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명강연(274호)

세계적인 종교학자이자 종교비평가
카렌 암스트롱(Karen Armstrong)은?

 

영국의 종교학자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종교문제 비평가로 꼽힌다. 1944년 영국 워체스터에서 태어났다. 1962년 수녀로 로마가톨릭에 귀의했다. 그러나 수녀원의 엄격한 규율 등에 실망해 7년 만에 환속했다. 이후 옥스퍼드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1982년부터 작가와 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다.

그녀는 종교와 문화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통찰을 바탕으로 기독교 중심의 유럽 문명사에 매우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전달해왔으며, 기독교뿐만 아니라 유대교 · 이슬람교 · 불교에 대해 해박한 지식과 편견 없는 자세를 견지하고 있는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 저서로 〈신을 위한 전쟁〉, 〈예루살렘〉, 〈신의 역사〉, 〈좁은 문을 통하여〉, 〈부처〉 등이 있으며, 이 저서들은 45개 언어로 번역되어 전 세계에 종교 제도와 문명에 대한 큰 반향을 일으켰다.

2008년에 그간 종교적 자유를 위해 활동한 업적을 인정받아 ‘루스벨트 4대 자유메달’을 받았고, 같은 해에 ‘널리 퍼뜨릴 가치가 있는 생각’을 주제로 한 강연으로 유명한 TED로부터도 상을 받았다. TED상 시상식에서 그녀는 각자의 마음속에 자비를 회복시킬 것을 호소하고, 〈자비의 헌장 Charter for Compassion〉 프로젝트를 제안해 현재까지 지속적으로 진행해나가고 있다.

이 내용은 2010년 4월 미국 맨해튼에서 ‘현대 사회의 종교와 윤리’를 주제로 한 강연이다.

저는 2008년에 미국의 비영리재단이 운영하는 TED Technology, Entertainment, Design상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상금과 함께 저의 소망 한 가지를 실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TED는 2005년부터 매년 수상자가 원하는 한 가지 캠페인을 지원해오고 있다.) 세계의 종교에 대해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평소 저는 종교가 시대의 과제를 해결하는데 기여하지 못하고 오히려 문제의 일부라 여겨지는 점이 무척 답답했습니다.

오늘날의 주요 과제 중 하나는 바로 ‘글로벌 커뮤니티’를 만드는 일입니다. 이념과 인종이 다른 사람들이 상호존중과 조화 속에 살 수 있는 공동체를 이루는 일은 우리 시대의 중요한 과제입니다. 이와 같은 공동체를 이루는데 실패하면 다음 세대에게 제대로 된 세상을 물려줄 수 없을 것입니다. 예전에는 국가에서나 행사할 수 있었던 규모의 파괴력을 점점 작은 단체들이 행사하는 오늘, 우리는 큰 난관에 봉착해 있습니다.

카렌 암스트롱은 2017년 10월 스페인 국왕 펠리페 6세로부터 ‘아스투리아스 어워드’를 수상했다.이 상은 과학 · 예술 · 문학 · 인문 · 스포츠 분야에 중요한 업적을 남긴 인물이나 단체에 수여하는 상이다.

자비 베풀지 못하면 그릇된 신앙

세계의 모든 주요 신앙체계는 소위 ‘황금률’(종교로써의 근본 원리)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그렇게 대접받기 싫으면 타인도 그렇게 대하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유대교의 대학자이자 성인으로 추앙받는 랍비 히렐과 관련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종교를 신앙하지 않는 한 사람이 “만약 랍비 히렐이 한쪽 다리로 선 채 유대교의 가르침을 모두 읊으면 유대교 신자가 되겠노라.”고 말하자 랍비 히렐은 한 다리로 서서 “‘내가 싫은 일을 타인에게 저지르지 마라.’ 이것은 토라Torah(유대교의 율법)입니다. 다른 것들은 부차적 해설일 뿐이지요. 이 한 마디를 공부하십시오.”라고 말했답니다. 얼마나 대담한 발언인가요? 의도적이고, 도발적이기까지 합니다. ‘신의 존재’, ‘천지창조’, ‘613 계명’ 등은 전혀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것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닙니다. 세계의 다양한 종교는 각각의 모습이 다르지만, 그 신앙을 바탕으로 실질적으로 자비를 베풀지 못한다면 그 신앙심에는 문제가 있다는 뜻입니다.

