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2

아버지는 나보다 세 살 위인 형에게 심부름을 시키곤 했는데, 형은 그 심부름의 임무를 받을 때마다 혼자 수행하려 하지 않고, 나를 손짓해 불러내서 앞장세우곤 했다. 엄존하는 가부장제 속에서, 형의 권력의 영향권 안에 있는 나는 싫든 좋든 형의 명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아버지 어머니는 형이 심부름을 수행하기 위해 나를 이용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형을 꾸짖으려 하지 않았다. 동생을 제압하고 사는 형의 행위를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형의 권력

나의 영육(靈肉)의 성장속도는 형보다 빨랐던 듯싶다. 형은 세 살 아래인 나보다 체구가 약간 작고, 얼굴 윤곽이나 거기에 뚫려 있는 구멍새들과 손발이 좀스러워 보이는 모양새였다. 

그런데 형은 집안 어른들의 비호 하에 나를 지배했다. 동생인 나를 제압하기 위해 어른들 몰래 폭행을 가하기도 했다. 어른들이 없는 자리에서 따귀를 치기도 하고, 정강이를 호되게 걷어차기도 했다. 나는 그 폭행을 어른들에게 고자질하지 않았다. 

나는 어른들의 가부장적인, 장자(큰아들) 우선의 가정질서를 인지하고 있었으므로, 내가 설사 고자질한다 할지라도 그것을 크게 꾸짖으려하지 않을 거라고 지레 생각했던 것이다. 어른들은 동생을 제압하는 것을 형으로서의 당연한 일로 여겼다. 나는 집안의 그러한 분위기에 적응하고 있었지만, 그 질서에 대한 불만을 속에 깊이 지니고 있었다. 그 불만은 형보다 무엇이든지 더 잘해버리려는 의지로 작용하고 있었다. 

<삽화=전병준>

형이 명받은 심부름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나를 앞장세우는 것은 그냥 심심하므로 동반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목적지에 가서는 나를 이용하려는 것이었다. 

아버지나 어머니는 당신들의 명에 따라 돈을 빌리거나, 어떤 물건을 빌리는 심부름을 수행하는 이가 정작 형이 아니고, 동생인 나라는 것을 짐작해버린 듯싶었다. 이후 언제인가부터는 아예 심부름 보낼 일이 있으면 형과 나를 함께 불러 나란히 다녀오게 하곤 했다.  

상당히 먼 이웃마을의 누군가의 집에 심부름을 수행할 경우에도 우리는 함께 다녔다. 내가 앞에 서고 형이 뒤에 따랐다. 한 번은 아버지의 한 친구에게 돈을 빌리러 갔는데, 그때도 내가 앞장서서 들어가 꾸벅 절을 하고 나서 아버지의 말을 전하고 처분을 기다렸다. 

그때 우리 형제를 대하는 아버지 친구의 반응에 나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우리 형제를 번갈아 보고 “아이고 아들, 둘이 다 아주 똑똑하네, 그런디 누가 형이냐?”하고는 미처 우리가 대답할 사이도 주지 않고 나를 향해 “니가 형인 모양이구나. 얼굴도 훤하고 말도 또록또록 잘하고. 아따, 한 씨 집안에 큰 인물 났네!”하고 말했다. 나는 재빨리 도리질을 하고 뒤에 선 형을 가리켜주며 “제가 동생이어요.”하고 말했다. 

우리 둘이 함께 다니면, 대개의 사람들이 나를 형인 것으로 착각하곤 했으므로, 형은 동생인 나보다 얼굴뿐 아니라 몸집이 작다는 것, 사람들이 동생인 나를 형으로 착각하곤 한다는 것 때문에 늘 상처를 입곤 하는 것이었다. 

거기다가 형보다 세 살 위인 누님이 자기의 손 맞잡이인 형보다는 나를 더 예뻐한 것이 탈이었다. 맛있는 떡이나 수숫대나 옥수수나 엿이나 과자가 생기면 형에게는 감추고 나에게만 주는 것이었다. 

형이 머슴과 한통속이 되어 나를 따돌리곤 한 것은 나에 대한 그러한 미움 때문이었다. 그것은 한 핏줄인 형제로서의 의리를 배반하는 것일 터이지만 나는 탓할 수 없었고 어느 누구에게도 하소연할 수 없었다. 

어머니는 당신의 장자인 형보다는 나를 더 예뻐했다. 내가 일곱 살 때 산으로 소를 뜯기러 다니고, 망태에 송아지의 꼴을 베어 오면 나를 얼싸안고 기뻐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형은 소가 두렵다고 소 뜯기는 일을 하지 못하면서도, 그 일로 인해 칭찬 받는 나를 못마땅하게 여겼고, 나를 더욱 미워했다. 일을 게을리 하고 꾀를 부리는 머슴과 공모하여 나를 따돌렸다. 

