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이지신 중 해신(亥神). 통도사성보박물관 소장.

영특한 동물 묘사, 다산과 제물의 상징

십이간지(十二干支) 마지막에 해당하는 돼지는 옛날엔 ‘돝’ 또는 ‘도야지’로 불렸다. 한자어로는 ‘돈(豚)’ 이외에도 ‘저(猪)’·‘시(豕)’·‘체()’·‘해(亥)’ 등이 있다. 인류 역사에 있어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일찍부터 제전(祭典) 때 희생된 대표적인 동물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돼지는 예로부터 희생양, 즉 제물로 쓰였다. 오늘날에도 무당이 큰 굿을 하거나 동제(洞祭, 마을을 지켜주는 신에게 지내는 제사)를 지낼 때 돼지를 제물로 쓰고 있다. 뿔이 있는 소가 하늘에 지내는 제물이라면, 돼지는 지신(地神)에게 바치는 제물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고구려 유리왕 19년 때 유리왕이 제사에 쓰려고 탁리와 사비로 하여금 돼지를 잡아오도록 했으나 생포하지 못한 채 죽은 돼지를 가져오자 왕은 ‘하늘에 제사할 짐승을 어찌 함부로 상처를 입히느냐?’며 두 사람을 죽였다고 전한다. 이에 설지라는 신하에게 다시 명령했고, 그가 위나암이라는 곳에서 사육하는 돼지를 바쳤다. 왕은 이후 도읍을 그곳으로 옮겼다. 교시라고도 한 성스러운 돼지에 대해 고구려 사람들이 얼마나 신성하게 여겼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돼지에 관한 속신(俗信, 민간의 미신적 신앙관습)도 많다. “임신 중인 여자가 돼지고기를 먹으면 아이의 피부가 거칠고 부스럼이 많다.”거나 “돼지꼬리를 먹으면 글씨를 잘 쓴다.”는 게 대표적이다. 특히 “꿈에 돼지를 보면 복이 오고 재수가 있다.”고 해서 돼지꿈을 꾸게 되면 지금도 복권을 산다는 사람들이 많다. 돼지를 돈과 연결시키기도 하는데 이것은 돼지가 4개월이란 짧은 임신기간에 비해 10여 마리씩 새끼를 낳는 다산의 특성 때문이다. 또한 돼지를 지칭하는 한자의 음인 ‘돈(豚)’이 한글로 화폐를 의미하는 돈과 동일하기 때문이라는 풀이도 있다.

그렇다면 불전(佛典) 속에 등장하는 돼지는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돼지는 코끼리·사자·원숭이 등에 비해 등장 빈도가 거의 없다. 〈본생담〉과 〈중아함경〉에 등장하는 돼지는 배경은 다르나 내용은 비슷하다.

먼저 〈본생담〉에 나오는 ‘들돼지의 전생이야기’다.

설산 지방의 어느 굴속에서 보살이 사자로 살고 있을 때였다. 굴 가까이에는 호수가 있었다. 그 호숫가에는 많은 들돼지가 살았다. 호숫가 인근에는 고행자들이 초막을 짓고 수행하고 있었다. 어느 날 사자는 물소 한 마리를 잡아먹고 호수에 내려가 물을 마셨다. 그때 들돼지 한 마리도 호숫가에서 먹이를 찾고 있었다. 사자는 들돼지를 보자 이런 생각을 했다. ‘언젠가 배가 고플 때 저놈을 잡아먹자. 그런데 저놈이 지금 나를 보면 다시는 호숫가로 오지 않을지 몰라.’ 사자는 이렇게 생각하며 들돼지를 못 본 체했다. 그리고 호수의 다른 쪽으로 갔다. 이런 사자를 보고 들돼지는 사자가 자기를 두려워하는 줄 알았다. 들돼지는 사자와 한 번 맞붙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사자여, 나도 네 발을 가졌고, 너도 네 발을 가졌다. 왜 도망가는가. 오너라, 사자여. 돌아오너라, 사자여. 왜 나를 두려워해서 달아나느냐?”

사자는 기가 막혔다. 돼지의 말이 가소롭기는 했지만 다시 또 모른 척하고 입을 열었다.

“들돼지여, 나는 오늘 그대와 싸우고 싶지 않다. 지금부터 이레 되는 날 지금 이 장소에서 만나 싸우자.”

들돼지는 사자와의 싸움 약속을 친구들에게 자랑했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친구들은 몹시 두려워했다.

“넌 지금 우리 모두를 멸망시킬 작정이냐? 너는 네 힘도 모르고 정말 사자와 싸울 작정이냐? 사자는 우리를 모두 죽일 것이다. 제발 그런 경솔한 짓은 하지 마라.”

친구들의 충고를 들은 들돼지는 그제서야 두려움에 온몸이 벌벌 떨렸다. 들돼지는 죽을 상이 되어 친구들에게 어떻게 하면 좋을지 의견을 물었다. 한 친구가 들돼지에게 말했다.

“너는 지금부터 저 고행자들의 변소에 들어가 이레 동안 뒹굴다가 나와 몸을 말리고, 이레째에는 이슬에 몸을 적셔 사자가 오기 전에 바람이 불어오는 맞은편에 서 있어라. 그렇게 하면 깨끗한 것을 좋아하는 사자가 네 몸의 냄새를 맡고 네 곁을 떠날 것이다.”

들돼지는 친구들이 시키는 대로 한 뒤 사자를 만났다. 그러자 사자가 들돼지 몸에서 나는 더러운 냄새를 맡고는 한 발 물러서면서 말했다.

