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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제자가 된 왕4_아소카왕참혹한 정복전쟁 벌였지만 8만4천 불탑 세우고 佛法 널리 퍼뜨린 왕
  • 글·   조용주 기자
  • 승인 2019.07.16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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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소카왕이 석가모니 부처님의 탄생지인 룸비니에 세운 석주다. 석주에는 “신들의 사랑을 받은 왕(아소카)이 재위 20년 친히 석가모니가 태어난 곳을 방문하다.”라고 새겨져 있다. 아소카왕은 이 석주를 세운 후 룸비니마을의 토지 세금을 면제해주고, 생산물에 대해서도 1/8의 세금만 징수하게 했다.

| 흙으로 음식 빚어 공양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마가다국의 수도 왕사성의 죽림정사에 계실 때의 일이다. 이른 아침 부처님은 시자인 아난과 함께 탁발을 하러 성안으로 들어갔다. 길을 가는 도중 두 명의 어린아이가 소꿉장난을 하고 있었다. 두 아이는 진흙으로 집과 창고를 짓고, 곡식과 많은 보물을 만들면서 놀고 있었다.
그때 한 아이가 멀리서 오는 부처님의 빛나는 모습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는 무한한 공경심과 더불어 무엇인가 보시하고 싶은 순수한 마음이 생겨났다. 아이는 곧 진흙으로 만든 창고에서 곡식이라 이름 지은 한 줌의 흙을 부처님께 가지고 가며 말했다.
“부처님, 보리로 빻은 이 미숫가루를 보시하겠습니다. 이 공덕으로 저는 다음 생에 세계를 통일하는 왕이 되어 부처님께 더 많은 공양을 할 수 있길 기원합니다.”
키 작은 아이를 위해 부처님께서는 스스로 발우를 낮추고 머리를 숙여 그것을 받아 아난에게 주면서 말했다.
“이것을 가지고 가서 내 방의 바닥 한구석에 발라라.”
탁발을 마치고 숙소에 돌아온 아난은 그 흙을 부처님 처소의 방바닥에 발랐다. 그리곤 부처님께 물었다.
“부처님, 조금 전 어린 아이가 한 줌 흙을 보시했습니다. 이 공덕이 그 아이에게 어떤 미래로 다가올지 말씀해주십시오.”
그러자 부처님은 아난에게 이와 같이 답했다.
“아난아, 너는 조금 전 그 아이가 기쁘게 보시한 흙을 내 방 한 귀퉁이에 발랐다. 그 어린아이는 이 공덕으로 인해 내가 열반한 지 100년이 흐른 뒤에 한 나라의 국왕이 되어 ‘아소카’라는 이름의 왕으로 태어나 정의의 왕, 이상적인 제왕이 될 것이다. 또 나를 위해 나의 유골을 각지에 모시고, 8만4천의 탑을 세워 사람들을 이롭게 할 것이다.”

