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불교인의 삶과 신앙(274호)

몽골불교의 중심 간단사원, 비록 많이 훼손되었지만 몽골에서 유일하게 명맥을 유지한 사원이다.

몽골(Mongolia)은 광활한 대륙이다. 넓이는 한반도의 7.4배 정도다. 고원지대로 목축지가 전체의 80%에 달하고, 사막도 많은 편이다. 땅은 넓지만 인구는 300만 명을 조금 넘어 세계에서 인구밀도가 가장 낮은 나라에 속한다. 거기에 인구의 절반 이상이 수도인 울란바토르에 살기 때문에 몽골의 초원을 표현하자면 한마디로 황량하다.

몽골인의 삶과 불교를 이야기 하려면 그들의 생활환경과 역사를 함께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먼저 기후다. 몽골은 여름이 짧은데 이 시기에도 일교차가 크다. 한 번씩 쏟아지는 폭우는 세상의 모든 것을 쓸어갈 듯하다. 문제는 겨울. 울란바토르는 세계에서 가장 추운 수도로 불린다. 몽골의 겨울은 세상을 모두 얼어붙게 만든다. ‘소뿔이 떨어질 정도의 추위’, ‘소꼬리가 떨어지는 추위’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상상을 초월한다.

혹독한 몽골의 자연환경으로 인해 그곳에서 살아가는 야생동물과 가축들의 생존은 자연스레 죽음과 맞닿아있다. 이 동물들에 기대어 살아가는 유목민도 척박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몽골의 초원에서 살아가는 유목민들의 삶은 낭만적이 아니라 치열한 투쟁의 연속이다. 오늘을 살면서 내일을 준비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늘 죽음을 곁에 두고 삶을 살아가는 유목민들은 마음에 위안을 주고, 내일의 희망이 될 수 있는 정신적 지주가 필요할 것이다.

파스파 스님을 머물게 하기 위해 지은 에르덴조 사원. 이곳은 원래 몽골제국의 수도였다.

게르에 불단 모시고 기도

몽골의 전통가옥은 이동식 주택인 게르 Ger다. 수도인 울란바토르에는 1960년대부터 아파트가 건설돼 도시민 절반 정도가 아파트 생활을 한다. 하지만 나머지는 여전히 게르에서 생활한다. 먼저 이 게르를 자세히 들여다보자.

게르는 그냥 보기에 원형의 원룸형식이지만 이곳에는 철저하게 분리된 영역이 있다. 게르 내부에서 가장 중요한 곳은, 남쪽에 위치한 출입구로 들어섰을 때 정면에 보이는 호이모르 Khoimor다. 유목민 불자들은 이곳에 불단을 만들고 불상을 안치한다. 이들은 아침에 일어난 후 가장 먼저 불단에 예를 올리고 하루를 시작한다. 특이한 점은 이 불단에 불상과 함께 달라이라마의 사진이나 몽골불교계 큰스님의 사진, 그리고 고인이 된 부모님의 사진까지 함께 놓아둔다.

몽골에서 유목을 하는 남자들은 집을 떠나 초원에서 가축을 방목하면서 보내는 시간이 많기 때문에 목에 걸 수 있는 별도의 불함佛函을 챙겨 다니기도 한다. 또 지역에 따라서는 초원에 석불을 모시기도 한다. 이 석불은 원래 불상으로 조성된 것이 아니라 옛 부족장이나 전쟁영웅 등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석인상이었다. 몽골인들은 석인상이 마을이나 부족을 지켜준다고 믿었는데, 이것이 발전해 호신불의 개념으로 바뀐 것이다. 이 석상에 축복과 환생을 기원하는 ‘하닥’이라 부르는 푸른 천을 감아놓고, 양젖으로 만든 버터에 심지를 꽂아 불을 밝혀 신성성을 부여한다.

몽골불교는 티베트 라마불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하지만 18~19세기 청나라 지배와 공산화를 거치며 그 색이 많이 바랬다. 그래서 티베트 불자들과는 달리 마니차를 돌리거나 오체투지를 하지 않는다. 몇 년 전,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에서 운수업을 하는 바타 씨와 몽골고고학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는 후르테 씨를 만난 적이 있는데, 그들에게서 몽골불자들의 신행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간단사원 중앙광장에서 등돌이를 하는 신도들.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신행생활이다.

