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오신날 봉축 특집(272호)

21세기로 들어선 지도 벌써 18년째이다.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이한다면서 모든 것이 새로운 국면에 진입하는 듯한 기분에 마치 천지개벽이라도 닥쳐온 듯이 호들갑을 떨었던 게 바로 엊그제 같은데 말이다. 시간의 단위와 계량은 그 자체가 고정불변의 절대진리가 아니라 사람이 지어내고 사회적 합의로써 유통되는 것일 뿐인데도, 우리는 그렇게 우리가 지어낸 숫자에 휘둘린다. 그런 줄을 잘 알면서도, 올해 대학교 신입생들이 1999년생이고 내년이면 바야흐로 2000년생들이 대학에 온다고 하니 대학교수로서 이른바 밀레니엄 쇼크를 한 번 더 느끼는 기분이다.

21세기 들어 한국불교계에 충격을 안긴 에피소드 한 토막으로, 지난 2015년에 정부에서 실시한 ‘인구주택총조사’의 종교인구 관련 내용을 들 수 있겠다.

1985년부터 10년마다 시행하는 종교인구 통계에서 2005년 조사까지는 계속 1위를 차지하던 불교신자의 수가 처음으로 개신교에 추월당한 것으로 나타났다. 10년 전에는 약 1,060만 명으로 집계되었던 불교신자 수가 760만 명으로 급전직하했다는 것이다. 그 사이에 300만 명이나 줄어들었다니 놀랍다. 이번에는 전수조사를 하지 않고 20%만 표본조사를 한 점을 비롯해서, 조사방법의 변화가 크게 영향을 미쳤다는 지적도 있다. 그래서 그 숫자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가 망설여지기도 한다.

통계 문제는 그렇다 치고, 한편으로 일상의 체험으로 느껴지는 분위기를 감안하면 수긍이 전혀 안 될 일도 아니다. 이미 꽤 오래전부터 젊은 세대에서 불교신자 비율이 왜소하여 미래가 걱정스러웠는데, 그 미래가 현재로 닥쳐왔을 만큼 세월이 흘렀다. 불교뿐만 아니라 종교 전체에 대한 인식이 부정적으로 되어가고 특히 젊은 세대에서는 그런 추세가 아주 급하게 강해졌다. 멀지 않은 장래에 종교의 공멸이 닥치지 않을까 하는 과격한 걱정까지도 든다.

가히 말법시대라 할 만하다. 부처님께서도 말법시대를 언급하셨다. 하지만, 말법의 상황이 닥친 것은 부처님의 잘못이나 책임이 아니다. 어느 종교나 마찬가지지만 불교도 그 역사를 들여다보면, 교리도 변하고 제도도 변하고 때로는 아주 급격한 개혁이 일어나기도 했다. 영화롭게 융성하다가도 세파에 휩쓸리며 쇠퇴하기도 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들어 세상을 빛내는 지혜와 문화의 금자탑을 이룩하기도 하고, 반면에 불교의 간판 아래 온갖 민망한 짓을 저지르기도 했다. 그렇게 특정 지역과 특정 시대에 불교의 실제 모습을 만들어가는 것은 바로 불자들의 몫이다.

아무튼, 불교가 이 시대 한국사회에서 그 존재이유를 인정받지 못한다면, 한국불교가 쇠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한국불교가 조선시대 500년의 억압과 20세기 막바지까지의 우여곡절을 겪고 나서, 마침내 제 앞길을 스스로 만들어나갈 엄두를 제대로 내게 되었을 때, 내일의 불교를 위해서 시급한 요건으로 흔히 언급된 것이 이를테면 ‘현대화’와 ‘사회화’였다.

현대인의 요구와 사고방식, 생활방식에 부합하는 신행의 매체 및 통로를 개발하는 것이 현대화이다. 필자가 보기에 이 부문은 꽤나 많이 진척되어 왔다. 물론 아직도 미흡한 면이 많이 있지만 경전과 의례와 교리 해설 등의 현대화, 그리고 시의에 따른 수행법의 다변화가 급속하게 진행되었다.

한편, 사회의 문제에 무관심하다는 비판에 부응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임으로써 ‘사회화’ 또한 두드러지게 진척되었다. 사회로부터 소외된 입지에 머물거나 사회현실의 문제에서 물러나 있지 않고,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참여하는 역동성이 크게 고양되었다. 도량(道場)과 시정(市井) 사이의 접근성이 굉장히 높아져서 시공간적인 거리가 좁아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한국불교는 신자 수가 줄어들며, 급기야 개신교에게 1위 자리를 내주는 굴욕을 당하는가? 그 위기의 원인이 단순명료할 리 없다. 다양한 요인들이 작용하고 있을 터이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 하나로, 혹시 한국불교가 ‘밥값’은 제대로 하고 있는지가 궁금하다. 여기서 밥값이란 성철 스님이 제자들에게 “부처님 밥값 내라.”고 다그치곤 했다는 일화에서 끌어온 말이다. 부처님 밥값이란 그러니까 부처님 덕분에 먹고 사는 데 대한 대가를 말하는데, 성철 스님이 다그쳤듯이 그것은 바로 정진(精進)에 다름 아니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고자 정진하고 뭇 중생들이 보고 배울 사표가 되는 것이다. 불교의 생명과 존재이유가 다른 어디가 아니라 바로 거기에 있다. 이것은 출가수행자뿐만 아니라 사부대중 모두에게 발부되는 청구서이다.

