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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세상을 잇는 다리5_지극한 염원 깃든 다리
  • 글 · 사진 이강식 기자
  • 승인 2019.09.17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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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진천군 문백면 구곡리와 초평면 화산리 일대를 연결하는 농다리.고려시대 건립된 것으로 추정하며, 동양에서 가장 길고 오래된 돌다리로 알려져 있다.

이루고자 하는 바를 간절히 생각하고 기원하는 것을 ‘염원(念願)’이라 한다. 누구나 염원 한 가지쯤은 마음에 품고 산다. 이번 ‘세상과 세상을 잇는 다리’는 ‘지극한 염원 깃든 다리’ 이야기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러 친정에 가던 여인의 사연이 깃든 진천 농다리[籠橋], 사랑이 이뤄지길 바라며 건너는 남원 광한루 오작교(烏鵲橋), 백성들이 정성들여 건립한 창녕 영산 만년교(萬年橋) 등 세 곳을 소개한다.

동양 최고의 돌다리, 진천 농다리

중부고속도로 진천 부근에는 ‘생거진천’이라 쓰인 대형 광고판이 설치돼 있다. ‘생거진천(生居鎭川) 사거용인(死居龍仁)’에서 따온 말이다. 진천은 예부터 평야가 넓고 땅이 비옥할 뿐만 아니라 가뭄으로 인한 피해도 없어 살기 좋은 지방이어서 이같이 불렸다고 한다. ‘생거진천’은 진천이 사람 살기 좋은 지역임을 부각하는 말인 셈이다.

농다리는 붉은 돌을 음양에 따라 배치하고, 고대 중국의 성가법(星家法)인 이십팔숙(二十八宿)을 응용해 28칸으로 쌓았다고 전한다. 현재는 24칸만 남아 있다.

삼국통일의 주역 김유신 장군의 출생지인 진천에는 오랜 역사를 간직한 ‘농다리’(籠橋,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8호)가 있다. 진천군 문백면 구곡리와 초평면 화산리 일대를 연결하는 농다리는 고려 초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하며, 동양에서 가장 길고 오래된 돌다리로 알려져 있다.

농다리 주변은 수변공원으로 조성돼 있어 인근 주민은 물론 많은 관광객이 찾는다. 미호천 위에 건립된 농다리는 붉은색 계열의 돌을 물고기 비늘모양처럼 쌓은 특이한 구조로, 하늘에서 보면 지네가 기어가는 듯한 모습이다. 다리는 길이 93.6m, 폭 3.6m, 두께 1.2m로, 현재 24칸(가로로 긴 징검다리 24개를 이은 형태)이 남아 있다. 칸과 칸 사이의 내폭은 80cm 가량이다. 건립 당시에는 총 28칸에 전체 길이가 100m가 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다리 위를 걷다보면 흔들리는 돌도 있지만, 걸을수록 안정감이 느껴진다. 미호천 상류의 징검다리에서 보이는 농다리는 주변 풍경과 잘 어우러져 수려한 자태를 뽐낸다.

다리 윗부분에 놓여 있는 판석(板石)은 각각 칸마다 1석씩 놓았는데, 냇물이 불어나면 물이 넘쳐도 돌은 빠져나가지 않는다고 한다.

농다리에 관한 일제강점기 이전의 기록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으며, 일제강점기 이후의 자료만 몇몇 남아 있다. 문화재청이 발간한 〈충청권 문화유산과 그 삶의 이야기〉 ‘진천’편에 따르면 농다리에 관한 기록은 조선시대의 각종 지리지에는 나오지 않으며, 일제강점기 때 간행된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과 1932년 간행된 〈상산지(常山誌)〉에 수록돼 있다.

〈조선환여승람〉은 충남 공주의 유학자 이병연(李秉延, 1894∼1977)이 1910년부터 1939년까지 100여 명의 인력을 동원해 12년간 전국 13도 229개 군 중 129개 군을 직접 조사해 편찬한 백과사전 형식의 지리서이고, 〈상산지〉는 진천 지역의 향토사를 기록한 사료다.

농다리는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러 친정으로 가는 딸의 효심에 감복해 임연 장군이 말을 타고 놓았다는 설화가 전하는 유서 깊은 돌다리다.

〈조선환여승람〉과 〈상산지〉, 그리고 근래에 제작된 ‘디지털진천문화대전’의 내용을 종합하면, 농다리는 고려 초 임연(林衍) 장군이 건립했다. (진천)군 남쪽 10리의 금천과 가리천의 합류 지점에 있으며, 붉은 돌을 음양에 따라 배치했다. 이십팔숙(二十八宿, 고대 중국의 성가법)을 응용해 28칸으로 쌓았다. 수문 위의 판석(板石)은 각각 1석씩 놓았는데, 냇물이 불어나면 물은 넘쳐도 돌이 빠져나가지 않았다. 세월이 오래돼 4칸이 매몰되고 24칸만 남아 있다.

