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 해외구호활동 현장리포트(275호)

하루평균 150명이 넘는 사람들이 지이바카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치료를 위해 줄을 서 있는 주민들.

JTS는 ‘Join Together Society’의 약자다. 풀이하면 어려운 이웃을 돕고자 하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 만나 인종ㆍ종교ㆍ민족ㆍ성별ㆍ사상ㆍ이념에 관계없이 작은 힘을 함께 모아 협력하여 일해 가고자 하는 모임이다.

인도 JTS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6년간 고행하셨던 전(前) 정각산 아래 15개 마을을 대상으로 교육ㆍ의료ㆍ마을개발ㆍ긴급구호 사업을 펼치고 있다. 이곳은 부처님 재세 시에 시체를 갖다 버리던 곳이다. 그래서 ‘버려진 땅’이란 이름 ‘둥게스와리’라고 불린다. 이곳 주민 80%는 만지면 더러워진다는 불가촉천민이다. 법적으로 카스트제도가 폐지되었고, 공무원의 30% 정도 천민을 대상으로 선발하는 제도를 시행하고 있지만, 여전히 같은 계급의 카스트끼리만 결혼을 한다. 또 양민마을에서는 천민마을 사람들과 같은 물을 마실 수 없다며 물길을 막아 버리는, 믿을 수 없는 일이 여전히 일어나고 있다.

둥게스와리는 가야시에서 차로 40분 정도 들어가야 한다. 복잡하고 시끄러운 시내와 달리 전정각산을 기둥 삼아 자리 잡은 15개 마을은 만 명이 조금 넘는 사람들이 사는 한가롭고 평화로운 곳이다. 전기가 들어온 지는 3년이 채 안 되었고, 그나마 불안정해 등불을 같이 써야 한다. 벽돌집과 2층집도 간혹 있지만 대부분 흙으로 지은 집과 볏짚으로 지은 집이고, 가족이라고 하기에 민망한 대가족들이 살고 있다.

지이바카 병원 의료진들은 일주일에 두 번, 낡은 구급차에 약품을 싣고 산넘어 마을로 가 이동진료를 실시한다.

아이들 교육 위해 맨땅에 학교 세워
콜레라 발병 계기로 교내에 병원 개원

1994년 전 정각산에 오르는 길에는 구걸로 생계를 이어가는 둥게스와리 주민들이 많았습니다. 끝없이 이어진 구걸 행렬에는 엄마 따라, 친구 따라온 어린 아이들도 많았습니다. ‘왜 학교에 가지 않느냐?’는 물음에 ‘학교가 없어 가지 못한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학교가 생기면 공부를 하겠느냐?’고 물었더니 ‘공부를 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처음엔 학교에 가고 싶다는 아이들과 나무 그늘 아래에서 야외수업을 했습니다. 문맹률이 90% 이상이던 곳, 자식에게 글을 가르치고 싶은 건 세상 모든 부모의 마음입니다. 주민들에게 땅을 기증받고, 같이 땅 파고 벽돌을 날랐습니다. 그렇게 1995년 1월 수자타 아카데미(초 · 중학교)가 정식으로 문을 열었습니다.

그해 6월 마을에 콜레라가 발생해 휴교령을 내리고 정부의 도움을 받아 학교에서 주민들을 치료하였습니다. 콜레라가 잡히고 학교는 정상적으로 운영되었는데, 이후 둥게스와리 주민들이 아플 때마다 학교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학교 건물의 한쪽을 내어 의료서비스를 제공하기 시작했고, 2001년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지원을 받아 ‘지이바카 병원’을 지었습니다. 개원 18년이 되는 이 병원은 현재 마을 사람들에게 기본적인 치료서비스를 안정적으로 제공하는데 그치지 않고 건강한 삶을 위한 여러 가지 지원 사업을 해 나가고 있습니다.

매일 오전 8시가 되면 병원 앞에 하나둘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합니다. 진료는 ‘알로팩틱’과 ‘호모팩틱’ 각각 1명의 의사가 맡습니다. 알로팩틱이 양방이라면 호모팩틱은 우리나라 한방의 개념입니다. 천연물질을 약으로 삼아 치료하는 호모팩틱은 유럽에서도 각광 받는 치료법으로 인도에서는 진료비가 꽤 비싼 편입니다. 그래서인지 다른 지역에서 3시간씩 기차를 타고 오기도 합니다. 당장 효과가 나타나는 양방과 달리 3개월에서 6개월의 시간이 걸리지만, 병이 치유되면 다시 아프지 않다고 말합니다.

