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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스승 나의 은사2_종달 이희익
종달 선사

‘無’자 화두로 한평생 정진
선도회 조직, 입실점검 전통 세워

함흥의 갑부집 막내아들로 태어나 부족함 없이 성장했던 종달(宗達) 이희익(李喜益, 1905~1990) 선사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대학 철학과를 수료한 후 귀국해 함남일보사 기자를 거쳐 〈조선불교〉 잡지사에 취직했다. 이곳에서 불교 관련 원고 교정을 보다가 특히 선(禪)에 매료돼 1928년 선지(禪旨)에 밝았던 편집장 삼소(三笑) 나까무라 겐타로(中村健太郞, 1883~?)의 인도로 일본 임제종 남선사파(南禪寺派)의 조실(祖室)과 묘심사파(妙心寺派) 경성별원 주지를 겸했던 화산대의(華山大義, 1891~1945) 선사 문하로 출가한다. 그 후 동경의 도림사(道林寺)를 개축해 한국 유학승을 위한 도량불사와 함께 수행을 이어가다, 1941년 한국 개교사(開敎師)에 임명돼 한국에서 해방을 맞이했다.

선도회와 언론 속 종달 선사

해방 후 유학시절부터 절친했던 유엽(柳葉, 1902~1975) 시인의 도움으로 1952년부터 1955년까지 해인대학(현 경남대) 교수, 1956년 동국대 강사, 1960년 월간 〈법시(法施)〉 편집인을 지냈다. 1963년 1월 당시 조계종 종정이셨던 효봉 선사의 법제(法弟)로 재입산해 총무원 교무부장이었던 화봉(華峰, 유엽 시인이 출가함) 선사의 추천으로 조계종 포교사로 임명돼 조계사에서 매주 수요일 일반인을 위한 참선법회를 주관했다. 이 모임에서 심지(心地)가 굳은 청년 이창훈을 만나 재가자도 간화선 수행이 가능하다는 확신을 하게 된다. 이를 계기로 1965년 ‘선도회(禪道會)’를 조직해 제1대 지도법사를 맡아 제자들을 지도하면서 남송시대 때 확립된 ‘입실점검(入室點檢)’ 전통 복원을 통한 간화선 대중화에 온몸을 던지셨다.

1960~1970년대 〈법시〉에 글을 기고하다 가까워진 활안(한정섭 법사) 스님께서 ‘현대불교신문’에 연재한 ‘내가 만난 선지식-법시사 편집장 이희익 대선사’ 편에 종달 선사의 당시 활약상이 다음과 같이 담겨 있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선에 대한 관심은 많았어도 실제 선에 대한 이론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선사께서 〈신심명〉·〈증도가〉·〈십우도〉·〈좌선의〉 등 선종 4부록을 내고, 또 〈임제록〉을 발간해 직접 강의를 함으로써 선에 대한 바른 이해를 돕고, 삿된 길이나 마군의 길을 막게 되었다. 선방에 가서 한 철만 ‘나도 도인’을 자처하고 선사들 근처에 갔다가 한 말씀만 들어도 한 소식 얻은 것처럼 자랑하고 다니던 사람들이 (이희익)선사를 만나면 쥐 죽은 듯 조용히 앉아 귀를 기울인다. 옛날에 전혀 듣지 못한 소리를 듣고, 보지 못한 경계를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중앙일보 1973년 5월 29일자 ‘남산 관광로에 대원정사 불교회관 개관’ 제하의 기사에는 불교교양강좌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대원정사 불교회관에선 일요일마다 하오 2시부터 일반인을 위한 무료 불교교양강좌를 갖고 있으며, 조명기 박사와 김동화 박사·홍정식 교수(동국대)·이희익 씨(법시사 주간)·정도천 씨·김대은 스님이 강의를 맡고 있다.”

<사진 왼쪽부터> 개교사증, 조계종 교무부 포교사 임명장, 조계종 총무원장 표창장.

필자의 견해로 선은 남송 말기에 이르러 대혜종고(大慧宗杲, 1089~1163) 선사에 의해 간화선 수행체계가 확립했으며, 무문혜개(無門慧開, 1183~1260) 선사께서 선종 최후의 공안집인 〈무문관〉을 저술해 간화선 체계를 완결했다고 여겨진다. 만일 승속을 불문하고 선수행자들이 입실점검을 통해 48칙의 화두를 철저히 투과하기만 한다면 불조(佛祖)와 손을 맞잡고 생사를 여의고 함께 살아가는 멋진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근세에 이르기까지 〈무문관〉에 대한 관심이 거의 없었다. 그러다 종달 선사가 최초로 〈법시〉 제9호(1968년 6월)에 〈무문관〉 제1칙을 제창(提唱)하고, 이후 20여 칙을 매월 게재하다가 1974년 퇴직 후 이를 바탕으로 한글로 풀어쓴 〈무문관〉 48칙을 단행본으로 출간하셨다. 이 책은 출간 직후 고(故) 고암(古庵, 1899~1988) 선사께서 종달 선사께 직접 전화를 걸어 선을 너무 노골화시켜 놓았다며 극찬한 책이기도 하다.

