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고 싶었습니다(271호)

“다름을 인정하고
소수자 배려할 때
‘선진시민’ 될 수 있죠.”

 

초등학교 저학년으로 보이는 아이가 전철게이트를 나오다가 문제가 생겼다. 왼손에 전철패스를 들고 왼편 인식기에 접촉했기 때문이다. 이미 그 게이트로는 한 사람이 지나갔다. 당황한 아이는 엄마가 이끄는 대로 허리를 숙이고 차단기 아래를 통과해야 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오른손잡이 중심으로 돌아간다. 즉, 사회의 구조가 구성원 중 다수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져 있다는 말이다. 다수결(多數決)의 원칙에 의해 굴러가는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다수의 독재’는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오른손잡이 집단에서 왼손잡이가 소수자라면, 직립보행 하는 사회에서 휠체어나 목발을 사용하는 사람 역시 소수자다. 이들에게 무작정 불편을 강요하는 건 올바른 방식일까? 성숙한 사회라면 소수자를 위한 최소한의 배려는 반드시 필요하다.

2018 평창장애인올림픽 개최를 즈음해 우리 사회의 대표적 소수자인 장애인의 권익보호에 앞장서고 있는 방귀희(61) 한국장애예술인협회 대표를 2월 26일 서울 금천구 가산동 사무실에서 만났다.

“장애인올림픽, 인식 개선 계기 되길”

방귀희 대표는 장애인 문학지 〈솟대문학〉의 발행인으로 장애인계를 대표하는 인물이기도 하지만, 신심 돈독한 불교 신자이기도 하다. 1991년 창간해 25년 간 발행해오던 〈솟대문학〉을 본의 아니게 2015년 겨울호(통권 100호)를 끝으로 폐간해야 했을 때는 사회활동을 접으려고도 했다는 방 대표. 하지만 그녀는 2016년 장애인예술 매거진 〈e美지〉를 창간한데 이어 지난해 가을 〈솟대문학〉을 한 단계 발전시킨 장애인문학평론지 〈솟대평론〉까지 창간, 여전히 장애인 문화예술분야 발전에 앞장서고 있다.

사무실 한쪽 벽면에는 〈솟대문학〉 창간호부터 100호까지를 진열해 놓았다.

방 대표는 평창동계장애인올림픽 100일을 앞두고 지난해 11월 문화체육관광부의 후원을 받아 열린 ‘2018평창동계패럴림픽 G-100일 기념 한중일 장애인예술축제’를 이끌기도 했다. 장애인올림픽은 동 · 하계올림픽 직후 열리지만, 상대적으로 주목을 받지는 못하는 대회다. 이를 감안해 국민들의 관심을 이끌어내고자 한중일 3개국 장애인이 함께 참여한 행사가 G-100일 기념 축제였다. 먼저 장애인계 입장에서 평창장애인올림픽이 갖는 의의에 대해 물어봤다.

“30년 전 (88서울올림픽에 이어) 서울장애인올림픽이 열렸잖아요. 그때는 올림픽을 통해 우리(장애인)가 무엇을 얻어내야 할지 전혀 몰랐어요. 그런데 돌이켜보면 서울장애인올림픽이 있었기 때문에 서울 시내에 장애인 편의시설이 많이 확충된 것 같아요. 당시 개 · 폐막식 작가로 참여했는데, 준비과정에서 문제점으로 대두된 것 중 하나가 장애인 편의시설이었어요. 언론에서는 ‘서울, 장애인편의시설 빵점’이라고 떠들었죠. 외국 선수들이 휠체어를 타고 오는데, 어디를 다닐 수 있겠느냐는 지적이었어요.

계간 〈e美지〉 최근호.

제가 대학을 다닐 때 6~7층을 어머니 등에 업혀 다녔어요. 당시 학교 측에는 어떤 불만도 말할 수 없었어요. 입학을 허가해 준 것만도 고마운데, 거기다가 어떻게 장애인 편의시설까지 만들어달라고 할 수 있겠어요. 지금 도심 구석구석에 경사로와 엘리베이터가 마련돼 있잖아요. 서울장애인올림픽이 이런 편의시설 확충에 큰 역할을 했어요.

서울장애인올림픽이 장애인에게 물리적인 장벽을 없애 주었다면, 이번 평창장애인올림픽은 인식의 장벽을 사라지게 해주는 기회가 됐으면 합니다. 그래서 요즘 마음이벤트 ‘내가 당신 뒤에-휠체어 퍼스트’란 캠페인을 전개하고 있어요. △엘리베이터는 장애인 먼저 △장애인에게 출입문 열어주기 △장애인 보행자 앞에서 자동차 서행하기, 이렇게 세 가지입니다. 이런 작은 실천이 이뤄진다면 평창장애인올림픽은 성공적인 개최라고 말할 수 있을 거예요.”