국토정보지리원에서 2015년에 펴낸 <한국지명유래집> ‘충청편’에는 “신라 또는 고려 때 축조한 다리로 추정하지만 정확한 축조 연대는 알 수 없다. 웬만한 홍수에도 무너지지 않았으며, 밟으면 움직이고, 잡아당기면 돌아가는 돌이 있어서 지명이 유래되었다고도 전한다. 또 농 궤짝을 쌓아 올리듯 돌을 차곡차곡 쌓아 올려 만든 다리이기 때문에 한자 지명으로 ‘농(籠)’자를 사용했다고도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미호천 상류에서 내려 온 냇물은 농다리의 칸과 칸 사이 수문을 통해 하류로 흘러간다.

농다리 건립에는 임 장군과 관련한 두 가지 설화가 전한다. 하나는 어느 추운 겨울 날, 한 여인이 강을 건너려 했다. 이를 본 임 장군이 그 이유를 묻자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친정으로 가는 길입니다.”하고 답했다. 임 장군은 그녀의 효심에 감복해 여인이 효를 다하도록 돕고자 말을 타고 돌을 실어 날라 다리를 만들었다는 설화다.

다른 하나는 임 장군과 누이에 관한 얘기다. 소문난 장사였던 남매는 ‘생사’를 건 내기를 했다. 임 장군은 굽이 높은 나막신을 신은 채 송아지를 끌고 서울에 다녀오기, 누이는 돌다리를 놓기가 조건이었는데, 먼저 임무수행을 완료한 사람이 이기는 것으로 약속했다. 남매의 내기를 지켜보던 어머니가 딸이 다리를 완성하기 직전 갖은 방법으로 딸이 일을 못하도록 훼방을 놓아 아들이 이기도록 도왔다는 설화다.

백성들의 세세생생 염원 깃든 창녕 만년교

경남 창녕군 영산(靈山)에는 백성들이 구슬땀을 흘리며 건립하고, 세세생생 무너지지 않기를 염원한 석교(石橋)가 있다. 민초들의 순박한 간절함이 흠뻑 스며있는 만년교(萬年橋, 보물 제564호)다.

경남 창녕 영산에 있는 만년교. 조선 정조 때 나무다리가 홍수로 떠내려가자 백성들이 힘을 모아 건립한 뒤 오래도록 보존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만년교’로 이름지었다고 전한다.

만년교는 영산면 소재지인 동리 남쪽으로 흐르는 남천을 가로지른 무지개 모양의 홍예교(虹蜺橋)다. 다리의 연혁을 기록해 놓은 자료로는 다리 북쪽(홍살문이 있는 곳)에 남아있는 ‘남천석교비(南川石橋碑)’와 ‘석교중건비(石橋重建碑)’가 있다.

두 비석의 기록에 따르면 남천에는 예부터 나무다리가 있었는데, 홍수가 나면 자주 떠내려갔다. 조선 정조 4년(1780)에도 큰 홍수가 나 다리가 떠내려갔는데, 영산 지역 백성들이 이번에는 힘을 모아 돌을 옮겨와 새로 튼튼한 돌다리를 놓았다. 다리 놓는 일을 주도한 사람은 영산에 사는 김윤관(金允寬)이었고, 다리 축조를 맡은 이는 석수 백진기(白進己)였다.

13세의 신필(神筆) 소년이 꿈에 만난 산신의 말을 듣고 썼다는 전설이 전하는 ‘萬年橋’ 글씨.

다리의 이름인 ‘만년교’에는 앞서 언급했듯, 다시는 무너지지 않아 대대손손 후손들이 이 다리를 건너는데 불편함이 없기를 바라는 간절함이 담겨 있다. 다리 이름과 관련해 재미난 이야기도 전한다. 만년교 남쪽 입구에 큰 글씨로 ‘萬年橋(만년교)’라고 새겨진 비가 있다. 비에는 작은 글씨로 ‘十三歲書(십삼세서)’라고 새겨져 있는데, 여기에 전설이 깃들어 있다.

다리를 건립할 당시 영산 고을에 신통한 필력(筆力)을 지닌 열세 살짜리 신동이 살고 있었다. 다리가 완공되던 날 밤, 소년은 꿈을 꾸었다. 자신을 산신이라고 밝힌 노인이 나타나 “듣건대 그대가 신필(神筆)이라 하니, 내가 거닐 다리에 그대의 글씨를 한 점 새겨두고 싶다. 다리 이름을 만년교로 할 테니 써보도록 하라.”고 말했다. 노인이 사라진 뒤 소년은 먹을 갈아 그날 밤이 지나기 전에 ‘萬年橋’를 써놓았다.

백성들의 정성에 신선이 감응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전설은 만년교를 더욱 신비롭게 한다. 만년교는 남천 위를 가로질러 건립됐다고 해서 ‘남천교’, 다리를 중건할 때 일을 주관한 원님의 공을 기리기 위해 ‘원다리’로도 불렀다. 고종 29년(1892)에는 만년교를 중건했는데, 현감 신관조(申觀朝)가 일을 주관하고, 현풍에 거주하던 김내경(金乃敬)이 돌을 다루는 일을 맡았다고 한다.

