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고 싶었습니다(272호)

카메라를 향해 환하게 미소지어 보이는 김병조 씨.

한학자가 된 코미디언 “聖人의 지혜<명심보감> 전할 때 가장 행복해요!”

희극인 김병조(69, 金炳祚)는 종갓집 장손으로 태어나 어린 시절 엄한 조부모 아래에서 한학을 배웠다. 그래놓곤 성인이 되어선 불쑥 코미디계에 입문했다. ‘살짜기 웃어예’, ‘일요일 밤의 뉴스대행진’ 등 시청률 60%대 기록을 세우며 국민을 울리고 웃기던 그는 한때 코미디계의 대부로도 불렸다. 하지만 한 번의 말실수로 큰 고초를 겪은 후 훌쩍 방송가를 떠났다. 지금은 대학 강단에서 제자들에게 〈명심보감〉을 가르치는 교수님이다. 세상에 평탄한 인생을 산 이가 몇 있을까마는, 그 만큼 파란만장한 삶을 산 이 또한 흔치 않을 것이다.

인기 절정의 코미디언에서 한학자로 거듭난 김병조 교수. 김 교수는 청주판 〈명심보감〉을 펼쳐놓고 “곳곳에 부처님의 말씀이 깃들어 있다.”고 말했다.

전남 장성이 고향인 김병조의 조부는 동네를 오가다 아낙네를 만나면 담벼락 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정도로 남녀유별(男女有別)이 몸에 밴 유학자였다. 마을에 탱자나무가 많았는데, 고개를 돌리다 가시에 얼굴이 긁히는 일이 있었을 정도니 더 말해 무엇 할까? 공직에 몸담았던 부친은 민족주의 의식이 강했다. 해방 이후 야학(夜學)과 문맹퇴치운동에도 참여했는데, 한국전쟁 후 낙향했다. 체면을 중시하던 시대에 농사를 지을 수도, 장사를 할 수도 없어 서당을 열었는데, 전후(戰後) 피폐해진 삶을 견디기도 힘겨운 터에 자식을 서당에 보내려는 부모는 몇 없었다. 겨우 곤궁함을 면할 뿐. 결국 모친이 행상에 나서야 했다.

“어렸을 때 꽤 똘똘했나 봐요. 조부께서 ‘이 놈은 잘 가르쳐라’ 당부를 하셨는데, 집안 형편이 따라주질 못했어요. 대학등록금 걱정에 지역에서 육군사관학교를 가장 많이 보낸 광주고를 진학했을 때, 반에서 한두 명에게 주는 극빈(極貧)장학금을 받고 다녔을 정도였어요. 대학 진학을 앞두고 담임선생님과 상담을 할 때 ‘사실은 연극영화과를 가고 싶다.’고 털어놓았어요. 초중고를 다닐 때 소풍을 가거나 운동회 때 앞에 나가 친구들을 웃기곤 했는데, 그 쾌감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컸어요. 선생님이 장학생으로 도전해보라고 권하셨죠.”

그렇게 지원한 학교가 서라벌예술대학(중앙대의 전신) 연극영화학과다. 부친은 법대에 진학하길 원했지만 등록금을 지원해주지 못하다보니 자식이 원하는 학과를 만류하지도 못했다. 다행히 과수석으로 입학했지만, 전액장학금을 주진 않았다. ‘죽기 살기’로 공부했다. 전 학교생활을 통틀어 가장 열심히 했다. 1학년 2학기에는 학년수석을 해 전액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다. 군 입대를 졸업 후로 미룬 이유도 장학금 때문이었다. 당시 압박감은 대단했다. 지금도 가끔 장학생 명단에서 누락되는 꿈을 꿀 정도다. 남들은 ‘장학생이어서 좋았겠다.’고 쉽게 말하지만, 당시 생활비까지 감당해야 했던 그에게 장학금은 생존의 문제였다.