방 대표가 백화점에 갔을 때의 일이다.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하는데, 귀부인 차림의 아줌마가 그녀를 밀치고 탔다. 엘리베이터 타기를 포기하려고 한 순간, 누군가 닫히려는 문을 잡아줬다. 쳐다보니 파란 눈의 외국인이었다. 당시 그녀는 고맙고도 창피했다. 자신의 장애가 창피한 게 아니라, 우리 사회의 낮은 문화 수준이 부끄러웠다. 캐나다에 살고 있는 친구에게서 그곳엔 ‘어린이나 노인, 장애인이 있을 경우에는 출입문을 그들이 지나갈 때까지 붙잡아줘야 한다.’는 일종의 생활규칙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휠체어 퍼스트’ 캠페인을 구상하게 된 계기다.

블랙리스트와 〈솟대문학〉 폐간

〈솟대평론〉 창간호.

평창장애인올림픽 개최 소식을 듣고 꼭 참여하고 싶었다는 방귀희 대표. 그런데 기획단계에는 참여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본 대회 준비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블랙리스트에 있었다. 이문태 평창패럴림픽 개 · 폐회식 총감독의 모 언론 인터뷰를 보면 그 전말을 엿볼 수 있다. 기자가 “KBS에서 PD로 30년 간 근무했었는데, 어떻게 장애인 관련 행사를 이끌게 되었느냐?”고 묻자 “방귀희 씨와 인연이 계기가 됐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장애인문화예술 분야에서는 그녀를 따라갈 사람이 없을 정도로 많은 경륜을 갖고 있는 분”이라고 평한 후 “개 · 폐회식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할 때도 도움을 받았지만, 막상 2016년 초 계약단계에서 ‘방귀희는 안 된다’는 통보를 문체부 실무자에게 받았다. 이미 7~8개월을 함께 준비해온 사람에게 빠지게 됐다는 말을 전할 때는 너무 힘들었다.”

블랙리스트에 올라 피해본 사람이 어찌 방귀희 대표뿐일까? 하지만 그녀는 자비(自費)를 들여 창간하고, 25년 간 발행해온 장애인문학지 〈솟대문학〉 마저도 블랙리스트 사건으로 인해 내려놓아야 했다. 이명박 정부 때 대통령 문화특별보좌관을 지냈고, 박근혜 정부 때 대통령 직속 문화융성위원회 위원을 맡은 이력으로 볼 때 보수 성향에 가까우리라 추측됐지만, 할 말은 하고 마는 곧은 성격이 누군가에겐 부담스러웠을지도 모르겠다.

사무실 한 귀퉁이의 솟대.

“왜 배제됐냐고 물어봤더니 장관이 싫어하는 사람이라고 하더군요. 블랙리스트에 올랐다는 건 나중에 알았어요. 블랙리스트에 오른 이유가 ‘좌파성향이 강한 사람’이었다고 전해 들었는데, 저는 그 이유가 다른 데 있다고 생각해요. 지금 서울 대학로에 정부가 설립한 최초의 장애인문화예술센터인 ‘이음센터’가 있어요. 제가 관련 예산을 받을 수 있도록 앞장섰어요. 이와 관련해 누군가 그곳에 자기 사람을 넣으려고 저를 블랙리스트에 올렸다고 보고 있어요.

하지만 블랙리스트와 관련한 재판을 지켜보면서 ‘부처님께서 이런 걸 다 아시고 나를 거기서 빼주셨구나.’하는 생각도 해요. 그렇지 않았다면 휠체어를 타고 검찰에 불려 다녔을지도 모르잖아요? 당시는 뭔지 모르고 억울했지만, 지금은 ‘내가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갈 때, 순응할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었다면, 지금 얼마나 힘들고 또 창피했을까?’ 싶어요.”

개인적인 정치성향을 묻자 ‘우리(장애인)가 좌, 우파 가릴 형편이 아니지 않느냐?’며 좌파, 우파 가리지 않고 장애인복지에 관심 가져주는 사람은 누구나 좋단다. 수많은 장애인들이 자기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면서 살고 있고, 자신부터도 장애인이란 제약으로 인해 능력을 모두 발휘하지 못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다른 곳에 눈 돌릴 새가 없는 모양이다.