|   포악한 군주 

아소카왕은 인도 최초의 제국으로 알려진 마우리아 왕조의 3대 왕으로 인도 대륙을 사실상 통일하고, 훗날 최고의 성군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아소카왕이 처음부터 성군이었던 것은 아니다. 
아버지인 빈두사라왕은 16명의 부인에게서 101명의 자식을 낳았는데, 아소카왕은 그 중에 부왕(父王)을 따라다니며 전장을 누비던 용맹스런 아들이었다. 하지만 그는 부왕으로부터 후계자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부왕이 갑자기 사망하고, 이후 형제들과 4년간에 걸쳐 왕위를 놓고 다툼을 벌인다. 결국 아소카왕은 친동생 한 명을 뺀 이복형제 99명을 죽이고 왕위를 계승한다. 
그 당시 재위에 오른 왕들의 행보를 살펴보면 권력을 잡기위해 친족을 몰살하고, 자신을 지지하지 않는 신하를 죽이는 일은 다반사였다. 아소카왕은 왕위를 계승한 후에도 강력한 중앙집권체제 구축을 위해 끔찍한 일을 자행했다. 재위에 오르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대신들이 아소카왕을 업신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눈치 챈 아소카왕은 대신들에게 말했다.
“너희들은 지금 꽃나무와 과일나무를 꺾어 그것으로 울타리를 만들어 가시나무를 보호하도록 하라.”
이에 모든 대신들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왕에게 되물었다.
“대왕이시여, 마땅히 가시나무를 꺾어 울타리로 만들어 꽃나무와 과일나무를 보호해야 합니다. 대왕의 명령은 올바르지 않습니다.”
이에 아소카왕은 대신들에게 다시 명령을 내렸다.
“그대들은 내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어서 꽃나무와 과일나무를 꺾어서 가시나무를 보호하도록 하라.”
왕은 세 번에 걸쳐 대신들에게 같은 명령을 내렸으나, 대신들은 왕의 명령을 시행하지 않았다. 이에 아소카왕은 화를 내며 그 자리에서 칼을 뽑아 대신들의 머리를 베었는데, 그 수가 500명에 달했다.
다음은 아소카왕의 성정이 얼마나 포악했는지를 보여주는 일화다. 한 번은 아소카왕이 500명의 궁녀를 거느리고 뒷동산에 올랐다. 그 동산에는 나무가 한 그루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 나무를 ‘아소카’라고 불렀다. 꽃과 잎이 예쁘게 돋아있는 나무를 보자 아소카왕은 본인의 이름과 같다고 생각하며 크게 기뻐했다. 그러나 당시 아소카왕은 성정이 거칠고 포악해 모든 궁녀들이 가까이 하려 하지 않았다. 아소카왕이 잠든 사이 궁녀들은 그가 즐거워하지 못하게 하려고 나무의 꽃과 잎을 모두 꺾어 없애버렸다. 잠에서 깬 아소카왕은 꽃과 잎이 떨어진 나무를 보고 호통을 쳤다.
“조금 전만 해도 이쁘게 피어있던 나무의 꽃과 잎을 누가 다 떼었느냐?”
아소카왕의 외침에 결국 궁녀들은 본인들의 짓이라고 자백을 했다. 이에 아소카왕은 화를 내며 대나무 상자 속에 500명의 궁녀를 가두고 불로 태워 죽였다.

인도 마디아 프라데시주(옛 보팔왕국)에 위치한 산치대탑은 세계 최초의 불탑이다. 아소카왕이 재위에 오르기 전, 전장을 떠돌 때 만난 여인 ‘데비’를 그리워하며 세운 탑이다. 둘 사이에는 남매가 태어났는데, 그 중 아들이 왕자가 되었다가 두 눈을 실명하고 출가를 한다. 탑은 모두 3기인데, 그중 가장 큰 제1탑이 기단 지름 37m, 높이 16.5m로에 달하는 ‘산치대탑’이다.

| 불교에 귀의하다

잔인하고 포악한 아소카왕이 불법에 귀의한 계기는 두 가지 설이 전한다. 먼저 스리랑카 역사서 〈마하방사〉에는 일곱 살의 사미승 니그로다 때문이라고 전한다. 니그로다 사미는 아소카왕이 죽인 이복형제 중 한 명인 수마나의 유복자다. 아소카왕에게는 조카가 된다. 이 어린 사미승은 왕궁에서 왕과 신하들에게 불법을 설했다고 하는데, 이를 통해 불교에 귀의했다는 설이다. 두 번째는 감옥에 갇힌 재가불자 사무다라가 행한 이적을 보고 귀의했다는 설이다.
아소카왕은 불법에 귀의했지만, 인도 대륙을 통일하기 위한 정복전쟁을 멈추지는 않았다. 불교에 귀의한 2년 뒤, 아소카왕은 보병 60만, 기병 10만, 9,000마리의 코끼리 부대를 이끌고 칼링가국 정벌에 나선다. 결과적으로 10만이 넘는 인명을 살육했고, 15만 명을 포로로 잡아 국외로 추방했으며, 그의 부하 역시 1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왕은 폐허가 된 칼링가의 수도를 둘러보다가 고아가 된 아이들과 미쳐버린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전쟁의 승리를 마냥 기뻐할 수 없었다. 그리고 자신의 야욕으로 인해 무고한 인명이 죽었음을 깨닫고 후회를 했다. 그리고 며칠 후, 101명의 왕자 중 유일하게 살려주었던 친동생이 비구의 모습으로 아소카왕을 찾아왔다.
“왕이시여, 지금 칼링가에는 죽은 이들의 피가 강을 이루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죽고, 부모를 잃은 아이들이 떠돌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오계 중 첫 번째가 바로 ‘살생하지 말라[不殺生].’입니다. 제발 더 이상 의미 없는 살육을 멈춰주십시오.” 
전쟁의 참담함에 자괴감을 느끼고, 깊이 가슴 아파하던 아소카왕은 비구가 된 친동생의 간절한 당부를 듣고 그동안 자신이 저지른 살생에 대해 진심으로 참회한다. 마침내 진정한 불제자로 거듭난 것이다. 그 후 참회를 몸소 실천하기 위해 여러 법령을 제정하고, 이후 불법(佛法)을 따르고자 정진했다. 