70년대 성약사 법회에 참석한 종달 선사.

종달 선사 문하에 입문하다

필자는 의사 집안의 2대 독자로 태어났다. 그렇다보니 집안의 극진한 보살핌 아래 형편없는 마마보이로 성장하게 됐다. 그러다 우주를 이해하고자 1974년 서강대 물리학과에 입학했다. 그런데 입학 직후 학문과 인생에 대해 심한 갈등을 겪었다. 이 무렵 갈등 해소 방편으로 독서를 즐겼는데, 1975년 8월 법정 스님께서 번역하신 〈숫타니파타〉(정음사)를 접하고 석가세존의 인간적인 체취에 매료돼, 불서들을 탐독하게 됐다. 그중 〈잡아함경〉에 담겨 있는 ‘독화살의 비유’를 읽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날 이후 독화살을 뽑는 게 급선무라는 것을 절감하고 부질없는 망상과 갈등을 즉시 내려놓고 물리학도로서의 본분사에 전념하게 됐다.

필자는 세존의 길을 좀 더 깊이 파악하기 위해 가을학기가 시작하자마자 불교동아리인 ‘혜명회(慧命會)’에 들어갔다. 세존의 길을 따르고자 하는 학생들은 어떤 인생관을 가지고 대학생활을 하고 있는지 매우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불교초보자라 경전 토론모임에 참석해서 입 다물고 듣기만 했더니 한 선배가 “너는 선(禪) 공부가 적성에 맞는 것 같다.”며 일반인을 위한 선 모임으로 이끌어주었다. 사실 당시 태어나 처음으로 ‘선(禪)’이라는 단어를 알게 됐다. 1975년 10월 18일 오후 3시 무렵 세검정에 있는 ‘불심원(佛心院)’에 도착해 법당 안으로 들어가니 앞쪽에 종달 선사께서 앉아 계시고, 그 뒤로 일반인들이 방석 위에 앉아 있었다. 필자는 비어 있는 맨 뒷자리에 앉았다. 조금 있으니 선사께서 다가오셔서 자세를 바로잡아주셨다. 필자의 삶에 새로운 장을 연 선수행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1979년 목동 자택에서 필자와.

종달 선사 문하에서 화두점검을 받은 지 1년쯤 됐을 때 선 수행을 통해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겠다는 확신이 섰고, 정말 온전히 여기에 몰두할 수 있게 되었다. 매일 새벽에 한 시간과 잠자리에 들기 전 한 시간 정도 다리를 틀고 앉았고, 밀린 과제가 없는 주말에는 거의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8시간 정도 앉았다.

그런데 이런 수행이 꾸준히 계속된 후에는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은 상태에서 모든 일이 무심한 가운데 하나하나 차근차근 잘 진행되었다. 특히 주말 오후 스승님을 만나러 가기 몇 시간 전부터는 아랫배에 쌓인 억제할 수 없는 힘을 느끼곤 했다. 그리고 입실해 스승님 앞에 당당히 버티고 앉아 마음껏 아랫배에 쌓인 힘을 폭발시키며 한 주간의 수행을 점검받곤 했다.

사실 처음에는 선 수행이 적성에 맞는 것 같아 취미 삼아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본격적으로 수행하게 된 계기가 생겼다. 중고등학교 시절 절친 아버지의 돌연사 소식이었다. 평소 건강했고 나이도 쉰 밖에 되지 않았던 분이다. 그 사건 후 생사(生死) 문제는 필자를 몸서리칠 정도로 흔들어 놓았다. 수행을 지속하던 1977년 가을, 종달 선사께 혜명회 회원을 대상으로 한 초청강연을 부탁드렸는데 흔쾌히 수락해주셨다. 그런데 필자는 이 강연에서 대통신수(大通神秀, 606~706) 선사와 육조혜능(六祖慧能, 638~713) 선사의 일화 가운데 특히 화두처럼 다가온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란 게송을 듣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이 무렵 필자는 선도회에서 발간하던 〈선문화〉의 원고 교정을 도우며 참선수행을 병행했는데, 늘 공금은 오른쪽 주머니에 넣고 사적인 찻값은 왼쪽 주머니에서 꺼내시던 선사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또 언젠가 “장부 정리를 잘하는 사람이 바로 대장부네!”라고 하신 말씀도 귓가에 생생하다. 이런 추억은 원고료와 강연료를 포함해 월급 이외의 모든 부수입을 통찰과 나눔 실천을 위해 사회에 100% 환원하는 필자의 삶의 태도에 큰 영향을 주었다.