| 가난에서 벗어나려 코미디계 입문

코미디에 대한 인식이 높지 않던 시절, 코미디언을 하겠다고 대학에 진학한 이가 몇이나 있었을까? 그는 연기자 못지않게 연기하는, 아나운서처럼 발음이 정확한, 어떤 사람과도 대담을 나눌 수 있도록 상식이 풍부한 코미디언이 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그런 노력 덕분일까? 예술원 회장을 역임했던 이해랑 선생으로부터 연극 ‘햄릿’의 주인공 제안을 받기도 했다. 영광스런 제의였지만 ‘코미디만 열심히 하겠습니다.’하며 고사했다. 뚜렷한 목적의식을 갖고 차근차근 준비해 온 과정을 인정받은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그가 연극배우 제안을 고사한 배경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연극계의 원로였던 유치진·이해랑·이진순 선생님은 모두 제게 스승님이셨어요. 연극영화과다 보니 작품을 올려야 학점을 받을 수 있었는데, 극단 광장의 대표로 있던 이진순 선생님이 ‘너 졸업하고 우리 극단으로 와라.’고 하셨어요. 그런데 당시만 해도 연극을 하는 사람들은 모두 가난했어요. 저는 ‘집안을 일으켜야 한다.’는 사명감을 갖고 있었거든요. ‘죄송하다.’고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죠.”

(좌측 상단) 김병조 교수의 아들인 김형주 씨는 뮤지컬배우 출신의 사업가다. 두 사람은 한국JTS 홍보대사로 함께 활동하고 있다. 잘 걷지도 못하면서 안방 아미타부처님상 앞에서 합장을 한다는 그의 손자의 돌잔치 모습.

(우측 상단) 김 교수는 생명나눔실천본부 홍보대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지난해 7월 이사장 일면 스님으로부터 공로패를 받는 모습.

1972년 대학을 졸업하고 입대했다. 첫 복무지는 카투사(KATUSA). 영어를 잘해서라기 보단 ‘웃기길 잘해서’ 간 곳이다. 논산훈련소에 입소했는데 특기를 적어내라고 했다. 남을 잘 웃긴다고 적었더니, 행정관이 불러서 자신을 웃겨보라고 시켰다. 그래서 정말 웃겨줬더니 ‘내가 군대에서 제일 좋은 데로 보내주마.’하고 보내준 곳이 카투사였다.

뒤늦게 백마부대로 전출을 가게 됐다. 병장을 달고 보병부대로 옮겨가니 적응이 쉽지 않아 문화선전대를 자원했다. 당시 백마부대는 월남에서 막 철군했던 시기여서 문선대는 부대에서 비중이 높았다. 동국대학교에서 주최한 ‘전국대학생 화술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70년)을 받았던 그에게 문선대 활동은 식은 죽 먹기였다. 백마부대의 명물이 된 그는 전군 문선대경연대회에서도 1등을 차지했다. 이런 활약을 눈여겨 본 정훈참모가 전역할 때 추천해준 곳이 동양방송(TBC)이다.

“아마 제가 군대에서 추천을 받아 방송국에 입사한 유일한 연예인일 겁니다. 1975년 입사해서 활동을 하다가 동양방송이 강제 통폐합(1980년) 되기 직전 ‘웃으면 복이와요’(MBC)를 새로 맡은 심상수 PD(전 춘천 MBC 사장)의 권유로 강석 씨와 함께 방송국을 옮겼어요. 그 분은 여장(女裝)을 하거나 이상한 몸짓과 말투로 바보스럽게 웃기는 슬립스틱코미디를 싫어했어요. 코미디도 교육적이어야 한다는 지론을 갖고 계셨죠. 제 생각도 같았거든요. MBC로 옮겨 이런저런 프로그램을 하다가 ‘일요일 밤의 대행진’ 안에 뉴스를 살짝 비틀어 시사풍자를 하는 코너를 맡았는데, 이게 대박이 났어요.”

생명나눔실천본부 홍보대사를 맡고 있다 보니 불암사에서 열리는 각종 문화행사에서 단골 사회를 맡고 있다.

‘일요일 밤의 뉴스대행진’으로 그는 벼락스타가 됐다. ‘시청률 60%’라고 하면 상상이 갈까? 무려 6년여 동안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호사다마라고 하지 않던가? 1987년 6월 10일. 이날은 한국현대사에 한 획을 그은 6 · 10민주항쟁의 시발점이지만 그에겐 인생에서 가장 큰 오점을 남긴 날이기도 하다. 당시 집권여당은 신군부 세력이 만든 민주정의당이었다. 그들은 장기집권을 위해 국민들이 요구하던 ‘대통령직선제 헌법 개정’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맞서 각계각층에서 시국선언이 잇따랐다. 6월 10일은 바로 민정당이 전당대회를 통해 노태우를 대통령후보로 뽑은 날이었다. ‘나는 새도 떨어뜨리던’ 집권정당은 전당대회 뒤풀이 행사에 출연하는 연예인도 입맛대로 골랐다. MC에 임성훈, 가수는 조용필·이선희·정수라·조영남 등 당대 최고의 멤버를 모았다. 코미디언으로 그 멤버에 포함된 건 한창 잘나가던 김병조였다.

