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업신여기다, 예언 듣고 귀의
대승불교 촉발, 아시아 곳곳에 전파

카니시카왕은 쿠샨왕조를 대표하는 가장 위대한 왕으로 평가 받고 있다. 그는 불교에 귀의한 이후 불교를 보호하고, 불교교단에 재정적으로 많은 후원을 했다. 인도 마우리아 왕조 아소카왕과 더불어 불교를 비호(庇護)한 명군으로 추앙받고 있다.

| 목동의 깨우침에 귀의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건타라국 도성 포로사포라(현 페샤와르 지역)에 계실 때의 일이다. 성 밖 동남쪽으로 8~9리를 가다 보면 높이가 100여 척에 달하며, 가지와 잎이 빽빽한 보리수가 있었다. 과거 네 분의 부처님께서 이 나무 아래에 앉으셨다는 전설이 있는 나무였다. 어느 날 부처님께서 이 나무 아래에서 남쪽을 향해 앉으신 뒤 시자인 아난에게 말했다.

“내가 세상을 떠난 후 400여 년이 지난 뒤 ‘카니시카’라는 이름을 가진 왕이 이 세상을 다스릴 것이다. 그는 이곳에서 남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 스투파(stūpa, 탑)를 세울 것이니, 내 몸의 모든 뼈와 살과 사리들의 대부분이 그 안에 모일 것이다.”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후 400여 년이 지나 카니시카왕이 세상에 태어나 천하를 통일했다. 카니시카왕은 처음에는 죄와 복[罪와 福, 인과]의 이치를 믿지 않았고, 부처님 법을 업신여기고 훼손하기까지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카니시카왕은 초원에서 사냥을 하다가 흰 토끼 한 마리를 발견했다. 왕은 토끼를 쫓아갔지만 어느 순간 홀연히 사라졌다. 토끼가 사라진 장소에는 나이 어린 목동이 작은 스투파를 만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왕이 목동에게 물었다.

“너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

이에 목동이 답했다.

“옛날 부처님께서 성스러운 지혜로 말씀하시길 ‘훗날 어떤 국왕이 이 땅에 스투파를 세울 것이며, 내 몸의 사리들은 대부분 그곳에 모일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대왕께서는 과거에 이미 성스러운 덕을 심으셨고, 그 이름은 옛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이름과 같습니다. 또 공력과 복덕이 뛰어나니 실로 기회가 무르익었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지금 그 일을 알려드리려는 것입니다.”

목동은 이렇게 말한 후 왕의 눈앞에서 홀연히 사라졌다. 왕은 목동의 말을 듣고 난 뒤 경사스러운 일이라 생각하며 크게 기뻐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이 부처님의 옛 말씀에 올라 있던 것에 큰 자부심을 갖게 됐다. 왕은 이 일을 계기로 부처님 법에 대한 올바른 믿음을 일으켜 깊이 공경하게 됐다.

카니시카왕은 목동이 만든 작은 스투파 주위에 자신이 커다란 스투파를 세워 덮어씌우려고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왕이 만든 스투파가 커질수록 목동이 만든 작은 스투파도 같이 높아졌다. 이 같은 상황이 계속되자 스투파의 높이는 점점 높아져 결국 400여 척이 넘게 됐다. 결국 기단이 세워진 터의 둘레가 1리 반에 달했고, 층수는 5층에 달했으며, 높이가 150여 척이 되고서야 마침내 작은 스투파를 덮을 수 있게 되었다.

이에 왕은 크게 기뻐하며 그 위에 다시 25층의 금동상륜을 세우고, 부처님의 사리 10말을 그 속에 안치한 후 예식(例式)을 갖춰 공양을 올렸다. 그런데 예식이 다 끝나자 또다시 작은 스투파가 동남쪽 모퉁이 아래 옆으로 삐죽하게 반쯤 나와 있는 것이 보였다. 왕이 불쾌히 여겨 반쯤 나와 있는 스투파를 내던져 버리니 다른 작은 스투파가 큰 스투파의 2층 아래에 반쯤 모습을 드러냈다. 왕이 이상하게 생각하며 본래의 장소에 가보니 작은 스투파가 또다시 나와 있었다. 왕은 이내 마음을 돌이켜 탄식하며 말했다.

“오오, 사람의 일이란 미혹에 빠지기 쉬우며, 신령스런 공덕은 가리기 어렵구나. 부처님께서 돌보시는 것을 어찌 분노로 미칠 수 있겠는가? 모두 궁으로 돌아가자.”

왕은 이렇게 참회하고 난 뒤 본인의 허물을 사죄하고, 두 스투파를 뒤로 한 채 궁으로 돌아갔다. 이후 두 기의 스투파를 향해 병에 걸려 쾌유를 바라는 사람이 향을 사르고, 꽃을 뿌리며 지극한 정성으로 귀의하면 병이 낫게 돼 많은 사람들이 찾아가게 된다.

| 4차 결집과 대승불교의 등장

카니시카왕은 즉위 후 여러 나라를 정복해 중앙아시아에서 중부 인도에 이르는 거대 제국을 건설했다. 이때 중인도의 화씨성을 공략한 뒤 화씨왕에게 배상금으로 9억 금을 요구했다. 금액이 너무나 크자 화씨왕은 카니시카왕에게 말했다.

