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각국사 의천 스님 이야기(272호)

천태종의 개조 천태 지의대사의 육신을 모신 ‘천태 지자탑’.의천 스님은 이 탑 앞에서 고려 천태종을 세울 것을 발원했다.

천태도량을 세울 오래된 꿈

1085년 정월이었다. 만 30세로 접어든 의천 스님은 어머니 인예태후와 둘째형이자 고려의 제13대 국왕인 선종(宣宗)에게 새해 인사를 드리려고 입궐했다. 그때 의천 스님은 송나라 구법여행에 대한 계획을 다시 밝혔다. 그는 이미 열아홉 살 되던 해에 부왕이던 문종에게 송나라 유학의 꿈을 말했다가 반대에 부딪힌 일이 있었다. 그 뒤 문종이 1083년 7월에 세상을 하직하자 맏아들인 순종이 37세의 나이로 제12대 국왕에 즉위했다. 순종은 본래 병약한 데다 아버지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은 탓에 즉위한 지 석 달 만에 승하했다. 순종에 이어 왕위에 오른 사람이 바로 선종이었다.

열아홉 살 이후로 십여 년 간 송나라 구법 여행의 뜻을 가슴 깊이 묻어두었던 의천 스님이었으나, 나라에 우환이 겹쳤으니 차마 송나라에 다녀오겠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 뒤 순종 체제가 어느 정도 틀이 잡힌 1085년에야 평소의 포부를 조심스레 밝힌 것이었다. 마침 그 즈음 송나라 진수 정원(晋水淨源) 선사가 의천 스님을 초청하는 편지를 보내오기도 했다.

의천이 인예태후에게 새해 인사를 드린 뒤 말했다.

“어머니, 나라 사정이 여러 가지로 어수선한 것을 소승도 알고 있습니다만 올해는 송나라로 건너가 여러 고승들을 뵙고 법을 구하고자 합니다.”

인예태후는 몇 해 전, 셋째왕자인 왕옹(王顒, 훗날의 숙종)이 의천 스님과 함께 입궁할 때의 일을 떠올렸다. 그때 의천 스님이 여러 가지 포부를 밝혔는데 당시에도 송나라로 유학할 뜻을 밝혔고, 그런 이유 중 하나로 고려국에 천태종을 개창하기 위함이라 하였다.

“천태삼관은 최상의 진리인데 이 땅에 천태종파가 아직 세워지지 않은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입니다. 소승은 중국으로 건너가 천태교관을 배우고 이 땅에 최상진승(最上眞乘)의 가르침을 펴고자 합니다.”

이렇게 의천 스님이 포부를 밝혔을 때 인예태후가 기뻐하며 말했다.

“승통이 그런 뜻을 가지고 있다면 이 어미가 어찌 가만히 있겠습니까? 최고의 도량을 세워 천태교관의 가르침이 널리 펼쳐질 수 있도록 동참하리다.”

그때 왕옹도 동참할 뜻을 밝혔다.

“저도 우세 승통을 후원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승통이 하루빨리 송나라를 다녀올 수 있어야 하는데 여건이 녹록치 않으니 걱정입니다.”

이런 대화가 있은 뒤 인예태후는 늘 우세 승통을 돕는 일을 모색했으나, 의천 스님의 송나라 유학은 점점 멀어지는 것만 같았다. 그러던 중 다시 궁궐로 찾아와 송나라로 갈 뜻을 밝혔으니 어찌 말릴 수 있을까. 다만 고려와 송나라 사이에 놓인 험난하고 거친 바다가 걱정이었다.

“승통의 뜻대로 다녀오셔야지요. 하지만 바닷길이 험하다 하니 어미로선 그게 걱정입니다.”

의천 스님이 답했다.

“고려국과 송 사이에 수많은 상선이 왕래하고 있으나 환란을 당하는 것은 극히 드문 일입니다. 태후마마께선 과히 염려치 마십시오.”

“아무쪼록 잘 다녀오셔야 합니다.”

