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저명론(273호)

파아나두라.

스리랑카 불교 살린 종교 論判
석오진 편역

1873년 8월 26일. 스리랑카 제1의 도시 콜롬보에서 남쪽으로 27km 떨어진 바닷가 마을 파아나두라가 이른 아침부터 시끌벅적하다. 뭔가 희대의 일이 벌어지기 직전의 분위기다. 이 일을 치르기 위해서 마을에 회관도 새로 지었다. 설렘과 흥분과 기대와 조바심에 몸과 마음이 바싹 달아오른 마을 사람들이 몰려든 가운데 오늘의 주인공들이 회관으로 들어온다.

주인공들이란 다름 아닌, 스리랑카 불교도와 기독교도들이다. 이들은 오늘과 이틀 뒤인 28일 모두 네 차례에 걸쳐 논쟁을 벌일 예정이다. 두 종교 가운데 어느 것이 올바르고, 어느 종교가 그릇되었는지를 판가름하기 위함이다. 이 논쟁을 원만하게 치르기 위해 약 한 달 전에 열 가지 항목의 약속도 했다. 그 중 몇 가지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 한 사람의 대담 시간은 1시간으로 한다.

• 첫 시간은 기독교 측에 부여하고, 그 시간은 불교의 허위성을 제시하기 위해서만 사용한다. 그 다음 시간은 불교 측에 부여하고, 불교 측은 불교의 허위성에 대한 기독교 주장에 대해 반드시 변론한 후 기독교의 허위성에 대해 반론해야 한다.

• 이 논쟁은 8월 26일, 28일에 행한다.

• 논쟁시간은 오전 8시부터 10시까지, 그리고 오후 3시부터 5시까지 행한다.

• 논쟁 중 논쟁자 이외의 모든 사람들은 조용히 들어야 한다. 그리고 이 협정서에 서명을 한 사람은 청중들이 평온하고 냉정을 기하도록 그 책임을 부여한다.

• 이 논쟁을 위해 특별히 단층 건물을 지을 것을 인정한다.

 

이 사전 협정에 의거해서 8월 26일 이른 아침부터 파아나두라 팟티야 마을로 양측 종교인들이 만 명이나 몰려들었다. 대체 이전에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이런 종교논쟁이 조용한 섬나라에서 치러지는 것일까?

지구 위에 불행하지 않은 나라가 있을까마는, 스리랑카는 그 중에서도 지독한 아픔을 간직한 나라이다. 인도의 빈번한 침입으로 왕조가 흥망성쇠를 되풀이하다가 1505년 유럽의 포르투갈에 의해 식민지화 되었고, 이어 네덜란드, 그리고 이후 자연스레 영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스리랑카는 어떤 나라인가? 생전에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세 차례나 다녀가신 나라라는 믿음과 함께, 부처님 가르침을 문자로 기록한 ‘패엽경’과 부처님 치아사리를 나라의 보물로 여겨오던 불교국가가 아니던가?

하지만 16세기부터 1948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기까지 무려 440년 간 외세에 의해 식민지 통치를 받은 나라이다. 서양의 세 나라는 스리랑카에 침략해 들어와서는 자신들의 종교(가톨릭과 개신교)를 강제로 퍼뜨리기 위해 온갖 불법을 자행했다. 개종하지 않으면 현실적으로 불이익을 받아야만 했다.

이 책의 편역자인 석오진 스님의 해설서에 의거하면 당시 상황은 이렇다.

애초 영국 정부는 불교승단을 보호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에 대해 영국 기독교 교단은 스리랑카 및 영국 본토 내에서 입을 모아 항의했다. 기독교 정부가 불교 전통을 인정하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일이라는 것이다. 이런 압력은 19세기 중반 총독 맥킨지가 ‘마하 나야까 테로(Mahā Nāyaka Thero)’ 임명을 승인하기를 거부하기에 이르렀다. 마하 나야까 테로란 불교교단의 최고 지위인 종정에 속하는 직위로서, 가톨릭의 교황과 같은 권위를 지닌 자리이다. 결국 불교를 스리랑카에서 더 이상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도를 드러내고 만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기독교로 강제개종이 이뤄졌는데, 갓 태어난 아기는 세례를 받지 않으면 주민으로 등록할 수 없었고, 결혼 역시 그러했다. 기독교인이 아니면 공무원도 될 수 없었다.

즉, 불교국가 스리랑카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불교를 버려야 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 전통이 오롯하게 살아 숨 쉰다는 자부심으로 지내온 스리랑카 불교교단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만은 없었다. 곳곳에서 기독교인과 교리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논쟁이 벌어졌다. 그리고 이런 논쟁의 귀결로서 1873년 파아나두라에서 양측을 대표하는 종교인들이 마주하고 논판(論判)을 하게 된 것이다.