“네가 교묘한 계략을 생각해 냈구나. 만일 네가 똥을 뒤집어쓰지 않았더라면 너는 지금 이 장소에서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네 몸은 입으로 물 수도 없고 발로 찰 수도 없을 만큼 더럽다. 너에게 승리를 양보하마.”

〈중아함경〉에도 이와 비슷한 설화가 보인다. 어느 돼지왕이 500마리의 돼지를 거느리고 길을 가다 호랑이를 만났다. 돼지왕은 호랑이를 보고 생각했다. ‘만일 호랑이와 싸우게 되면 내가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고, 그렇지 않고 도망가면 돼지들이 나를 업신여기게 될 것이니, 어떤 방편을 써서 이 위기를 벗어날까?’ 돼지왕은 즉시 자기들이 배설해놓은 똥무더기에 들어가 온몸을 굴렀다. 그리곤 호랑이에게 말했다.

“자, 싸우고 싶거든 어서 오너라. 만일 싸우지 않겠거든 어서 내게 길을 비켜다오.”

호랑이가 돼지왕에게 말했다.

“나는 너에게 길을 비켜주겠다. 싸우고 싶지 않구나.”

호랑이를 물리친 돼지왕은 500마리의 돼지들을 이끌고 다시 길을 나섰다.

흔히 돼지를 탐욕의 상징으로 인식하는 것과 달리 경전에서는 위기를 모면하는데 기지를 발휘하는 영특한 동물로 묘사되고 있다. 또 배짱 있는 동물로도 표현된다.

〈수마제녀경〉에서는 돼지를 닭·개·양·나귀·노새 등과 같은 낮은 부류로 취급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수마제녀가 이교도의 집안과 결혼하게 되었는데 시아버지가 육천범지에게 예를 갖출 것을 요구하자 이를 거절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두 가지 인연이 있어야 세상 사람이 존귀하게 여기나니, 이른바 ‘참()’과 ‘괴(愧)’가 있어야 한다. 만일 이 두 가지 일이 없으면 부모·형제·종족·5친의 존비고하를 분별할 수 없어 저 닭·개·돼지·양·나귀·노새와 모두 동류이어서 높고 낮은 것이 없게 된다. 세상에는 이 두 가지 법이 있으므로 존귀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이 두 법을 떠나서 닭·개·돼지·양·나귀·노새와 같은 무리에 속하니, 실로 그들에게 향하여 예를 갖출 수는 없습니다.”

닭·개·돼지·양·나귀·노새는 참()과 괴(愧)가 없는 천박한 동물이란 얘기다.

〈범망경보살계본〉에서는 돼지의 거래와 축산을 금지하고 있다. 이 경 제12 ‘나쁜 마음으로 장사하지 말라’는 계율은 “불자들아, 너희는 양민이나 종, 그리고 여섯 가지 짐승을 사고팔지 말며, 관(棺)과 관을 만드는 관자와 시체를 담는 기구를 팔지 말라. 보살은 이와 같은 것을 만들거나 팔지도 말아야 하거늘 하물며 다른 사람에게 시켜 만들고 팔게 하겠는가. 만약 짐짓 스스로 만들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만들게 하면 가벼운 죄가 되느니라.”고 했다.

또 제32 ‘중생을 해롭게 하지 말라’에서는 “고양이·살쾡이·돼지·개 따위를 기르지 말아야 한다. 만약 짐짓 그러한 일을 하면 가벼운 죄가 된다.”고 했다. 이는 다른 짐승을 잡아먹거나 또 잡아먹기 위해서 키우는 동물에 대해 기르는 것을 제한하고 있는 계율이다. 중생을 해롭게 하지 말라는 부처님의 애정이 담긴 제재조항인 것이다.

과거 그리스와 로마인들은 자연의 풍요와 비옥함을 기원하거나 감사할 때 신에게 바치는 동물로 돼지를 사용했다. 이와 별개로 로마인들은 멧돼지나 들돼지를 용기하고 대담무쌍한 동물로 인식했다. 자신이 위험할 때만 공격하는 성향 때문이다. 또 그리스인들은 돼지의 피로 살인범의 피를 정화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스와 로마인들이 돼지를 이처럼 용기·자신감·정화 등 선의(善意)의 상징으로 여겼지만 기독교와 이슬람교에선 악(惡)의 상징으로 치부한다. 일단 돼지를 근본적으로 더럽고 불결한 동물로 인식한 탓이다. 이는 이슬람 경전인 〈코란〉에 나오는 “너희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이 있으니, 죽은 고기와 피와 돼지고기와 알라의 이름으로 도살되지 않은 고기와 …… 이것들은 불결한 것이니라.”라는 구절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중국에서는 돼지가 행운의 상징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에서도 돼지는 행운을 안겨주는 복덩어리로 여긴다. 특히 돼지를 꿈속에서 만나면 횡재한다고 생각한다. 돼지가 저금통의 상징이 된 것은 동음이의어(同音異意語)로 인한 착각 때문이다. 본래 그리스인들은 서유럽 점토의 일종인 ‘피그(pygg)’라는 점토로 만든 그릇에 돈을 모았다. 그러다가 19세기 어느 은행에서 판촉 상품으로 고객들에게 나눠줄 저금통을 만들었는데 도예장인에게 “피그(pygg) 점토로 만들어 달라.”고 주문했다. 그런데 이 주문을 도예장인이 잘못 알아듣고 ‘피그(pig)’, 즉 돼지 모양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이후 저금통은 대부분 돼지 모양으로 만드는 게 일반화되었다.

밀양 표충사 추녀마루 저팔계잡상. 통도사성보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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