| 잊고 싶은 그날, 1987년 6월 10일

문제는 주최 측이 그에게 전달한 대본에 있었다. ‘민정당은 국민에게 정을 주는 당, 통민당(통일민주당)은 국민에게 고통을 주는 당’이라는 멘트는 그가 보기에도 문제의 소지가 다분했다. 문구를 수정하자는 말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문화방송 측에 물어봤지만, 알아서 하라는 답변뿐이었다.

“안일하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모든 걸 그만둘 생각으로 하지 않았어야 했어요. 당원들끼리 모인 행사이고, 녹화나 녹음을 하는 행사도 아니라고 쉽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현직 대통령이 참석하는 행사다보니 기자들이 많았어요. 총연습을 지켜본 한 기자가 민정당 사무총장에게 ‘저런 발언은 해선 안 되는 거 아니냐?’고 말하기도 했다더군요. 그런데 ‘당원들끼리 하는 행사인데 어떠냐?’는 식으로 넘기더래요.

결국 기자가 제 발언을 기사화했고, 국민들은 난리가 났지요. 방송국에서는 자신들이 정당대회에 내보냈기 때문에 감싸려고 했지만, 출연하던 ‘일요일 밤의 대행진’ 시청거부운동이 벌어지고, 출연했던 라면광고, 스낵광고가 방송중지 되면서 결국 한 달간 출연정지를 당했죠.”

전당대회 전날인 6월 9일은 연세대 이한열 열사가 머리에 최루탄이 박혀 의식불명에 빠졌던 날이다. 앞서 5월 18일에는 서울대 박종철 열사의 고문치사사건(1월)이 은폐, 조작됐다는 게 밝혀졌었다. 민정당을 향한 국민들의 분노가 들끓다 못해 폭발하고 있었다. 그 상황에 시사풍자 개그를 하던 ‘의식 있는 코미디언’ 김병조가 저런 말을 하다니. 그건 아마도 배신감이었을 것이다.

요즘으로 치면 ‘유재석’ 못지않은 국민스타였던 그는 하루아침에 무너졌다. 욕도 많이 먹었다. 협박 전화도 많이 받았다. 너무 힘들어 극단적인 생각까지 했다. 심한 스트레스로 안구 혈관이 터져 오른쪽 눈을 실명했다. 아들 걱정에 노심초사하던 부친도 결국 이듬해 암으로 돌아가셨다. 한평생 꼿꼿한 선비로 살아왔던 부친에게 세상의 지탄을 받는 아들의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자괴감은 그를 더욱 힘들게 만들었다.

하지만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고 하지 않던가? ‘민정당 망언 사건’은 그동안의 삶을 되돌아보게 했다. ‘제행무상(諸行無常)’과 ‘선인선과(善因善果)’를 직접 경험한 그는 자신이 만든 유행어처럼 ‘먼저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걸 절감했다.

“무늬뿐이던 불자에서 신심 돈독한 불자로 돌아온 것도 이 사건이 계기가 됐습니다. 사실 어렸을 때부터 불교와 인연이 깊었어요. 어머니가 혼인하고 10년 만에 저를 낳았는데, 장성 백양사에 가서 불공을 많이 올렸다고 해요. 당시는 아들을 낳아야 며느리 역할을 다하는 시절이었잖아요.

서울 월계동 자택에서 만난 김 교수와 부인 김현숙 씨. 얼굴에는 주름진 세월의 흔적이 묻어났지만, 인자한 미소에는 단아한 기운이 풍겨났다.

학교를 다니기 전의 일인데, 무속인은 아닌 듯한데, 출가를 하지는 않은 보살님이 길에서 노는 저를 보고 ‘관상이 좋다. 큰 인물이 되겠다.’며 어머니한테 ‘이 아이는 기도를 드려야 한다.’며 자신에게 팔라고 하더래요. 자식 잘 되는 게 좋으니까 어머니는 그러자고 하셨죠. 그 후 칠석날이나 삼월삼짓날에는 어머니와 그 보살님 집에 가서 하룻밤을 보내곤 했어요.