제가 TED 수상 기념 캠페인으로 ‘자비를 위한 헌장The Charter for Compassion’을 만들기로 결정한데에는 계기가 있었습니다. 미국 · 유럽 · 중동 어디를 가나 사람들은 조금 더 자비로운 종교에 배고파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종교 지도자들이 모이면 교리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뿐이었습니다. ‘자비를 위한 헌장’은 다시 황금률과 자비를 종교의 중심에 세우기 위한 캠페인입니다. ‘자비’(Compassion)라는 단어를 잘 쓰지 않아서, 사람들은 이제 ‘자비’가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합니다. 단순히 타인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라고 생각하더군요.

카렌 암스트롱은 2009년 5월 독일 튀빙겐 대학교에서 레오폴드 루카스상을 수상했다. 카렌 암스트롱이 수상 후 기자회견에서미소 짓고 있다.

몇 년 전 네덜란드에서 강연을 할 기회가 있었는데, 자비는 ‘타인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아니다.’라고 분명히 말했는데도 강연 후 신문기사를 보니 자비가 동정심 또는 긍휼 矜恤, Pity로 번역되어 있었습니다. 자비는 ‘스스로를 들여다보며 개인이나 사회가 나에게 준 고통을 발견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타인에게 같은 고통을 주지 않으려는 굳은 마음’입니다.

공자가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제 생각에는 공자가 황금률을 만든 창시자인 것 같습니다. 공자의 모든 가르침에는 황금률이 녹아들어 있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을 우리는 세계에 적용해야 합니다.

혹자는 제가 이미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쉬운 설교를 한다고 말합니다. 비유하자면, 목사가 성가대원들을 대상으로 설교하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저는 기꺼이 성가대원들에게 설교하고자 합니다. 성가대원들은 찬송가를 부르며 자비의 힘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물론 그렇겠지요. 누구인들 자비의 힘을 믿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들은 실질적으로 실천하고 있는 것이 있나요? 침묵을 지키고 있는 다수의 종교인들이 (종교적 가르침을) 실천한다면 우리는 세상을 바꿀 수 있고, 각종 매체에서 들려오는 공격적이고 극단주의적인 목소리를 잠재울 수 있을 것입니다. 글을 쓰는 작가도, 종교인도, 사업가도, 교사도, 부모도, 식당 종업원도 세상을 조금 더 자비롭게 만들기 위해 함께 힘써야 합니다.

누군가 나의 전통을 모욕하는 것이 싫으면, 나도 다른 사람의 전통을 경솔하게 모욕하지 않아야합니다. 불의나 잔혹함에 대해 목소리를 내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저는 관용 Charity에 대해 성 바울 사도가 한 말씀을 점검표로 활용해 볼까합니다. 성 바울 사도는 “관용은 기다려줄 줄 아는 어진 마음이다. 거만하게 나를 부풀려 보이지 않아야한다. 싫어하는 사람을 비난할 때, 간혹 상대를 비판했다는 자찬에 취해 들떠 있는 사람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관용은 타인의 잘못에 희열을 느끼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타인의 잘못에 대해 이야기할 때 기쁨에 차 입맛을 다시기도 하고, 타인이 저지른 과오를 자신이 더 나은 사람으로 보이기 위한 수단으로 삼기도합니다.

종교의 자비로움을 끌어내라

팔리어 경전을 토대로 붓다의 삶을 재구성한 책 〈Buddha〉.
이 책은 2003년 국내에〈스스로 깨어난 자 붓다〉로 소개됐다.

더 이상 이렇게 살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카렌 암스트롱 자비를 말하다 : TED상 수상자가 제안하는 더 나은 삶에 이르는 12단계〉(원제 ‘Twelve Steps to a Compassionate Life’)라는 책을 썼습니다.

우리는 알코올 중독자처럼 자신의 호불호를 너무나 강하게 드러냅니다. 증오[不好]의 대상이 없으면 어찌해야 할 바를 모릅니다. 우리는 스스로의 자아를 내세우기 위해 개인 · 국가 · 문화 · 종교분야의 ‘적’에게 의존합니다. 타인에 대해 나쁜 이야기를 할 때, 알코올 중독자가 첫 잔의 술을 마셨을 때 느끼는 짜릿함 같은 것을 느낍니다. 그렇지만 술이 몸을 망가트리는 것처럼 타인에 대한 독설도 나를 망치고, 결국 모두를 망칩니다. 이것은 반드시 고쳐나가야 합니다. 그저 이상주의적인 생각이 아닙니다. 반드시 이루어 내야 할 이 시대의 과제입니다. 종교의 자비로움을 다시 끌어내지 못하면, 우리 전통은 이 시대의 과제를 해결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실 저 역시 종교를 자비와 연관 지어 생각하지 않았었습니다. 사랑과 관용에 대한 종교 문헌과 서적이 잔뜩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요. 사람들은 늘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저는 종교가 참 불친절하다고 느꼈습니다. 제가 받은 수녀 교육은 예비 수녀들을 강하게 만드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습니다. 수녀원은 꼭 신병훈련소 같았습니다. 친구도 사귈 수 없었고, 서로에게 차가운 존재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만뒀습니다. 수녀원이 잘못되었다는 게 아니고, 그 당시 교육방식이 그랬는데 저에게는 맞지 않았다는 겁니다. 수녀원을 떠나서 보니 성직자들은 항상 무언가 또는 누군가를 규탄하고 있었다는 걸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우리는 (저런 행동에) 공감하지 않는다!”는 말을 즐겁게 외쳤습니다. 마치 자랑스러워할만한 일인 것처럼. 저는 점점 기도하는 것조차 제대로 못하게 되었고, 결국 종교와 관련된 모든 수행을 그만두었습니다.