물 아래 긴 서방

내가 만들어 불곤 하는 피리젓대 때문이었는지, 머슴은 나를 더욱 미워했다. 내가 자기의 피리를 불어보고 싶어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자기가 연주하는 곡조들을 내가 다 연주해버린 것이 그의 자존심을 상하게 한 것이었을까. 아니 자기의 여동생 순이 때문이었을까. 순이와 내가 하곤 한 은밀한 숨바꼭질을 그에게 들킨 적이 한 번 있었다. 이후 그는 아기 업고 우리 집에 오는 순이를 퉁명스럽게 꾸짖어 쫓곤 했다. 나를 미워한 만큼 그는 형과 더욱 친밀해지고 있었다.

해마다 정월 대보름날 저녁이면, 마을 어른들이 앞산 너머의 넓바우 연안바다 포구 모퉁이 갯바위 위에서 갯제[海神祭]를 지냈다. 제주(祭主)로 뽑힌 남자는 한 달 전부터 피방(避房)을 하고 목욕재계하고 제물을 준비했다. 

머슴은 갯제 지내는 바닷가에 형만 데리고 가고, 나를 데리고 가지 않을 태세였다. 나는 따라가고 싶어 환장할 것만 같았다. 

거기에 가기 전에 머슴은 나에게 보아란듯이, 형을 상대로 마을 사람들이 갯제 지내는 이야기를 속닥거려주었다. 그게 넉넉히 들리도록 나에게 약을 올리고 있었다. 나는 관심이 없는 척, 듣지 않은 척했지만, 머슴의 모든 말을 온몸에 뚫려 있는 모든 구멍(감각기관)으로 빨아들이고 있었다. 

“우리 득량만 바다에 사는 고기들이나 해의(김)를 이럭저럭하는 ‘물 아래 긴 서방’은 넓바우 연안 ‘제일 엿개(제일 큰 여(암초)의 개포)’에 산단다. 갯제 지내는데 따라 가면 그 물 아래 긴 서방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물 아래 긴 서방’이란 말은 바다 도깨비를 높여 부르는 말이다.”

그 말을 듣고 나자 더욱 머슴을 따라 갯제 지내는 바닷가에 가보고 싶어 좀이 쑤셨지만, 나는 머슴에게 나를 데려가 달라고 조르지 않았다. 혹시 내가 조른다면, 너는 안 된다 하고 잡아떼면서 ‘용용 죽겠지’ 하고 놀릴 터이다. 만일 내가 자존심이 구겨지더라도 따라가겠다고 했으면 데리고 가주었을지도 모르는데 왜 그랬을까. 나는 자존심을 구긴 채 그와 타협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태연스럽게 눈살을 찌푸리고 참으면서, 속닥거리는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나는 자존심을 지키고 싶었다. 그 자존심은, 내가 그의 동생 순이와 은밀하게 숨바꼭질을 하곤 한다는 것을 알아버린 그에게 비굴하게 항복하고 타협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머슴과 나는 오래전부터 알 수 없는 싸움을 하고 있었다. 사실은 머슴이 나를 데리고 가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내 쪽에서 데리고 가 달라고 조르기를 바랐는지도 몰랐다. 

나는 나대로 토라져 있었다. 그에게 손톱만치도 아쉬울 것 없다고 나를 타일렀다. 피리도 손수 만들어 불고 있었으므로 그의 피리를 훔쳐 불지 않아도 되었고, 거기다가 머슴이 연주하는 곡조들은 그의 지도 없이도 내가 다 연주할 수 있었고, 그의 여동생 순이는 자기 오빠보다도 나를 더 예뻐하고 있었다. 그가 순이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것(비밀)을 나는 알고 있었다. 숨바꼭질을 할 때, 순이는 내 손을 잡아다가 자기의 옷섶 속에 넣어 둥둥하게 부푼 젖가슴을 만져보라고 했고, 내가 만지면 나를 으스러지게 안아주고 입을 쪽 맞추어주곤 했다. 누룽지를 가져다주기도 하고 떡을 숨겨 가져다주기도 했다. 

바로 그러한 사실 때문에 머슴은 나에게 복수를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머슴은 가끔씩 나를 흘긋거리며 형을 상대로 열심히 갯제 이야기를 했다. 