그러니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를 가시적으로 상징하는 불상이 있고, 경전이 있고, 종단이 있다고 해서, 불교의 생명력이 저절로 보장되지는 않는다. 그런 것들은 다만 불교의 생명수를 담아 전달하고 나누어 마실 수 있게 하기 위한 그릇일 뿐이다.

삼보에 귀의한다는 것도 그런 그릇들에 담긴 보물에 귀의한다는 뜻이지, 보물을 담은 그릇에 귀의한다는 얘기가 아니다. 그릇은 그 자체만으로 저절로 존재 의의(意義)가 확보되지 않는다. 그 안에 담긴 생명수를 나누어 마시고는 그 제대로 된 물맛을 알아 맑은 물을 새록새록 자꾸 담아내고 전달하는 데 사용될 때, 비로소 그릇으로서 제 역할을 하는 것이다.

박물관에 진열된 골동품들은 텅 빈 그릇인데도 가치를 높이 쳐준다. 하지만 그것들은 더 이상 그릇으로 쓰이지 않는 진열품일 뿐이다. 종교의 그릇도 그 안에 생명수를 채워 나누어 마시는 데 쓰이지 못하고 텅 비어 있으면, 골동품으로 진열되는 데에나 쓰일 뿐이다. 각국의 박물관에 가면 어디서나 그렇게 비어버린 종교의 잔해들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릇은 휘황찬란한데 안에 담긴 물은 더러운 경우도 있다. 오염된 물이 들어가면 당연히 그렇게 되지만, 처음에 맑은 물이었더라도 가만히 고여 있으면 썩는다. 아무리 휘황찬란한 보물도 먼지를 뒤집어쓰면 빛을 잃는다. 그런 그릇의 내용물은 조만간 역사의 오물처리장으로 가고, 그릇 자체도 깨지거나 혹시 다행히 깨지지 않았더라도 기껏해야 박물관에 진열되는 신세가 된다. 실제 그릇으로 보면 그것도 나쁘다고만 할 일은 아니지만, 여기에서 비유하는 종교로 보면 그건 죽음이다.

종교를 그릇과 물로 비유하는 이미지를 가지고, 한국불교의 현황을 생각해 본다. 지금 한국불교에는 맑은 생명수가 잘 흐르고 있으며 그것을 담아주는 그릇이 제 노릇을 잘 하고 있는가? 언뜻 보면 그릇은 지난 600년 동안의 피폐를 견디고 의연하게 유지될 뿐 아니라 더욱 커지고 화려해졌다. 일부 종단에만 해당되는 얘기지만, 그 그릇 덕분에 이른바 사찰문화재 관람료를 징수할 수 있어서 재정에 큰 도움이 된다. 일종의 박물관 사업이다.

그러나 물려받은 밥그릇 말고 새로 빚은 밥그릇은 어떠하며, 그 내용물은 또 어떠한가에 초점을 두고 보면, 아무래도 낙관적인 전망을 하기가 어렵다. 사찰문화재관람료 때문에 아무래도 본연의 책무에 좀 게으르게 되지 않는가 하는 걱정까지 생길 지경이다.

지금, 나아가 내일, 불교가 존재이유의 근거로 주장할 본연의 책무는 무엇인가 생각해본다. 현대인의 정신적 황폐 증상, 즉 이기적 개인주의와 물질 만능주의, 인간의 존엄성 실추, 그리고 환경파괴 등 이 시대의 심각한 문제들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방안은 그 원천인 물질문명 자체 내에서 찾을 수가 없다. 물질문명을 뒷받침해주는 과학 지식과 기술도 그런 문제가 갈수록 심각해지는 추세를 근본적으로 되돌려 놓는 방향으로 인류를 이끌어갈 힘은 그 자체 안에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한 문제의 해결은 인간이 물질적 풍요와 편리함, 편안함, 일신의 장수와 명예, 지위 등 근시안적이고 이기적인 가치에 매달리는 아집적인 의식을 극복하고 세상과 인간, 우주와 역사를 통틀어서 보는 총체적인 의미와 가치관을 향해 정진하는 데에서만 가능하다.

바로 이 지점에서 오늘 그리고 내일의 불교는 매우 중대한 역사적 사명을 가지고 있다. 바로 지금의 불자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의 요체가 바로 그것임을 상기하고 그 실천을 위해 정진하는 사표가 됨으로써, 앞으로 새로운 젊은이들로부터 다음과 같은 고백이 계속 터져 나와야지만 불교의 내일이 이어질 것이다.

‘저는 아무개 불자를 보고 불교가 훌륭하다는 사실을 목격하게 되어, 저도 삼보에 귀의하렵니다.’

라는 고백 말이다.

윤원철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서울대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뉴욕주립대 스토니브룩 대학원에서 종교학 박사를 취득했다. 저서로는 〈마음, 어떻게 움직이는가?〉(공저), 〈종교와 과학〉(공저), 〈불교사상의 이해〉(공저)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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