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엔 스스로에게
계획보다 비어있는
시간을 선물하자

새해가 시작될 때마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너무 무거운 짐을 지우는 건 아닐까 생각해본다. 새 달력을 펼쳐놓고 해야 할 일들을 적어나가면서 문득 서글프다. ‘이 과제들을 하나씩 마무리하노라면 또 한 해가 가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하루하루는 새롭고 소중한 시간이거늘, ‘해야 할 일’에 방점을 두다보니 시간의 여유가 있어도 마음의 여유가 없다. 그래서 새해엔 계획보다 스스로에게 비어있는 시간을 선물하고 싶다.

근래 “버리고, 비우고, 지우라.”는 딜리트(delete)의 사유가 회자되고 있다. 많은 지식과 매뉴얼에 길들여진 우리에게 “지우면 누구나 창조자가 되고, ‘딜리트’한 빈자리는 반드시 새로운 것으로 채워지게 된다.”는 무유(無有)의 진리를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무(無)란 아무 것도 없는 게 아니라 모든 것의 근본이라는 〈노자〉의 가르침은 늘 새롭다. 역경에서 맨 먼저 해야 할 일은 잎사귀를 떨고 나목(裸木)으로 서는 일이라 했으니, 나아가기를 멈추고 근원으로 돌아가면 새 생명은 싹트는 법이다.

신영복 선생은 우리말의 ‘없다’가 ‘업다’에서 나온 것이라 보았다. 아기를 등에 업고 있으면 일단 없다. 보이지 않기에 없지만 아기는 든든한 엄마의 등 뒤에 있다. 아기에게 하는 까꿍놀이, 친구들끼리 하는 숨바꼭질도 모두 무와 유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니 우리는 어릴 적부터 ‘없지만 없는 게 아닌’ 무유론(無有論) 교육을 받아온 셈이라 했다. 이렇듯 무와 유는 둘이 아니니, 버리고 비우고 지우는 것만으로도 창조는 이미 시작되는 것이다.

어느 스님이 절 마당에 커다란 동그라미를 그려놓고 동자승에게 말했다.

“마을에 다녀올 테니, 돌아왔을 때 네가 이 원 안에 있으면 종일을 굶게 될 것이고, 원 밖에 있으면 절에서 내쫓아 버릴 것이야.”

동자승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원 바깥에 있자니 쫓겨날 판이요, 원 안에 있자니 하루를 굶게 생겼으니 말이다. 이윽고 몇 시간이 지나 스님이 돌아왔지만 동자승은 굶지도 쫓겨나지도 않았다. 빗자루로 원을 쓱쓱 쓸어서 지워버렸기 때문이다. 원이 없어졌으니 원 안에 머묾도 원 바깥에 머묾도 아니다. 원을 없애자 자유로울 수 있었다.

동자승에게 던져진 화두의 답은 하나가 아닐 수도 있다. 다만 이 이야기에서 동자가 원을 지운 것은 ‘없음(無)을 행한 것(爲)’이라는 점을 새길 만하다. 문제에서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되돌아감으로써 인위(人爲)를 무위(無爲)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노자〉에 ‘그릇은 비어있음으로써 그 쓰임이 있다(當其無 有器之用).’고 하였다. 그릇은 속이 비어야 쓰임이 생기는 것이지, 무언가로 가득 차있으면 존재의 의미를 잃어버린다. 따라서 그릇을 비우는 것이 바로 무위이다.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 동그라미를 그리고, 그 원의 안에 있을지 바깥에 있을지 고민한다. 그 원이 굴레가 되어 나를 얽매이게 하는 건 아닌지 돌아보지 못한다. 채우고 가지는 것보다 비우고 지우는 일이 더 어렵기 때문이다.

‘딜리트’는 단지 복잡한 머릿속을 지우고 창조적인 일을 성취하라는 것이 아니라, 근원으로 돌아가라는 뜻이다. 자칫 방심하여 사바세계의 흐름에 나를 실으면 영원히 스스로의 주인공이 되지 못한 채 흘러 떠내려가고 만다. 근원으로 되돌아가 본래부터 원만하게 갖추어진 내 마음을 찾는 것이 곧 ‘딜리트’가 아니겠는가. 새해에는 우리 자신에게 너무 많은 계획과 의무로 무거운 짐을 지우지 말고, 용기를 주는 나날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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