병원에서는 두 분의 현지 의사가 교대로 자원봉사를 해주고 있습니다. 양방 파트는 정식의사는 아니지만 ‘로컬닥터’라고 해서 현지인에게 인정이 되는 의사선생님입니다. 물론 진료의 한계는 있습니다.

양방을 맡고 있는 까미스와르 씨는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부터 시작했으니, 인도 JTS 초창기부터 함께 해온 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양방은 기본적인 상처 드레싱부터 우기철 곪고 부스러기가 나는 환자들의 종기를 짜 내는 수술까지 합니다. 더운 날씨에 힘없이 쓰러지는 노약자들에게 링거는 큰 도움이 됩니다. 환경이 열악하다보니 열이 나는 환자와 배가 아픈 환자들이 많습니다. 공동우물에서 물을 길어다 쓰는데, 물을 끓여서 마실 형편이 못됩니다. 게다가 이곳은 화장실이 있는 집보다 없는 집이 더 많으니 배가 아픈 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전기가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전기에 의한 화상 환자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정식 의사는 아니지만 현지인에게 인정되는 로컬닥터가 마을 주민의 혈압을 재고 있다.

돈 없어 진료 받기 힘든 주민들
무료 치료ㆍ이동 진료로 보살펴

어느 날 엄지와 검지의 절반이 잘리고, 가슴에 손바닥 크기의 화상을 입은 남자분이 왔습니다. 처음 상처를 봤을 때는 아연실색했습니다. ‘큰 병원에 가야 할 것 같은데.’, ‘소독하고 연고만 바를 수 있는 이곳에서는 어떻게 할 수 없을 거 같은데.’ 등 부정적인 생각들만 떠올랐습니다. 그런데 까미스와르 씨는 태연하게 ‘괜찮다.’고 했습니다. ‘할 수 있냐?’는 물음에 ‘문제없다.’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큰 병원에 가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더니 그가 한 말은 한 마디였습니다. “그는 돈이 없어요.” 물론 100% 정부 지원으로 이루어지는 병원을 찾아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없이 기다려야 하는 긴 줄과 이동 경비를 생각한다면 여기가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환자의 녹아내린 손가락은 조금씩 아물기 시작하더니 속살이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가슴 쪽 화상을 치료할 때는 죽은 세포들을 조금씩 떼어내는 고통을 견디어 주었습니다. 치료 받는 동안 비명 한마디 없이 고개를 돌려 무릎에 얼굴을 기댄 게 아픔을 표현한 전부였습니다. 아무 말 없이 손을 잡고 옆에서 지켜보던 부인의 시선, 그 무표정한 얼굴을 잊을 수 없습니다. 이 환자는 매일 부인과 산을 오르며 두 달 가까이 치료를 받았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치료가 이루어졌다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을 테지요.

8시 반부터 진료를 시작하는데, 점심 전까지 많은 사람들로 북적입니다. 이곳은 날씨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사람들은 갑자기 날씨가 더워지거나 추워질 때, 계속되는 더위나 추위, 우기 등 날씨 변화에 따라 열나고, 배 아프고, 눈병 나고, 토하고, 어지러움을 호소합니다. 농번기나 비가 올 때는 100명이 안 될 때도 있지만 하루 평균 160~170명이 병원을 다녀갑니다.

일주일에 두 번 낡은 구급차에 약품을 싣고 구불구불 울퉁불퉁한 도로를 따라 산 넘어 마을에 가기도 하고 비교적 가까운 마을도 찾아갑니다. 걸어서 1시간 정도 걸리는 병원까지 오기가 불편한 노약자, 아이들을 위해서입니다. 구급차가 도착하면 동네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와 한 발 떨어져 구경을 합니다. 지나갈 때는 웃으면서 따라오고, 손을 흔들며 ‘바이 바이’를 외치는데 가까이 가면 쑥스러워 합니다. 웃으며 ‘나마스테(안녕)’라고 하면 그때서야 웃으며 모여듭니다. 짐 내리는 것도 도와주고 졸졸 따라 다닙니다. 아이들에게 위생교육에 관한 영상을 보여주고 다른 한편에서는 이동진료를 시작합니다. 간이책상을 펼치고 약통 상자를 준비하면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합니다. 아이를 업거나 손잡고 오는 엄마들도 많습니다. 구부정한 몸으로 천천히 걸어오는 노인들, 어디서 이 많은 사람들이 나오는지 특별한 정보 없이 마을을 찾아가도 이동진료소가 차려지면 그곳은 간이병원이 됩니다.