천연암반 위에 건립된 만년교. 32개의 장대석으로 홍예의 틀을 잡은 뒤 둥근 돌을 겹겹으로 쌓아 만들었다.

만년교는 남천 바닥의 천연암반을 초석으로 삼아 장대석 32개로 홍예의 틀을 잡은 다음, 그 위에 둥근 돌을 여러 겹으로 쌓아올리고 다시 맨 위에 흙을 얇게 깔았다. 총 길이는 총 13.5m이며, 홍예는 너비 11m, 높이 5m, 폭 3m다. 현재 남아 있는 홍예교 중 작은 편에 속한다.

순천 선암사 승선교 등 다른 홍예교에 있는 용두는 없지만, 소박한 아름다움이 한껏 풍겨난다. 홍예와 남천에 비치는 홍예의 그림자가 이뤄낸 완벽한 원과 주변 수목들의 어울림은 단아하면서도 아름답다.

옥황상제가 사는 궁전인 ‘광한청허부’(줄여서 ‘광한’이라고 부른다)는 달나라에 있다. 광한루의 이름도 여기서 따왔으며, 광한루 앞의 긴 돌다리가 오작교다.

연인들의 애틋한 사랑 담긴 남원 오작교

옥황상제(玉皇上帝)가 사는 궁전(宮殿)을 ‘광한청허부(廣寒淸虛府)’라고 부른다. 줄여서 ‘광한(廣寒)’이라고 하는데, 이 궁전은 방아 찧는 옥토끼가 사는 달나라에 있다. 그래서 옥황상제의 궁궐을 ‘월궁(月宮)’ 또는 ‘월궁전(月宮殿)’이라고도 한다.

‘광한’, 많이 들어본 이름이다.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연인인 이몽룡과 성춘향의 사랑이야기가 전하는 전북 남원의 광한루(보물 제281호)가 금방 떠오른다. ‘광한루’의 ‘광한’도 ‘광한청허부’에서 따왔다. 광한루 앞에는 연못이 있는데, 은하수를 상징한다. 지상에 구현된 달나라인 광한루에 가려면 은하수 위에 놓인 다리를 건너야 하는데, 바로 오작교(烏鵲橋)다.

광한루 오작교는 1582년 부사 장의국이 연못의 삼신산과 함께 조성했다.다리의 폭은 2.8m 길이는 58m로, 다리 가운데 부분에 4개의 홍예가 있다.

오작교는 견우(牽牛)와 직녀(織女)가 1년에 한 번 만나는 음력 7월 7일 칠석날에 까마귀와 까치가 은하수에 모여 서로 몸을 이어 만든다는 전설의 다리다. 광한루 오작교는 1582년 부사 장의국이 연못과 함께 조성했다. 다리의 폭은 2.8m 길이는 58m로, 다리 가운데 부분에 4개의 홍예가 있다. 현존하는 연지교(蓮池橋) 중 가장 큰 규모지만, 문헌 자료가 없어 현재의 모습이 건립 당시의 모습인지는 알 수 없다.

일반적으로 누각 앞의 다리는 선비들이 누각에 오르기 전 몸과 마음을 정갈히 하고, 의관을 정제하는 상징적인 공간이기도 하다. 광한루 앞 오작교도 그 역할을 했을 것이다. 광한루 주변이 공원으로 조성되기 전까지 마을 주민들은 오작교를 건너 시장에 가서 물건을 사고 팔았다고 하니, 오작교가 주민들의 교통로 역할도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오작교 입구에 있는 ‘烏鵲橋’ 비석.

그럼에도 오작교는 ‘남녀 간 사랑’을 대표하는 다리라는 인식이 강하다. 이몽룡이 그네 뛰는 성춘향을 만나기 위해 오작교를 지나면서 옷매무새를 단정히 했음은 물론, 뭇 연인들도 이 다리를 거닐며 사랑을 맹세하고 속삭였을 것이다. 요즘도 ‘썸(사귀기 전 미묘한 관계)’ 타는 이들이 사랑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며 이 다리를 건너고, 연인들도 그 사랑의 결실이 맺어지길 염원하며 오작교를 지나다니고 있다.

어느 곳이든 스님이 법당 한 칸 짓고 일념으로 염불·참선을 하면, 불력(佛力)이 가득하고 여법한 부처님 도량이 되듯, 돌다리를 건너며 간절히 원하는 바를 기원하면 다리도 사람들의 염원이 가득 채워진 신성한 공간이 될 수 있다. 우리가 무심결에 지나다니는 다리, 세상 모든 다리에는 누군가의 간절한 염원이, 누군가의 애틋한 사연이 깃들어 있다.

오작교(烏鵲橋)는 견우(牽牛)와 직녀(織女)가 1년에 한 번 만나는 날인 음력 7월 7일 칠석날에 까마귀와 까치가 은하수에 모여 서로 몸을 이어 만든다는 전설의 다리다. ‘사랑’의 상징인 오작교에는 지금도 연인과 가족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글 · 사진 이강식 기자  ggbn@ggb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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