바타 씨는 울란바토르에서 사람과 물자를 몽골 전역으로 운송하는 일을 주로 하고 있었다. 가끔은 국경을 건너 중국까지 화물을 배달하기도 한다. 그는 자동차 안에 안전운전을 기원하는 의미로, 작은 금강저와 불상을 모시고 다닌다. 또 먼 지방으로 출장가기 전에는 몽골불교의 중심인 울란바토르 간단사원에 들러 안전을 기원하는 참배를 한다. 그는 출장에서 돌아온 다음날에도 반드시 사원을 찾는 불심 깊은 사업가다. 이들은 불상이나 사찰 마당의 등 燈을 세 바퀴 돌며 염불을 외운다.

1749년에 완공된 만조실 사원. 이곳에는 350여 명의승려가 머물렀지만 탄압기에 50명이 넘는 승려가 살해 되었다.소풍 온 어린이들에게 사원의 내력을 설명하는 관리소장.

그러나 바타 씨와 같은 독실한 불교신자도 몽골 전통의 샤머니즘에게 경배한다. 몽골의 언덕 위에 세워진 석인상이나 어워 Ovoo(돌탑)를 만나면 주변을 세 번 돌면서 술과 지폐, 자신의 관심사와 관련된 물건을 올려놓는다. 또 집안에 일이 있을 때는 샤머니즘 지도자를 찾아가 상의하고 점을 보기도 한다. 이러한 모습, 불교와 샤머니즘을 혼동하는 신앙형태를 그들은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공무원인 후르테 씨도 중요한 시험이 있거나 발표가 있을 때는 사원을 찾는데, 바타 씨의 신앙형태와 다르지 않다. 몽골인의 신행생활에는 이렇게 샤머니즘이 깊숙이 자리하고 있다. 몽골불교가 정체성을 상실하게 되는 배경은 청나라 점령기 때 유입되는 중국불교와 공산화되면서 실시된 종교말살정책 때문이다. 복잡한 과정을 이해하려면 후반에 언급할 몽골의 역사가 도움이 될 것이다.

086 0871648년, 몽골불교의 지도자인 자나바자르 스님이 명상하던 곳으로 두뿌흥 사원에서 가장 신성시 되는 곳이다.

라마불교에 샤머니즘 혼합

티베트의 사원에서는 법회와 축제가 함께 열리지만, 현재 몽골에는 종교적인 축제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티베트 사원에서 공연되던 가면극의 일종인 ‘참 Tsam’은 몽골에서 더 발전되고 다양화 되어 몽골의 전통가면극으로 유명해졌다. ‘참’은 원래 불교교육을 위한 종교의식으로 시작됐지만, 몽골에서는 종교적 의식과 더불어 서사적인 내용이 추가돼 많은 사원에서 공연됐다고 한다. 그런데 현재는 종교적인 부분은 맥이 끊기고, 서사적인 내용만 전해져 불교와는 무관한 예술적 가면극이 되어버렸다.

종교적인 내용이 전승되지 못한 이유는 상당한 기간 동안 사원에서 종교적인 의식과 축제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몽골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달성된 1921년 7월 11일을 기념해 3일간 열리는 관제축제인 ‘나담 Naadam’ 또한 종교적 성격은 없는 전통민속축제에 가깝다. 그렇다면, 몽골불자들에게 가장 의미 있는 날은 언제일까? 몽골의 설날명절인 차강 살 Tsagaan sar(하얀 달)이다. 이날에는 온 가족들이 모여 식사를 하고 선물을 주고받은 후 사원을 찾는다. 특히 이날은 사원의 스님들이 공식적으로 속가의 집을 방문하는 날이기 때문에 특별한 날로 여겨진다.

몽골인들은 티베트 달라이라마에 대한 존경심이 아주 크다. 그 이유는 몽골의 불교가 티베트 라마불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국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달라이라마를 초청해 법회를 열고 있다. 이 법회는 몽골 불자들은 물론이고 몽골의 젊은 스님들에게도 첫 손꼽히는 중요한 법회로 자리 잡았는데, 몽골불교의 지남이 되고 있다.

달라이라마와 몽골은 역사적으로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역대 달라이라마들은 불교가 탄압 받기 이전까지는 정기적으로 몽골을 방문해 법회를 열었다. 그 중 몽골불교가 가장 화려했던 시기인 17세기에도 큰 법회가 열렸었다. 이를 기념해 건립한 사원이 돈드고비(중앙고비사막)에 있는 처리인 히뜨사원Choiriin hiid이다. 이 사원은 몽골불교의 발전을 기도하는 중요한 사원이었다. 그러나 탄압시기 폐허가 되었다.