“마을에서 바다로 나갈 때는 잡귀 쫓는 액막이굿거리를 ‘깽매깽매 쿵덕쿵덕……’ 치고 나간다. 넓바우 바닷가에 이르면 풍물을 그치고, 상쇠가 제사상 앞에 무릎을 꿇고 ‘물 아래 긴 서방’한테 비나리를 한다. 우리 아버지가 살았을 적에는 우리 아버지가 상쇠를 했었다.”

머슴은 자기가 상쇠라도 되는 냥 재바른 말솜씨로 비나리를 하고 있었다.

“물 아래 긴 서방, 하고 부르면, 검은 안개 덮인 제일 엿개 끝에서 ‘어이!’하고 도깨비가 대답을 하지……. 그럼 상쇠가 이렇게 비나리를 하는 거야.”

<삽화=전병준>

머슴은 가느다란 가성(假聲)으로 그 말을 했다. 그 목소리에는 알 수 없는 귀기(鬼氣)가 담겨 있었다.

“…… 우리는 해동(海東) 조선 전라남도 장흥군 신상리 2구 넓바우 개포 어민들인디, 금년에는 물 아래 긴 서방이 태평양 대서양 인도양 바다에서 도미·숭어·농어·전어·낙지·주꾸미·멸치 떼를 쏵 쓸어서 우리 바다로 몰고 오소. 해의는 우리 어민들의 모든 발[簾]에 소 자빠진 것 같이 새까맣게 자라게 해주소. 파래·매생이는 다른 동네로 보내고 먹장 같은 해의만 자라게 해주소. 그러면 제일 엿개에서 물 아래 긴 서방이 ‘어이 알았네.’하고 대답을 한다.” 

머슴은 나를 흘긋 보고 나서, 형을 상대로 말을 이었다.

“‘물 아래 긴 서방’이라는 말이 사실은 바다를 관리하는 도깨비를 지칭하는 것인데, 바다에 나가서는 도깨비라는 말을 절대로 입에 담으면 안 되고, 반드시 ‘물 아래 긴 서방’이라고 불러야 한다……. 제사 뒤끝에는 청년들이 제상에 있는 돼지 머리를 바닷물에 풍덩 던진다. 그리고는 더 이상 풍물을 치지 않고 조용히 마을로 돌아온다. 그때는 조심해야 한다. 맨 뒤에 혼자 처지면 귀신한테 잡힐 수가 있으니까. 원래 음력 대보름날 밤에는 세상의 모든 굶주린 잡귀신들이나 도깨비들이 미친 듯이 설치는 거야. 그러니까 너는 돌아올 때 내 손을 꼭 잡고 뛰어오면 된다.”

머슴과 형이 문을 열고 나가자 나는 따돌림 당한 소외감과 부러움으로 인해 울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들이 갯제를 지내는 데 가고 난 다음 나는 혼자 할아버지의 방 아랫목에 누워 있었다. 내 머리 속에는 넓바우 연안 바닷가에서 마을 어른들이 갯제 지내는 모습이 보였다. 달은 휘영청 밝은데, 바닷물에는 모든 고기들이 떠올라 파닥거리는 듯 달빛이 반짝거리고 그 속에서 ‘물 아래 긴 서방’이라 불리는 도깨비가 음산한 가성(假聲)으로 대답을 하고 있었다. 손과 발을 한없이 길게 늘여 바다 깊은 곳에서 고기를 잡아낼 수도 있고 물위를 걸어 다닐 수도 있다는 ‘물 아래 긴 서방’이라는, 투명한 초월적인 존재가 내 머리 속에 그려지고 있었다. 그 생각에 잠겨 있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다가 깼는데, 어느 새 돌아왔는지 내 옆에 형이 자고 있었다.

훗날 성장해서, 나는 할아버지가 이야기한 도깨비와 머슴들이 이야기한 도깨비를 종합해 보았고, 그것은 우리 민족의 집단 무의식을 표현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 집 머슴의 해신제 이야기 속의 ‘물 아래 긴 서방’으로 인해 나의 도깨비에 대한 생각은 더 뚜렷해지고 있었다.

한 승 원

1939년 전남 장흥에서 태어나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1968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목선〉이 당선되며 활동을 시작했다. 〈아제아제 바라아제〉·〈소설 원효〉·〈초의〉·〈다산〉 등 다수의 소설을 쓴 이 시대의 대표 소설가다. 고향 율산마을에서 바다를 시원(始原)으로 한 작품을 써오고 있다. 현대문학상·한국문학작가상·이상문학상·대한민국문학·한국소설문학상·한국해양문학상·한국불교문학상·미국 기리야마 환태평양 도서상·김동리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저작권자 © 금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