1979년 서강대 대학원 물리학과 석사과정 중 선사(가운데)와 필자. 선사 왼쪽은 2호 인가 제자인 도심 거사, 오른쪽 아래는 3호 인가 제자인 법원 거사.

두 마리 토끼를 잡고 인가를 받다

대학원에 진학하던 1978년 2월 필자는 석사를 마치고 유학을 갈 계획이었다. 하지만 1학기를 마칠 무렵 지도교수께서 “이론물리의 경우 종이와 연필 외에 전공 관련 국제 저명 학술지 몇 종만 구독하면 되니 굳이 유학을 갈 필요가 없네. 내 밑에서 박사학위를 하도록 하게.”라고 조언을 해주셨다. 만일 유학을 다녀오는 사이 연로하신 종달 선사께서 입적하실 경우, 한 스승 밑에서의 일관된 선 수행이 중단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래서 국내에서 학문과 수행,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기로 결심을 하게 됐다.

그 후 참선 수행을 병행하며 학업에 몰입한 결과, 1983년 2월 서강대 대학원 물리학과에서 국제 저명 학술지에 6편의 논문을 게재하며 박사 1호(이학박사) 학위를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1983년 3월 공채를 통해 곧바로 춘천에 있는 강원대학교 물리학과 조교수로 부임했다. 당시는 이공(理工)계통의 박사학위 소지자가 적었기 때문에 어디서 학위를 받았느냐에 관계없이 연구업적만 좋으면 쉽게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1983년 5월 전국불교포교사협회에서 서울 한복판 화신백화점 뒤 8층에 열 평 크기의 ‘시민선방(市民禪房)’을 개설하고 종달 선사를 지도법사로 모셨다. 필자도 틈을 내어 참선법회에 몇 차례 참석했는데, 평소 당연하게 여겼던 간화선 수행의 정수(精髓)인 ‘입실점검’의 중요성을 생생하게 목격하게 된다. 순서를 기다리다 입실방으로 들어가 보니 선사께서는 화장실을 입실방으로 삼아 좌식 변기뚜껑 위에 거리낌 없이 걸터앉아 제자들을 점검해주고 계셨다.

1987년 한국과학재단의 해외연수 프로그램에 선정돼 뉴욕 주립대 이론물리연구소 연구원으로 떠나게 되었는데, 떠나기 직전인 그해 8월 말경 종달 선사께서 설정해 놓으신 참선수행과정을 모두 마칠 수 있었다. 9월 5일 작별인사를 드리러 선사를 찾아뵈니 다음과 같이 인가장(印可狀)을 써 주셨다.

1987년 9월 5일 받은 인가장(왼쪽)과 선사의 선필.

“무문관을 투과해 마쳤음을 인가함[印可 無門關了畢]. 1987년 9월 박영재 법경 거사 법앞에[法正].”

사실 스승의 인가는 이제 혼자서도 제자를 잘 지도할 수 있는 동시에 스승 도움 없이도 독자적으로 수행을 제대로 지속할 수 있다는 뜻이지, 석가세존께서 체험한 바로 그 정각(正覺)에 도달했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1987년 9월 5일 받은 인가장(왼쪽)과 선사의 선필.

〈벽암록〉 뒷이야기와 지도법사 승계

강원대에 재직하고 있을 때 종달 선사께서는 정기법회가 아니라도 서울에 오면 언제든지 들려 점검을 받으라고 특별히 배려해 주셨는데, 1983년 어느 날 서강대 세미나를 마치고 찾아뵈었더니 필자에게 “건강상 더는 선서(禪書)를 집필할 수 없을 것 같다.”는 뜻을 밝히셨다. 그러나 필자는 오히려 선사의 건강에 집필이 가장 좋은 방도라고 판단돼 〈무문관〉과 쌍벽을 이루는 〈벽암록(碧巖錄)〉만은 꼭 집필하셔야 한다는 간청을 여러 차례 드렸다. 결국 1988년 〈벽암록〉(상아)이 출간됐는데 책 서문에 그 일화가 다음과 같이 담겨 있다.