 

험난한 밀항의 바닷길

인예태후는 이처럼 의천 스님의 유학을 허락했으나 선종은 선뜻 그렇게 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마음속으로는 받아들이고자 했으나 고려를 둘러싼 국제관계와 대신들의 반응을 살펴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 고려와 송  · 요의 삼국은 적절한 균형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고려가 공공연히 의천의 송나라 유학을 허용할 경우, 요나라의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나아가선 또 다른 침략의 빌미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여러 가지를 생각하던 선종이 조심스레 말했다.

“짐은 그 청을 받아들이고 싶지만 대신들의 의견을 무시할 수가 없네. 오늘 대신들을 소집해 그 문제를 논의할 것이니 우세 승통도 참석해서 자세히 의견을 밝혀보게.”

“그리하겠습니다.”

얼마 후, 어전에 여러 대신들이 모이자 선종이 용건을 밝혔다.

“머잖아 우세 승통이 송나라로 가 여러 고승대덕을 뵙고 곳곳에 흩어진 주석서들을 수집하려고 하오. 더 나아가 천태교종을 세우려는 포부도 가지고 있소. 난 그 뜻을 반대하지 않지만 여러 대신들의 의견도 중요하니 기탄없이 말해주시오.”

하지만 대신들의 반응은 완강했다. 표면적으로는 바닷길이 위험해 우세 승통의 안위가 염려스럽다는 걸 이유로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요나라의 침공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의천 스님의 법을 구하려는 노력에 감동하고 지원할 생각보다는 현실에 안주하려는 자세가 분명했다. 그때 의천 스님이 송나라로 꼭 가야 할 이유를 대신들에게 설명했다.

“나는 오래 전부터 교장을 결집해 부처님의 말씀을 보다 분명하고 자세히 사부대중에게 전하고자 발원했소. 그러기 위해 신라 때의 원효 · 의상 스님 등 여러 스님들의 주석서들을 수집했고 더 나아가 중국 각지를 여행하며 다양한 주석서를 수집하고자 했으나 아직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더구나 근래에는 진수 정원 선사의 학문이 높고 수행이 훌륭하다는 말씀을 전해 듣고 편지를 주고받으며 스승처럼 받들고 있습니다. 정원 선사께서 최근 나를 초청하는 글을 보내오셨으니 제자로서 그 청을 거절할 수가 없습니다. 옛 성현들은 목숨을 걸고 도를 구했으니 당나라 현장(玄裝) 스님이 서역으로 갔던 일이나 신라의 의상 스님이 중국으로 갔던 것이 그런 경우입니다. 편안히 지내며 애써 스승을 찾지 않는다면 어찌 출가자의 본래 자세라 하겠습니까?”

지자대사의 유언에 따라 서기 598년 창건된 국청사. 의천 스님은 500여 년이 흐른 후 이곳을 찾아간다.

이 말을 듣고 난 선종이 감격해하며 말했다.

“우세 승통의 설명을 다시금 들으니 역시 송나라에 다녀올 필요가 있겠습니다. 짐은 승통의 유학을 허용하겠소.”

그러나 대신들은 완강했다.

“저희도 큰스님의 구법 의지에 감격합니다만 송나라로 가시는 것은 동의할 수 없습니다. 뱃길이 너무도 위험한 데다 사절단을 보내 교류할 경우 북쪽의 요나라가 다시금 고려를 침략할 것이 불을 보듯 뻔하기 때문입니다. 큰스님뿐만 아니라 고려 전체의 안위가 염려스러워 반대하는 것이니 헤아려주십시오.”

그때 의천 스님은 대신들의 뜻에 반박하지 않고 조용히 궁궐을 나왔다. 대신들이 걱정하는 바의 요체를 알았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석 달이 지나 사월초파일을 앞둔 때였다. 각 지방의 사찰은 물론 관청과 민가에서도 연등을 만들어 장엄했다. 당시 고려 사회는 매년 여러 차례의 연등회를 열고 관등놀이를 즐겼다. 그 중에서도 사월 초파일의 연등회와 관등놀이가 단연 으뜸이었다. 각 사찰을 중심으로 거리 곳곳에 온갖 모양의 연등이 밤거리를 화려하게 빛내며 아기부처님이 세상에 오신 뜻을 기렸다. 의천 스님이 주석하던 영통사도 초파일 행사 준비로 여념이 없었다.