이곳에 젊은 승려들이 모여들어 수도하면서 옛 사원의 터 위에 새 사원이 재건됐다. 그리고 1992년, 현재의 달라이라마가 방문하면서 종교적으로나 역사적으로 강한 상징성을 부여하게 되었다. 아직도 몽골에서는 샤머니즘 속에 불교의식이 많이 남아 있다. 실제로 큰 불교사원 앞에는 전통 샤머니즘의 지도자들이 점을 치는 상점이 많다. 사원을 찾았던 불교도 중 일부는 자연스레 이곳을 찾는다.

에르덴조 사원 안에 있는 라쁘린 사원. 티베트양식의 이 건물은 젊은 스님들의 교육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다.
왕궁 위에 건립된 에르덴조 사원에는 몽골제국의 화려했던 옛 영화를 말해주는 많은 석조물이 남아있다.

6세기 이전 라마불교 전래 추정

그렇다면 이제는 몽골불교의 역사를 살펴보자. 몽골에 불교가 전래된 시기에 대해서는 학자마다 의견이 분분하다. 옛 기록이 상충하기 때문이다. 몽골의 초원을 지배하던 북방민족들은 모두 유목민이었다. 그들은 세력이 커지면 초원의 지배자가 되었고, 세력이 약해지면 다른 종족에게 초원을 넘겨주었다. 당시 그들에겐 기록문화가 없었다. 불교가 어렵사리 전래되더라도 초원의 지배자가 바뀌면 그 흔적은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몽골초원을 지배했던 민족들이 모두 중국대륙과 교류하고 있었다는 점, 그들이 중국 땅에 세웠던 여러 나라가 찬란한 불교문화를 꽃피운 점을 고려하면, 몽골에 불교가 전래된 시기는 6세기 이전이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실제로 745년 몽골 초원에 도성을 건설한 터키계 종족인 위구르족 내에도 불교도가 있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몽골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티베트 라마불교의 몽골 전래는 13세기 승려 파스파 Pags pa(1235~1280)에 의해서다. 파스파 스님은 라마불교를 원 元 나라에 먼저 전했고, 이후 몽골에도 전했다. 당시 파스파 스님이 몽골을 방문했을 때 스님을 몽골에 정착시키기 위해 하르허린 Harhorin(카라코룸)에 에르덴조 사원 Erdene zuu hiid을 건립한다. 이 사원은 티베트 불교가 공식적으로 전해진 후 처음으로 건립된 라마불교 사원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칭기즈칸 Chingiz Khan이 정복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그들을 추종해 ‘발주나 맹약’을 함께 한 19명 중에 불교도와 무슬림이 있었고, 1251년 대칸에 오른 뭉케칸 Munh Khan(재위 1251~1258)이 ‘불교와 무슬림, 기독교 간에 진행된 종교토론을 직접 참관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몽골에는 이에 앞서 불교가 뿌리내리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뿌리를 내린 불교는 칭기즈칸이 몽골을 통일한 후 유목민들의 삶 속에 깊숙이 자리하게 되었고, 유목민들이 척박한 삶을 견딜 수 있는 힘의 원천이 되었다.

간단사원 중앙법당의 불상. 이곳에는 원래 1913년에 완성된 불상이 있었으나 탄압기에 조각내 소련으로 보내져 빈 곳으로 남아있었다. 이후 몽골 불자들의 보시와 정부의 후원으로 무게 90톤,높이 26.5미터의 크기로 1996년 완성되었다.

공산정권 들어와 불교 말살

그러나 몽골제국이 세운 원 元나라가 몰락한 이후 상황은 달라졌다. 몽골은 17세기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에 복속된다. 이때 몽골 초원의 대부분이 청나라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 몽골불교도 주류인 티베트불교에 청나라 불교가 유입되기 시작한다. 그래서 몽골제국의 옛 영화 위에 청나라 양식의 건물과 청나라 불교사원이 건립됐다. 새롭게 짓는 사원은 당연히 청나라 양식을 갖추게 되었다. 당시 불교계의 현자 자나바자르Zanabazar(1635~1723)와 같은 몽골의 불교 지도자를 초청해 중국에 머물게 하면서 몽골민족과 그들의 정신적 지도자를 분리하는 정책을 취하기도 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몽골의 라마불교를 청나라 불교와 동화시키려는 움직임은 있었지만, 불교의 말살을 획책하지는 않았다.