아마 초등학교 4학년 때로 기억해요. 칠석날 하룻밤을 묵고 돌아오는 길에 어머니께 ‘내가 큰 인물이 된다고 해서 저 분께 팔았다고 하셨는데, 왜 백양사처럼 큰 절에 팔지 않고 그곳에 팔았어요?’하고 물었죠. 그 말에 깜짝 놀란 어머니는 ‘아이고, 네 말이 맞다!’ 하시고는 그날 이후 백양사에 제 이름을 올려놓고 온갖 불공을 다 드리셨어요.

불교방송 개국 10주년 때 대목장 박찬수 선생께서 아미타불상을 선물로 주셨는데, 안방에 모셔놓고 먼 길 갈 때는 항상 인사를 올리고 있죠. 어머니께서 그 방에서 돌아가셨는데, 그 부처님을 향해 날마다 108배를 하셨고, 거동이 불편해진 다음에는 앉은 채 허리를 굽히는 걸로 108배를 대신하셨어요. 신심이 대단하셨죠. 요즘은 돌이 막 지난 손자가 부처님 앞에서 합장 반배를 해요.(웃음)”

| 두 개의 법명, 두 명의 도반

그는 법명이 두 개다. 출가(出家)한 사촌동생이 1970년대 말쯤 수유리 화계사 옆 백상원에 머물 때 화계사 숭산 스님께 받은 ‘혜성(慧性)’이란 법명이 하나고, 불교방송을 진행할 당시 박완일 법사가 지어준, 사람들의 환희심을 불러일으키란 뜻의 ‘환희장(歡喜藏)’이 다른 하나다. 그의 깊은 불연(佛緣)에는 어머니와 아내의 역할이 컸다. 불교방송이 개국한 1990년부터 2013년 12월까지 24년 간 마이크를 놓지 않을 수 있었던 것도 ‘아무리 바빠도 불교방송만은 계속 했으면 좋겠다.’는 어머니의 당부 때문이다. 어머니는 불교방송에 아들 목소리가 나오는 걸 좋아했다.

김 교수의 저서 〈김병조의 마음공부 上·下〉

처가 식구들도 불심이 돈독하다. 동서 가족이 인근에 사는데, 법회가 있는 날이면 월계동 기원사에서 만난다. 숭산 스님께 ‘자월행(慈月行)’이란 법명은 받은 아내 김현숙 씨는 불교전통문화원장 선혜 스님에게 다도를 배웠고, 사찰에서 불자들을 지도하기도 했다. 율당 김종섭 선생에게 사군자를 사사해 제17회 한국현대미술대전에서 우수상(사군자 부문)을 수상하는 등 예술적 재능도 뛰어나다. 그의 저서 〈김병조의 마음공부 上·下〉에 나오는 동양화도 아내 작품이다.

뒤늦게 한학자의 길을 걷을 수 있었던 것도 어쩌면 방송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았기에 가능했는지 모른다. 그 사건 후 한 달여가 흘러 MBC의 출연정지가 풀렸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 마침 SBS가 개국했는데 ‘마음을 좀 다잡아야겠다.’는 생각에 방송국을 옮겼다. ‘코미디 전망대’를 할 때 언론에서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고 떠들었지만, ‘도덕성’이란 자신의 매력을 상실했다는 생각에 마음은 조금씩 방송과 멀어져 갔다.

(상단) 방송출연을 자제하던 그는 후배들의 성화에 못이겨 2011년 문화방송 ‘추억이 빛나는 밤에’에 출연했다. 김한국·김학래·이경실·이홍렬·최병서·김희철 등이 함께 했다.

(하단) 20년 째 조선대학교 평생교육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김 교수. 화순 운주사에서 야외수업을 할 때.

당시 대학 후배가 KBC광주방송에 있었는데, 노래자랑 프로그램을 하나 하자고 제안해왔다. 그렇잖아도 고향에서 뭔가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할 때여서 수락했다. 망언으로 고향 어르신들 마음고생을 시켜드렸다는 송구스러움에, 서울에서 방송할 때보다 더 열심히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조선대학교 평생교육원에서 강의를 요청하는 전화를 받았다.