이윽고 초파일 전날 저녁이었다. 의천 스님은 어머니 인예태후와 선종에게 보낼 편지를 써내려갔다. 허락을 받지 않고 송나라로 밀항하는 것을 사죄한다는 내용이었다. 편지를 모두 쓴 의천 스님이 제자 낙진(樂眞)을 불러 명했다.

“오늘밤 내가 수개(壽介)를 데리고 송나라로 떠날 것이다. 그리 알고 넌 내일 아침 궁궐로 들어가 이 편지를 전하도록 해라.”

“명심하겠습니다, 스님.”

낙진이 대답하고 물러나자 의천 스님은 상인처럼 옷을 갈아입고 문밖에 대기하고 있던 제자 수개를 불러 명했다.

“이제 떠나자.”

곧이어 의천 스님과 수개, 그리고 송나라 상인 임영(林寧) 등 일행은 개경의 남쪽 해안인 정주(貞州)를 향해 잰걸음을 놓았다. 그리고 미리 정박하고 있던 송나라 상선에 올라 밤바람을 타고 서남쪽으로 미끄러지듯 달려 나갔다.

그 시간, 선종은 개경을 비우고 남쪽으로 시찰을 떠난 상태였다. 그래서 의천 스님이 송나라로 몰래 떠났다는 소식을 뒤늦게야 접하고는 크게 놀랐다. 출가자가 조정의 승인을 받지 않고 송나라로 밀항한 것도 문제지만, 더구나 그가 왕자 출신 승통이라는 점에선 국제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었다.

우세 승통의 속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선종은 급히 예빈승(禮賓丞)이던 정의(鄭儀)를 비롯한 관료들을 선발한 다음 낙진, 혜선(慧宣), 도린(道隣) 등 의천 스님의 제자들과 함께 송나라로 출발하게 했다. 한시바삐 출발해 의천 스님 일행과 합류하고, 중국에 도착한 뒤에는 통역뿐만 아니라 황제를 비롯해 각 지방의 관리들을 접촉하는데 필요한 의전 절차를 수행하라고 명했다. 그것은 의천 스님의 비공식적인 방문을 공식화하려는 의도였다. 그럴 경우 송나라에 예의를 차리면서 요나라에 대해서도 시비를 걸지 못하게 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하지만 선종이 파견한 사절단은 먼저 출발한 의천 일행을 따라 잡지 못해 결국 송나라 판교진(板橋鎭)에 도착해서야 합류할 수 있었다. 산동 반도 밀주(密州) 관내에 있던 판교진은 당시 요나라로부터 허락받은 중국 최북단의 무역항이었다.

 

지자대사의 뿌리를 담아 귀국하다

의천 일행이 송나라 판교진에 도착한 것은 고려를 출발한지 24일 만인 5월 2일이었다. 귀국할 때의 뱃길이 훨씬 멀었음에도 열흘 만에 도착한 것과 비교하면 바다가 험난했거나 상선인 탓에 연안을 따라 여러 항구에 들렀기에 그처럼 많은 시간이 걸렸던 것으로 짐작된다.

판교진에 도착한 의천 스님은 밀주와 고밀현(高密縣) 두 곳의 지방 관아는 물론 송나라 조정에도 편지를 보내 입성한 목적과 대체적인 여행 계획을 알렸다. 의천 스님의 편지를 받은 송나라 황제는 입성을 허락했으며 관리를 파견해 의천 스님 일행의 여정을 안내하게 했다. 또한 대신들을 보내 황제를 대신해 연회를 베푸는가 하면 차와 약 등을 보내주었다.

당시 송나라 황제는 신종(神宗)의 6남으로 아홉 살에 즉위한 제7대 철종(哲宗)이었다. 철종의 아명은 조후(趙煦)였는데, 그 때문에 스물두 살이나 많은 의천 스님의 속명 왕후(王煦)란 이름을 피휘(避諱)하게 만든 장본인이기도 했다.