높은 영아사망률, 저체중아 지원 사업도
현지인 “어릴 때부터 받은 지원에 감사”

이 지역은 영아 사망률이 높아 2010년 처음 저체중아 지원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올해 15개 마을 0세에서 3세까지 아이들에게 677개의 쿠폰을 지급해 510명이 검진을 통해 지원을 받았습니다. 마을에 찾아가 엄마 품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울어대는 아이들을 어르고, 낯선 저울에 올라가는 것을 두려워하는 아이들을 비스킷으로 달래 키와 몸무게를 잽니다. 그리고 영양 상태에 따라 비타민 · 쌀 4kg · 콩 2kg · 비스킷 · 기름 등을 한 달에 한 번씩 지원합니다. 한 번만 지원하기도 하지만 많게는 6회에 걸쳐 지원합니다. 드물게 한 집에 두세 명이 한꺼번에 지원을 받기도 합니다. 대식구인 경우 아이에게 온전히 돌아가는 건 비타민 시럽뿐일지도 모르겠지만 다같이 먹는다 해도 아이들의 건강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모든 지원은 병원에서 이루어지는데, 지원 전에 위생교육이나 그때그때 필요한 콜레라 · 말라리아 · 결핵 등 의료 정보도 알려 주고 있습니다.

저체중아 지원과 함께 임산부 때부터 관리하면 저체중아 비율이 낮아지지 않을까 생각해 임산부 지원도 시작했습니다. 조혼으로 인해 첫 아이를 낳는 산모의 나이는 어릴 경우 17세입니다. 어른인지 애인지 구분이 안 가는 자그만 한 체구로 임신을 하다 보니 산모의 건강뿐 아니라 아이도 건강하지 못한 악순환이 생깁니다. 병원에 가서 임신 진단을 받지 못해 정확한 임신 주기를 알지 못하지만 예상되는 개월수에 맞춰 칼슘과 철분제 · 곡물 그리고 출산 후에 필요한 비누와 세제를 지원합니다. 상황에 따라 분유도 지원합니다.

매주 결핵환자 영양식 지원, 매달 이루어지는 저체중아 · 임산부 지원은 이곳 주민 건강에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결핵 환자 수는 줄어들고 있고, 저체중아 비율도 점점 낮아지고 있습니다. 10~20년 전에 비하면 살 만해졌다고 말하지만 여전히 가난한 이들은 배가 고프고, 몸이 아파도 돈이 없어 병원에 가지 못합니다.

어디나 아이들은 잘 웃고 그 모습이 천사 같지만, 여기 마을에서 만나는 아이들은 더욱 그러합니다. 마을을 지나갈 때 여기저기서 들리는 “나마스테 시스터(안녕 누나)”. 꼬맹이들의 목소리는 마음을 따뜻하게 합니다. 힌디어를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 같이 알아듣는 인도 스텝들. 자주 바뀌는 한국봉사자들에 맞춰 일하는 게 쉽지 않을 텐데 특유의 느긋함으로 손발을 맞추어 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현재 수자타 학교와 병원, 마을 개발을 위해 일하는 인도인들은 40여 명입니다. 대부분 유치원부터 인연이 되어 대학 학비를 지원 받았고, 졸업 후 지금은 여러 파트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2년 전 각 팀의 팀장이 한국인에서 인도인 체제로 바뀌었습니다. 이들이 사업을 계획하고 진행해 갑니다. 어릴 때 받았던 고마움을 얘기하며 자신의 삶을 나누어 주는 이들이 있어, 우리는 함께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함께 하는 인연에 감사하며 배고픈 사람은 먹을 수 있기를, 아픈 사람은 치료받을 수 있기를, 그리고 둥게스와리 아이들이 배움을 통해 세상에 도움 주는 사람으로 성장해 갈 수 있기를 바라봅니다.

아이를 낳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가 세상을 떠났다. 자이바카 병원은 이들을 위해 분유 지원을 하고 있다.
지이바카 병원 관계자들과 필자)뒷줄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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