“〈명심보감〉을 강의한다고 하니 처음엔 말이 많았어요. (지역 유학자들은) ‘저급한 연예인이 감히 성인의 말씀을 입에 담느냐’고 날선 반응을 보였어요. 시민들의 거부감도 상당했지요. 사실 대학 측도 학생 모집이 안 되니 연예인의 유명세를 이용해보자는 의도가 있었을 거예요. 그런데 강의 수준이 나쁘지 않았거든요. 거기에 유머 섞인 입담으로 쉽고 재미있게 수업을 하니 수강생이 금방 정원을 넘어섰어요.

그렇게 매주 수요일 조선대 평생교육원에서 〈명심보감〉으로 강의를 한 지 벌써 20년이 되었습니다. 학생 수준이 낮을 거란 선입견을 갖는 분도 있는데, 지금 대학에서 정년퇴직한 교수제자가 5명이나 돼요. 대기업이나 교직에서 퇴임하신 분도 수두룩하죠. 지난해는 조선대학교 특임교수로 임명되었습니다. 지금의 삶이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요.”

그가 강의할 때 텍스트로 삼는 책은 〈청주판 명심보감〉이다. 〈명심보감〉은 중국 명나라 때 절강성 항주 출신의 범립본(范立本)이란 학자가 동양에서 회자되던 주옥같은 격언들을 취합해 집대성한 책이다. 공맹(孔孟)은 물론 부처님의 말씀까지 망라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조선 단종 때 몇몇 학자가 청주에서 이를 간행했으나 후대에 전해지지 못했다. 대신 세조 때 펴낸 〈명심보감〉 초략본이 널리 전해졌다. 그런데 1974년 경상도의 한 고택에서 〈청주판 명심보감〉이 발견됐다. 그는 이 책에 깊이 매료돼 책을 펴내기도 했다.

| 〈명심보감〉 그리고 한학자의 길

교수님답게 질문에 대한 답변이 거침이 없다. 금세 두 시간이 흘렀다.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정치인들이 귀감으로 삼을 만한 구절을 〈명심보감〉에서 골라달라고 청하니 좋은 구절이 너무 많다며 고심을 한다. 어깨너머로 배워 이미 절반쯤 훈장님이 된 아내의 훈수를 받아 주역의 글귀 한 구절을 적어줬다.

덕미이위존 德微而位尊 지소이모대 知小而謀大
역소이임중 力小而任重 무화자선의 無楇者鮮矣

덕이 적은데 지위가 높고, 지혜는 작은데 꾀하는 게 크고
역량이 부족한데 중책을 탐하면 화를 입지 않는 자가 드물다

〈명심보감〉 ‘성심편’의 한 구절을 쓰는 그를 보고 있노라니 예전 ‘배추머리 김병조’와는 달라져도 너무 달라졌단 생각이 들었다. 당시 그는 말려 올라간 머리카락만큼이나 통통한 얼굴과 달리 눈빛이 매서웠다. “한창 때와 비교하면 지금 얼굴이 훨씬 편해 보입니다.”하고 덕담 아닌 덕담을 건넸더니 “잘 보셨다.”며 고개를 끄덕인다. 후배 이하원(2016년 작고) 씨도 언젠가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단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형 얼굴에서 독기가 쫙 빠졌어.”하더란다. 아마도 지금의 이 순간이 행복하기 때문일 것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한 달에 20여 회 강연을 다닌다. 감사원, 사법기관, 대기업에서도 강연 요청이 줄을 잇는다. 주말에는 주례도 자주 선다. 봄가을엔 산사음악회 사회도 본다. 이렇게 전국 구석구석 오라는 곳은 마다않고 찾아간다. 바쁜 와중에도 국제구호단체인 한국JTS와 생명나눔실천본부 홍보대사를 맡아 활동하고 있으니 몸이 몇 개라도 남아나지 않을 성 싶다.

그는 인터뷰 내내 유쾌했다. 가벼운 웃음에 성인의 지혜를 담아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드는, 지금의 일이 즐겁고 행복하다고 말했다. 정계에 진출하라는 제안도 받아봤고, 다시 방송을 하자는 권유도 있었지만 스스로 선택한 지금의 길에 확신이 있기에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았다.

“법정 스님께서 ‘주어진 가난은 가난이지만, 선택한 가난은 가난이 아니다.’고 하셨잖아요. ‘멈춤의 미학’을 아는 나 같은 연예인도 한 명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희끗희끗한 머리카락과 주름진 얼굴에는 세월의 흔적이 가득했지만 인자한 미소와 풍겨나는 단아한 기운을 통해 몸은 물론 그의 마음까지 홀가분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저작권자 © 금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