몽골불교의 암흑기는 청나라가 몰락한 후 시작되었다. 1911년 신해혁명 이후 내몽골은 중국 공산정권에 병합되면서 종교의 자유가 사라졌다. 현재의 몽골지역인 외몽골에는 소련의 무력을 등에 업은 ‘몽골인민공화국’이 등장해, 모든 종교행위를 금지한다. 불교 박해가 시작되기 이전인 1937년까지만 해도 700개가 넘는 사원에 12만 명이 넘는 승려들이 있었는데, 이는 당시 남자인구의 30%에 해당되는 숫자였다. 당시 몽골에서는 티베트와 마찬가지로 한 가구에 한 명 이상의 출가자를 배출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산화 이후 몽골불교는 끝없는 암흑기에 빠지게 된다.

만조실사원의 마애불.폐허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있는 석불상, 이곳에 남아있는 유일한 불상이다.

공산정권의 종교금지정책은 매우 잔인했다. 그들은 전국의 모든 불교사원을 약탈하고 불태웠고, 수도하던 승려들을 시베리아 강제노동수용소로 보냈다. 또한 사원을 떠나길 거부하는 승려나 피신한 승려를 찾으면 그 자리에서 처형을 했다. 만행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몽골불교의 중심이자 종교적으로 가장 신성하게 여기는 간단사원 Gandantegchenlin에 모셔진 ‘벅뜨’(라마불교의 수장)들의 무덤을 파괴하고, 유해를 모두 훼손하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이런 잔악한 행위 때문에 불자들은 일시적으로 전통 샤머니즘으로 위장해 종교행위를 해야만 했다. 이런 기간이 길어지면서 불교의식은 완전히 전통샤머니즘에 흡수되었다.

다행히 1990년대 들어 소련연방이 붕괴하면서 몽골에 종교의 자유가 찾아왔지만, 이미 모든 것을 잃어버린 몽골불교는 빈터 위에서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고 있던 간단사원을 중심으로 승가대학과 불교미술대학을 운영하며 인재를 키워나가는 한편, 곳곳에 빈터로 남아있는 사원들을 점차 복원해 가고 있다. 초원에 버려진 옛 절터는 시간이 지나면서 흔적이 희미해지고 있지만, 몽골 불자들은 옛 사찰 터를 찾아보거나 그곳의 나무에 푸른 천을 걸어 놓고 예를 올리고 있다.

드넓은 초원에 세워진 아마르바야스갈란트 사원. 몽골불교의 중요한 성지순례지 중에한 곳으로 청나라 옹정제의 지원으로 1736년에 세워진 사원이다. 탄압기 동안 아무도 살지 않았던 사원이지만, 청나라 건축양식과 법당 내부의 티베트식 탕가가 그대로 남아있다.
젊은 스님들의 의지로 재건된 처리인 히뜨 사원. 게르 법당내부에는 수많은 불경들이 있다.

불교의식과 불교문화도 옛 것을 복원하려는 노력과 외부의 도움으로 조금씩 형태를 갖추어가고 있다. 그러나 전통적인 몽골불교의 전통의식은 모두 맥이 단절돼 불교신자들의 신행은 여전히 전통 샤머니즘과 혼재된 양상을 보이고 있다. 그렇다고 그들의 불심이 약해진 건 아니다. 통계적으로 보면 불교와 샤머니즘을 신앙하는 국민이 전체의 90%를 넘는다. 여전히 초원의 불자들은 항상 불심을 유지한 채 유목생활을 하고 있다.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거나, 환자가 생겼을 때, 상을 당했을 때면 가장 먼저 사원을 찾는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 우리나라 선교사들이 대거 몰려가 활발한 선교활동을 펼치다보니, 수도에 거주하는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개신교 인구도 조금씩 늘고 있다. 한국 불교계도 몽골불교와의 교류와 지원에 좀 더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

김성철

사진작가. 서울예술대학에서 사진을 전공하고 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에서 문화재 전공 석사과정을 마쳤다. 전국 장승과 솟대, 옛 절터 등 문화유산을 촬영 · 출판했다. 직지사 성보박물관 도록 작업을 했다. 현재 해외 문화유산 전문 출판사 ‘두르가’ 대표로 〈몽골 인 몽골리아〉, 〈골든 미얀마〉 등 세계의 문화유산 시리즈를 출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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