“그렇게 큰 배상금은 우리에겐 무리입니다. 왕이시여 9억 금 대신 부처님이 사용하신 발우[佛鉢]와 자심계(慈心鷄, 진귀한 새), 그리고 마명 스님을 보내드리겠습니다. 이것을 각 3억 금으로 충당해 주십시오.”

그러자 왕은 크게 기뻐하며 이를 승낙했다. 마명 스님은 논사로 전법행을 주도했던 위대한 사상가이자, 대승불교의 개척자로 알려진 인물이다. 카니시카왕은 이런 마명 스님을 열성적으로 후원했다. 마명 스님은 쿠샨왕조의 수도로 가서 고문관 역할을 하면서 불교 전파에 힘쓰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카니시카왕은 개인 구제에 치우친 소승불교에 대해 의문을 품는다. 그는 매일 스님 한 분을 모셔와 법을 청해 듣고, 스스로도 경론을 공부했다. 그런데 스님들 간의 가르치는 내용이 같지 않음을 깨닫고 ‘협존자(脇尊者)’에게 그 연유를 물었다. 이를 통해 불교 교단 내에 여러 부파가 있고, 각 부파마다 교의를 달리 해석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왕은 협존자와 이에 대해 상의했다.

“현재 너무 많은 부파와 교의가 있어 불교를 신앙하는 사람들도 어느 것이 옳은 것인지 잘 모르고 있습니다. 나는 부처님께서 몇 번이고 다시 태어나는 게 다른 사람들이 열반에 이르도록 도와주기 위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각 종파 간의 상이점을 조화롭게 하고 싶은데,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그러자 협존자가 이렇게 대답했다.

“불교 부파 간의 각기 다른 견해를 통일해야 할 것입니다.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에 속한 고승 500여 명을 선출해 이 사안에 대해 논의를 해보시지요.”

왕은 캐시미르 지방의 계곡 쿤달라바나에 위치한 환림사(環林寺)에서 종교회의를 열고 의장에 협존자를, 부의장에 마명 스님을 임명해 제4차 결집(結集)을 거행한다. 이들은 불서의 필사본을 수집해 토론하는 일 뿐만 아니라 당시 20여 개로 분열돼있던 각 종파 사이의 상이점을 찾아 조화롭게 하고, 표준 교설을 세우는 작업도 진행했다. 이때 집대성된 문헌이 총 30만 송(頌) 660만 언(言)에 달하는 대주석서 〈아비달마대비바사론(阿毗達磨大毘婆沙論)〉이다. 또 4차 결집부터 ‘경전’은 산스크리트어로 공식화되고, 문자화됐다. 따라서 이 무렵부터 중국에 전해진 경전 역시 산스크리트어 경전이다.

제4차 결집 후 그 내용은 주변국으로 전해졌다. 카니시카왕은 포교단을 조직해 중앙아시아·중국·티베트 등에 파견했으며, 불교를 아시아의 대표적인 종교로 만드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는 결과적으로 대승불교의 등장이라는 새로운 국면을 여는 계기가 된다.

불상이 만들어지기 전에 보리수·스투파(불탑)와 같이 부처님을 상징했던 ‘부처님 발자국 문양’.

| 왕의 죽음, 불교의 쇠퇴

카니시카왕은 포용력 있는 왕이었다. 그가 만든 당대 주화를 보면, 부처님뿐만 아니라 조로아스터교·그리스·브라만의 신들도 존중했음을 알 수 있다. 또 그의 재위 기간에 이뤄진 로마 제국과의 교류는 상당한 규모의 무역 증대와 사상 교류를 가져왔다. 그중 동서 교류의 가장 뚜렷한 예는 ‘간다라미술’로, 인도에 전래 된 헬레니즘 미술양식이 인도 토착 양식과 결합해 성립한 것이다. 이 시기에 만들어진 불상에서는 머리카락이 물결 모양으로 곱슬곱슬하고, 코가 높고 눈이 깊게 새겨지는 등 그리스·로마의 고전적인 선을 찾아볼 수 있다.

이같이 불법을 널리 퍼뜨린 카니시카왕은 파미르고원(Pamir Plat)을 넘어 중국 후한 원정에 나서 승리를 거두지만, 나라로 돌아오는 도중 반란을 일으킨 부하들에 의해 피살당하고 만다. 그의 사후에도 쿠샨왕조는 계속 불교를 신봉하고 사탑을 건립했다. 하지만 결국 카니시카왕과 함께 중흥기를 이룬 쿠샨왕조는 점점 국력이 쇠퇴했고, 5세기 후반 중앙아시아의 고대 유목민족인 에프탈에 의해 멸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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