수녀원을 떠난 저는 영문학 교수가 되려는 꿈을 품었으나 박사학위를 취득하는데 실패했습니다. 그 후 교사가 되었으나 간질 증상 때문에 고초를 겪었습니다. 그런데 좌절감을 느껴 본 경험이 저에게는 오히려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저는 타인이 좌절하는 모습을 보면 어떤 기분인지를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고통을 느낍니다. 그런데 그 고통의 순간이 인류를 하나로 엮어줍니다. 우리의 공통분모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경험에 대해 불평만 하지 말고 타인의 절망을 이해하는데 자신의 경험을 적극 활용해야 합니다.

뉴스에 나오는 단편적인 소식을 넘어서는 시야를 가지도록 노력하길 바랍니다. 각 나라의 많은 사람들은 지도자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그 나라에 갇혀 삽니다. 인생이 어떻게 풀릴지 선택할 수 없듯이 그 사람들도 자신의 상황을 선택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모멸감을 느끼며 고통과 공포 속에서 살아갑니다. 우리는 타인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 사람은 이게 문제야.” 등 마치 다 안다는 듯이 이야기합니다. 마치 한 존재의 신비함을 나의 편협한 견해를 통해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는 듯이 말합니다. 만약 같은 행동을 한 문화권 전체를 대상으로 이런 행동을 했다고 생각해보세요. 제각각 고통의 역사를 가진 수백만 명이 속한, 다양한 면모를 가진 문화권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는 게 가능한가요? 그래서 우리는 뉴스 헤드라인 이면의 사태를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나 자신의 경험 · 고통 · 오해 · 무력함 · 절망 · 고통을 활용해야 합니다. ‘내가 적이라고 여기는 사람도 나와 같다.’[自他不二]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타인과 나의 고통을 이해하고 나의 무지를 인정하는 것은 진정한 용기입니다. 인류는 무지합니다. 20세기 초에 과학자들은 자신 있게 예언했습니다. 뉴턴 역학체계에서 해결되지 않는 열 가지 정도의 큰 문제만 해결하면 인류는 세상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런데 20년 후에 아인슈타인이 나타났고, 미지의 은하계가 무수히 존재함을 밝혀냈습니다. 어떤 분야에 대한 연구가 심화될수록 우리가 몰랐던 것이 얼마나 많은지를 새삼 알게 됩니다.

제가 신의 역사에 대해 연구하고 있었을 무렵, 무척 반가운 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위대한 신학자들은 모두 우리가 생각하는 신의 관념이 결코 그 실체에 다다를 수 없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종교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하는 언어는 사실 신비한 무언가를 들여다보기 위한 상징일 뿐입니다. 좋은 신학은 우리가 무지를 인식하도록 인도해야 합니다. 공연을 보러 가면 가끔 합주가 막 끝나고 청중의 박수소리가 나오기 직전에 한 박자 정도의 고요함이 콘서트홀에 감돕니다. 아주 강력하고 충만한 순간입니다. 훌륭한 신학은 우리를 바로 이런 순간 속에 살 수 있도록 도와야합니다.

다른 종교 배척은 무지에서 기인

카렌 암스트롱은 종교의 실천을 강조한다. ‘더불어 잘 사는 행복공동체를 위한 12단계 실천 프로젝트’를 제안한 그녀의 저서〈Twelve Steps to a Compassionate Life〉. 국내에는 2012년 〈카렌 암스트롱 자비를 말하다〉로 소개됐다.

12세기 이슬람 수피 Sufi 철학자가 한 말이 있습니다. 수피교도들은 다른 종교를 아주 존중하는데, 이런 내용입니다.