“내가 연로해 집필하기 곤란한 터에 강원대 박영재 교수(法境居士)가 격려와 맞춤법을 바로잡아주었고, 같은 대학의 사학전공 신종원 교수(현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가 한자수정을 해주셔서 탈고했던 것을 깊이 감사드린다.”

미국에서의 방문연구를 마치고 1988년 9월 귀국해 강원대에서 1년간 더 근무하다가 1989년 9월부터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로 재직하게 됐다. 그때가 선사께서 입적하기 9개월 전인데, 서강대로 이직한 일은 선사의 뒤를 이어 종교와 종파를 초월해 선도회의 재가수행자들을 이끌어가라는 필연적인 시대적 소명(召命)이라고 여겨지기도 한다.

1989년 11월 법등(法燈)거사(현재 성북거점모임 법사)와 함께 선사를 찾아뵈니 입적 후 뒤를 이어 (필자가) 선도회를 이끌어가라는 말씀을 하셨다. 1990년 6월 6일 입적하시려 한다는 전갈을 받고 급히 목동 자택으로 찾아뵈니, 옆에 있던 도반이 벌써 몇 차례 의식을 잃으시곤 했다고 말했다. 필자가 선사 곁에서 손을 붙잡고 ‘안심입명(安心立命)’을 간절히 염원하며 앉아 있는데, 어느 순간 마지막으로 눈을 뜨시며 필자에게 평화로우면서도 강렬한 눈빛을 발산하신 다음, 곧 눈을 감으시고 내내 의식이 없으시다가 다음 날 새벽 입적하셨다.

선사는 일생을 통해 온몸을 던져 입실점검을 하신 결과, 65명의 거사(居士)와 대자(大姉)를 배출하셨다. 그 가운데 필자를 포함해 10명이 선사께서 설정하신 점검과정을 모두 마치고 법사가 되었다. 아울러 수행하는 분들에게 요긴한 십수 권의 선서를 저술하셨는데, 특히 80세 되시던 해에 쓰셨던 자서전 〈인생의 계단〉에서 선사로서의 일생을 이렇게 회향(廻向)했다.

‘가까스로 조주무자를 얻어 평생을 쓰고도 다 못쓰고 가노라.’[재득조주무자(纔得趙州無字) 일생수용불진(一生受用不盡.)]

해방 이후 선사는 주로 교육 및 출판 분야에서 이희익 거사로 알려졌지만, 입적하실 때까지도 묘심사파 승적을 유지했다. 입적 직후 필자가 묘심사파 법제인 혜광(惠光) 선사에게 입적 사실을 알리며 교신하는 과정에서 정중한 예우가 담긴 다음과 같은 답신을 받았는데, 이를 통해 한국 개교사직을 부여받을 정도로 묘심사파 내에서도 인정받으셨던 사가(師家)로서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1990년 6월 7일 오전 7시 15분 어서거(御逝去)하셨다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대단히 고맙습니다. 긴 세월 동안 우리들이 바른 수행자가 되도록 어지도(御指導)해 주셔서 어고덕(御高德)을 흠모해 왔습니다. 다른 도우(道友)들에게도 이 슬픈 사실을 알려드려서 불도수행자로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어공양(御供養)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선사 입적 이후 필자는 그 뜻을 받들어 도반 법사 및 회원과 함께 임의단체였던 ‘선도회’를 2009년 종교법인 ‘(사)선도성찰나눔실천회’로 탈바꿈시켰으며, 핵심가풍인 △세 분 스승께 귀의하기[歸依三師] △지속적으로 스승께 점검받기[入室點檢] △이른 아침 잠깐 앉은 힘으로 온 하루를 부리기[坐一走七]를 바탕으로 통찰과 나눔이 둘이 아닌 ‘통보불이(洞布不二)’의 삶을 치열하게 이어오고 있다.

‘완묵(翫墨) 대자(大姉)’가 그린 종달 선사 진영.

박영재
서강대학교 물리학과 교수. 1978년 서강대학교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1983년 동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금까지 국외학술지에 176편의 학술논문을 게재했다. 종달 이희익 선사의 뒤를 이어 선도회 2대 지도법사를 맡아 수행을 지도하고 있다. 저서로 〈두문을 동시에 투과한다〉·〈삶과 수행은 둘이 아니네〉·〈석가도 없고 미륵도 없네〉·〈무문관‐온몸으로 투과하기〉·〈날
마다 온몸으로 성찰하기〉 등이 있다.

글 박영재  ggbn@ggb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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