아무튼 후(煦)라는, 같은 속명을 가진 두 인물은 1085년 7월, 송나라 수도였던 개봉(開封)에서 비로소 상면했다. 의천 스님이 개봉에 도착하자 철종은 성대하게 영접한 뒤 연회를 베풀어 그동안의 노고를 위로해주었다. 그리고 의천 스님 일행이 계성사(啓聖寺)에서 머물게 했으며 중서사인(中書舍人) 범백록(范百祿)으로 하여금 스님을 시봉하게 했다. 보름쯤 지난 7월 21일에는 철종이 수공전(垂拱殿)으로 가 의천 스님을 손님의 예로서 접대했다. 이때에도 철종은 공양을 베풀고 여러 가지 귀한 물건을 선물했다.

물론 철종의 나이가 어려, 할머니 고 태후(高太后)가 수렴청정을 했으니 의천 스님에게 극진한 호의를 베푼 것은 황제라기보다 불심이 깊었던 고 태후였다고 보는 게 합당하다. 의천 스님은 철종과 고 태후에게 받았던 여러 가지 후한 접대와 공양에 일일이 감사의 편지를 올렸는데 그런 기록들은 지금도 생생히 전하고 있다.

다음날 의천 스님은 스승을 만나 공부하기를 청하는 글을 황제에게 올렸다. 그러자 황제는 당시 개봉에서 가장 뛰어난 석학으로 알려진 화엄종의 유성(有誠) 법사를 추천해주었다. 의천 스님은 곧 유성 법사를 스승으로 삼아 한 달 가량 문답을 나누는가 하면 여러 주석서들을 선물로 주고받으며 친분을 쌓았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가 송나라를 찾은 것은 당시 항주(杭州)의 대중상부사(大中祥符寺)에 주석하던 정원 법사를 뵙고 그 가르침을 받고자 함이었다. 그래서 철종의 허락을 받고 항주로 향했다. 의천 스님이 개봉을 떠나 항주로 가 정원 법사를 뵌 것은 같은 해(1085년) 9월의 일이다.

정원은 중국 화엄종을 새로 일으켜 세운 중흥조로 추앙받고 있었다. 오래 전부터 의천 스님은 송나라의 고승들 중 가르침을 청할 만한 스승을 찾다가, 그 중 정원 법사의 학문과 인품이 가장 높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인편을 통해 여러 차례의 편지로 문답을 나눴는데 그러던 중 송나라를 방문해달라는 요청을 받게 된 것이다.

“소승 고려에서 온 의천이라 합니다. 스승께선 그동안 평안하셨는지요?”

대중상부사에 도착한 의천 스님이 일흔 살이 넘은 노승 정원에게 엎드려 절했다.

“어서 오십시오. 스님을 언제 뵙나 학수고대했는데 이제 만나게 되었으니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두 사람은 초면이었음에도 전혀 낯설지가 않았다. 그만큼 인연이 깊었기 때문이다. 의천 스님이 송나라를 방문하기 전 정원 법사는 초청장을 통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바람을 타고 와 입과 마음으로 주고받으니, 바늘과 겨자가 비록 하늘과 땅에 멀리 있어도 위 아래로 서로 딱 들어맞는 것처럼 기쁩니다. 생황(笙簧)과 경쇠(磬─)가 연주하니 궁상(宮商)이 어울려 화음을 이룹니다…….

 

바늘과 겨자가 서로 들어맞는다는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연 맺는 게 지극히 어렵다는 걸 말한다. 그만큼 의천 스님과 정원 법사는 다른 나라에 멀리 떨어져 살며 할아버지와 손자처럼 나이차이가 있어도 꼭 만나야 할 인연이었다. 그래서 의천 스님이 온갖 어려움을 헤치고 송나라로 건너 가 정원 법사에게 삼배를 올렸으며, 정원 법사는 멀리 떠나간 제자가 다시 본처(本處)로 돌아온 것처럼 반가워했다.

의천 스님이 송나라에 머문 기간은 14개월 정도이며 그 중 7개월가량을 정원 법사의 도량에 머물며 가르침을 받았다. 의천 스님에게 정원 법사가 차지하는 비중이 그만큼 컸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이다. 오늘날 전해지는 의천 스님의 비문과 문집에 따르면,

“(의천 스님은) 밀주에서 수도에 이르기까지, 또한 오월(吳越)을 왕래하면서 다닌 명산대찰의 모든 성현의 흔적을 참배하지 않은 데가 없고, 만나 뵌 고승도 50여 명으로 역시 불법의 중요한 법담을 물었다.”