| 8만4천 불탑 조성하다

아소카왕은 칙령을 선포하고, 불교의 진리에 입각한 정치를 펼치기 시작했다. 먼저 사냥과 신에게 동물을 바치는 제사를 금지했다. 궁에서마저 일체의 육식이 금지됐다. 왕은 역사상 처음으로 동물보호 및 학대금지 법령도 제정했으며, 동물병원을 세워 인류 최초로 수의사 제도를 만들기도 했다. 또 공공사업을 후원하고, 병원과 고아원·양로원을 세워 전쟁으로 떠돌던 이들을 치료하고 돌보게 했다. 
“앞으로 나는 길을 따라 과일나무를 심어 모든 사람과 짐승들이 배고플 때 먹을 수 있고, 햇빛을 피해 쉴 수 있는 그늘을 만들겠다. 또 일정한 거리를 두고 우물을 파 쉼터를 짓고, 물이 흐르는 곳을 만들어 사람들과 짐승이 이용할 수 있게 하겠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대단하지 않은 업적이다.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이미 예전의 왕들이 그동안 해 왔던 것들이다. 내가 이러한 일들을 시행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진리를 실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아소카왕의 치세로 태평성대를 이루고 있던 어느 날, 왕은 한 스님의 안내로 인도에 있는 부처님 성지를 순례하게 됐다. 부처님 탄생지인 룸비니에 이르러 부처님 탄생이야기를 듣자 아소카왕은 오체투지를 하며 눈물을 흘렸다. 
“나는 지난날의 내 삶을 반성하고, 앞으로 부처님의 정법을 전하기 위해 자비(慈悲)와 보시(布施)의 삶을 더욱더 널리 알리겠다.”
아소카왕은 룸비니와 녹야원 등 가는 곳마다 부처님의 성적(聖蹟)을 기념하는 석주를 세워 부처님을 찬탄했다. 궁으로 돌아온 아소카왕은 ‘근본팔탑(根本八塔)’ 중 7개의 탑 속에 보관된 부처님 사리를 분배해 8만4천기에 달하는 수많은 불탑을 조성했다. 왕은 탑을 세울 때마다 이렇게 서원했다.
“그동안 나로 인해 목숨을 잃은 사람들의 극락왕생을 발원하고, 남아 있는 사람들의 복덕을 발원합니다.”
아소카왕은 인도 대륙은 물론 주변 지역으로까지 불교가 전해지는데 크게 공헌했다. 하지만 그가 저지른 악업은, 그 어떤 공덕으로도 만회할 수 없었다. 친아들은 그가 말년에 맞은 왕비 ‘띠사락쉬따’의 모략에 의해 두 눈을 잃는 고통을 겪어야 했고, 통일제국을 이룩했던 마우리아 왕조는 그의 사후 급속도로 분열돼 약 50년이 지난 후 멸망하고 만다. 

글·   조용주 기자  ggbn@ggb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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