“내가 가진 신앙을 지나치게 추앙한 나머지 다른 신앙체계를 못 믿게 되면 안 된다. 그러면 중요한 것을 잃을 것이다. 세상의 진실을 이해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전지전능한 신은 어떤 한 가지 신념으로 한정될 수 없다. 〈코란〉에 보면 ‘어느 쪽을 바라보든, 알라의 존재가 있다.’ 라는 말이 있다. 누구든 자기가 아는 것을 추앙한다. 자신의 신은 본인이 만들어 낸 것이다. 결국, 자기 자신의 신앙을 추앙하는 것은 스스로를 추앙하는 일인데, 제대로 된 신도는 이러한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다. 다른 전통을 싫어하는 것은 무지에 기인한 것이다.”

특히 기독교 신도들은 ‘믿음’에 중독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종교인을 ‘어떤 종교를 믿는 사람’으로 정의합니다. 그런데 믿음이라는 단어는 상당한 의미 변화를 겪었습니다. 원래 영어에서 ‘bileven’(‘믿다’는 의미인 believe의 고어체)의 의미는 ‘사랑하다’였습니다. 독일어 ‘리베 liebe’ 및 라틴어 ‘리비도 libido’와 관련된 단어입니다. 영국 국왕 제임스 1세(1566~1625)의 지시 하에 〈신약성서〉를 번역하면서 원전에서 그리스어 ‘피스티스Pistis, Πίστις’를 ‘bileven’으로 번역한 것이 이 단어가 종교적 믿음과 관련지어진 시초입니다. 그런데 피스티스는 ‘믿다’인 ‘bileven’과는 의미가 다릅니다. 그리스도는 ‘믿음’을 원했던 것이 아닙니다. 교리를 받아들이라는 뜻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한 ‘헌신과 충심’을 원했던 것입니다. ‘bileven’은 17세기 후반이 되어서야 ‘교리를 받아들임’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교리는 실천을 위해 존재합니다. 종교는 관념적인 것이 아닙니다. 4세기경 성육신 成肉身 (신적 존재가 인간의 육체에 들어와 머무는 것)으로 개념화된 교리에 대해 성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는 스스로를 비우시고 인간의 몸을 입고 고통 받는 인류의 종이 되셨다. 성육신은 단순히 성경 속에 있는 교리적인 가르침이 아니다. 우리도 그리스도를 본받아야한다. 다른 사람이 나 자신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면서 모두가 하나 되어 살아가야한다. 그러지 못하면, 결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깨우치지 못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도 황금률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슬람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코란〉에 체계적 신학 같은 것은 없습니다. 아무도 어떤 쪽이 옳은지 확실히 알 수 없는 자기도착적 추론은 논쟁과 파벌만 낳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코란〉에서 ‘신앙심 Faith’이란 가난한 사람에게 베풀고, 고통 받는 이를 돕는 일을 의미합니다. 유대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서 저에게 랍비 히렐 이야기를 해 주신 분께 제가 “네, 좋은 이야기입니다만, 그럼 개종하겠다는 비非신도는 이제 뭘 믿어야 하지요?”라고 질문을 했더니, 그 분께서 “질문 내용을 보아하니 암스트롱 선생은 기독교 집안에서 자라셨나봅니다. 랍비 히렐 이야기는 실천의 중요성에 대한 가르침 입니다.”라고 답하시더군요.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은 실천입니다. 이것은 수영을 배우는 것과 같습니다. 수영하는 방법에 대해서 책을 읽는다고 수영하는 법을 익힐 수 있는 것이 아니듯, 종교 역시 이런 종류의 앎인 것입니다.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실천해야 합니다.

우리는 종교를 너무 관념화해서 그 가르침을 실천할 수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실천 없이는 결코 아무것도 깨우칠 수 없습니다. 무작정 현장에 뛰어들어 실천해야합니다. 자비가 모든 종교의 핵심 가르침입니다. 세계 여러 종교의 전통들은 지금 우리 사회처럼 폭력이 극성을 부릴 때 생겨났습니다. 당시 현자들은 우리가 타인을 대하는 법을 익히지 못하면, 삶이 아예 불가능함을 알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신이나 해탈에 가까워지지 못하는 이유는 이기심 때문입니다. 아집, 자기중심적 성향 , 개인적 · 문화적 · 종교적 · 국가적 배타주의를 모두 떨쳐낼 때, 우리는 비로소 종교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혜인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영어 · 교육학 · 한국불교를 공부했다. 현재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에 재학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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