고 한다. 당시 송나라의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으로 있으면서 의천 스님을 접대했던 양걸(楊傑)은 의천 스님의 송나라 방문에 대해

“자고이래로 바다를 건너 구법을 온 사람은 많았지만 우세 승통처럼 우리나라에 와서 천태, 현수, 남산, 조계, 서천범학(西天梵學)을 일시에 전해 받고 참 진리를 펼친 큰 보살이 어디에 있겠는가.”

라고 평했다. 이런 평가처럼 의천 스님의 송나라 방문 기간은 비교적 짧았지만 그 발자취는 크고 깊었다. 스님은 정원 법사를 비롯한 송나라의 여러 고승들을 만나 문답했으며 스승으로 섬긴 사람도 여럿이었다. 그리고 수많은 불교의 주석서들을 수집해 귀국한 뒤 훗날 집대성하는 성과를 거뒀다. 뿐만 아니라 왕자로서 모국의 넉넉한 지원을 받아 중국에서조차 자취를 감춘 수많은 불교의 전적을 보내주고 여러 사찰을 재건할 수 있게 재정적인 보시를 아끼지 않았다.

이처럼 의천 스님이 송나라로 유학한 것은 법을 구하려는 목적이었으나, 때로는 쇠락해진 중국 불교에 큰 자극과 활력을 주어 다시금 융성시키는 역할까지 도맡아 한 것이다. 그것은 의천 스님이 고려국의 왕자 출신인데다 승통으로서의 영향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의천 스님이 송나라로 건너간 이듬해인 1086년 1월의 일이다. 어머니 인예태후가 스님의 안위를 걱정한 나머지 하루빨리 귀국할 것을 종용해달라며 송나라 조정에 편지를 보냈다. 이때 의천 스님은 항주 상천축사(上天竺寺)로 가 주지 종간(從諫) 스님에게 천태학을 공부하던 중이었다. 의천 스님이 귀국을 망설이자 종간 스님이 말했다.

“스님이 천태교학을 공부하는 것도 좋지만 하루빨리 귀국해 효도를 하는 게 더욱 중요하다고 봅니다.”

의천 스님은 이런 권유를 차마 무시할 수가 없어 마침내 귀국을 결심했다. 그 뒤 항주에서 중국 천태산까지 220킬로미터를 걸어가 천태종 근본도량으로 알려진 국청사를 방문했다. 천태산 남쪽 기슭에 세워진 국청사는 서기 598년에 창건되었다 하니, 의천 스님이 찾아갔을 때만 해도 500여 년 가까운 역사를 자랑하던 고찰이었다. 이 절은 천태종을 창시한 지자대사(智者大師)의 유언에 따라 창건되었다. 처음엔 천태사라 불렸다가 국청사로 이름이 바뀌었는데 당나라 말기의 은자(隱者)로 알려진 한산(寒山)과 습득(拾得)의 일화가 남은 사찰로도 유명하다.

귀국하기 전 국청사를 찾은 의천 스님은 그곳에 세워진 지자대사의 육신탑을 찾아 참배했다. 그 자리에서 의천 스님은 ‘귀국한 뒤 반드시 천태종을 창종하겠다.’는 발원문을 낭독하며 마음속으로 굳게 맹세했다. 천태종 창종은 그가 송나라를 찾기 전부터 여러 사람들에게 약속하고 다짐한 일이었다.

1086년 5월 19일, 명주(明州)의 정해항(定海港)에서 귀국하는 배에 오른 의천 스님은 열흘만인 5월 29일에 예성강을 통해 고려로 돌아왔다. 출국할 때는 조정의 반대로 밀항을 해야 했지만, 평소의 발원을 원만히 성취했을 뿐만 아니라 국제적인 명성을 얻고 귀국할 때의 발걸음은 한없이 가벼웠다.

- 다음호에 계속

이정범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한 뒤 우리 역사와 불교인물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다양한 저술활동을 해왔다. 저서로 〈서프라이즈 한국사〉, 〈어린이 삼국유사〉, 〈다큐동화로 만나는 한국 근현대사〉, 〈그대 마음이 부처라네〉, 〈시와 소설로 만나는 원감국사〉, 〈붓다가 된 엿장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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