그녀는 무학여고를 수석으로 입학했고, 동국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누군가 “공부를 잘 했나 봐요?”하고 물으면 “그것 밖에는 할 게 없었거든요.”하고 대답하지만 그 여정은 상상 그 이상으로 지난(至難)한 길이었다. 돌을 앞두고 소아마비(지체장애 1급)에 걸린 딸. 그 일이 마치 당신의 잘못인 양 대학 졸업 때까지 등에 업고 등하교를 시키고, 학교 계단을 오르내렸던 어머니. 그 분의 고단함을 어떻게 말로 다 형용할 수 있을까?

방귀희 대표가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천운(天運)이요, 불연(佛緣)이라 할 수 있다. 1976년은 대학에 장애인의 입학을 거부하는 규정이 명문화되어 있었다. 목발을 짚고 걸으면(직립보행) 입학할 수 있었지만, 휠체어를 탄 경우는 학교 측에서 입학을 거부할 수 있었다. 장애인 한 명을 위해 학교 곳곳에 경사로를 만들고, 문턱을 없앨 대학은 당시 어디에도 없었다.

“불교는 나에게 종교이자 신념”

1981년 동국대학교 졸업식에서 부모님과 함께. 그녀가 불편한 몸으로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던 건 어머니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경희대 한의대를 진학하고 싶었지만 바람일 뿐, 어느 대학도 받아주지 않았다. 불심 돈독했던 어머니가 스님에게 들었다며 동국대 불교학과에 원서를 내자고 했다. 동국대가 자비심이 충만한 대학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원서를 낸 건 아니었다. 전기모집 때 연세대가 신학대에 원서를 낸 10여 명의 장애인 입학을 거부한 사건이 이슈가 됐으니, 후기모집을 하던 동국대는 입학을 허가해줄 가능성이 높다는 게 스님과 어머니의 판단이었다. 결과적으로 그녀는 국내 최초의 ‘휠체어를 탄 대학생’이 될 수 있었다.

“동국대 입학 전까지는 불교에 대해 전혀 몰랐어요. 혼자서 집 밖을 나갈 수도 없었는데, 절에 가볼 기회가 있었겠어요? 대학에 가서 스님이 학교를 다니는 걸 보고, 신기해 할 정도였죠.

사실 ‘불교라는 종교를, 무슨 대학까지 가서 공부하나?’ 생각했어요. 그런데 ‘불교학개론’ 과목을 들으면서 불교가 정말 과학적인 종교란 걸 알게 됐죠. 처음에는 종교라기보다는 참 멋진 철학이자 학문이라고 생각했어요. 그전까지 서양철학에 관한 책은 많이 읽었지만, 동양철학이나 인도철학 계통의 책은 잘 안 읽었어요. 그래서 종교로 받아들이기보다 이론에 굉장히 감동을 받았어요. 지금도 저에게 불교는 굳건한 자기 철학이에요. 일반 사람들의 종교관과는 조금 다른데, 불교는 저의 신념이라고도 할 수 있어요.

건축업을 하시던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1년 휴학을 하고 집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돈을 벌었어요. 그냥 그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어머니가 복학을 강력하게 주장하셨어요. 부모가 세상을 떠난 후 형제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자립하려면 공부를 해야 한다는 이유였죠. 곡절 끝에 졸업(81년)할 때는 전체수석을 했어요. 그해가 마침 유엔이 정한 ‘세계 장애인의 해’여서 언론에서 기사거리를 찾고 있었는데, 고 목정배 교수님이 ‘우리 학과 수석 졸업한 아이가 장애인’이라고 홍보를 하셨죠. 덕분에 방송에 여러 차례 출연했고, 사회 진출에도 도움이 됐어요.”

장애인이 한 사람의 사회 구성원이 되는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다. 1981년 방송작가 생활을 시작했지만, 휠체어를 탄 초보 작가와 흔쾌히 함께 일하려는 PD는 없었다. 그래서 프로그램을 맡으면 최선을 다했다. 평소에도 ‘열심히 하면 결과는 좋다’는 소신을 갖고 있었지만 다른 작가들이 “언니는 왜 (PD에게) 그렇게 충성을 다해?”라고 말할 정도로 열심히 일했다. 그리고 이렇게 대답했다. “난 PD에게 충성을 하는 게 아니라, 좋은 프로그램을 만들려는 거야. 한 사람이라도 더 ‘그 멘트 참 좋더라’하는 소리를 듣고 싶거든.”

방귀희 대표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개종하라는 권유도 참 많이 받았다.

‘당신을 영웅으로 만들어 줄 테니 개종해라.’, ‘대학원 장학금을 지원해주겠다.’