8월 26일과 28일, 오전과 오후로 나눠 모두 네 차례에 걸쳐 이뤄진 논쟁에는 기독교 측에서 데이비드 데 실바 목사, 시리만나 전도사가 나섰고, 불교 측에서는 모호티왓테 구나난다 스님이 나섰다. 기독교 측은 불교의 업보 사상과 영혼을 인정하지 않는 사상 등에 대해서, 그리고 ‘붓다에 관한 경전 기록들을 보자면 붓다는 결코 뛰어난 자도, 깨달은 자도 아닌 보통의 중생일 뿐이다.’ 등을 주장하며 불교가 허구에 찬 미신이라 주장했다.

이에 대해 불교 측의 구나난다 스님은 기독교측을 향해 ‘당신들의 하느님은 질투에 가득 찬 신이요, 걱정 · 근심하고 증거를 보여야 안심을 하는 존재이고, 인간의 피를 좋아하는 존재다.’, ‘올바로 행동하면 구원받는다고 주장했다가, 아무리 그래도 기독교만을 믿는 것이 구원의 조건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니 모순투성이의 주장을 어찌 진리요, 제대로 된 종교라고 할 수 있겠는가?’ 등의 반론을 제기했다.

21세기 종교학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런 논쟁들이 어쩌면 싱거울 수도 있으리라. 특히 기독교 측이 불교를 공격하기 위해 인용하는 내용들을 보자면 불교이해가 너무나 일천해서 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분명 당시 유럽은 스리랑카와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믿고 있는 불교라는 종교가 허황된 미신이어서 어서 빨리 기독교로 개종시켜 ‘저 미개하고 야만한 자들을 문명화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신의 계시인 양 여기고 있었을 것이다.

이 논쟁은 불교 측 승리로 결론이 났다. 하지만 승패 여부는 차치하고라도 이 논쟁은 훗날 인류정신사에 새로운 흐름을 품게 하였다. 이 기록물을 읽은 미국의 올코트 대령이 크게 자극을 받아 1880년 불교신지학협회(The Buddhist Theosophical Society)를 창설해서 미국과 유럽 사람들이 불교를 만나는 계기를 만들어주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런 네 차례 논쟁은 문자로 기록되었고, 그 기록물을 훗날 일본에 유학 중이던 석오진(釋悟震) 스님이 번역해 우리나라에 소개하였다. 2001년 이 책을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오진 스님이 일본학자의 책을 한국어로 번역해서 낸 것이라 착각했었다. 하지만 다시 한 번 꼼꼼하게 읽어보니 놀랍게도 오진 스님이 영문판과 싱할리어판을 꼼꼼하게 대조해서 우리글로 옮긴 것이었다.

스님은 1987년에 한국의 어느 출판사에 출판을 의뢰했는데 “지금은 대화시대이므로 이 같은 과격한 논쟁을 출판할 수 없다.”는 대답과 함께 거절당했다고 한다. 낙심천만하던 차에 나카무라 하지메 박사의 권유로 일본의 연구논문집 〈동방〉에 6회에 걸쳐 연재를 했고(1987~1992년), 1995년 9월, 일본 동경의 출판사인 산키보불서림(山喜房佛書林)에서 일본어판으로 출간하였다. 그리고 나서 2001년 10월에야 한국의 출판사 운주사에서 한국어판으로 나올 수 있게 되었다. 책이 나오기까지의 사연을 보자니 한국 불교계 출판사가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대화와 소통의 시대에 오래 전 갈등을 부각하는 것이 그리 곱지는 않겠지만 무슨 눈치를 그렇게 보아야했을까? 현대의 패러다임을 좇기 위해 지난 역사는 묻어 버리는 것이 최선이었을까? 그 덕분에 유럽 열강에 식민 지배를 당한 아시아의 정신문명은 결국 명예를 회복하지도 못한 채, 자본주의의 흐름에 휩쓸려 유야무야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 이야기쯤으로 치부되고 마는 것은 아닌지 따져볼 일이다.

스리랑카로 성지순례를 떠나는 이들이 늘고 있다. 하지만 온 세상 숱한 사람들이 둘러보는 빤한 곳보다는, 지난한 세월 서양 열강에 맞서 스리랑카의 정신, 스리랑카의 신앙을 지켜내려 했던 파아나두라야 말로 반드시 둘러봐야 할 진정한 불교성지가 아닐까? 다음에 스리랑카로 떠날 때에는 이 책 뒷부분에 실린 오진 스님의 ‘5대 논쟁지에 대한 현지답사 보고서’를 참고하려 한다. 그러면 우리는 불치사(佛齒寺)로만 기억하는 추억의 불교가 아닌, 근세를 거쳐 오면서 묵묵히, 하지만 당당히 참아내고 그래서 더 크게 꽃피웠던 불교의 근 · 현대사까지 만나게 될 것이다.

이미령

불교칼럼니스트. BBS FM 〈멋진 오후 이미령입니다〉를 진행하고 있으며, 책읽기 모임인 〈붓다와 떠나는 책여행〉과 〈대안연구공동체 -직장인책읽기반〉에서 활동하고 있다. 〈붓다 한 말씀〉, 〈고맙습니다 관세음보살〉 등을 썼고, 여러 번역서가 있다.

저작권자 © 금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