, 포행을 할 때면 이 길을 이용했을 것이다. 선승으로서의 일연 스님, 자식으로서의 일연 스님. 수식어가 무엇이건 일연 스님은 고매한 인품을 지닌 스승임에 틀림없다. 보각국사비에는 스님의 인품에 대한 내용도 실려 있다.

스님은 사람 됨됨이가 말할 때에는 농담하는 일이 없고, 천성(天性)은 가식(假飾)하는 일이 없다. 항상 진정(眞情)으로 사람을 대하고, 많은 대중과 같이 있으나, 마치 홀로 있는 것과 같이 조용하였다. 국존의 위치에 있으나, 항상 자신을 낮추었으며, 배움에 있어서는 스승으로부터 수학(受學)하지 아니하고, 스스로 통달하였다.

700여 년 전 일연 스님이 걸었을 일연테마로드. 이제와 스님의 족적을 찾을 수는 없지만, 스님이 길을 오가며 남긴 효행의 발자국, 수행의 발자국 흔적은 억겁의 시간이 흘러도 닳지 않는 가르침의 흔적으로 남을 것이다. 

(좌)일연 스님 모친 묘소 안내판. (우)이 나무 계단을 오르면 일연 스님 모친 묘소가 있다.
산 정상에서 인각사로 내려가는 길. 소나무의 수령은 오래되진 않았지만, 무리지어 있어 솔숲의 정취를 느끼기에 충분하다.

글·사진 이강식 기자  ggbn@ggb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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