방송국 PD들도 불교 신자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도 ‘자를 테면 잘라라.’하며 받아 넘겼다. 불교는 내게 종교이기 이전에 하나의 신념인데, 그깟 유혹에 신념을 저버릴 수는 없지 않겠는가? 정계에 발을 담갔을 때도 이런 유혹은 계속 됐다. ‘여의도에 국회의원들만 다니는 곳(교회)이 있다. 거기가면 좋은 점이 많다. 예산도 잘 받을 수 있다.’고 권했다. 그 세계에는 종교를 신앙이 아니라 출세의 도구로 생각하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2012년 대통령실 문화특별보좌관으로 자승 스님을 예방했다.(사진=대한불교조계종)
2006년 한국방송작가대상을 수상한 후 소감을 말하고 있다.

장애인 권익보호를 위한 발걸음

장애인계도 예외는 아니어서 개신교가 강세다. 장애인 전문선교회가 수천 개에 달한다. 속된 말로 ‘장애인 5명만 데리고 있으면 먹고 산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목사님들의 활동이 이렇게 왕성하다 보니 ‘방귀희는 다 좋은데, 종교가 달라서’라는 말을 곧잘 듣는다. 그 정도로 장애인계에서 ‘불교’라는 색깔을 유지하기는 어렵다. 그래도 그녀는 꿋꿋하다. 몸이 불편해 사찰을 참배하지 못하고, 기도를 열심히 하지는 못하지만, 자신이 불자라는 마음은 항상 굳건하다. 그녀의 향후 계획이 궁금해졌다.

“문화특보를 맡을 때 방송국을 그만뒀는데, 임기가 끝나니 할 일이 없더군요. 허무하고 좌절감도 생겼어요. 장애가 문제가 아니라 할 일이 없다는 게 무력감으로 찾아왔어요. 방송작가 일을 하며 2007년부터 경희대에서 구성작가실기론 강의를 하고 있었는데, 강의가 의외로 저와 잘 맞았어요. 그래서 가르치는 일을 하려고 숭실대학교 대학원에서 사회복지전공으로 석·박사학위를 받았죠. 지금은 한국체대, 숭실대 등에서 일주일에 세 번 정도 강의를 해요. 앞으로도 대학 강의와 함께 〈e美지〉와 〈솟대평론〉을 발간하면서 장애인을 위한 제도 정비와 인식 개선운동에 앞장서려 합니다.

스위스 태생의 뇌성마비 철학자 알렉상드르 졸리앙이 서울에 살고 있는데, 인터뷰를 한 적이 있어요. 그때 ‘한국 사람들은 장애인을 투명인간 취급을 한다.’는 말을 하더군요. 무시나 무관심은 동정보다 더 나쁜 거예요. 비장애인들이 장애인에게 보다 관심을 기울여줬으면 좋겠어요. 관심은 나와 다른 점을 인정하고, 함께 가기 위해 기다려주는 거예요. ‘내가 당신 뒤에-휠체어 퍼스트’란 캠페인처럼 말이죠.”

장애인에 대한 우리 사회의 무관심은 평창동계올림픽 직후 열린 장애인올림픽에 대한 무관심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3월 12일 강릉컬링센터에서 열린 휠체어컬링 한국과 캐나다전에서 서순석이 투구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우리나라의 등록장애인은 280만 명 정도다. 등록되지 않은 장애인 수는 훨씬 많다. 세계보건기구에서는 장애인 인구를 세계인구의 10% 정도로 보는데, 장애인계도 우리나라 장애인을 450만 명 정도로 추산한다. 선진국일수록 장애인의 범위가 넓은데, 스웨덴은 국민의 18%까지 본다. 일상생활을 하기 어려운 사람을 모두 장애인으로 보기 때문이다. 거기엔 비만, 위장장애, 알코올 의존증도 포함된다.

바야흐로 100세 시대다. 의술의 발달로 이젠 늙어도 쉽게 죽지 않는다. 대신 거동이 불편한 장애인이 되어간다. 그럼에도 장애인에 대한 우리의 시선은 여전히 비뚤어져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장애인이 화를 내면 사람들은 ‘쟤가 장애인이라 저렇구나.’ 생각한다. 장애인도 비장애인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편견의 벽이 그만큼 높다는 말이다. 이 같은 편견은 국민의 의식수준이 높아지지 않고는 바뀌기 어렵다.

우리나라는 물질적으로 풍요해졌을지 몰라도, 정신적으로는 여전히 ‘졸부스러운’ 사람이 많다. 다수가 소수의 ‘다름’을 편견 없이 받아들이면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고, 자연스레 배려가 행동으로 나올 것이다. 방귀희 대표는 평창장애인올림픽이 바로 이런 변화의 계기가 되길 소망한다고 말했다.

방 대표는 평창장애인올림픽 100일을 앞두고 열린 한·중·일 장애인예술축제를 이끌었다.
저작권자 © 금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